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

이사부 국가표준영정[1]

1 개요

金異斯夫

(? ~ ?)

신라군인. 삼국유사에는 박이종으로 나온다.

지증왕 ~ 진흥왕 때인 6세기 초중반 시기에 활동하였다. 신라가 경상도 지역의 소국에서 한반도 중부를 석권해 나가던 중기 신라 시기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일본, 백제, 고구려, 가야를 골고루 상대해 승리했고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 특히 가야인들에게는 가히 저승사자와 같았던 인물로, 이 양반의 손에 가야의 양대 세력으로 알려진 금관가야대가야가 차례대로 멸망당했다.

성은 김(金)씨이며 이름은 잇부(異斯夫), 이질부례(利叱夫禮).[2], 태종(苔宗)이라고도 한다.[3] 성이 김(金)씨이므로 본명은 '김잇부'이나 대부분 사람들은 이사부가 이씨인 줄 알고 있다(...). 안습. 《삼국유사》에서는 성은 박(朴) 이름은 이종(伊宗)으로 기록하고 있다. 비슷한 사례로 이차돈이 있는데 이차돈 역시 이름이 '이차돈'이고 성은 따로 있다. 둘 다 이씨가 아니다. 사실 마스터이 가 이분을 모티브로 한 거라 카더라

대한민국에서는 왠지 모르게 독도를 최초로 점령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아마 '독도는 우리땅' 가사에 등장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우산국(울릉도)을 점령한 것은 사실이지만 후술하듯이 '독도'와의 관련성은 확인된 바 없으며, 논란이 많은 관점이다. 정작 이사부는 우산국 정벌보다도 가야 정벌에 더욱 두각을 드러낸 인물임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어쨌든 이사부가 실제로 독도를 점령했는지는 확인된 바가 없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을 참조.

2 생애

2487_1688_4730.jpg
기록에서 나타나는 이사부의 주요 활동 지역

왕족의 피를 타고난 인물로써 내물왕의 4세손이라고 한다. 성은 상술했듯 김씨지만 삼국유사에서는 그 성씨를 박(朴)씨라고도 하였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이 정확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사부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삼국사기가 경주 김씨김부식이 집필했기 때문에 고백신 중 제일 늦은 신라의 역사를 고무줄처럼 늘려 가장 먼저 건국된 것으로 표현한 점 등을 보면 이사부라는 인물의 업적이 뛰어나니 박씨가 아닌 김씨라고 썼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나라 역사책 중 가장 권위 높은 삼국시대 역사책이지만 신라 우선, 김씨 우선으로 책을 쓴 점이 많으니 그런 부분에 관해서는 조금 신빙성이 떨어지는 점이 있다.

2.1 우산국(울릉도) 정벌

동해 먼 바다에 외따로 떨어진 울릉도가 최초로 한반도 왕조의 영역에 포함된 사건.[4]

505년 2월에 지증왕은 신라에 주, 군, 현의 제도를 정하고 실직주(悉直州, 오늘날의 강원도 삼척시)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지증왕은 이사부를 실직주의 군주(軍主)로 삼았다. 이사부가 역사 기록 속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에서 군주라는 직위의 명칭이 이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사부는 후술하겠지만 50여 년이 지난 562년까지 현역으로 활동했는데, 이사부의 정확한 생년은 알려지지 않지만 그가 평균수명을 크게 웃돌지 않았다면 아무리 관대하게 계산해도 아직 새파란 젊은이의 나이로 한 지역의 군주직을 맡은 셈이다.

7년 뒤인 지증왕 13년(512)에 실직주 근처인 하슬라주(현재의 강릉시) 군주로 임명받았고, 그 유명한 우산국 정벌을 개시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귀환했다. 정벌 과정은 삼국시대의 양대 역사책인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모두 실려 있는데 내용에 큰 차이는 없다.

우산국(于山國)이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백 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다루기는 어려우니 계책으로 복종시켜야 한다.”라고 하고, 바로 나무로 사자를 가득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말하였다.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 마립간 13년(서기 512) 여름 6월
아슬라주(阿瑟羅州)[지금의 명주(溟州, 강릉)이다.] 동쪽 바다에 순풍이 불면 이틀만에 이를 수 있는 거리에 우릉도(于陵島)[지금은 우릉(羽陵)이라고 한다.]가 있었는데, 섬 둘레가 26,730보였다.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고 오만하여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다. 박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가서 그들을 위협하여 말하였다.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겠다.”
그러자 섬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왕은 박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아슬라주의 장관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지철로왕

여기에서 착안해 현재 강원도 삼척에는 '이사부 사자공원'이 있고, 지역 축제 때도 나무사자를 깎는 행사를 한다.

독도는 우리땅 노래 때문인지 이 때 이사부가 독도까지 접수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시 우산국은 울릉도 본섬에 존재했던 소국이며 본섬 이상의 범위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다. 즉, 독도가 당시 우산국이라는 나라의 부속 도서라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은 독도와 연결되지 못한다는 얘기.

2.2 금관가야 공격

법흥왕 16년(529) 금관가야를 공격해 금관가야를 신라의 보호령으로 삼았는데 이에 위기감을 느낀 아라가야의 요청으로 파병된 왜의 오미케 케누가 이끄는 왜군을 쳐부수고 2년뒤에는 백제군까지 격파한 뒤 금관가야를 압박, 가야왕 구형왕이 직접 나와 가야를 신라에 바치며 금관가야를 신라에 합병시켜버렸다.(531)

이사부의 금관가야 정벌에 대해서 국내의 대표적 사료인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언급이 없고[5], 일본서기에서만 기록하고 있는데, 학계는 대체로 이 내용에 대해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2.3 병부령(국방부장관)이 되다.

진흥왕 2년(541) 국방장관 격인 병부령에 취임해 명실상부한 군부의 정점에 올랐다.

진흥왕 6년, 왕에게 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는 일을 이사부가 건의했는데 왕은 거칠부 헷갈리지 말자 에게 편찬을 명했고 거칠부가 쓴 게 신라 최초의 정사(正史) 국사(國史)다. 이 책은 천 년쯤 뒤인 고려 말까지는 책이 멀쩡히 존재해서 삼국유사를 쓸 때 반영됐지만 아쉽게도 현재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2.4 신라의 백전노장

이 후로도 신라의 정복전쟁 일선에서 계속 활약했는데 진흥왕 11년(550)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과 금현성에서 서로 치고받아 싸우다 지친 틈을 타 이사부는 군대를 이끌고 가서 두 나라 군대를 어부지리로 모두 쳐부수고 두 성을 차지했다. 단양 신라 적성비에도 이사부의 이름이 나와서, 고구려 영역이었던 단양 지역을 정벌하는 데도 참여했던 듯 하다. 이렇게 한반도 중부 공략전 초반에는 이사부가 참여했지만 정작 전투가 가장 치열했고, 신라가 가장 급격하게 세력을 넓히는 데 성공한 551년의 거칠부를 비롯한 아홉 장군의 한강 상류 정벌~554년의 관산성 전투까지의 과정에서는 딱히 이사부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데, 젊은 진흥왕이 친정을 시작한 후 견제로 권신 이사부의 영향력이 약해져 실각한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활동년도를 감안했을 때 단순히 나이가 너무 들어서 그랬을 가능성도 높다. 실직 군주에 임명될 때 20세라고 치면 이미 금현성, 도살성 전투 때는 65세다.

2.5 가야의 완전 병합과 말년

기록에 나오는 마지막 업적은 진흥왕 23년(562)에 있었던 대가야 정복이다. 가야는 이미 앞서 금관국은 진작에 망했고 안라회의의 결렬, 독산성 전투 등으로 안라국도 크게 약화되면서 반파국(대가야)만이 마지막 구심점으로 남아 있었다. 신라의 후방에 걸림돌이 될 세력(백제, 가야, 일본)을 관산성 전투에서 모조리 정리한 뒤인 562년에 진흥왕의 명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대가야로 진격했고 부장으로는 유명한 화랑 사다함이 참전했으며, 도설지왕의 항복을 받아 정복은 성공리에 끝나고 가야는 마침내 완전히 멸망해 전역이 신라 땅이 되었다. 이 때 이사부의 나이는 대충 잡아도 70대였다. 이후의 행적은 묘연하며 죽고 어디에 묻혔는지 흔적조차 제대로 없어서 진흥왕 왕권 강화 과정에서 말년 실각설이 있기도 하다. 위 내용과 같이 적어도 3대 왕을 섬기면서 평생에 걸쳐 업적이 상당히 많은데도 김유신 등의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도 기록이 너무 부실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사부 관련 기록이 줄어드는 시점부터 슬슬 금관국 왕족 계통 김무력, 김서현 등의 활동이 대폭 잦아지는 것도 진흥왕이 이사부를 견제하기 위해 신흥세력인 가야계를 등용했다는 견해도 있다.

2.6 기타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의 남편 세종은 이사부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종(노리부)은 이사부는 커녕 김유신의 큰할아버지라고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화랑세기의 고증은 안드로메다로(...).

3 평가

기록만 놓고 보면 신라 최고의 백전노장. 서기 500년 초에서 560년대까지 활약하고 있으니 최소 50년 이상 전장을 누빈 사람이다. 김유신도 기록만 놓고 보면 620년대에서 660년대 후반까지 40여년을 전장을 누빈 사람이지만 이사부는 김유신보다도 더 긴 활약연도를 자랑한다. 이로 미뤄 보면 수명도 상당히 길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신라 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 통틀어도 이사부만큼 긴 시간을 전장에서 보낸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한국사의 고대 위인들 중에서 그 '이름은' 일반인들에게도 비교적 알려져 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독도는 우리땅 노래에도 '신라장군 이사부'로 나오고, 울릉도 정복이 임팩트가 큰 업적이어서 그런 듯. 하지만 사실 이사부의 일생에서 우산국 정벌은 아주 일부일 뿐인데 그것 말고 대부분의 업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4 미디어에서

이사부의 주 활동 시대가 선덕여왕보다는 한두 세대 앞이라 초반부에만 노년의 모습으로 특별 출연했다.

5 기타

강원도 영동 지역과 여러가지 인연이 있는 위인이기 때문에 강원도 지방자치단체가 많이 써먹는 컨텐츠가 이사부다. 삼척시에서는 이사부광장, 이사부사자공원 등의 관련 지명과 이사부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나무사자를 깎는 행사 등을 한다. 강릉시에서도 이사부 크루즈를 운항한다.

독도도로명주소로 독도이사부길이 있다.

2015년 진수한 5000톤급 해양과학조사선의 이름으로 채용되었다.
  1. 상당히 우수한 고증을 자랑하는 공식 영정 중 하나로, 삼국시대에 널리 쓰이던 목가리개가 달린 찰갑의 형태와 환두대도의 모습을 잘 구현하였다. 당장 광개토왕 항목에 실린 영정을 봐도 고증이 영 아니다(...).
  2.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라는 긴 명칭으로 등장. 신라어/가야어에서 지(智)는 존칭 "님"을 말하는 것이고 간기(干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에 이름은 이질부례가 되는 것이다.
  3. 태(苔)는 잇(이끼), 종(宗)은 부(남자)에 해당하는 말이다. 고로 널리 알려진 이사부는 신라어의 음을 따서 쓴 이름이고, 태종은 신라어의 뜻을 따서 쓴 이름이 된다. 의미는 이끼남(...). 웰빙!!
  4. 울릉도에 대한 언급 자체는 더 이전의 중국 기록에서도 간략하게 등장한다.
  5. 장수 이름에 대한 언급은 없고 법흥왕이 했다고만 언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