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독일 해군조약

1 개요

Anglo-German Naval Agreement. 1935년 6월 18일, 런던에서 영국독일 사이에 맺어진 양국간 해군력 균형을 맞추는 조약. 런던 해군조약이라고도 하나 이럴 경우 런던 해군 군축조약과 혼동이 되기에 그냥 영독 해군조약이라고 통칭한다.

2 배경

영국의 입장에서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파기되어서 다시 건함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 때는 미국은 우호적이긴 했지만 동맹은 아니었고, 일본태평양동남아시아에서의 대영제국의 이권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1935년 3월,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하면서 유럽에서도 전운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영국의 램지 맥도널드 수상,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프랑스의 피에르 나발 외상이 이탈리아 스트레사에서 독일의 재군비 선언에 대한 공동전선을 합의, 스트레사 전선을 형성하였으나 영국은 이와 별개로 독일과의 외교적 해결을 고려한다.

독일은 독일대로 히틀러의 도박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했으나 외교적으로 고립될 가능성이 커졌고, 영-이-프 3국과 모두 맞서는 것은 어렵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아울러 독일의 외교관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중심으로 외교적으로 스트레사 전선을 무력화하고, 영국으로부터 실질적 권리를 보장받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안 그래도 외교적 해결을 고려하던 영국은 이러한 독일의 타협적 태도와, 1934년 초 독일이 폴란드와 불가침조약을 맺으며 당시까지 유럽에서 가장 전쟁위험이 높았던 독일-폴란드 긴장관계를 단번에 해소했던 전례를 보아, 좀 막나가는 면은 있지만 그래도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는 당시로선 지극히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게 된다. 여기에는 대공황 이후 급격히 약화된 영국의 군사력과, 유럽 최대의 산업국인 독일이 본격적으로 건함에 나설 경우, 1차 세계대전 직전의 건함 경쟁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겹쳤다.

3 조약 내용

조약 내용은 간단하기 그지 없다. 핵심은 독일 해군의 주력함 총톤수는 영국 해군의 주력함 총톤수의 35%를 절대 넘지 못한다는 것. 이른바 100:35의 전력비율을 인정하고 동시에 베르사유 조약으로 묶여있던 독일의 주력함 건조 제한이 완전히 풀리게 되었다. 유일한 제약은 주력함(전함)의 배수량을 35,000톤으로 규정한 것.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10,000톤을 넘지 못하는 중순양함 6척[1], 6,000톤을 넘지 못하는 경순양함 6척, 800톤을 넘지 못하는 구축함 12척과 추가로 어뢰정 12척만의 보유가 가능했는데, 이 조약으로 인해 그동안 갖지 못하던 전함의 건조가 가능해졌다.[2]

또 주력함 총톤수에 있어서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당시 영국군 주력함 총톤수가 522,500톤이니 독일이 확보 가능한 주력함 총톤수는 183,750톤. 더군다나 이때는 이미 워싱턴 군축조약이 파기된 상황이었기에 독일은 실질적으로 20만톤 내외에서 주력함 확보가 가능해졌다. 워싱턴 군축조약 당시 프랑스가 인정받은것과 동일한 대우를 받은것. 아울러 완전히 보유를 금지했던 유보트의 건조 및 보유를 허용했다.

이 조약으로 독일 해군은 국제법적으로 합법적인 재건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4 후폭풍

문제는 영국이 단독으로 독일과 해군조약을 체결한 행동이, 히틀러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재군비 선언을 공인해준 결과가 되었다는 것이다. 안그래도 히틀러의 일련의 행동으로 1차대전 당시 연합국들이 공동대응을 모색하고 있는 마당에, 그 공동대응에 동참했던 영국이 뒤통수를 치며 히틀러의 행동을 공인해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독일은 합법적으로 군비증강에 열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은 100:35의 비율이 외교적 승리라며 정신승리했지만, 독일은 개전 전까지 20도 못 채웠다. 히틀러의 허세에 놀아난 것.[3]

반대로 구 연합국간에는 심각한 불신이 생겨났다. 그도 그럴것이 스트레사 전선의 공동참여국인 영국이 이런 식으로 엿을 먹이고 이탈하였으니 서로 믿을 수가... 때문에 그동안 독일을 나쁘게 보고 있던 이탈리아는 영프가 이렇게 무력하다면 차라리 이 참에 해외팽창을 가자는 생각으로 1935년 말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키며, 사실상 연합국간 공조체제에서 이탈하면서 독일과 손을 잡게 된다.

하지만 이탈리아보다 더 큰 문제는 프랑스였다. 프랑스 역시 영국에 심각한 배신감을 느꼈고, 이는 불과 1년 뒤 라인란트 재무장에서 적극적인 영국과 소극적인 프랑스라는 반대되는 상황을 불러일으키고 만다.

모든 원인을 이 조약에서 찾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프랑스를 중심으로 1차대전 직후 형성된 대독 포위망(프랑스-영국-벨기에-이탈리아-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은 이 조약으로 흔들리기 시작하고 이후 포위망이 붕괴되는 연쇄작용의 계기가 된다. 일종의 나비효과.

이 조약으로 재건된 독일 해군 때문에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엄청 고생해야 했다. 비스마르크 잡겠다고 나서다가 후드가 격침당하기도 하고, 지중해에서는 바럼을 잃었다. 북방항로로 다닐 때는 티르피츠 때문에 늘 벌벌 떨어야 했다. 무엇보다 그 놈의 U-boat 때문에 영국은 41~42년 동안 말 그대로 아사할 뻔 했다.
  1. 이걸로 어떻게든 전함 비스무리하게 만들어보려고 한 것이 포켓전함으로 불리는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이다.
  2. 그래서 건조한 게 비스마르크급 전함. 단,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비스마르크급은 영독 해군조약에서 규정한 35,000톤을 한참 넘긴 함선이다.
  3. 독일이 건함계획을 안 세운 것은 아니다. 플랜 Z라 하여, 전함 13척항공모함 4척을 중심으로 하여 저 35의 비율을 모조리 채우는 대양함대를 재건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플랜 Z가 종결되는 시점은 1945년으로 예정되었고, 결국 2차대전 발발과 함께 군비투자가 육군과 공군에 집중되면서 계획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