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파일:Attachment/uploadfile/sitzkitz-western-front-french-sold.jpg |
독일 국경에 가까운 지역의 과수원에서 의자까지 가져다놓고 편안하게 앉아서 보초를 서는 프랑스군 |
WW2: The Sitzkrieg (Sitting-Phony War) |
Phony war.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일어났던 해프닝. 독일에서는 Sitzkrieg(앉은뱅이 전쟁)이라고 불렀다.
"대열은 있으나 전투는 없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상황이다. 말 그대로 선전포고는 했는데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던 1939년 9월~1940년 5월 초순까지의 독일-프랑스 국경지대, 즉 서부전선에서의 기묘한 고요를 가리킨다. 유럽의 기묘한 전쟁
요약하자면 프랑스가 군대를 동원해서 독일땅에 쭉 들어갔다가 유턴해서 다시 본토로 돌아온 전쟁이다.
2 발단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와의 동맹에 근거하여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먼저 독일 국경으로 쳐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프랑스와 영국의 동원은 아직 완료가 되지 않았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호전에서 먼저 참호를 뛰쳐나온 쪽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1]
물론 폴란드를 돕는다는 시늉은 해야 했기에 아예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9월 초순에서 중순까지 프랑스군이 독일을 침공하긴 했다. 그것도 자그마치 41개 사단에 전차 2,400대를 몰고. 이에 맞선 독일군은 아직 소집도 끝나지 않은 22개 사단이 전부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9월 17일까지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그냥 독일 영내로 32km 행군해 들어갔다가 조용히 나왔다(…). 그나마도 정작 독일 영내로 돌입한 프랑스군의 실제 병력은 서류상 동원 병력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독일은 독일대로 주력이 동부의 폴란드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를 확실히 정복하기 전에 서부에서 공세를 벌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침공해온 프랑스군에 대해서는 산발적인 교전을 제외하고는 주로 지뢰를 잔뜩 매설해서 프랑스군의 진격속도를 느리게 함과 동시에 삐라와 선전방송을 통해 적대할 생각이 없음을 외치는 대응을 했다. 결국 양쪽의 소극성 때문에 법적으로는 전쟁 상태지만 이렇게 전선에서는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3 전개
폴란드 전역은 약 한달만에 독일의 완승으로 결판났지만, 이미 겨울이 다가오는 10월이었기 때문에 독일측은 서부로 바로 공세를 돌리기보다는 폴란드 전역을 치르면서 소모된 물자와 전력을 보충하고 기갑부대와 공군이 활동하기 좋은 날씨를 기다리느라고 1939-1940년 겨울을 소강상태로 보내고 있었다.
1940년 1월 10일, 독일군 공군 정보장교 라인베르거 소령이 베를린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Bf-108 연락기를 타고 가다가 악천후를 만나서 벨기에군에게 붙잡힌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라인베르거 소령은 자신들이 내린 곳이 목적지인 베를린이 아니라 벨기에의 마스트리히트라는 (마스트릭트는 18세기부터 네덜란드였는데) 것을 깨닫고 기밀 유지를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서류를 태우려고 했지만, 급히 달려온 벨기에 군인들에 의해 이 서류는 약간 그을렸을 뿐, 멀쩡하게 노획되었다. 이 서류에는 당시 독일군의 공격계획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는데, 이 비보를 접한 히틀러는 거의 발광하다시피 했고, 참모장 알프레드 요들 장군은 "만약 적들이 그 서류에 기재된 모든 계획을 손에 넣었다면 우리는 끝장이다."라는 절망어린 토로를 일기장에 적을 정도였다.
물론 당시 라인베르거가 분실한 서류는 독일군의 본격적인 계획이었지만 이미 적도 뻔하게 알 수 있는 것이라 비판이 가중된 계획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으로 인해 기존 계획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독일군은 그 유명한 만슈타인 원수의 프랑스 침공 계획을 묻혀있던 곳에서 파내서 수립했다. 또한 바로 이 서류에 기재된 작전내용은 제발 독일군이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프랑스가 여기던 바로 그런 작전이었다. 당시 독일국방군 참모본부가 패닉에 빠졌던 것은 사실이나, 실제로 벌어진 일은 달랐다. 프랑스군은 그 계획을 보고 아싸 걸렸구나!를 외치며 그거에 대응해서 주력부대의 벨기에 진공을 확정했다. 이른바 딜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건 조금 뒤의 이야기고, 당장 만들고 있던 정식 계획이 통째로 노출된 독일군 수뇌부는 극심한 패닉에 빠져들었고, "우리는 이제 끝장"이라느니 "전쟁에서 또 지면 신이 우리를 돌봐줄까?"라느니 하면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서 공격 계획을 고쳐야 한다느니, 하면 안된다느니 하면서 날마다 신경전과 논쟁을 거듭하는 형편이었다. 사실 계획 자체도 부실하던 차에 적에게 다 넘어가 버리기까지 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연합군은 아무런 대응도 취하지 않았다. 아니, 취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연합군은 마지노 선 건설을 통해 독일군의 공격 방향을 1914년과 같은 벨기에 루트로 고정했다고 여겼고, 이때 노획된 독일의 작전계획서도 바로 그런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혹시 독일이 딴 생각을 하면 어쩌나, 그들이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 뭔가 기상천외한 짓을 벌이면 어쩌나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독일의 계획이 노출되자 프랑스는 다행이라고 여기며 원래의 계획대로, 독일이 침공해 오면 천천히 방어해서 그 힘을 깎아먹고 나서 제대로 한 방 날려버린다는 원래의 계획을 고수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연합군의 대독 작전계획이 이렇게도 수동적이었던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훈 때문이었다. 해당 전훈은 공격은 죽고 싶은 놈들이나 하는 거다. 아니면 압도적으로 병력이 많거나.였다. 즉 독일군을 아주 많이 죽여 놓기 전까지는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당시 연합군의 내심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그 당시의 프랑스는 독일이 자신들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믿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역시 제일 큰 것은 총 인구 및 경제규모 자체에서 독일이 프랑스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했던 탓이다. 실제로도 당시 독일의 경제력은 프랑스의 2배를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 그 규모의 경제에 프랑스는 독일이 재무장을 이제 시작했고, 끝나려면 앞으로도 3~4년은 더 걸린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1941년에 프랑스에서 나온 관련 저술에서는 비겁한 독일놈들이 가짜 서류를 뿌려서 고스란히 속아 넘어갔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누굴 탓하리 애초에 작전이 노출되면 독일이 작전을 바꿀 거라는 예상을 하지 못한 쪽이 바보라고 생각하면 지는 거다.
아무튼 당시 프랑스에는 영국 원정군이 주둔하여 초기 연합군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된 뒤에도 연합군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독일군과 전면적인 군사적 충돌을 거의 일으키지 않았고, 쌍방이 전혀 다른 배경으로 적대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갖 에피소드가 속출했다.
4 현장 상황
- 프랑스와 독일과 룩셈부르크 국경에 쌍둥이같은 두 마을이 있었다. [2] 이 두 마을에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소는 독일에 있었는데, 어느날 독일에서 송전을 멈추자 프랑스군이 즉시 독일 쪽에 있는 마을을 향해 몇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그러자 수 시간만에 다시 송전이 재개되다가 다시 뚝 끊긴지 10여분 후, 갑자기 독일 쪽에서 프랑스어로 "포격은 자제해주십시오. 송전이 중단된 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순전히 기계가 고장났기 때문입니다."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 방송을 들은 프랑스군 병사들은 한바탕 웃고는 포격을 그만뒀는데, 과연 그 방송이 나온지 2시간 뒤 프랑스 군인들은 독일 발전소가 보내오는 전기를 마음껏 쓸 수 있었다.
- 지크프리트 선과 마지노 선 사이에서는 영국이 폭격기 부대를 동원해서 밤에 삐라를 뿌리고 나면 독일 쪽은 선전 연설과 밴드 연주를 내보내는 식으로 응수했다. 삐라는 독일군도 사용했는데, 주요 내용은 "우리는 공격받지 않는 한 절대 귀국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 "지금 여러분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동안 당신의 애인을 누군가가 채 갈 것이다. 그러니 돌아가라." 등이었다.
- 물루즈 부근에서 프랑스군이 라인 강에 걸려있는 철교를 폭파할 때 독일 쪽에 "지금 다리를 부술 테니까 조심하세요."라고 경고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때는 이미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시점이었다.
- 독일군은 프랑스와의 국경 지대에 "독일인은 프랑스인들의 적이 아닙니다. 독일인은 여러분이 총을 쏠 때까지는 결코 총을 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적힌 간판을 세웠는데 프랑스군도 이 제안을 받아들여 결국 독일군이 간판을 다 세울 때까지 총소리가 나지 않았다. 또한 독일 군악대가 프랑스 유행가를 연주하는 적도 있었다.
- 당시 프랑스 군인들이 고향에 보낸 편지들을 보면, '너무나도 고요한 전선', '쥐죽은 듯한 독일군'들이 뭘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더욱 불안하다는 식의 서술이 많다. 여러모로 프랑스인들은 1차 대전에서의 엄청난 피해 때문에 전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심했다.
- 이 당시 영국군 사이에서 널리 불리웠던 노래 '우리는 지크프리트 선으로 빨래를 널러 간다네'가 있는데, 독일군에선 이걸 알곤 같은 곡조에 '진짜 빨래 실력이 뭔지 보여주마'라는 식의 내용을 담은 노래로 응수하기도 했다(...) [3]
위의 사례만 보더라도 이게 선전포고를 보낸 후 전면전에 돌입한 국가가 하는 행동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가짜 전쟁이라고 부를 만하지 않은가? 물론 실제 전면전 상황의 전시에서도 워낙 전선이 길어지다 보니 소강상태에 빠진 곳에서는 교전을 형식적으로만 치루는 경우가 많았긴 했다. 실제로 서로 정해진 시각 정해진 위치에 포격을 가하는 사례나 명절에 서로 파티를 열었던 이야기는 제법 유명하지만, 적어도 이런 사례는 한바탕 끔찍한 전투를 벌인 뒤라든지, 전략 전술적으로 2선, 3선급인 전선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사례지 저렇게 1선급인 전선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지는 않는다.
이후 1940년 초봄에는 독일은 발트해의 입구를 확보하기 위해 전격적인 노르웨이 침공을 개시한다. 노르웨이가 연합국에 가담한다면 독일 해군은 발트해라는 호수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기 때문에... 이때도 북쪽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프랑스 접경지역의 국경에는 아무 일 없었다.
5 전쟁의 의도
이 전쟁같지도 않은 전쟁은, 이후 프랑스 침공에서 보여주는 독일군의 놀라운 전과로만 미루어 본다면, 어디까지나 독일군의 연막작전처럼 보인다. 하지만 프랑스를 침공하는 그 순간까지도 독일군 고위층에는 승리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은 없었다. 실제로 독일군은 재무장을 한창 시작하는 중이었고, 일부 부대에는 전투복과 개인 화기도 충분하게 지급되지 않은 부대도 있었다. 독일군은 체코와 폴란드를 점령 후, 유럽의 초강대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눈치만 보고 있는 상태였는데, 실제 영국이 대륙 원정군을 조직하고, 프랑스가 독일 국경을 침공하여 부대를 주둔하는 순간이 아마 독일군 고위층의 긴장과 위기감이 최절정인 상태였다. 거의 그 시점에서 독일군은 항복을 고려해보기도 하였다. 물론 히틀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가짜 전쟁이 실제 전투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공포스런 기억 때문이었다. 1차대전에서 나타난, 그야말로 사람이 갈려들어가는 참혹한 소모전, 참호전의 기억 및 국민들을 총알받이로 내몰던 지배층에 대한 여론의 분노로 인해 두 나라 모두 독일을 상대로 단호하게 전쟁을 강행할 의지가 없었다. 게다가 대공황 당시 극심하던 청년실업으로 인한 청년층의 분노는 정치판을 그야말로 난장판으로 바꿔놓았고, 여기에 독일의 여론전까지 더해지면서 두 나라 군대가 전쟁에 돌입하더라도 내부는 다른 결정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즉 현재 한국이나 유럽, 일본 등에서 벌어지는 내부 고립주의 및 청년들의 박탈감이 좀 더 강화된 형태로 두 나라를 잠식했던 것이다. 특히 1차대전 당시 그 지배층에게 소모품처럼 내몰렸던 장년층의 반전주의 분위기는 청년들보다 더 강했다. 여기에 지배층들 스스로도 독일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등 오판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런 문제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를 버리고 독일에 대한 공세를 포기했다. 하지만 두 나라의 청장년들도 착각한 게 있었으니, 독일이 폴란드만 잡아먹고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독일은 1940년 5월 본색을 드러내 프랑스를 침공했고, 자신들의 병크를 오직 정신력으로 극복하라고 강요하기만 하고 국민의 희생만을 외쳐대던 영국, 프랑스의 지배층들과 독일의 진의를 알지 못하고 박탈감에만 시달리던 국민들의 반전여론의 힙작은 프랑스 점령. 그리고 영국 역시 제국이 해체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결국 두 나라가 내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정신력 드립만 친 결과 모두 다 함께 피를 보게 된 셈이다. 그리고 이후 전쟁은 5,0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빨아먹는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