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퀸시 애덤스

역대 미국 대통령
5대6대7대
제임스 먼로존 퀸시 애덤스앤드루 잭슨
공식 초상화
풀네임John Quincy Adams
출신정당민주공화당
생몰년1767년 7월 11일 ~ 1848년 2월 23일(80년 5개월 12일)
재임기간1825년 3월 4일 ~ 1829년 3월 4일
서명
171cm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실제 사진이 남아 있는 최초의 대통령이다. 위의 사진은 1843년에 찍은 사진. 딱 봐도 꼬장꼬장하게 생겼다.

미국의 외교관, 정치가이자 제6대 대통령.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장남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의 부자(父子) 대통령이 되었다. 부자 대통령 기록을 다음으로 세운 건 20세기 후반의 조지 부시 부자. 그리고, 지미 카터 처럼 퇴임 후가 더 훌륭한 대통령.[1]

1 젊은 시절

1818년 당시 모습

당대 미국의 잘 나가는 정치인이자 변호사, 외교관으로 이름을 날렸던 존 애덤스의 아들답게 어린 시절부터 박학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소년 시절부터 외교 업무로 유럽으로 자주 돌아다녔던 아버지를 따라다녔는데, 이때의 경험이 국제적 안목과 외국어 습득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매사추세츠에서 변호사로 일했으며 1791년부터는 네덜란드, 프로이센 등을 전전하며 외교사절로 일했다. 이 후 돌아와서 여러 공직을 거치다가 제임스 매디슨 행정부에서 러시아 대사와 영국 대사를 역임하며 미영전쟁 종전 협상인 겐트 조약에도 참석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봐도 정말 대단한 외교 경력인데, 그가 구사할 줄 알았던 외국어는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스웨덴어. 거기에 영어까지 합쳐 모두 7개 국어를 구사했던 엄청난 굇수였다. 후덜덜. 조선의 모 정승이 떠오르는 부분.

제임스 먼로 행정부에서는 국무장관이 되었는데, 이 때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와 북서 태평양 연안의 영토를 매입하는 데 직접 교섭을 맡았고 이 일을 성사시켰다. 그의 매입으로 미국의 영토는 태평양에서 대서양을 찍게 되었다. 사실 이 때 조약 결과 오리건 지역은 영국과 공동 점유 지역이 되었다. 완전히 미국 땅이 된 것은 1846년. 또한 '먼로 독트린'을 구상하고 작성한 것도 바로 애덤스의 작품이다. 이렇듯 먼로 행정부 8년 동안 국무장관을 역임하였는데 그 업적이 대단해서 오늘날에도 역대 '국무장관'으로서는 최고의 장관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뛰어난 언변과 외교술 때문에 붙은 별명이 바로 '노련한 능변가(Old Man Eloquent)' 네이버 지식인에 떠도는 미국 대통령들의 별명 중에 애덤스의 이 별명을 '설변가 노인'이라고 번역한 것이 있는데 이건 오역. 여기서 Old man은 '노인'의 의미가 아니라 '숙련된 사람' 정도의 의미다.

2 대통령 선거

350px-ElectoralCollege1824.svg.png
문제의 그 선거 결과. 느낌상으로도 잭슨이 우세해 보인다.

이렇듯 가문도 가문이고 능력 또한 충분히 검증된 인물인만큼 1824년 선거에서 먼로의 뒤를 이을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지만 미영전쟁 때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영국군을 섬멸하여 인기 있는 전쟁영웅으로 떠오른 앤드루 잭슨도 대선 후보로 나섰다. 이 무렵에는 연방파가 정계에서 소멸되어서 모든 후보들이 '민주공화당(Republican)'이었던 "Era of Good Feeling"의 상황이었다. 일당독재. 윌리엄 크로퍼드 재무부장관을 대통령후보, 앨버트 갤러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당원 위주의 폐쇄적인 전당대회에 불복하여 다수의 후보가 민주공화당의 이름으로 난립하게 된다.

애덤스와 잭슨을 비롯해서 헨리 클레이나 윌리엄 크로퍼드 등이 후보로 떠올라 각기 선거운동을 했다. 인기는 전쟁영웅인 잭슨이 나머지 후보들을 앞서서 득표수에서는 41.3%(15만1천표)로 1위를 차지했으며, 선거인단에서도 반란표가 등장하면서 선거인단 역시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2등인 애덤스는 30.9%(11만3천표)를 득표했다. 그러나 이 네 후보 모두 선거인단 투표에서 과반수를 득표하지 못해서 수정헌법 12조에 의해 의회에 대통령 결정이 들어가게 되는 최초의 상황이 발생했다. 하원의원으로 다시 선거인단 선거를 하게 된것.

대략 애덤스 84 : 잭슨 99 : 크라우포드 41(득표는 11.3%) : 클레이 37(득표는 13.0%)이었던 상황. 그런데 이 때 애덤스와 헨리 클레이가 서로 협상을 하는 바람에 클레이를 지지하던 서부의 네 주가 애덤스 지지로 돌아섰고, 이로서 반란표가 차단되었다. 결국 제6대 대통령 자리는 애덤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2등과 4등(득표율 3등)의 연대가 1등을 이겼다. 뭐 결과적으로는 30.9 + 13.0 = 43.9% > 41.3%이지만.. 애덤스의 이기록은 여하간 역대 최소득표율이 된다. 그 다음이 에이브러햄 링컨의 39% 정도.

그런데 상당히 재미있는 사실은 '선거인단 투표에서 어느 후보도 과반수 득표를 얻지 못하면 대통령은 의회가 결정한다'는 수정헌법 12조가 채택될 때 애덤스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었다. 자신이 반대한 법안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정말 아이러니. 어쨌든 클레이와의 교섭으로 대통령이 된 애덤스는 취임하자마자 45세의 젊은 클레이를 국무장관에 임명했는데, 잭슨은 클레이는 이스카리옷 유다 같은 새퀴라며 둘을 두고두고 까댔다. 젊었던 헨리 클레이는 이후로도 상원의원 등을 지내며 1850년대까지 미국 현대사에서 자주 등장한다. 항목 참조.

어디까지나 여담이지만, 네 명의 대선후보중 유일하게 존 퀸시 애덤스만 키가 171cm으로 루저였다. 크로우포드는 191cm, 잭슨과 클레이는 185cm이었다. 루저의 난.

한편 부통령 선거는 프랑스 공사였던 갤러틴이 마틴 밴 뷰런의 설득으로 귀국 후 출마하지 않으면서, 민주공화당 내 후보 난립 속에 존 C. 컬훈이 260명 중 182명을 확보하면서 순조롭게 당선되었다. 잭슨과 애덤스는 모두 부통령 상대로 컬훈을 지명한 상태였으며 결국 컬훈이 애덤스의 부통령이 된다. 재밋는건, 다음 선거에서는 컬훈이 잭슨과 손을 잡았고, 다시 잭슨과 갈라지면서 부통령직을 사임했다는 것. 부통령 항목 참조.

3 대통령으로서

먼로 재임기 중반부터 나타난 경기침체가 조금씩 호전되고 나라가 안정된 상황에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재임기에는 이렇다할 큰 사건도 없었고 그래서인지 두드러진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연방파가 정계에서 소멸된 상황이었지만 애덤스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전임자들과 달리 강력한 연방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매디슨이나 먼로는 각 주의 도로나 운하 건설에 연방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각 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들과 달리 연방정부가 중심이 되어 도로나 운하 건설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박식한 지도자답게 교육과 천문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워싱턴에 국립대학과 천문관측소를 설립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은행의 허가를 계속 유지하는 데도 찬성했고, 뉴잉글랜드 지역, 특히 뉴욕 주에 집중된 국내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제조상품에 대해 높은 관세를 매겼지만 남부와 서부 지역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바람에 이는 남부에서 "증오스런 관세법"이라며 까였다.

주특기인 외교 쪽에서도 국무장관 때와는 달리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1826년 파나마 국제회의에서 미국 대표가 참석하지 못했는데, 이 회의에 미국 대표를 참석시키자는 것은 남아메리카의 시몬 볼리바르가 주창한 것으로 서반구 국가들간의 협력을 증진시키자는 의도였다. 사실은 당시 남부 주 출신 의원들이 중심이었던 연방의회는 미국의 노예제가 국제회의에서 까일까봐 쫄아서 이 회의에 참석하는 대표단의 인준을 늦게 가결해 버렸다. (여하간 미국은 외교는 정부보다 의회의 권한이 훨씬 더 크다) 부랴부랴 대표단은 파나마로 갔지만 도착했을 때 회의는 끝난 상태였다.

사실은 애덤스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고집불통에 괴팍한 성격이었고 융통성도 없었던 편이라서 전임자인 먼로와 달리 모든 의원들을 통합하여 설득과 타협, 대화하는 능력이 부족한 편이었고, 애덤스의 정치적 기반 자체가 뉴잉글랜드나 뉴욕 지방에 국한되어 있어서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려 해도 많은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1824년의 선거만 봐도 애덤스가 왜 지지를 받지 못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4 퇴임과 그 이후

1846년 촬영

임기 말년인 1828년의 대선에서 애덤스는 재선을 노렸고, 경쟁자로는 1824년 선거에서 그에게 패배 아닌 패배를 한 앤드루 잭슨이 리벤지설욕을 다짐하며 출마했다. 이 무렵 민주공화당도 잭슨을 지지하는 일파와 애덤스를 지지하는 파벌로 분열되었는데 잭슨을 지지하는 파벌("민주공화당 잔당")이 민주당이 되었고, 애덤스를 지지하는 파벌인 "국민공화당"이 바로 '휘그당'의 전신이 되었다. 휘그당이 정식 출범한 것은 1834년이지만 애덤스를 지지하고 잭슨에게 반대했던 사람들이 모여진 정당이므로 이들이 휘그당의 전신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휘그당은 오늘날 공화당의 전신이다.

잭슨은 자신의 인기를 십분 활용하는 것은 물론, 애덤스를 "귀족주의자, 부유층만의 대통령"이란 식으로 비난했는데 애덤스는 정작 이 비난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3배로 늘어난 투표자들 중 서민의 몰표[2]로 잭슨에게 대선에서 참패.

퇴임 후에는 매사추세츠주의 농장으로 은거하여 지내다가 퇴임 다음해인 1830년에 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제2의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원로 정치인으로서 반노예제도의 선봉장이 되어 노예제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 해에는 하원에서 반노예제의 청원이 토론이든 행동이든 어떤 형태로든 거론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억지법안[3]이 채택되자 이를 폐지하기 위해 수 년간 투쟁했다. 헌법을 거론하며 이것이 위헌이라는 투쟁을 벌인 끝에 1844년에 이를 폐지하는 데 성공했다. 대통령보다 더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오오오.

천문관측소 설립을 대통령 시절에 이루지는 못했지만 1843년 신시내티 천문관측소가 설립되자 이 자리에 참석하여 그 기쁨을 누렸다고 한다. 이는 거의 20년만에 이룰 수 있었던 성과였다. 그리고 쿠바에서 도망쳐 미국 해안에 잠입한 후 스페인 함선에서 반란을 일으킨 흑인들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 연방 대법원에서 이들을 변호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일명 아미스타드 호 사건으로 이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메가폰을 쥔 "아미스타드"로 극화된 바 있다.

이렇듯 퇴임 후에는 나라의 원로로 정치 활동을 하면서 노예제 폐지를 위해 노구를 이끌고 열심히 일하다가 1848년 제임스 포크 행정부가 멕시코 전쟁을 일으키려 할 때 이를 고함까지 질러가면서 반대하던 도중 갑자기 뇌졸중을 일으켜 쓰러지고 말았고 그 이틀 후인 1848년 2월 23일에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운명하기 직전에 "이승도 끝이구만. 만족한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총평하면 대통령으로서의 기량은 부족했다 할 수 있고 그다지 이렇다할 업적은 남기지 못했지만 정치인으로서만 본다면 분명 우수한 정치인이었음에는 틀림없다.

5 여러 이야기거리

아버지가 연방주의자인 존 애덤스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토머스 제퍼슨의 반연방주의자들과 한 편이 되었다. 그래서 애덤스도 없고, 해밀턴도 없고 수장들이 은퇴하거나 현피 결투하다 죽어서 사라진 연방주의자들은 말 그대로 망해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어차피 연방정부의 권한 강화가 주요 내용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어차피 세력 약화나 형태 변화는 필연적이기는 했다. 초기 연방주의자들이 집권해서 연방정부의 권한을 상당히 강화해 놓았고 연방정부의 우위 자체는 거의 상식이 되어갔기 때문에 이후에는 그거 유지하는 것 외에는 연방주의라는 형태로서는 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이후 연방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는 것은 남북전쟁 시기 정도?

전임 대통령들도 노예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전임자들이 그다지 적극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던 데 반해 애덤스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한 사람이었다. "이건 나쁜 것", "노예제는 미합중국의 더러운 오점"이라는 표현까지 썼을 정도였으며 1843년 '개그 룰' 폐지 운동 때는 "만약 노예제가 피와 전쟁을 통해야만 없어질 수 있다면 전쟁이라도 해야 한다!"고까지 발언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외모에서 보이듯이 상당히 괴팍한 성격의 인물이었는데 영부인과 결혼할 때의 일화를 보면 영부인 루이자와 혼인서약을 한 후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그러나 나는 내 조국을 더 사랑하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의 영부인 루이자는 미국 외교관과 영국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출신지는 영국이었다. 그래서 흔히 루이자를 '유일한 외국인 출신 영부인'이라고 부른다.

미국 대통령들 중 기벽 없는 사람은 드물지만 애덤스 역시 이색적인 습관이 있었는데 취미는 수영이었다. 백악관에 있을 때 새벽에 일어나 혼자 포토맥강으로 가서 옷을 훌렁 벗고는 다이빙을 한 후 한참 헤엄치다가 강가로 올라와서 백악관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였다고 한다.

야담식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당시 미국 최초의 여기자인 앤 로얄이 중요 현안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듣기 위해 대통령의 수영 취미를 알고 새벽에 찾아가서 인터뷰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때 애덤스는 앤의 요청을 거절하고 말없이 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앤은 대통령의 옷을 엉덩이에 깔고 앉았다. 그러면서 대통령에게 "대통령님이 인터뷰에 응하실 때까지 전 여기에 앉아 있겠어요"라고 협박(?)을 했다. 당황한 애덤스가 "인터뷰 할 테니까 옷부터 좀 입읍시다. 옷을 갈아입을 동안 저 수풀 쪽으로 가 주시오"라고 사정했는데 앤은 "대통령님 말씀은 믿을 수 없어요. 옷만 입고 가 버리시려고요?"(...)라며 결국 애덤스는 강물 속에서 인터뷰를 해야만 했다고.

또한 상당히 무뚝뚝하고 고지식하기로도 유명했다. 하버드 대학생 시절 독립전쟁의 격전지인 벙커힐에서 기념식이 열리고 학생들이 바베큐 파티를 준비했는데 이 친구들 중 한 명이 애덤스에게도 참석을 권유하자 애덤스는 화를 내며 안 간다고 했다. 친구가 이유를 묻자 "이 무개념들아. 우리 독립군들이 영국과 싸워 수많은 희생자를 낸 신성한 그곳에서 바베큐나 구워댈래?"라며 면박을 줬다. 이렇게 들으면 미국군이 참패한 전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독립전쟁 초기에는 보기 드물 정도로 대륙군이 완승한 전장이 벙커힐이었다. 어찌 보면 애덤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는 훗날 그가 정치활동을 시작한 후에도 마찬가지라서 지지자들도 "화강암 조각처럼 딱딱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사람"이라고 평가했을 정도.

대통령 시절 콜롬비아 강 포구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싸고 영국 대사와 설전을 벌였다. 점점 언성이 높아진 끝에 애덤스는 "당신 주장이 맞다면[4]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셰틀랜드 군도는 우리 미국 땅이오!"라고 말하자 영국 대사도 발끈하여 애덤스에게 맞섰다. 애덤스는 "인도도 영국 땅이고, 아프리카도 영국 땅이고..."라고 말을 이었는데 영국 대사가 "그럼 도 영국 땅이라고 하시죠?"라며 비아냥댔다. 그러자 애덤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오. 영국이 달에 대해 독점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말은 내가 듣지 못했소. 하지만 사람이 살 수 있는 이 지구에는 영국이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곳이 없지 않소?"

즉 영국이 지구 곳곳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비꼰 것. 이 말에 영국 대사는 버로우.

그의 재임시절 당시 백악관에 최초로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되었는데, 이런 이유로 당시 수세식 화장실을 Quincy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의 대통령 초상화는 뒷날 캘빈 쿨리지에게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허버트 후버 항목 참고. 괜찮아 사진이 있잖아 사진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아미스타드에서는 한니발 렉터로 유명한 안소니 홉킨스가 존 퀸시 애덤스 역을 맡았다.
  1. 다만 존 퀸시 애덤스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이미 수많은 업적을 남기기는 했다.
  2. 1824년 선거의 투표자는 36만명이었는데, 1828년에 모든 주에서 재산권에 상관 없는 투표권이 부여되면서 115만명이 투표에 참여하게 되었다.
  3. 이를 '개그 룰(gag rule)'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그 의미가 아니라 입에 재갈을 물린다"는 의미로서의 개그이다.
  4. 즉 콜롬비아 강 포구가 영국의 소유라는 말을 인정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