사다함

1 불교용어

斯多含. 산스크리트어 Sakridāgāmi(한 번 돌아오는 사람)를 한역한 단어로, 다음 생에 한 번 더 환생을 하면 다다음 삶에서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경지를 일컫는다. 열 가지 번뇌 중 앞의 세 가지[1]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바로 다음의 두 가지[2]에는 얽매임이 덜해질 정도가 되면 사다함으로 인정된다.

2 신라 시대의 화랑

이름斯多含(사다함)
출생? [3]

신라 진흥왕 때의 화랑[4]으로 무척 유명하여 관창이나 반굴 등과 함께 화랑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진 인물.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에 그 행적이 실려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으나 뛰어난 실력으로 대가야 정벌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사로잡은 대가야 백성 300명을 모두 자유롭게 풀어준 대인배적인 일화를 남겼다.

또한 친구인 무관랑이 죽자 이를 슬퍼하다가 곧 따라 죽은 일화로도 유명하다.

2.1 생애

2.1.1 출신과 초기 일생

사다함의 가계는 신라의 진골 가문으로, 내물왕의 7대손이다. 그의 아버지는 급찬 벼슬을 지내던 구리지였으며 성은 김(金)씨였다.

사다함은 근본이 좋은 귀족 가문의 자제로 그 풍모가 깨끗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그 지기(志氣)가 드높았다 전해진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사다함을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니 사다함은 청을 이기지 못해 화랑이 되었는데 그 인기가 엄청나서 그를 따르는 낭도가 무려 1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2.1.2 대가야 정벌

562년 9월에 대가야가 신라에 모반하므로 진흥왕은 백전노장이었던 이찬 이사부에게 이를 평정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사다함은 불과 15,6세의 나이로 왕에게 자신도 종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였다. 처음에 진흥왕이 사다함의 나이가 어리다며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나 사다함은 이에 굴하지 않고 몇차례 더 청하였다. 결국 진흥왕은 사다함의 청을 받아들여 사다함을 이사부의 귀당비장으로 삼아 종군하도록 하니 그의 낭도들도 사다함을 따라 출전하였다.

이사부는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여 마침내 국경에 이르었는데 이때 사다함은 이사부에게 청하여 휘하의 5천 기병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을 급습하였다.[5] 갑자기 급습당한 가야인들은 어찌할바를 몰라 우왕좌왕하였는데, 이때 사다함은 전단량 위에 백기를 세워 놓으니 가야군이 크게 당황하므로 곧 이사부가 대군을 이끌고 들이닥치자 곧 항복하였다.

2.1.3 포로를 풀어주다

대가야를 평정한 후에 진흥왕이 공로를 논하였는데 사다함의 공이 특히 으뜸이었다. 삼국사기 사다함열전에 따르면 진흥왕은 사다함의 공로를 책정하여 사로잡은 가야인 300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은 이들을 모두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이에 왕이 토지를 하사하였으나 사다함은 이마저도 사양하고 대신 알천땅의 불모지[6]를 청하여 얻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진흥왕은 사다함에게 가야인 200명과 좋은 토지를 하사하였으나 사다함이 이를 3번에나 굳게 사양하므로 왕은 억지로 상을 내렸다. 그러나 사다함은 가야인 포로들을 모두 자유롭게 풀어주고 하사받은 토지는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둘 중 어느것이 사실이든 간에 사다함은 하사받은 가야인 포로들을 풀어주는 등 실로 대인배스러운 면모[7]를 보여주었는데 이로 인하여 사다함의 명성은 드높아졌고 신라인들은 사다함의 덕행과 미덕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2.1.4 죽음

사다함은 이보다 앞서서 무관랑이라는 이를 친구로 사귀어 죽어도 변치 않은 벗으로 지낼 것을 맹세하였다. 그런데 무관랑이 병으로 죽자 사다함은 몹시 슬퍼하며 통곡하다가 그 역시 7일만에 죽었다. 자결인지 몸이 쇠약해져 죽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때 사다함의 나이는 겨우 17세에 불과하였다.

일부 학자는 이 기록을 토대로 사다함과 무관랑이 실은 동성연인의 관계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당시 미소년 집단이었던 화랑도 내에서 이런 일이 흔했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거니와 고대 시대에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동성애가 흔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만 추측은 추측일뿐 사실로 완전히 단정짓기는 힘들다.

2.2 박창화 필사본 화랑세기

위서 논란이 있는 박창화의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5세 풍월주였다고 한다. . 화랑세기에 따르면 비량공과 벽화후(소지마립간의 부인이자 법흥왕의 후궁이자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누나)[8] 사이의 아들인 구리지의 아들. 어머니는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이자 4세 풍월주 이화랑의 남매인 금진. 형제로 친형 토함(4세 풍월주 이화랑의 부제)과 아버지가 다른 동생 설원이 있다.

우산국 정벌로 유명한 이사부와 함께 가야를 정벌,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때 받은 토지는 병사들에게 나눠주고 포로로 받은 가야인 300명을 풀어줘 양민으로 만드는 등 상당한 대인배 기질을 보여준다.

화랑세기의 최고의 엄친아 포스를 보여준다… 외모면 외모, 인품이면 인품, 무술실력까지… 다만 가문이 유일한 오점이다. 아빠 이름이 구리지 풍월주 3대 미남(위화랑, 이화랑, 보종랑) 중 하나인 이화랑은 사다함을 가리켜 자신을 뛰어넘는 아름다움과 무예 실력을 가졌다고 평했으며, 문노는 완벽하지만 그의 유일한 오점은 미생과 친하게 지낸 것이라고 평했다. 또한 미실은 자신이 사랑한 남자 중 최고의 남자는 사다함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다함을 까는 사람들이 문제 삼는 것이 고작 성문 관리직인가 싶은 사람도 있을 텐데, 당시 사다함의 나이와 가문을 생각하면 정말 파격적인 인사다.

친구였던 무관랑이 죽자 그의 죽음을 슬퍼해 7일 동안 통곡하다가 죽었다(…). 이런 점 때문에 사실 화랑들 안에서 동성애가 퍼져 있던 게 아니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사다함의 어머니 색골마녀 금진이 무관랑을 유혹했지만 사다함이 너그럽게 용서하자 무관랑은 도망치기 위해 월성을 넘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 당시가 연인 미실과 어쩔 수 없이 헤어졌던 무렵. 이에 사다함이 슬퍼하여 병들자 금진이 자기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며 안타까워했지만 오히려 어머니의 탓이 아니라고 어머니를 위로하고 죽었다. 화랑세기 부녀자들의 단골 떡밥.

화랑세기에 의하면 미실과 친척 관계다. 미실의 외할머니인 옥진의 여동생이 사다함의 어머니인 금진이므로 미실에게는 당숙이 된다. 부계로 따지면 미실의 아버지 미진부의 처남(미실의 삼촌은 아님)의 처남의 사촌(겸 매부)의 아들이 사다함이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미실이 지소 태후에 의해 쫓겨났을 시기에 미실과 정분이 있었다. 그가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미실은 다시 불러들여지는데, 사다함은 크게 슬퍼해 '청조가'라는 노래를 지었다. 나중에 세종과의 사이에서 생긴 하종이 태어날 때 사다함이 미실의 배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사다함과 닮아 사실 하종은 사다함의 아들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화랑세기에선 그에게 자식이 있었는지 언급이 없는데, 공식 기록에 따르면 선덕왕의 할아버지 김원훈이 사다함의 아들이란 언급이 있다.

풍월주 부제로 있었던 동생 설원이 아직 어리다는 걸 염두에 둔 건지 미실을 생각한 건지 능력을 보고 생각한 건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사다함은 죽을 때 설원이 어린데 이 뒤를 어찌 하겠냐는 이화랑의 말에 차기 풍월주로 세종을 추천했다고 한다.

미실의 어린 남동생 미생도 화랑으로 만든 뒤 문노가 말도 못 탄다며 탐탁치 않아 하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우"라며 설득하기도 했다.

2.3 창작물

  • 화랑전사 마루에서는 '서다함'이 사다함의 정령이 깃든 초등학생으로 나온다.

2.3.1 선덕여왕(드라마)의 등장인물

사다함(선덕여왕) 문서로.

3 일러스트레이터/만화가

파일:Attachment/sadaham.jpg


쉬다함
안함
놀다함
이퍼즈하고

작가 캐릭터는 노란색 토끼.
1987년생. 레인폴 소프트라는 게임회사의 원화가였다. 지금은 그만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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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투온The Prince of Darkness, One's Trash 등의 배경 일러스트로 많이 알려졌다.

자타공인 오덕, 노블레스에서는 프랑켄이 제일 좋고, 치즈인더트랩에서는 유정이 가장 좋다고, 사다함의 취향은 순정만화에 가까운데 퇴마물을 그리고 있으니 좀 아쉽다고 한다. 이지투온에서의 An Old Story는 그냥 보면 훈훈한 사랑 이야기로 보이나 사실 등장하는 인물 둘이 둘 다 남자였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네이버 웹툰 "특수 영능력 수사반"을 연재했으나 잦은 연재 지각으로 인해 결국 연재 중단되었다. 또다른 작품으론 2010년에 출판된 '페도라 빅밴드'가 있다.

특영반 연중 이후로는 딱히 활동을 보이고 있지 않다. 네이버 금요웹툰인 낮에 뜨는 달에 1번 항목이 모티브인 캐릭터가 등장해서 그런지 사다함이 특영반을 연중하고 낮뜨달에 출연하고 있다는 말이 있었다.

2015년 3월 11일에 특영반이 다시 목요웹툰에 올라왔다.

2016년 7월 21일 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논란에 대해 넥슨을 보이콧하겠다는 트윗을 올린 것으로 또다시 논란이 되었다.
  1. 오온이 '나'라는 사견, 의심, 관념 및 의식(儀式)에 대한 집착
  2. 감각적 욕망, 성냄
  3.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562년에 대가야를 정벌할 당시 사다함의 나이가 15,6세의 나이라고 하였는데 사다함이 17세의 나이로 죽었으므로 563년이나 혹은 564년에 죽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4. 기록상 진흥왕이 화랑 제도를 만든 건 576년인데, 사다함은 그 전에 사망한 인물이므로 576년 이전에도 어떤 형태로든 화랑이라는 것이 제도적으로는 아니라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5. 삼국사기 사다함열전에는 전단문(門)을 전단량(梁)으로 표기하였는데 량이란 가야말로 문을 이르는 것이라 하였다.
  6. 강가의 땅이 왜 불모지인가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당시 좋은 토지란 산이나 구릉 지역의 토지를 뜻했다. 수리시설이 미비해서 홍수가 잦다보니 강가의 토지는 안정적인 소출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
  7.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다른 해석도 있다. 굳이 좋은 구릉지대 대신에 강가의 황무지를 받아내 포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는데, 사다함이 살고 있던 6세기 초는 바로 그 수리시설이 정비되면서 강가의 황무지가 옥토로 탈바꿈되는 시기였기 때문. 재테크 노비가 되는 대신 양민이 되어 좋은 땅까지 선사받았으니 이 300명이 전부 사다함의 사람이 될 것이란 것 또한 간단히 유추할 수 있다.
  8.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그쪽의 기록을 따르면, 소지마립간이 말년에 날이군이라는 지방에 갔다가 새로 맞아들인 부인으로 아들까지 낳았지만 소지마립간이 얼마안가 죽어버렸다. 이후에는 등장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