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

1 대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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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詩仙)

두보와 더불어 한시 문학의 양대 거성

李白, 701~762

본명은 이백(200 E-100李白). 태백(太白)은 그의 자를 가리킨다.

두보와 함께 한시 문학의 양대 거성으로 꼽힌다. 두보가 몇 번의 퇴고를 거쳐서 완성된 시를 내놓는 반면 그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마음 내킬 때 몇 줄 내려쓰면 그게 두보에 필적하는 명시였다고 한다. 때문에 별명은 두보의 별명인 시성(詩聖)과 대비되는 시선(詩仙).[1] 그 둘을 묶어 보통 '이두(李杜)' 라고 부르며 둘 사이의 우열을 가리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이미 중국 고전문학계에서는 논쟁을 끝냈을 정도다(이백이 뛰어나다는 소리가 아니다. 동급이라는 소리).

지방에서 태어났으며[2] 젊었을 때는 검술을 배워 혈기를 주체하지 못해 사람 여럿 죽이고 다녔지만 20살 때에 당시 은거하던 이인인 동엄자(東嚴子)과 만나서 개과천선했다고 하며 그의 시가 신선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것도 이때부터다. 25살 때는 사천성을 떠나 강남 일대를 유람하면서 살다가 여기저기를 떠돌며 28살 때 운몽호에서 고종(高宗)[3] 때의 조상인 허어자의 손녀를 만나 결혼하고 10년 동안을 거기서 살았다. 무일푼일 텐데 뭔 수로 결혼한겨? 35살 때는 잠시 낙양을 거쳐 태원까지 유람했고 이때 우연히 명장 곽자의와의 안면을 텄다고도 한다[4]. 또한 도술도 이래저래 배우고 다녔다고 한다. 37살 때는 5명의 시인과 같이[5] 죽림에 은거하여 조용히 살려고 했으나 시가 너무 유명해져서 도피 겸(...) 여행을 다니다가 장안까지 입성하게 되었다고. 시험도 쳤으나 당시 시험관이었던 양국충과 고력사의 의견이 충돌하는 바람에 낙방...

유교적 도덕을 바탕으로 시를 쓴 두보와 달리 그야말로 풍류에 몸을 맡기고 삶을 살았기에 역대 중국왕조에선 국가적 차원에서는 이 사람보다 두보를 더 쳐줬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안 그래도 몇백 년에 한 번 날까말까한 시인인 두보를 그렇게 치켜 세워줬는데도 대등하게 평가될 만큼 시의 천재였다는 말. 물론 우리나라에선 이쪽이 인기가 더 높다. 유교가 들어왔긴 해도 그놈의 풍류 때문에 이백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다. 옛날 이야기에서 달만 나오면 이백이 얘기되기도 하는 등 이백의 언급은 많지만 두보는 영... 사실 두보는 당대 역사의 질곡과 그에 따른 생활고를 슬퍼하고 고뇌하며 중국의 고사를 바탕으로 빗대어 비판하고 궁리하는 시가 많은데 이 때문에 시의 완성도는 훌륭하지만 풍류의 일환으로 한시를 즐기기에는 뭔가 좀 그렇다(...) 다만 인기와는 별도로 조선왕조는 역대 중국왕조와 같은 이유로 두보의 시를 권장하였다. 당장 훈민정음 창제 이후 훈민정음으로 발간된 대표적인 책 중의 하나가 두시언해였음을 생각하면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장안에 입성한 그는 발해 사신의 문서를 해독한 걸로 유명해졌다.# 시를 잘 지어 당현종양귀비의 총애를 받았으나 술김에 현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환관 고력사에게 "내 신발 좀 벗겨봐라. 이 고자놈아!"라며 술주정을 부릴 정도로 호방하게 굴었고 훗날 이 일을 잊지 않은 술주정이라고해도 나라도 못잊을 듯.고력사의 미움을 사서 "이 반동노무 새끼!" 파면당했고 그 해 여름 낙양에서 두보를 만나 1년동안 같이 지내면서 여행도 다녔다.[6]

지금으로 말하자면 순수한 의미의 달빠였다. 달을 읊은 시도 수없이 많은데 월하독작 등이 읽기도 쉽고 정취가 빼어나다. 심지어 야사에는 그가 '뱃놀이를 하다가 강에 비친 을 보고 그걸 건지려다 뛰어들어 익사했다'고 알려질 정도로 그의 빠심은 대단했다.[7] 우리나라 민요와 가요에도 '이태백이 놀던 달아' 라는 대목이 나오는 것이 그의 영향이다.[8]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나 몇 년 간 양자강 중하류를 떠돌다가 762년 외숙부의 집에 의탁하다 몇 달 안 돼 죽고 말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 62세였다.외숙부는 나이가 몇이여 민간 전승에서는 이때 강에 뛰어든 이백이 고래를 타고 하늘을 날아 고향인 선계로 돌아갔다고 한다.

서양에도 그의 시가 전해졌는데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도 그의 시에 반한 듯하다. 중국의 시들을 바탕으로 작곡된 대지의 노래에서 이백의 시가 절반 넘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볼 때 그렇다. 물론 원문과 대지의 노래의 가사 사이에는 좀 갭이 있긴 하지만. 외국어에도 능통했는지 위에 언급한 대로 발해의 말을 알아서 당시 발해에서 온 외교문서를 처리하는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고 한다.[9]

2 하라 야스히사만화 킹덤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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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능력치
시기무력지휘력지력정치
20권888586?
가이드북888586?

수비형 무장이라는 설정과 인식에 통솔력이나 지력이 높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무력이 더 높은 무장.

조나라장군으로, 나라와 조나라와의 전투에서 등장한다.중화에서는 수비의 이백으로 불리는데, 연나라의 5만여 명의 적군에 맞서 겨우 수천명으로 작은 을 지켰다고 붙여진 이명. 초반에는 몽무도 그의 수비벽을 뚫지 못하여 고전하는 듯 했고 이백은 몽무가 자신을 이기려면 10년은 더 경험을 쌓아야한다고 장담했으나, 이것은 급징용된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위한 몽무의 계책으로, 이후 전투에서는 몽무에게 넌 그 동안 상대를 잘 만난 것 뿐이라며 완전히 개발살나고 목숨만 부지한다.[10]

이후 합종군에서 경사 휘하에서 참전해 표공의 군대와 싸우다가 경사와 함께 철수한다.

3 트랜스포머 사이버트론의 등장 트랜스포머

Evac. 한국명은 라이브콘. 이백(사이버트론)항목 참조.
  1. 여기에 시불(詩佛) 왕유, 시귀(詩鬼) 이하를 더해서 당시사걸(唐詩四傑)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2. 사실 이설이 심하다. 감숙성 일대에 태어났다고도 하며 산둥, 관중 일대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지만 대부분 출생은 하서 일대며 3살이 되기 전에 사천으로 이주했다는 설이 정설.
  3. 당 고종이다. 조선의 고종이 아니다!
  4. 야설에서는 곽자의가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쓰자 이백이 구명활동을 벌이고 무죄를 호소하여 풀려났다고 한다. 만일 사실이라면 훗날 곽자의가 이백을 살려주려고 한 것은 은혜를 갚은게 된다.
  5. 공소보(孔巢父), 배정(裵政), 한준(韓準), 장숙명(張叔明), 도면(陶沔).
  6. 두보가 한 말에 의하면 둘은 밤에는 같은 이불에서 잤고 날이 새자마자 손 잡고 떠났다고...ANG?
  7. 물론 그 전설이 어린 고장은 높은 산이 솟아있는 지역이라 그랬을리는 당연히 없다.
  8. 그런데 단순히 달을 좋아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니고 그가 안사의 난을 일으킨 수괴인 안록산과 절친했기 때문에 그 죽음에 모종의 음모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 당시 이태백은 황족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곽자의의 도움으로 살아난 신세라 그리 신빙성이 있는 건 아닐 듯하다.
  9. 아마 이백은 문서 자체를 다르게 이해한 듯 싶다. 알다시피 한국어와 중국어는 문장 성분의 어순이 다르다. 즉 발해에서 한문 어순을 제멋대로 한국어(정확히는 당시 발해어) 순서를 따라 썼기에 중국에서 해석이 어려웠을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식 유머? 교착어인 한국어에서는 어순이 바뀌어도 조사의 도움으로 해독이 가능하지만 중국어같이 어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고립어의 경우, 어순이 바뀌었을 시 해독이 아주 어려워진다.
  10. 그리고 몽무는 이백을 쫓는 대신 장군을 잃은 이백군을 쓸어버리는 것을 택하여 머리가 도망가 오합지졸로 전락한 이백군을 절단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