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당 제국 상서우복야
전임 배요경두보
757년~762년
후임 곽영예
당 제국 상서좌복야
전임 곽자의두보
764년~769년
후임 최원

파일:/image/dailian/2008/01/14/news1200276049 97638 1 m.jpg
杜甫, 712~770

시성(詩聖)

이백과 더불어 한시 문학의 양대 거성,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이백과 함께 중국 2대 시인으로 불리는 인물. 동시대 인물이기도 하며 이백이 두보보다 12살 연상이었는데 두보가 이백의 재능에 크게 탄복하면서 그와 더불어 하남, 산동 일대를 유람하면서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1] 이백이 시선(詩仙)이라면 두보는 시성(詩聖). 그러나 이것이 시성보다 시선이 위대하다는 뜻은 아니다.[2] 이백의 시에서는 도교적인 영향이 짙게, 두보의 시에서는 유교적인 경향이 짙게 나타나는데, 도교적인 신선의 이미지를 이백이 가지고 있다면, 유교적인 성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두보라는 것이다. 때문에 도교[3]보다 유교를 더 국가가치로 삼았던 적이 많은 역대 중국왕조에서는 두보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대중적인 인기는 역시 술먹고 노니나 풍류를 읊을 때 더 좋은 이백. 조선 시대의 유명한 주당 시인들은 이태백과 자신을 견주고는 하였지만, 사실 조선시대에 세 번에 걸쳐 훈민정음 번역본을 편찬한 덕분에 한글 변천사를 잘보여주고 있는 두시언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실제 '교과서용'은 두보였다.[4]

삼국지를 종결시킨 인물 가운데 하나인 두예의 먼 후손이며, 조부인 두심언도 시인이었지만[5]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다. 과거도 억울하게 계속 낙방하여 방랑의 삶을 살았다. [6] 게다가 성격도 강직하여 아첨을 싫어했기에 과거에 급제했어도 높은 벼슬을 차지하긴 어려웠다. 이런 성품 때문인지 두보는 백성들의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시로 써[7] 고위층의 사치와 대비하고 부패한 사회상을 비판하는 시를 많이 지었다. 이 때문에 두보는 현실적이고 사회성이 높은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으며 당시 사회상을 거울과 같이 그려내어 사람들이 그를 ‘시사(詩史)’라고도 불렀다. 물론 두보의 시 가운데선 낭만주의적인 시도 꽤 많다.

이백과 달리 안사의 난이 그에게는 입신양명의 발판이 되었다.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의 행재소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라는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강직한 성격은 그대로라서 결국 지방관으로 좌천되었고, 그나마도 그 지역에 어마어마한 기근이 닥치면서 끼니도 못 구할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굶주리던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상관들에게 구호식량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분노하여 48세에 사직하고 처자와 함께 감숙성(甘肅省)을 거쳐 촉 땅의 청두(삼국지의 그 성도 맞다. 현재 쓰촨성의 중심지이다.)에 정착해 성 밖에 완화초당(浣花草堂)을 세웠다. 잠시 친구였던 촉 절도사의 막료로 있기도 했다.[8] 이후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내려가서 기수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2년간 더 방랑하다가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동정호(洞庭湖)에서 58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야사에 따르면 매우 굶주리다가 간신히 잔칫집을 방문하여 폭식하다가 생긴 배탈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대만의 시사만화가 어부는 두보의 열전을 만화화하면서 이 '어사설'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고 논박하긴 했는데, 어쨌든 물에 비쳐진 보름달을 보고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죽었다는 이태백보단 현실적이다.(...)

왠지 이백과 대조되어 문약하고 꼿꼿한 선비 이미지가 강하긴 하지만 이백 못지않은 술고래였다. 그래서 친구들을 대동하고 2차, 3차까지 끝장을 보았으며 장안에서 이백과 잠깐 교류할 때에는 둘 다 고주망태가 되어 한 침상을 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그 강직한 성품을 무색케 할 정도로 관아의 빈민구제용 비축미까지 암시장에 내다 팔아(...) 술을 마셨다고 한다. 두보 자신의 말로는 몇 말 안 된다고 하지만.

또한 말까지 잘 탔는데 어느날 술김에 말을 타고 벼랑을 넘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된통 다친 적도 있다고 한다. 가난한 시절, 어렵게 사람들이 저급술을 빚어서 주자 무척 기뻐하며 그 심정을 시로 쓰기도 했다.

재능에 비해 삶은 안습한 인물이었다. 이백이 곽자의 한 명에 대한 시만을 남김에 비해, 두보는 심심하면 그 당시 인물에 대한 시를 남겼고 그 중에는 고선지 장군에 대한 고도호총마행(高都護馬行)이라는 시도 남겼는데 고선지의 애마 한혈마와 같이 고선지를 찬양한 시였다.

그의 후손은 한국에도 100여 명이 살고 있는데 정확히는 정유재란이 끝나고 두 아들과 조선으로 귀화한 장군 두사충의 후손들이다.

두보의 이명인 두공부에서 유래한 공부사우루스라는 공룡이 있다.
  1. 우연의 일치였을지 몰라도 이백과 두보 둘 다 상당히 유력한 가문의 후예였다. 이백은 전국시대부터 나름 중견가문인 농서 이씨의 후예였고(당나라 성씨이기도 하다!) 두보 역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 몇몇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2. 이미 중국 고전문학계에서는 이백과 두보의 시에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결론이 난 상태다.
  3. 정확하겐 도가사상. 도교는 여러 사상이 짬뽕된 종교인지라 도가랑은 차이가 있다. 도교 항목 참조.
  4. 이 또한 두보의 시에 유교적 사상이 잘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5. 유명한 고사성어 '천고마비'는 바로 이 두심언이 북방에서 근무하는 친구에게 편지로 써보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6. 이때 시험관 이림보가 너무 뛰어나서 낙방시켰다는 소리가 있는데 당시 시험관 이림보는 아예 시험지 자체를 안 보고 전원 낙방시켰다. 그리고 현종에게 "인재를 다 뽑아서 이제 인재가 없어요!"라는 희대의 개소리를 했다. 허균이 그 당시에 있었다면 두들겨팼을지도
  7. "처음 변방에 수자리 살러 갈 적에 마을 이장이 머리 싸맬 것을 주셨는데, 머리 세어 돌아오니 다시 변방으로 가라네", "변방에 흐르는 피가 바다를 이루어도 황제의 가시려는(변방 정벌하려는) 뜻은 변하지 않는다네"(병거행)라는 구절이 있는가 하면, 어느 노파가 징발을 피해 달아난 남편을 잡으러 온 관리에게 아들 둘 있던 것도 전쟁 나가서 죽고 손자는 이제 젖도 못 뗐다면서 남편 말고 자기를 데려가면 병사들 밥 짓는 일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비는 처절한 장면을 그린 작품(석호리)도 있다.
  8. 일단 이 때가 두보의 생활에서 제일 좋았던 때였다. 그런데 문제는 둘의 사이가 친구라고 보기에는... 심지어 절도사가 두보를 죽이려다가 참은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