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시스 S. 그랜트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에서 넘어옴)
역대 미국 대통령
17대18대19대
앤드루 존슨율리시스 심슨 그랜트러더퍼드 버처드 헤이스
공식 초상화
풀네임Ulysses S. Grant
출신 정당공화당
생몰년1822년 4월 27일 ~ 1885년 7월 23일(63년 2개월 26일)
재임기간1869년 3월 4일 ~ 1877년 3월 4일
서명
17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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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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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간지! 아니, 러셀 크로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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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부터 50달러 지폐 모델을 맡게 됐다.

"Although a soldier by profession, I have never felt any sort of fondness for war, and I have never advocated it, except as a means of peace."

직업 군인이긴 했지만, 나는 전쟁에 어떤 종류의 호감도 가진 적이 없었고, 전쟁을 옹호한 적도 단 한번도 없었다. 평화를 위한 전쟁만이 예외였을 뿐이다.

1 개요

19세기 미국장군이자 대통령. 남북전쟁에서 북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북부를 승리를 이끈 명장이다. 남부의 총사령관인 로버트 E. 리와 자주 비교된다. 다만 정치가로써는 성공하지 못한 점에서 유능한 군인이 유능한 정치인이 아님을 보여주는 반면 교사이기도 하다.[1]

2 생애

  • 군사 관련 경력

1839 육군사관학교 입학
1843 육군 소위 임관
1844 육군 중위
1846 멕시코 전쟁 참전, 임시 소령 진급 종전 후 정규군 대위
1854 미 육군 대위로 군에서 퇴역
1861 (남북 전쟁 발발) 대령~소장 진급
1863 빅스버그 점령 후 중장 진급, 테네시 군 사령관
1864. 3 ~ : 미 육군 총사령관
1865 ~ 1869 : 미 육군 총사령관(1866년 7월 대장 진급)

2.1 장교 그랜트

오하이오 주에서 가죽 가공업자 제시 그랜트와 농장주의 딸 한나 심프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말수가 적고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지만 말을 잘 다루었다. 본명은 하이럼 율리시스(Hiram Ulysses)로 하이럼은 침례교에서 받은 세례명이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개명하였는데, 이는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위해 추천서[2]를 받은 상원의원이 추천서에 이름을 잘못 적은 게 마음에 들었던 탓이라고.[3]

초급장교 시절에는 늦은 진급과 박봉 때문에 우울증과 알콜 중독에 시달렸다. 당장 아내가 대단한 부호 집안이고 자기 자신도 제법 잘 사는 기업가의 아들인데, 부부 동반으로 서부 오지로 파견와서 월급 2~30달러로 빠듯한 살림을 이어나가는 게 절망적이었다는 게 본인의 회고다.[4] 더구나 진급 가능성마저 낮았으니... 근무지인 서부 주둔지에서 대위 계급으로 경리장교 임무를 수행했으나 가족과 떨어져 있던 탓에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이 심해졌다. 얼마나 심했냐면 에 취해 금화 개수조차 제대로 셀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결국 군법회의에 회부어 처벌받을 것이냐 퇴역이냐의 갈림길에서 퇴역을 선택했다.[5]

그러나 이것이 미합중국(북부)이나 그랜트 본인에게나 매우 다행이었다. 만일, 그랜트가 서부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군인으로써 그랜트의 업적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남북전쟁이 터지자 이때까지 퇴역 신청을 하지 않은 서부의 연방군 장교들 상당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말뚝이 박혔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능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은 동부로 차출되기도 했지만, 그랜트의 당시 경력을 생각하면 결국 전쟁기간 내내 술에 쩔어 돈이나 세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2.2 예비역 그랜트

이후 몇 년 동안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는데, 심지어 그 와중에 장인에게 노예와 땅을 빌려서 플랜테이션 노예노동 농장을 경영하려 한 적도 있었다. 그랜트의 아내인 줄리아 덴트는 켄터키 출신으로, 16살 때까지 노예를 몸종으로 부린 노예주의 딸이었다[6]. 그의 고향인 일리노이 역시 기본적으로는 자유주였지만, 노예노동 자체는 주 남부 일대에서 실제로 진행되고 있고 주민으로서 노예주(상전)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도 흉년으로 실패했고, 이때 농장을 개간하면서 벤 나무를 장작으로 팔아 겨우 연명했다고 한다. 이후 갈 데가 없어 결국 고향 마을에서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죽제품 공장에서 경리 일을 맡게 되었지만, 이 일조차 똑바로 못했다. 그래도 무사한게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신세를 망친 아들을 차마 내칠 수가 없어 그대로 일을 맡겼던 것.

뭔소리냐면 그랜트는 원래 보통 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학비가 들지 않는 사관학교로 갈 것을 강요했다. 더스티 아텐보로?[7] 문제는 그랜트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군인 체질이 아니라고 느꼈다는 것. 실제로 전투임무 수행을 제외하고는 일체의 군사 업무를 똑바로 수행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행군조차 엉망이어서, 행군을 위한 군악도 모를 정도였다. 그의 유명한 말 중에는 이런 말도 있다. "내게 있어서 군악이란 양키 두들양키 두들이 아닌 것밖에 없다." 게다가 성격까지 내성적이다보니 상관이랑 동기들한테 인기가 없어 외향적인 성격이 잘 적응하는 군대가 그랜트한테는 더욱 힘들었다.

당시 고향에선 별볼일없는 주정뱅이 사무원으로서, 다만 동네의 아마추어 정치평론가였던 친구와 함께 정치토론을 하는 등 머리가 꽤 좋은 것을 빼면 눈에 띄는 데가 하나도 없는 추레한 중년남이었다는 평을 들었다.

2.3 장군 그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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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일리노이 의용군에 지원, 군사 경력이 인정되어 일리노이 의용군 대령으로 임관된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연방군 준장이 되었다. 전술적 능력은 매우 뛰어났던 인물로, 이후 전쟁 중에 주로 서부에서 공훈을 쌓아 1864년 미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남군의 대표적인 명장로버트 E. 리와 격돌, 그의 항복을 받아내어 전쟁을 종결시켰다.

남북전쟁 중에 "Unconditional Surrender(무조건 항복)"이라는 별명이 생겼다.[8] 빅스버그 승리 후 미 육군에서 두 번째로 정규군 육군 중장이 되어[9] 1866년 7월에 미군 역사상 최초의 대장으로 진급, 육군 총사령관으로 재직했다.

2.4 대통령 그랜트

전쟁영웅으로서의 인기를 등에 업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얼굴을 봐서는 안 믿기지만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취임과 존 F. 케네디의 당선으로 기록이 깨질 때까지 역대 최연소 대통령(취임 당시 만 46세 311일)이었다. 버락 오바마보다도 어렸다!#

개인적으로 그는 자신이 대통령에 맞지 않다고 했다. 정치를 해본 적이 없었으니 그럴만도 하지만... 이 때 그의 이름을 이니셜화 한 U.S. 그랜트가 미국(U.S.)의 이니셜과 맞아떨어진 덕분에 이걸 이용한 광고전략을 펼쳤다고 한다. 전임 육군 사령관은 모두 소장 또는 명예중장이었으며, 이후로도 20세기가 될 때까지 정규군 중장은 남북전쟁 때의 영웅들 서너 명을 제외하면 거의 20여 년 동안 새로 탄생하지 않았다. 대장도 윌리엄 T. 셔먼이나 헨리 셰리든 같은 남북전쟁의 영웅들 뒤로 제1차 세계대전까지 계속 공석으로 남아있었다.

대통령 임기 중 본인은 청렴했으나 그의 주위 인물들이 타락한 게 문제였다. 정계에 인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들을 측근으로 기용했는데, 문제는 사람됨이 순진하여 측근들을 지나치게 믿었다는 데 있었다는 거다. 게다가 거의 모든 친척들이 청탁을 하거나 공직에 올랐다. 유일한 예외는 어머니였는데 그녀는 청탁이 들어오는 걸 천성적으로 싫어했다나. 통치를 그럭저럭 하긴 했지만 이렇게 스캔들이 끊이지 않으면서 영웅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추락했다. 그럼에도 1872년 선거에서는 오히려 1868년선거때 보다도 많은 득표율을 얻어 승리했다.[10]

주위 인물이 타락한 덕분에 대법원장을 지명하는데도 애를 먹었다. 1873년에 대법원장이었던 샐먼 포틀랜드 체이스(Salmon Portland Chase)가 사망하면서 대법원장 자리가 비었는데, 그랜트가 지명한 다섯 명의 후보 모두가 청문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지명철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랜트가 지명 → 알고보니 그 후보는 정치적으로 타락했던 인물 → 상원들이 지명찬성할 리가 없으므로 지명철회 이걸 다섯 번이나 반복하는 막장상황에 놓인 것. 고민 끝에 그랜트 대통령은 모리슨 레믹 웨이트(Morrison Remick Waite)라는 변호사를 지명한다. 웨이트가 지명을 받은 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다섯 번이나 지명철회를 하고 멘붕해 있던 그랜트가 "아 맞다. 내가 기차로 오하이오를 건너가고 있었을 적에 나를 소개했던 그 변호사 이름이 누구였더라?"하고 질문, 체크해 보니까 모리슨 웨이트였던 것. 그랜트는 "음, 그 사람 맘에 들었음. 그 사람 지명하지!" 웃긴 건 웨이트는 오하이오 주에 있는 2류 변호사 중 탑(...)이었던 그저 그런 변호사였다는 것. 어쨌든 이 지명은 통과되었고, 국민들은 아 이제 끝났네 하고 안도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출처

이에 대해서는 그랜트 개인의 인기가 아니라 공화당 후보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당시 미국인들이 남북전쟁의 원흉이라고 깔보던 미국 민주당[11] 및 그 지지기반인 남부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몰표를 받았다는 것이다.[12]근데 그랜트가 남부로 나올 수나 있는겁니까 애초에 남북전쟁에 남부연합으로 가담한 주들은 종전 후 전부 군정(미군정할 때 그 군정 맞다)을 받았기에 저항 자체가 쉽지 않았다. 이는 남부 선거인단을 반강제로 빼앗아 당선된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의 공약으로 해제된다.

그랜트에 대한 미국인들의 평가는 대체로 "훌륭한 장군이라고 정치도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사람은 좋았지..." 등이다. 사람이 좋은 걸 떠나서 정치도 잘 몰랐는지, 그는 두 차례 선거 때마다 매번 상대방 후보에게 표를 던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원복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 3부 대통령편(12권)에서 율리시스 그랜트에 대해 마지막에 평하기를, 위대한 지도자는 위대한 지휘관을 알아보지만, 전쟁터의 사자가 곧 정치판의 현자가 되기는 쉽지 않다고 나온다.

2.5 전직 대통령 그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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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에 빚 갚으려고 자서전 집필 중.

러더퍼드 헤이스 직후 남은 인기를 기반으로 3선에 도전해서 공화당 내에서 제임스 가필드와 격돌했다. 사업가, 퇴역 군인, 감리교도 들의 지지를 받아 선전했으나 대통령 시기에 보인 정치적 무능이 결국 발목을 잡아 경선에서 399대 306으로 패한 뒤 은퇴를 선언했다. 이런 면모를 보면 그랜트 자신이 정치적 매력이 없었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는 친구 퍼니낸드 워드의 중개회사 보증을 잘못 서서 파산했다(...). 전직 대통령한테 사기치는 부은 인간 예나 지금이나 보증은 위험 자신은 이름만 빌려준 일종의 피라미드 사기에 당했다고. 그래도 사람이 너무 좋은 나머지 자신의 이름만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들에게 돈을 갚기 위해 자신의 집을 포함한 전 재산을 처분하려고까지 했으나, 절친한 친구이자 전 대통령인 그랜트가 집마저 없는 빈털털이가 되지 않길 원했던 채권자의 거절로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여러모로 대인배.

이에 빚을 갚기 위해 작가이자 친구인 사무엘 클레멘츠를 고용해서 회고록을 집필. 생활비가 떨어져서 자신이 가진 모든 군 경력 및 대통령 시절의 기념품을 저당잡혀 돈을 빌려 생활하며 필사적으로 회고록을 썼다. 문제는 이때 후두암으로(그랜트는 대단한 끽연가였다.) 거의 치사량에 가까운 아편을 먹어가면서 고통을 참아가며 회고록을 구술했다.

문학적으로 남북전쟁 전반에 대해 다룬 꽤 괜찮은 회고록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남북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자의 회고록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잘 팔렸다. 결국 회고록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50만 달러나 벌어들여 빚을 갚고 유족들을 돈방석에 올려주었다고 한다. 본인이 사망한 후에. 실제로 그랜트는 초고 완성 4일전에 사망했다. 초고 수정과 출판 감독은 그랜트의 부인이 했고 최종적으로 마크 트웨인이 완성한다. 대통령으로써는 실패했지만 한때 전장의 사자였던 이 사람이 1885년 7월 23일에 숨이 끊어지는 순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대단히 단순한 단어였다. 여담으로 사망 당시 몸무게는 108킬로그램으로, 미국 역대 대통령 중 4번째로 뚱뚱했다.

"Water...(...)"

3 우직한 전략가 그랜트 - 남북전쟁 시기 그랜트의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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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날리던 리즈시절. 1864년 콜드 하버에서 찍은 사진이다. 정작 콜드 하버에선 리한테 깨졌는데?

앞서 언급한 개인적인 성향과는 정반대로 군인으로서는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랜트의 성향은 인내심과 뚝심이 매우 강하고 끈질겨서, 남군의 로버트 E. 리 장군과 싸운 다른 북군 장군들과는 달리 참패해도 겁을 먹거나 패닉에 빠져 후퇴하지 않고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며 버티고 또 버텼다.

지금까지 남군의 승리패턴은 북군이 남군을 두려워해서 위축되어 있으면(이전에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다가 큰 피해를 입는 것이 이유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 리나 잭슨 등이 이끄는 남군이 화려한 기동으로 북군을 몰아붙이거나 후방 기지를 공격해서 큰 피해를 입히고, 이에 북군의 장군들이 재편성을 이유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심지어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리 장군에게 이긴 조지 미드 장군조차 리 장군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몰라 예비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격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리는 만신창이가 된 북버지니아군을 간신히 구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랜트는 위축되지 않고 단호한 공격을 계속했으며, 그러다 참패를 당하는 경우에도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휘하의 한 사단장이 스팟실베이니아 전투에서 리의 후방 급습에 자신의 사단이 와해되자 그랜트 앞에서 이성을 잃고 후퇴를 종용했을 때 모든 참모들이 당황해서 파닥파닥(...)하고 있는 와중에도, 정작 그랜트는 시거 한대 물고 나무조각을 깎으며 무덤덤하게 버티라고 명령했을 정도로 뚝심이 좋았다. 그때 전장 근처에서는 산불이 났는데, 하필 그 불길 속에 수많은 부상병들이 갇혀 있었다. 당연히 태반이 타죽었고, 그들의 비명은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내린 명령은 공격을 계속하라였다.[13]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런 대담한 뚝심에도 불구하고 피를 보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이상한 기벽이 있어서 고기는 피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바싹 구워 먹었다. 그래서 그의 스테이크는 언제나 겉이 시커멓게 타 있었다고 한다. 웰던 사실 남북전쟁 참전 장군들 중에서 기벽 하나 없는 인간도 극히 드물지만, 이렇게 군 생활에 안 어울릴 것 같은 기벽을 가진 사람은 그랜트 하나 정도다. 무슨 병약 미소녀도 아니고(...) 또 1864년, 버지니아 출신의 한 병사가 진중에서 자기 말의 머리를 피나게 때리는 걸 보고 빡돌아서 그 병사의 머리채를 잡아채 목을 졸랐고 그를 6시간 동안 말뚝에 묶어 놓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다소 거친 양 웬리?

어쨌든 그랜트의 북군은 남군의 리 장군을 상대로 한 전역에서 종종 2, 3배에 달하는 피해를 더 입었으나 북부의 우수한 보급역량을 바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 피해를 회복했으며, 남군은 북군보다 피해는 적었지만 충분한 보충을 받지 못해 가면 갈수록 군 규모의 격차가 커졌다. 더구나 전력상 앞서는 북군이 단호하게 공세를 펴는 이상, 리나 잭슨이 북군을 농락했던 화려한 기동도 불가능해졌다. 개개의 전투에서는 다소 우위에 설 수도 있었지만, 이제 전역을 결정하는 것은 북군이 되었고 남군은 전장에서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 채 북군의 진격에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방어전을 수행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러니까 제아무리 신컨이라도 자원 많은 상대편이 인구수 꽉꽉 채워 어택땅 계속 들어오면 밀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전체적인 전력이나 보급에서 수십배나 앞서는 북군을 상대로 싸우는 남군에게는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대인 셈. 그랜트 이전에는 남군이 북군을 전장에서 몰아붙이고 북군의 후방으로 기동할 수 있었지만 그랜트가 사령관이 되면서 반대로 북군이 전장에서 남군에 대해 지속적인 공세를 취하며 전선에 묶인 남군의 후방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랜트 이전, 스톤월 잭슨의 계곡 전역. 파란색이 북군, 빨간색이 남군이다. 이 전역에서 잭슨의 남군은 북군 사이를 휘젓고 돌아다니면서 큰 피해를 입힌 후 무사히 빠져나왔다. 북군이 기민하게 움직였으면 잭슨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섬멸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겠지만, 북군은 가만히 있다가 잭슨에게 각개격파당하거나 느릿느릿 잭슨의 뒤만 쫓아다니기만 했을 뿐 변변한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랜트의 윌더니스 전역(오버랜드 전역이라고도 한다). 마찬가지로 파란색이 북군, 빨간색이 남군이다. 리치먼드를 향해 남군의 측면을 노리며 맹렬히 진군하는 그랜트의 북군과 이를 필사적으로 뒤쫓으며 저지하는 남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셰리든은 기병대를 이끌고 리치먼드를 강습하며 남군의 보급창을 파괴하는 등의 피해를 입혔고, 소수의 병력으로 이를 저지하던 스튜어트는 옐로 터번 전투에서 전사하는 등 남군은 끊임없이 수세에 몰렸다. 결국 이 전역은 피터스버그에서 남군이 북군을 방어하며 고착화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고, 이후 리의 북버지니아군은 북군의 공세 속에 이곳에서 완전히 발이 묶였다.

상대가 남군의 잭슨 장군과 더불어 남북전쟁 최강의 전술가이며 야전축성의 달인인 리 장군이어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기는 하지만, 참신하고 세련된 우회기동으로 빅스버그를 단박에 함락시키는 등 야전지휘관으로써 전술능력도 출중했다.

그랜트가 정식 사령관인 미드를 직접 제어했던 포토맥군은 일견 무모해보일 정도로 리 장군의 남군에게 계속 싸움을 걸었고 종종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북군의 최고의 강점인 무한한 보급역량을 잘 살리면서 남군의 장점인 우수한 장교단을 봉쇄하고 약점인 빈약한 보급을 압박한 것이 효과적인 수단임은 틀림없었다. 이렇게 북버지니아군 주력이 붙들려서 소모되어 가는 동안 서부에서 윌리엄 테쿰세 셔먼테네시군이 남부 중심부를 휩쓸어버렸다. 서부 전역의 남군 사령관 조지프 존스턴은 증원을 요청했지만, 남부에는 더이상 그럴 자원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 일을 가리켜 링컨은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그랜트가 리라는 곰에게 손을 물려 있는 동안, 셔먼은 그 곰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버렸군."

이런 무한 소모전으로 남군의 주력인 리를 붙잡고 소모시키는 동안 앞서 언급한 셔먼의 군단이 바다로의 행진을 성공시키며 남군의 본진을 털어버리고, 이에 급히 퇴각하던 리의 뒤통수를 그랜트가 사정없이 후려쳐 마침내 남북전쟁의 끝을 맺는다.

그랜트는 본인이 군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던 탓인지 반전주의 경향 역시 강했으며 국가가 위기에 처하지 않는 한 전쟁을 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평생 고수했다. 그래서인지 자서전에서는 남북전쟁 이전에 일어났던 미국-멕시코 전쟁을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상대로 벌인 가장 부조리한 전쟁"이라며 신랄하게 깠다. 여기에 '남북전쟁은 사실 이 전쟁(미국-멕시코 전쟁)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미국의 전횡에 대한 일종의 천벌'이라고 했다(그런데 그도 결국 전쟁이 터지자 국가를 위해 전쟁에 참여했고, 꽤 용감하게 잘 싸운 장교로 좋은 평판을 얻었다. 몰라 뭐야 이거 무서워). 남북전쟁에 자진해서 참전한 것은 연방이 무너지는 것을 국가적 위기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어째 보면 볼수록 양 웬리 닮았다. 양 웬리가 그랜트를 닮은 거겠지

4 그 외 여담과 일화

퇴임 직후, 1877년부터 2년 동안 세계일주를 했다. 영국윈저 궁과 독일 제2제국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 바티칸레오 8세 러시아, 이집트, 예루살렘 성지, 타이, 버마, 청나라, 일본 등을 방문했다. 당시 방문한 베네치아를 두고 "배수 시설이 안되는 도시"라고 했다(...).

세계일주 당시 각국 군주로부터 사열을 받게 될 때마다 "난 군대라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며 대놓고 사열을 거부하기도 했다고. 그가 큰 불만없이 사열하는 것을 받아들인 군대는 일본군 정도. 딴 열병식은 다 안 보려고 했으면서 일본군 열병식은 대체 왜 구경했는지 모를 일인데, 아마 아시아 국가라 호기심이 동했던 모양이다. 일본을 방문했을 때 류큐를 병합하려는 일본의 팽창 정책과 그에 반대한 중국의 입장 차이에 대해 류큐의 대부분을 일본이 차지하는 대신, 일부 남쪽 도서와 타이완을 중국이 가지는 방안을 제시하면서 전직 대통령으로서 조율해보려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센가쿠 열도 분쟁 떡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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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에는 부인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였다. 우에노 공원에서 환영회가 열렸고 자신은 우에노에 삼나무를 심었고, 그의 부인은 목련을 심었는데 현재도 남아있다.

총각 시절 영부인이 되는 줄리아와 연애할 무렵에 마차를 타고 가다가 비가 마구 쏟아지는 상황에서 개울을 건너야 했는데, 줄리아는 위험할까봐 두 손으로 그랜트의 팔을 붙들었다. 다리를 건너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랜트는 대뜸 이런 말로 프로포즈를 했다.

"바라건대, 평생 내게 매달리면 어떻습니까?(I wonder if you would cling to me all my life?)"

손발이 오그리토그리

그러나 부부의 사이는 대단히 좋았다. 자식들과도 마찬가지. 특히 그랜트의 사진은 거의 다 죽을 상우울한 표정인데 오로지 가족사진에서만 활짝 웃고 있다. 워낙 심적으로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다보니 가족에게 굉장히 따뜻하였기에 가장으로서는 굉장히 성공했다.

퇴임한 후 어떤 연회에 초청되어 길을 가고 있었는데 그날 비가 왔다.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행인이 우산 없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우산을 씌워 주었다. 마침 그 행인도 그랜트가 초대받은 연회에 가던 사람이라 즐겁게 대화를 하며 연회장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같이 가는 사람이 그랜트인 것을 몰랐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나는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을 본 적이 없는데 오늘 그 연회에 가는 것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요.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긴데 난 그랜트 장군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하오." 그러자 그랜트는 화를 내기는 커녕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웃어넘겼다. 가면 넌 가만두지 않겠다

앞서 말했듯이 대단한 끽연가였고 술을 좋아해서(그래도 작전 때는 마시지 않았다) 흔히 술주정뱅이로 찍히곤 했다. 작전이 없었던 때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말 그대로 깡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남부연합이 승리하는 대체역사물에서는 주로 술주정뱅이로 일생을 마치는 역으로 나온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평상시에는 늘 꾀죄죄한 행색으로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잘 씻지도 않고 대충 기른 지저분한 수염에다가 술에 완전히 절은 추레한 꼴을 많이 보였다고(...). 복장관리도 안하고 청결도 가뿐하게 무시해서 술에 취한채 더러운 군복과 진흙투성이인 장화를 신고 그대로 쓰러져 자기도 했다. 작전 날이라고 다를 것은 없어서 술에 취하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똑같았다고 한다. 남북전쟁 당시의 라이벌이었던 명장 로버트 E. 리와도 전쟁 전에 만난 적이 있었으나 로버트 E. 리는 그랜트를 그냥 술주정뱅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했던 것 같다. 반면에 그랜트는 로버트 E. 리와 만났던 날을 잊지 못할 순간이라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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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민간인의 리 장군과의 팬미팅 일람

훗날에 로버트 E. 리와 다시 만나 그로부터 항복을 받는 순간을 그려놓은 기록화도 여럿 있는데, 하나같이 말끔히 차려입은 리와는 대조적으로 여전히 꾀죄하고 추레한 행색을 하고 있어서 그림만 보고 있으면 어느 쪽이 항복을 하고 있는 쪽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스포트라이트도 리가 받고 있잖아. 원근법을 씹어먹는다!

한국사와도 관계가 있는 인물인데 한국과 미국의 최초의 군사접전인 신미양요가 바로 이 사람 재임기에 일어났다(1871년).

자서전 집필을 통해 인연을 가진 마크 트웨인과는 다른 일화가 있다. 마크 트웨인이 무명 작가인 시기에 상원의원인 친구의 소개로 대통령직에 갓 취임한 상태의 그랜트와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마크 트웨인은 상대가 대통령인데다 그랜트의 무뚝뚝한 대응에 지나치게 긴장해서 "어...참으로 당황스럽네요."하며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다.

이후 1879년 그랜트가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것을 환영하는 시카고의 행사장에서 다시 마크 트웨인과 그랜트가 만나게 되었는데, 인사 대신 그랜트가 한 말은 "저는 당황스럽지가 않는데, 지금 당신은 어떤가요?"였다. 마크 트웨인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대로 말해 놀려먹은 것.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그랜트가 상당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친구들 중에 이로쿼이 원주민인 엘리 파커가 있다. 남북전쟁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참전이 거부되었지만 엘리 파커는 그랜트 덕에 남북전쟁에 참가할 수 있었으며, 그랜트의 대통령 재임기간에 '인디언'국 국장으로 재임하며 원주민들의 권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M3 중형전차의 개량형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참고로 개량형 이전의 M3전차의 명칭은 . 덧붙혀 이 이름들은 모두 영국군이 부여한 명칭이다.

영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에서 그랜트 대통령이 등장하며 미친 과학자에게 미합중국의 안전을 위협받는다. 어째서인지 부하요원에게 툭하면 위장당한다

여담이지만 비디오 게임 폴아웃: 뉴 베가스최종보스율리시스의 이름은 이 분에게서 따온 거다. 이 게임의 배경이 핵전쟁에서부터의 200년 후인데도 남북전쟁과 율리시스 그랜트를 아는 걸 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이전의 미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참고로 폴아웃: 뉴 베가스의 율리시스가 자신의 이름을 율리시스라 지은 이유는 그리스 고전의 오디세우스[14]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까지도 염두에 둔 것. 핵전쟁으로 문명이 사라지고 200년이나 지났는데 기원전의 고전과 19세기의 장군, 20세기의 문학 작품을 기억하는 걸 보면 상당한 지식이다.

죽은 자의 제국에서는 전직 미국 대통령으로 등장. 남북전쟁 때 미국에서 발전한 시병(屍兵) 기술을 각국에 판매하려는 목적 겸 '빅터의 수기'를 손에 넣기 위해 아달리 릴리스를 비서로 대동하고 해외를 순방한다. 애니메이션판에서는 시체 폭탄에 의해 폭사한다.

  1. 사실 이건 당연한 것이 군인이면 하급자가 상관에 대하여 반인륜 범죄나 정상적인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내린 명령같은 게 아닌 이상 명령의 부당성을 판단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전투 결과 승리 아니면 패배, 사상자 얼마 이런 식의 전투 결과에 대한 책임만 지면 된다. 반면 대통령이면 이거 저거 설득하고 조율하고 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통치의 용이함을 위해 친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쉬운데 그들이 대통령을 등에 업고 온갖 부패를 일삼는데다 외부 목소리가 반영이 안 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랜트는 독선적인 성격이라 충고를 듣을 생각도 안하니 이게 더 심했다. 이 고질적인 친목질은 현대까지도 이어져 미국 정치의 걸림돌로 자리잡고 있다.
  2. 미국에서 육·해·공군 사관학교에 입학하려면 출신 지역 연방 상원의원의 추천서가 필요하다.
  3. 하지만 이걸 고치려면 굉장히 번거로웠기 때문에 그냥 잘못 쓰인 이름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원래 이름도 하이럼 율리시스 그랜트인데 HUG라는 이니셜이 너무 계집애같다고 율리시스 하이럼으로 바꾼 것이 다시 율리시스 하이럼 → 율리시스 심슨으로 잘못 쓰인 것이라는 설이다.
  4. 게다가 당시 서부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이라서 돈을 가져와봤자 물건이 없어서 못 샀을 정도로 황량했다. 개발이 잘된 도시에서 잘먹고 잘살던 두 남녀에게는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이를 잘 알기에 자국과 유럽의 하층민들에게 일부러 사실을 왜곡하여 서부만 가면 잘 살수 있다고 홍보를 해댔다. 물론 이거 믿고 온 미국인과 유럽인들은 그야말로 개고생.
  5. 당시 미국은 상비군 규모가 작고 처우 역시 매우 열악해서, 유능하건 무능하건 장교 거의 대부분이 초급장교 근무만 마치고 퇴역했다. 그런 이유로 남북전쟁 당시 남북군을 통틀어서 장군 중 상당수가 중위 또는 대위, 아무리 높아도 소령 계급으로 퇴역한 웨스트포인트 출신들이었다. 남은 사람들도 진급이 어려워서, 리 장군만 해도 중령 진급 후 대령이 될 때까지 얼마나 남았나 직접 세어 보니 20년 이상 더 걸린다는 결론에 진지하게 퇴역을 고민했다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리는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대령이 되었다. 특히 중간에 2년 동안 퇴역해서 농사를 지었는데도 진급을 했으니 운이 굉장히 좋은 축이었다. 장교들이 이런 판국이니 하사관과 병사의 처우는 더 심했다.
  6. 그러나 켄터키의 노예주들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경향이 컸던 탓에, 처가인 덴트 가문은 남북전쟁에서 북부편을 들어 연방군에 가담했다
  7. 당시 미국의 대학교 등록금은 굉장히 비싸 돈이 많이 들었다.
  8. 남군의 무조건 항복 말고는 어떤 협상도 받지 않았기 때문.
  9. 첫번째는 당연히 조지 워싱턴.
  10. 공교롭게도 이 때 상대 후보였던(자유공화당 소속이었다.) 호러스 그릴리는 선거인단 투표 직전 사망한다. 물론 그 전에 승부는 난 상태였지만.
  11. 1880년대까지 민주당은 대선에서 이기겠다는 걸 꿈도 꿀 수 없었다.
  12. 사실 1872년 대선에 출마한 호리스 그릴리는 노예제의 폐지를 적극적으로 주창하고 (당시 기준으로) 개혁주의적인 논지를 전개해 북부인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던 명망높은 언론인이었고 동시에 공화당 창립멤버에기도 했다. 그러나 1864년 대선에서 링컨의 재선에 반대한일이나 1867년에 남부연합의 대통령을 지냈던 데이비드를 풀어주자는 주장으로 평판을 많이 갉아먹었는데 여하튼 그랜트 행정부가 난맥상과 부정부패로 얼록지면서 이에 반발하여 따로 자유공화당을 창당했지만 이 앞의 두 행보로 인해서 중상모략을 당하게 되고 결국 처철하게 낙선하게 된 것.
  13. 다만 마음씨 좋은 그랜트 답게, 후방이 무너져도 의연하던 그가 병사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는 펑펑 울었다고 한다. 울보 장군님
  14. 영어로는 Ulysses라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