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밴 뷰런

미국 대통령
7대8대9대
앤드루 잭슨마틴 밴 뷰런윌리엄 해리슨
역대 미국 부통령
7대8대9대
존 C.컬훈마틴 밴 뷰런리처드 멘터존스
역대 뉴욕 주지사
250px
10대11대12대
나다니엘 핏쳐마틴 밴 뷰런에노스 T. 스루프
공식 초상화
풀네임Martin Van Buren
출신정당민주당
생몰년1782년 12월 5일 ~ 1862년 7월 24일(79년 7개월 19일)
재임기간1837년 3월 4일 ~ 1841년 3월 4일
서명
168cm

(대통령 재임 : 1837-1841, 부통령 재임 : 1833-1837)

1 이름에 대하여

성은 뷰런이 아닌 '밴 뷰런'이며,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네덜란드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네덜란드어)를 모어로 쓴 대통령. 성에서 은근히 귀족풍의 분위기가 풍기지만, 사실 이 성은 미국으로 이주한 첫 조상이 자기 출신지에서 따와 정한 성으로 귀족 핏줄하고는 전혀 연관이 없다.[1]

2 생애

뉴욕 주의 킨더후크에서 출생. 그의 아버지 에이브러햄 밴 뷰런은 시작은 선술집 주인이었으나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고 뒷날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뉴욕 주 상원의원이 되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출신 성분 때문에 잭슨에 못잖게 "보통 사람" 출신이었다는 것이 두고두고 그에게 부정적으로 남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말솜씨가 좋아 킨더후크의 유명한 변호사 밑에서 법률 공부를 받기도 한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독학으로 변호사가 된 인물. 그 후 정치에 진출하여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그는 1815년 뉴욕 검찰 총장이 된 것을 시작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상류층의 예의범절을 완전하게 익히게 되는데, 그런 과도하게 드러나는 "배운 예의범절"이 데이비 크로켓 등에게는 위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1824년 앤드루 잭슨존 퀸시 애덤스에게 낙선 아닌 낙선을 당하게 되자 강력한 선거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자신을 정상으로 한 파벌을 만들었고 이 것을 일반적으로 현대 정치의 시작이라고 보게 된다. 그리하여 1828년 잭슨이 당선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되어 국무장관에 오르게 되었고 1832년에는 부통령 존 C. 칼훈이 사직하자[2] 잭슨은 그를 부통령으로 지명하였다.

그리고 4년 뒤에는 잭슨의 인기를 등에 업고 마침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부통령을 역임하고 대통령이 된 경우는 일반적으로 이 경우를 최초라고 본다. (존 애덤스토마스 제퍼슨 같은 경우는 당시 선거 제도가 차점자, 즉 2등을 부통령에 앉히는 식이었기 때문.) 직업 정치인으로서 '머신Machine'을 만들었다. 이게 뭐냐면, 현대의 계파이다. 친박, 친이, 친노라고 하는 계파정치가 바로 영어로 머신 폴리틱스(Machine Politics)이다. 물론 그 만큼 악평도 높은 것.

그러나 대통령이 되자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 1837년의 공황이 터지고 만 것. 이 공황의 규모는 1930년대 세계대공황 만을 기억하는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공황 발생 전에는 사상 최악의 공황으로 꼽힐 정도였다. 이로 인해 그의 인기는 급락하고 말았다. 근데 사실 이건 잭슨 때 연방은행 없에겠다고 뺀 돈을 사은행들한테 넣어놨더니 돈놀이(...)나 마구 하다가 거품 꺼졌는데 영국 자본까지 함께 빠져나가면서 생긴 문제뭔가 요새랑 겹친다!?였는지라, 본인의 전적인 책임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헨리 클레이가 극구 반대하며 협력을 요청할 때도 멍때리고 돕지 않았던게 밴 뷰런이었던 지라, 본인의 책임이 없다고 보기도 어렵고... 여하간 취임 초부터 악재의 연속이었다.

또한 타 국가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텍사스 공화국의 연방 가입을 거부하는 등, 화끈했던 전임자 잭슨에 비해 우유부단하게 비춰졌고 이를 두고 휘그당에서는 그의 이름을 빗대 Martin Van Ruin(마틴은 폐허를 만들었다!)라는 식으로 공세적인 선거를 펼쳤다. 캐롤라인호 사건을 윈필드 스콧 장군을 파견해 미영간의 분쟁을 차단한 것, 제2차 세미놀 전쟁(인디언 전쟁의 일부)을 승전으로 이끌고 아메리카 원주민 이주 정책을 유지하는 등 대외적으로는 업적을 세웠지만 크게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다.

이미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도 잭슨 밑의 많은 이들도 등을 돌린 상태였고, 결국 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서 후보분열이 일어나 런닝메이트도 없을 정도였다. 1840년 결국 재선에 실패, 윌리엄 해리슨에게 패하고 백악관을 나오게 되었다. 사실 선거인단에 비해 선거 격차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고. 127만표 대 112만표. 6.1% 격차였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대통령에 도전했고 기어이 1848년에는 독자 출마를 감행하였다. 그가 새로 만든 자유토지당은 서부개척지를 노예제로 부리지 말고 해방 노예들이 토지를 일구게 하는게 경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낫다는 개념있는 주장을 했다. 자유토지당은 비록 선거에서는 실패했지만 하원과 상원에서 4년간 의미있는 제3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밴 뷰런의 선전 (10% 득표)은 민주당의 표를 일부 갉아먹어 재커리 테일러의 당선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자유토지당은 1852년 미국 공화당에 합류하지만 마틴 밴 뷰런은 복당하여 죽을 때까지 민주당원으로 남았다.) 은퇴 후에는 조용히 살다 1862년 세상을 떠났다. 강력한 노예제 반대입장으로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어느정도 역할을 한 셈.

3 여담

그의 낙선 이후 20여년간 누구도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는 이 것을 모두 지켜보고, 링컨의 당선까지를 보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제1언어가 영어가 아니었다. 그의 1언어는 네덜란드어. 사실 본인이 네덜란드 계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배출한 걸로 유명한 루스벨트가문도 네덜란드계 가문.

또한 독립전쟁 이후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퇴임 후 13년 만인 1853년 유럽을 방문해, 유럽을 방문한 최초의 전직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그의 아내는 그의 먼 친척이자 어린 시절 짝사랑이었다고 한다. 승리의 밴 뷰런 사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는 소꿉친구와 결혼한 케이스가 제법 있다. 밴 뷰런, 시어도어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이 그 예.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인해 얻은 별명은 찬양자들 사이에서는 작은 마술사(The Little Magician), 정적들 사이에서는 킨더후크의 붉은 여우(The Red Fox of Kinderhook)라고 불렸다고 한다. 유려함과 우유부단함을 동시에 갖고 있었던 전형적인 정치인이라 부를만 했던 것. 존 퀸시 애덤스는 제임스 메디슨에 표리부동을 겸비한 사람이라며 비판했다(...) 전체 미국 대통령 중에서는 선호도가 평균 언저리(43명 중 24위)에 든다.

대통령이 되기 전 한 상원의원이 밴 뷰런에게 "해는 동쪽에서 뜬다고 하는데 자네는 그걸 믿나?"라고 묻자 밴 뷰런은 "아침에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것이 상식인 걸 알고 있지만 난 동이 틀 때까지 일어나지 않아서 뭐라고 말할 수 없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밴 뷰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 대통령편에서 죽기 직전에 노예제에 대한 대립으로 남북전쟁이 터질거라는걸 예견했다고 나와있는데, 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밴 뷰런이 사망한건 1862년 7월이고 남북전쟁이 발발한건 그보다 한참 전인 1861년 4월이다(...). 물론 정치적 감각을 보아 그정도도 눈치 못챌 인물은 아닌것 같다만...
  1. 사실 독일어의 von과 다르게 네덜란드어의 전치사 van은 귀족 성씨뿐만이 아니라 평민의 출신지를 가리키기 위해서도 많이 사용되었으므로, 성씨만 가지고 귀족 출신이라고 판정할 수가 없는 경우가 더 많다.
  2. 그와 절친했던 헨리 클레이 때문이었다 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