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란트

1 개요

Rheinland. 라인 강 유역에 위치한 독일의 서부 지역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1949년 서독이 건국된 후로는 둘로 쪼개져서 북부 라인란트는 베스트팔렌과 하나로 묶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으로 편성됐고, 중부/남부 라인란트는 바이에른월경지였던 팔츠와 묶여 라인란트-팔츠로 편성된다.

2 역사

기원전부터 이 일대는 게르만 족의 한 분파인 트레비족과 우비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근처 갈리아에서 넘어온 켈트족도 살고있었다.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하여 이 일대는 로마 제국의 국경 안으로 편입되었으며, 엘베 강까지 영토를 확장하려고 했던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이후로는 로마의 북동부 국경을 담당하는 최일선기지가 된다. 로마의 멸망 이후로는 프랑크 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가 샤를마뉴의 사후 프랑크 왕국을 삼분한 베르됭 조약에 의거하여 라인강 서안은 로트링엔 왕국에게로, 동안은 동프랑크 왕국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이런 분리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오토 1세에 의해 라인란트는 다시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로 묶이게 된다. 다만 이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오늘날의 '라인란트'라는 지역개념은 없었는데, 그 탓은 개판으로 유명한 신성로마제국의 중앙권력 탓.[1] 당시 지도를 찾아보면 알겠지만 오늘날의 라인란트 일대는 온갖 군소 공국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세력이 꽤 컸던 몇몇 세력으로는 쾰른 선제후, 아헨 제국자유도시[2] 정도를 들어볼 수 있다.

어쨌든 군소공국이 난립하는 특성상, 정치적으로 강력한 공동체가 존재할리 없었고 15~16세기 무렵 대충 중앙집권화를 끝낸 프랑스 왕국이 호시탐탐 이 곳을 노린다. 아예 루이 14세때가 되면 '평지보다는 라인강을 국경선으로 삼는게 자연스럽잖아.'라는 논리를 들고는 시시건건 이 곳을 쳐들어온다. 그렇지만 어떻게 어떻게 이 일대는 독일의 문화권으로 남는데는 성공했고, 전쟁과 군소공국의 난립이라는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라인강이라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경제적으로는 꽤나 번영을 누리게 된다.[3] 이후 프랑스 혁명전쟁을 거치면서 1795년 라인강 서안은 마침내(!)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됐고, 1806년에는 나폴레옹에 의해 꼭두각시 라인 연방이 세워진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이 곳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나폴레옹의 우주방어 앞에 번번이 무산됐다. 라인란트의 프랑스 편입이 정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갈리겠지만 적어도 불행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나폴레옹의 통치를 거치면서 온갖 구시대적인 규제, 신분제도들이 철폐되면서 라인란트가 경제/사회적으로 급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줬기 때문. 실제로 인근 지역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이 프랑스와 나폴레옹에게 이를 박박 갈던것과 달리 정작 이 시기 라인란트 주민들은 프랑스의 통치를 꽤나 마음에 들어했다고.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개최된 빈 회의에 의거하여 라인란트는 프로이센 왕국 산하로 편입된다. 하지만 가톨릭 - 자유주의 성향의 라인란트 인들에게 프로테스탄티즘 - 보수/반동주의 성향인 프로이센의 통치는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었고, 라인란트인들의 프로이센에 대한 반감은 꽤나 거셌다. 이런 반감은 문화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비스마르크의 가톨릭 탄압정책을 통해 더더욱 커졌고, 라인란트의 주민들은 가톨릭 중앙당에게 표를 던지는 방식으로 프로이센과, 프로이센을 좌우하는 융커들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러한 라인란트 출신들이 프로이센에 품은 반감을 가장 극명히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쾰른 출신의 독일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4] 다만 이런 반감과는 별개로 라인란트는 계속해서 프로이센의 일부로 존속했으며 이는 1871년 프로이센 주도하의 독일제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차대전의 종결후인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하여 독일은 이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없게 됐고, 이는 독일인들의 격렬한 반발심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종전 후 독일이 전쟁배상금 지불을 중단하면서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이 이 일대를 점령해버리면서 반프랑스 감정은 더더욱 거세진다. 그와는 별개로 프로이센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던 라인란트 분리주의자들은 이를 이용하고자 했고, 이 시기 쾰른의 시장을 지내던 아데나워는 프랑스군과의 협상을 통해 아예 라인란트의 독자적인 자치정부를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한다. 다만 이 시기 라인란트는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와 하이퍼 인플레이션 해결을 위한 렌텐마르크 공급 문제를 놓고 싸우고 있었는데[5] 아데나워를 비롯한 자치론자들이 정말로 자치를 꿈꿨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렌텐마르크 공급을 위해 정부를 압박하려고 이런 움직임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갑론을박 중. 이후 도스 안에 의거하여 프랑스군은 1925년에 본국으로 철수했고, 1936년에는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이 곳에 독일군을 다시 배치시킴에 따라 전운이 몰려오기도 했었다. 이때 히틀러를 조졌으면 2차대전은 없었을 것이지만 괜히 이 때 쫄아서 가만히 있었다고 더 큰 화를 부르고 만다.

2차대전 이후 이 지역은 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다시 영국군의 관할로 바뀌었으며, 신생 독일연방공화국은 이 곳을 두 곳으로 나누어 북부지방은 베스트팔렌과 합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를 신설했고 중부와 북부지방은 팔츠와 합쳐 라인란트-팔츠 주가 된다.[6]
  1. 근데 사실 이 시기에 이 정도면 '그나마' 중앙에 권력이 있는 편이었다. 문제는 옆나라들 다 중앙집권화 끝낸 18~19세기까지도 이 꼬라지가 유지되어서 문제였던거지....
  2. 아헨은 샤를마뉴가 대관식을 올린 장소였기 때문에 근대시기까지도 독일 민족에게는 하나의 성지였다. 물론 샤를마뉴를 자기네 나라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프랑스인들에게도 성지였고, 그래서 또 맨날 이걸 주제로 싸웠다. 여담이지만 아헨의 프랑스식 지명은 엑스-라-샤펠.
  3. 다만 남 잘되는 꼴을 못보는 군소공국의 영주들이 온갖 통행료와 규제를 걸어대는 바람에 가지고 있는 잠재력에 비하면 성장이 정체됐다는 견해가 다수다.
  4. 아데나워는 싫어하는 인물이 있으면 가령 슈트레제만이라던가 슈트레제만이라던가 '프로이센스러운 놈'이라고 씹어댔으며 2차대전 후 소련과 폴란드에 의한 동프로이센슐레지엔 상실을 사실상 묵인했는데, 이것도 '프로이센을 꼴보기 싫어해서 그런 것 아니냐'라는 의견이 강하게 제기될 정도였다.
  5. 바이마르 공화국이 '프로이센 지역에 먼저 지급하겠다'면서 라인란트에는 새로운 화폐 공급을 거부했다.
  6. 정확히는 세 곳이다. 문서 상위의 사진을 보면 월경지가 하나 보일텐데, 이 월경지는 헤센으로 편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