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산성 전투

1 삼국시대의 전투

禿山城 戰鬪

독산성 전투
날짜
548년
장소
독산성[1]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고구려군, 동예백제군, 신라
지휘관양원왕
그 외 미상
성왕
진흥왕
주진(朱珍) 혹은 주령(珠玲)
구리지†[2]
그 외 미상
병력6천여명백제군 불명
신라군 3천여명
피해 규모고구려군의 패퇴불명
결과
나제동맹 재확인, 고구려군을 사주한 안라국은 백제에 종속.
기타
고구려는 직후 한강 유역까지 방어에 실패.

1.1 소개

삼국시대 548년에 일어난 전투. 백제와 신라 양측에 고립당한 가야와 일본이 고구려를 사주해 백제를 공격하게 했으나, 나제동맹에 따른 신라군의 신속한 원군 파병으로 연합군이 고구려군을 대파한다. 곧 깨질 나제동맹이 아직은 굳건함을 알 수 있었으며, 속사정을 알아보면 이후 삼국시대의 판도에도 꽤 영향을 미친 전투.

1.2 상황

6세기, 백제신라는 비록 고구려라는 강대국이 장수왕 시대부터 시작된 남하정책을 방어하기 위해 서로 나제동맹을 맺어둔 상태였지만, 반면 두 나라의 가운데에 있는 가야 소국들을 두고는 서로 파워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고구려라는 강적 때문에 가야 쪽으로 대대적인 군사동원은 서로 자제하고 있었지만 지증왕(智證王), 법흥왕(法興王) 시대를 거치면서 신라가 점점 강해지면서 한때 가야의 필두였던 금관국을 완전히 흡수하는 등 조금씩 우위를 차지하고, 남은 가야의 소국들은 멸망을 피하기 위해 신라에도 교섭을 시도하고, 백제와는 두 차례 사비회의를 열었지만 끝내 결렬되었다. 남은 가야 소국들 중 비교적 주도적인 위치였던 안라국[3]은 백제도 신라도 교섭의 가능성이 없자 가야로서 살아남기 위해 멀리 고구려와 손을 잡았고, 이에 호응한 고구려군이 이미 이 시대에는 고구려의 속국화된 동예인들을 대거 동원해서 백제의 북방을 공격한다.

나제동맹 백년간 늘 그랬듯 고구려가 백제로 쳐들어오자 성왕은 신라에 원군을 요청, 신라는 주진(朱珍)에게 3천의 병사를 주어 보냈고 결국 고구려군은 신라-백제 동맹군에게 대패한다.[4] 이후 따로 기록은 없지만 더 이상 도와줄 후원자가 없는 안라국은 이후로는 더 이상 백제에 저항한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사실상 백제 영향권에 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관산성 전투로 백제가 약화된 이후에는 신라에 항복하게 된다.

고구려는 이 전투의 타격이 컸는지 3년 뒤 나제동맹군의 대대적인 침략을 방어하지 못하고, 광개토대왕장수왕이 차지하고 백여년간 지배한 지금의 경기도부터 강원도까지 한강 유역을 죄다 백제와 신라에 내주고 전성기를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새로 얻은 한강 유역을 두고 곧 백제와 신라가 서로 싸우게 된다. 관산성 전투 문서 참조.

2 임진왜란의 전투

1593년에 위 전투와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투. 이 전투로 경기도 지역의 일본군이 궤멸당해 임진왜란 초기에 승기를 잡았던 일본이 한반도 남부로 밀려나게 된다. 추가 바람
  1. 현재의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일대.
  2. 인물의 이름은 삼국사기에도 나오나 독산성 전투 참전 내용은 화랑세기에만 등장
  3.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4.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사다함의 아버지인 구리지가 신라군으로 종군했다가 전사했다는 내용이 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