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클레이

Henry Clay
1777년 4월 12일 ~ 1852년 6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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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모습말년의 모습 제러미 아이언스

1 개요

미국의 정치인. 타협의 전문가. 캐스팅보더. 정치9단. 영원한 콩라인. 미국사의 JP

민주당 vs 휘그당(공화당의 전신이 됨), 남부 vs 북부의 대결구도에서 휘그당을 이끌며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사에서 중대한 영향을 끼쳤던 정치인으로, 1820년대 이래 1850년대까지 감초처럼 그의 업적이 끼어있다. 미국 역사에 관심이 없어도 인지도가 웬만한 대통령보다 높을 정도인 네임드 급 정치인으로, 대선에도 3번이나 출마했다.

여러 중요한 타협안을 제시해 전쟁을 막기위해 노력을 기울였기에 그가 얻은 별명은 "타협의 명수(Great Compromiser)". 그의 동료 의원이었던 대니얼 웹스터(Daniel Webster)와 전직 부통령(항목 참조)인 존 컬훈(John C. Calhoun)과 함께 "불멸의 트리오(Immortal Trio)", "위대한 삼각동맹(Great Triumvirate)"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2 초기 생애

버지니아하노버 카운티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법률의 뛰어난 이해력을 보여준 그를 양부[1] 조지 위드가 눈여겨 보고 당시 법무장관 로버트 브룩에게 정식으로 법률 교육을 받게끔 했다. 그리고 클레이는 1797년 법률 사무소를 설립했다.

법률가로 있으면서 그는 명성을 높이게 되었고 결국 1803년 켄터키 주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어른의 사정으로 그 자리에 오래있진 못했지만 켄터키의 노예들의 점진적 해방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런 그의 노력은 그가 죽을 때까지 빛을 못보게 된다. 켄터키 주는 노예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그 원인에는 두차례(1820년, 1850년)나 남북부 타협에 나선 그의 행동이 결정적이었지만.

1806년 켄터키 주 상원의원을 시작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된다.[2] 물론 이때 했던 약속이 있어서 3개월만(12월 말 승계, 다음해 3월 초 퇴임)에 그만뒀지만 여하간 말 그대로 데뷔 때부터 젊은 정치 엘리트였던 것이다.

3 정치 인생

3.1 미주리 협정

잠시 켄터키 주 의회 하원의장으로 있다가, 데뷔 5년 만에 연방 하원의장[3], 상원의원[4] 등을 거치며 점차 거물로 커가던 그는 1820~1821년 미주리 협정(Missouri Compromise)을 통과시켜 분쟁을 막았다는 평을 듣게 된다. 미주리를 12번째 노예주로 가입시키는 대신 1823년부터 독립주이자 자유주인 메인주가 매사추세츠에서 분리한 것. 하지만 그의 대선가도에는 늘상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게 함정 이로서 미봉책이지만 전쟁은 수십 년 늦춰졌다.

사실 클레이 개인은 노예 해방을 추구했지만 그보다는 정치인으로서의 직업정신에 더 충실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애초에 그 자체가 최대 60명의 노예를 거느렸던 플랜테이션 노예주였으니까. 하지만 죽기 전에 노예들을 풀어주었고, 이 시대 미국인들 상당수가 그렇듯 개인은 선량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노예 해방 소송(Slave freedom suit) 등에 분쟁을 빚기도 했다.

3.2 1824년 대선 - 캐스팅 보더가 되다

그리하여 그는 1824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게 된다. 당시 후보는 앤드루 잭슨, 존 퀸시 애덤스, 윌리엄 크로퍼드 등이었다.[5]

하지만 이 선거는 누구도 선거인의 과반을 획득하지 못했고 결국 의회로 넘어가게 되는데 가장 선거인을 적게 얻은 클레이는 자신의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고 애덤스를 지지하여 잭슨을 엿먹였다.[6] 그 대가로 애덤스 정권에서 그는 국무장관으로 발탁된다. 잭슨은 이걸두고 더러운 거래라며 맹비난한다. 근데 의미심장한게 헨리 클레이는 자신의 선거인단을 고향인 켄터키, 미주리, 그리고 대선의 승부가 갈린다는 오하이오에서 얻었다.

3.3 두 번의 대선에서 낙선하다

그러나 다음 대선인 1828년 선거에서 잭슨이 민주당으로 갈라저 나와 승리하자 그는 대통령과 사사건건 충돌하게 된다. 예를 들면 클레이의 주도를 통과시킨 법안을 잭슨이 거부하거나 합중국 은행을 없애려는 잭슨을 막기 위해 은행권 대출을 막게끔 한다.[7] 1831년 상원의원에 당선된 그는 1832년에는 아예 휘그당을 차리고[8] 후보로 출마해 잭슨의 재선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클레이는 37.4%로 캐발리며 매사추세츠와 고향 켄터키 정도에서만 승리하며 대패했다.

1836년과 1840년은 윌리엄 해리슨에 밀려 후보 지명에 실패하게 되며, 1844년 드디어 다시금 대통령 후보가 된다. 상대당 후보는 제임스 포크로 이 때까지만 해도 잭슨의 지지로 후보가 된 낙하산이란 소리를 들었던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게 당시 포크는 테네시 주지사 선거에 2번이나 낙선한 상태였기 때문.

하지만 포크는 당시의 대세에 걸맞게 명백한 운명을 내세워 미국의 적극적 영토 확장을 추구했고,[9] 클레이는 전쟁을 유발할 것이라고 하면서 반대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어쨌건 당시 시대적 흐름을 따른 포크가 간발의 차(49.5% vs 48.1%. 170명 vs 105명)로 당선되면서 클레이는 그저 안습(...) 이번에도 클레이는 오하이오와 북동부 해안 상당수 지역에서 이겼지만 승기를 잡지 못했다. 오하이오 징크스 따위

3.4 마지막 영광, "1850년의 타협안"

결국 대통령 후보보다는 의회에 더 익숙했던 그는 상원의원으로 복귀하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임기(임기 중 사망했다)였고, 동시에 그가 빛을 발하는 마지막 순간이 된다. 1850년 전쟁으로 얻어낸 새 영토의 노예제 허용여부를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이 빚어지자 그는 1850년의 타협안을 제시하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캘리포니아는 자유주로 편입한다.

2) 유타뉴멕시코는 주민투표에 의하여 노예주의 유지 여부를 결정한다.
3) 워싱턴 D.C.의 노예 시장을 없앤다.
4) 도망노예 단속법추노을 강화한다.
5) 텍사스의 일부(36도 30분 이북 선)를 뉴멕시코 준주에 양도하고, 정부는 그 대가로 텍사스 주에 멕시코와의 전쟁에서부터 나온 비용 1000만 달러를 지불한다.
6) 이 타협안은 주간의 노예 무역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타협안은 남북 모두에게 불만을 샀다. 서로에게 불리한 점이 있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원래 그래서 타협을 하는거지 스티븐 더글러스의 설득으로 인준할 수 있었지만. 이것이 바로 위대한 타협으로도 불리우는 바로 그것이지만, 동시에 남북전쟁이 10년 뒤 일어났다는걸 생각하면 역시 미봉책에 불과했다. 30년간 미봉책만 해오신 해결사 클레이 선생님 참고로 당시 대통령 테일러가 급작스럽게 사망해 이 법안이 효력을 발휘한 것은 밀러드 필모어 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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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안을 통과시킨 직후 결핵으로 인해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며, 1852년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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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렉싱턴의 그의 집은 박물관이 되었다고. 참고로 입장은 유료다

4 트리비아

1964년~1990년 동안 취역했던 라파예트급 SSBN SSBN-625가 헨리 클레이 함으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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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그는 전쟁과 악연이 많았다.

  • 그가 대선에서 패배한 상대 잭슨과 포크 모두 군사영웅이었다.
  • 그가 대선 경선에서 패배한 해리슨과 테일러 역시 군사영웅이었다. [10]
  • 멕시코 전쟁으로 인해 그는 두 아들을 잃게 된다.
  • 그의 타협안은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남북전쟁이 터지고 만다. 그의 기반이자 고향인 켄터키는 전형적인 전장이 된다(...)
이래저래 전쟁은 그와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았던것 같다. 안습. 전쟁 개객기 해봐
  1. 그의 친아버지는 4살 때 사망한 상태였다.
  2. 사실 이건 당시 상원의원 브레킨리지가 국무장관이 됨에 따라 자리가 빈 것을 그가 채운 것이다. 그런데 당시 그의 나이는 29이었기에 피선거권 연령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가 취임 전에 30세가 되면서 문제가 해결됐지만.
  3. 1811~14, 1815~20, 1823~25. 연달아서 15년, 햇수로는 10년간, 서른 살 때부터 마흔 다섯 살 때까지 하원의장을 했다는 이야기다.
  4. 당선 직후에 관두고, 또 잠시 보궐승계해서 1810년 잠시하다 관두고, 이후로 하원의장으로 활약하다가 1831년부터 1842년까지 재선하고, 대통령에 출마해서 제임스 포크와 싸워 낙선해서 잠쉬 쉬었다가, 1849년부터 죽을 때까지 3년을 더했다.
  5. 참고로 이 시기에는 정당이 민주공화당 하나뿐 이었다. 일당독재 비록 다음 선거에서는 두 쪽 나지만.
  6. 자신의 성향이 잭슨보다는 애덤스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생각이 맞았다는게 입증된다.
  7. 결국 이건 1837년의 공황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8. 다만 이 이름이 본격화 된건 그 이후고 당시 이름은 여전히 민주공화당의 후신인 국민공화당(National Republican)이었다.
  9. 가장 대표적인게 오리건 지역의 미국 영토를 54º40'(알래스카 바로 밑이다.)까지 끌어올리자고 주장했던 것. (이는 무산되었고 밴쿠버에 접한연안으로 캐나다는 태평양 출구를 얻게 되었다.) 그 외에도 텍사스 공화국 합병 등이 있었다.
  10. 그리고 둘다 취임 직후 사망했다. 좀 일찍 좀 죽어주지! 여담으로 간신히 대선후보가 된 1848년에는 단독후보여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