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더퍼드 B. 헤이스

(러더퍼드 헤이스에서 넘어옴)
역대 미국 대통령
18대19대20대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러더퍼드 버처드 헤이스제임스 에이브럼 가필드
공식 초상화
풀네임Rutherford Birchard Hayes
출신 정당공화당
생몰년1822년 10월 4일 ~ 1893년 1월 17일(70년 3개월 13일)
재임기간1877년 3월 4일 ~ 1881년 3월 4일
서명
174cm

tumblr_lsm38zJ1M91qkgs51o1_400.jpg

리즈 때는 아무것도 없다가

presidentrutherfordhayes18701880_1.jpg

풍성하게 수염을 길렀다.

026.jpg

아주 나이들어서는 산타클로스화.

1 전반적 생애

1822년 오하이오델라웨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엄격한 도덕주의자였던 어머니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이 것은 헤이스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노르워크 신학교[1]를 거쳐 캐니언 대학을 간 그는 졸업생 대표가 될 정도로 성적이 뛰어났다고 한다. 대학을 마친 후엔 하버드 법학 대학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 후 변호사가 되었고 이 때에도 그는 노예제 폐지 운동에 앞장섰다. 이즈음 미국-멕시코 전쟁이 터진다. 하지만 당시 그는 결핵에 걸린 상태였기에 참전하지 못했다.

전쟁 후 새로운 법률 사무소를 차리면서 명성이 높아진 그에게 남북전쟁이 찾아왔다. 여기서 그는 연방군에 자진입대하였다. 참고로 헤이스의 부관이 바로 윌리엄 매킨리였다.

부상을 입어 명예 제대한 그는 1864년 하원 의원이 되었다. 이 시절 그는 흑인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법을 갖춘 후 남부가 연방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민권법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한다. 그 후 오하이오 주지사에 당선되었고, 2번 더 연임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1876년 대통령에 도전하게 되었고 당시 부패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벗을만한 후보를 찾던 공화당은 그를 후보로 내세우게 되었다. 그럼에도 민주당의 공세를 막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2 선거분쟁

아무리 보아도 대선은 누가보아도 민주당의 승리 같아보였다. 그랜트는 8년의 임기동안 인기를 잃을만큼 충분히 잃었고, 남북전쟁 패배 이후로 벼르고 있던 남부로서는 이런 설욕의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헤이스는 403만 표 받에 얻지 못해, 428만 표를 얻은 민주당의 새뮤얼 틸던에게 크게 뒤지고 있었고 선거인도 18명이나 적은 상황이었다. 틸든은 184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함으로서 한명만 더 확보하면 과반수 확보가 눈앞이었다.

그러나 남부의 3개 주 사우스캐롤라이나 (7명), 플로리다 (4명), 루이지애나 (8명)의 선거 승자가 결정나지 않았다. 이것이 문제가 된 이유는 3개 주의 선거인을 모두 합치면 19명이었기 때문에 만약 이 3주가 헤이스의 것이 된다면 선거인단 1명 차이로 전세 역전이 가능했던 것. 거꾸로 말하면 틸든은 세 동네 가운데서 한 군데만 이기면 대통령이 되는거였다.

근데, "이게 결과가 계속 다르게 나오네?"(...) "그래도 개표를 다시 하면 좀 낫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서 재개표와 재검표가 반복되었는데. 그 때마다 다르게 나왔다. 수작업으로 개표한 거라 어느 정도의 오차는 있을 수 있다 해도. 분명한 건 양측의 표 차이가 수작업의 오차 범위 안이었다는 것이다. 수십번도 더 개표를 한 끝에, 결론이 난 건 대통령 취임식 이틀 전이었다(..)

결국 양당은 각자 자기 측에 유리한 주장을 하며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특별개표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때 당시 개표위원은 민주당이 7명, 공화당이 7명씩 배정되고 당적이 없는 데이비스가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가 상원의원이 되면서 개표위원에서 빠지게 되었고 상원 다수당(47:19)#인 공화당 소속이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2] 결과는 8-7. 그리하여 공화당의 주장을 반영해 185-184로 헤이스가 이겼다고 선언해 버린 것.

이렇게 되자 남부는 그야말로 헬게이트가 벌어졌다. 당시 3주는 아직 연방군의 군정을 받고 있었던데다가 부정 투표 의혹까지 발생했던 상황이라 말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은게 더 이상했다. 득표에서 졌는데 당선 되다니 말이 될 일인가? 하지만 이후로도 2이나 더 이런 일이 벌어진걸 보면 안될거야 아마.

결국 결과는 그야말로 남부의 백인 입장에서는 "도둑맞은 선거". 남부와 민주당 지지자들의 심정을 한국 근현대사에 빗댄다면 사사오입 개헌당시에 개헌반대파 의원들의 심정일 것이다. 실제로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 편에서 이를 사사오입 개헌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반대 세력은 헤이스의 이름인 "Rutherford"를 비꼬아서 "RutherFRAUD"(사기) 로 불렀다.

하지만 남부에서도 백인들이 불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해 흑인들의 투표를 방해한 것은 사실이었고, 애초에 흑인에 대한 투표 방해가 없었다면 새뮤얼 틸던이 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현대의 예측에 따르면 불법적인 폭력이 없었을 경우 이들 주 3개 중 2군데에서 공화당이 이기고 1군데에서 민주당이 이겼겠지만 다른 주에서 공화당이 이겨서 헤이스가 정당하게 당선됐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Who Won the 1876 Election? Issue 9 of Buttons and Ballots, in Spring 1997. 또한 흑인에 대한 투표 방해가 없었다면 popular vote로도 헤이스가 이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남부에서는 폭동(이라고 쓰고 반란이라고 읽는 것)이 발생하려는 등 상황이 심각해지자, 헤이스는 타협안을 내놨다. 그 내용이란...

1. 남부의 군정을 종료한다.

1. 민주당원에게 일정한 수의 각료를 배정한다.
1. 남부인의 연방 공직 임명을 가능케 한다.[3]
1. 재선에 출마하지 않는다.

이것을 1877년의 타협이라고 하며, 헤이스는 재선에 출마하지 않으면서 약속을 지켰다[4]. 이때 연방군이 철수해버리면서 남부인들은 이후 거리낌없이(...) 흑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3 대통령 시절

우선 위의 타협대로 남부에 경제 기반 시설들을 재건하였다. 그렇지만 흑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는데, 공화당이 위의 선거결과 때문에 민주당에 기세가 눌리게 됨으로서 헤이스의 시도들은 불발로 그치게 되었다. 좋게 생각하자 틸든이 대통령이 됐으면 더했을테니까 또한 공무원 제도를 시험으로 뽑게끔 바꾸려고 시도하였다. 비록 이 시기에는 실패하였지만 훗날 펜들턴 법을 통과시키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지만 헤이스가 마주하게 된 최대의 문제는 바로 노동자 문제였다. 형편없는 임금과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던 철도 노동자들이 회사의 가혹한 조치[5]에 반발하여 폭동이 발생하였다.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시작된 폭동은 빠르게 확산되어 결국 헤이스는 군대를 동원해 간신히 이들을 진압할 수 있었다. 덕분에 헤이스는 노동 운동에는 잔혹했던 도덕적 온정 대통령이라고 까이기도 한다(...) 이 폭동은 단순한 철도 노동자의 파업이 아닌 다른 많은 노동자들이나 사회에 불만을 가진 시민들이 대거 가담하였기에 더욱 빠르게 확산되었던 것. [6] 이 일 이후 노동자들에게 뜨거운 맛을 본 철도회사들은 한동한 임금 삭감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은화제도[7]중국인 이민 제한[8]을 둘러싼 의회와의 갈등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다 임기를 마쳤다.

4 그 외의 이야기

위의 타협안에 따라 재선에 출마하지는 않고 가필드를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1884년 선거에서는 공무원 개혁을 주장하는 그로버 클리블랜드를 지지하기도 했다. [9]

퇴임 후에는 자선 단체를 설립하고, 몇몇 공직을 거친 후 1893년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에 한 말은 "이제 루시가 있는 곳으로 가겠군..."이었다고 한다.

헤이스는 엄격한 도덕주의자로 유명했다. 그가 중국인 이민 제한을 거부한 것도 그들을 토사구팽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 또한 그의 부인 루시 헤이스도 남편 못지 않은 인물로 노예제 폐지와 금주 운동에 앞장 섰으며 영부인이 된 이후에는 백악관에 절대 술을 들이지 못하게 하고 레모네이드를 대접하였기에 얻은 별명이 '레모네이드 루시'. 헤이스 재임기에 한 파티가 끝나자 국무장관인 윌리엄 애버츠라는 사람은 "너무 훌륭한 축제였습니다! 샴페인처럼 흘러 넘쳤어요!"라고 반어법 외쳤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루시 본인은 "난 술보다는 레모네이드가 더 좋다고 권장했을 뿐이지 강요한 적은 없는데 왜들 이러지? 내가 너무 했나?"란 식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또한 헤이스는 평생동안 일기를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남북전쟁 당시 부상으로 죽을 뻔한 상황에서도 쓴 일기가 남아있다고.

의외로 진보적 성향의 마크 트웨인은 그를 "날이 갈 수록 위대함이 더하는 인물"이라고 격찬했으나, 대통령 인기 순위에서는 중위권~중하위권을 오가고 있다.

여담으로 미국 대통령 중 목소리 기록이 있는 최초의 대통령이다 [1] 헤이스가 아니고 해리슨인건 함정
  1. 참고로 감리교 계열이다. 또한 헤이스 본인도 감리교를 믿었다.
  2. 원래는 하원 다수당이라고 되어있는데, 당시 하원은 민주당이 압도적 다수당이었다. # 더빡쳤을듯 사실 상원이 다수당이어서만도 아니고 Justice(법사위)에서 더이상 선임할 민주당 의원이 없었다는 문제가 있었다. 항목 참조. #
  3. 당시 남부인들은 충성 서약을 하지 않으면 참정권 등을 얻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4. 링컨 이래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 드물기도 했고..
  5. 늘 그렇듯 요금은 크게 올리고 임금은 확 깎았다.
  6. 참고로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보낸 군대의 지휘관이 바로 다음 선거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해 낙선한 윈필드 핸콕이었다.
  7. 1873년 주화법으로 은화 생산이 중단됨으로 인해 농부, 노동자의 생활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자 의회는 필요한 만큼 돈을 찍어낼 수 있는 은화제도를 주장했지만 헤이스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며 거부했다.
  8. 당시 의회에서는 급증하는 중국인(쿨리)들의 이민을 막고자 하였지만 헤이스가 거부함으로서 이 법은 아서 때 시행되었다.
  9. 이 이야기는 그랜트의 3선을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