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왼쪽)와 함께. 마하티르와 리콴유는 사이가 좋았던 편으로, 정치적으로 냉랭했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관계도 마하티르 집권 이후부터는 개선되었다.)
1 개요
말레이시아의 정치가이자 제4대 총리. 1981년부터 2003년까지 22년간 총리를 역임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등과 더불어 동남아시아의 대표적 개발독재자로 평가받는다.
2 생애
1925년 영국령 말라야 크다 주 알로르 스타르에서 태어났다. 이후 싱가포르의 킹 에드워드 7세 의과대학(현 싱가포르국립대학 의학부)을 졸업했으며 이곳에서 훗날의 배필을 만난다. 싱가포르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고향 알로르 스타르로 귀향했고 그곳에서 유일한 말레이인 의사로서 좋은 평판을 쌓았다.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에 참여하였고 1957년 말라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UMNO는 당시 일당독재와 말레이인 중심의 인종차별 정책을 만들려고 별 생쇼를 다했는데, 다행히도 그는 이와 거리가 멀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떠올랐던 건, 1963년 기존의 말라야 연방에 사라와크, 사바, 싱가포르의 3개 주가 가맹하여 새로운 말레이시아연방을 성립한 뒤였다. 싱가포르 주정부의 수반이었던 리콴유는 UMNO가 주도하던 신생 말레이시아 연방정부와 사이가 매우 나빴는데 마하티르는 여기에 리콴유를 "돼지"라고 욕했다. 아마 이 때문인지, 말레이인들이 마하티르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싱가포르를 축출하고 난 뒤 처음으로 치러진 1969년 총선에서 UMNO가 개헌선 확보에 실패하는 패배를 당하고 중국계와 인도계 정당이 승리하자 인종폭동 사태말레이시아판 5.18가 일어나고, 총리였던 툰쿠 압둘 라만은 계엄령을 내리고 독재자가 된다. 마하티르는 이러한 라만을 신랄하게 까댔고, 결국 당에서 숙청당했다.
결국 한순간에 쫄딱 망한 마하티르는, '말레이 딜레마'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당연히 금서가 되었다. 왜냐하면 라만 정권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었고, 라만의 뒤를 이은 압둘 라작도 잔인한 독재를 한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김정일? 또 그 책은 단순한 라만 정권을 향한 디스에서 끝나지 않고, 말레이인 우월주의를 주창하며 인종차별을 조장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말레이계와 인도계의 혼혈이었으니 안습.
3 집권 시절
라작의 새로운 독재가 시작된 뒤, 마하티르는 당에 복귀했다. 비록 1971년부터 라작은 독재를 조금씩 풀려는 듯 했지만, 훼이크 새로운 독재체제를 마련했다. 마하티르는 여기에 가담했고, 대학생들의 학생운동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 체계를 마련했다.
당연히 그는 새로운 후계자로 유력시되었고, 하필 라작이 죽자 새로운 총리 후세인 온의 밑에서, 부총리의 한 후보로 떠올랐다. 하필 상대편에 그를 때릴 수 있는 힘센 후보들이 있었는데, 어쩌면은 그가 졌을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하티르는 영어능력도 있었고, 지도자 우상화에 힘을 실어준 부인 등으로 인해 이긴다. 그리고 1981년 후세인이 사임한 뒤, 그는 총리에 올랐다.
그는 경제발전에 기여한다면서, 말레이인을 우대하고 타민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노골적으로 펼쳤고, 외국인들을 막 내쫓았다. 말레이인들에게 대학입시의 길을 열어두겠다며 대학에 멀쩡히 다니고 있던 중국인, 인도인, 외국인 학생들을 그냥 쫓아냈다. 그들 대부분은 아무런 죄도 없었고, 오로지 '말레이인이 아니다'라는 죄 때문에 쫓겨난 거였다. 그리고 대학입시에 있어 학생의 60%는 기본적으로 말레이인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만든 건데, 원칙상 그렇다는 거지 실제 말레이인의 수는 그보다 더 많다. 지금도 말레이인이 아닌 다른 민족 학생은 대학에 들어가는 게 어려워서 질 떨어지는 지잡대나 외국 대학으로 가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말레이인에게는 표현의 자유를 어느정도 주어 정부를 비판할 수 있었는데, 중국인이나 인도인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예를 들어 만약에 어느 중국인 기독교도가 마하티르에 대해 어쩌구저쩌구 했다, 그러면 당장 끌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때문에 80년대까지만 해도, 말레이시아에서 여야 대립은 말레이인들만의 대립이었다.검은 남아공 90년대부터 냉전이 풀리고 국제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점차 중국인들과 인도인들도 점차 정계에 진입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
(한때 후계자로 거론되었던 안와르 이브라힘(왼쪽)과 함께. 1990년대 후반 이후 정적 관계가 되었다)
마하티르는 집권기 '룩 이스트'(Look East Policy: 동방을 배우자)라는 표어 아래, 동남아시아보다 앞서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한 일본, 한국 등 동북아 국가들의 사례를 배우자고 역설했는데, 해필 이때 배운 것 중 하나가 유신독재였는지(...)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통해 수차례 장기집권했고, 학생운동가와 양심수들을 탄압했다. 결국 그의 독재는 마치 차우셰스쿠나 박정희와도 같아 여당인 UMNO에서도 염증을 느낄 정도였는데, 당의 부수장이자 부총리로 마하티르의 중요 후계자였던 안와르 이브라힘과도 갈등을 겪어 안와르는 끝내 숙청되었다.
(1998년 9월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한 마하티르. 안와르의 숙청, 고정환율을 통한 독자적인 외환위기 대응을 다루었다)
마하티르 측은 안와르가 동성애자라는 혐의를 내세워 그를 실각시켰지만, 실제 이유는 1990년대 말의 동아시아 외환위기 당시의 정책적 대응 방향을 놓고 마하티르와 안와르가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중론이다. 청년 시절부터 국수주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던 마하티르는 외환위기 자체를 미국이나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서방측의 음모로 규정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성향과 맞물려 외환위기 당시 한국과 태국 등이 IMF의 긴축재정 권고를 받아들인 것과는 달리, 마하티르는 IMF지원 거절, 링깃화 고정환율제 채택을 통한 외국자본 유출금지 등을 강조하는 행보를 보였다. 반면 안와르는 서방측이 주장하는 금융 자유화를 지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안와르의 주장은 마하티르에게 이적행위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 축출된 안와르는 마하티르 정권의 2인자, 후계자에서 이후 재야 민주화 투사로 변신하게 되었다. 그의 아내는 인민정의당을 창당하기도 한다. 근데 딸이..
독재자에게 부록처럼 붙는 사치 및 부패 의혹도 있다. 90년대엔 수도 쿠알라룸푸르가 인구가 넘치자 이를 해결한다고, 스팡 중간 지점 일대에 신행정도시세종시를 만들기로 했는데, 짓는 와중에 각종 부패와 사치 문제가 제기되었다.
다만, 부미푸트라 정책의 경우 결과적으로 본다면 화교가 경제적으로는 축출되지 않았을 뿐더러 수입 대체산업을 대대적으로 장려하면서 외국인들의 몫이 크게 줄어드는 과정에서 비중이 오히려 확대되는 경향까지 보였기에 극단적인 반발에까지 직면하진 않았고(...), 말레이계 우대 정책으로 말라야 반도의 말레이계 사람들이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중국계나 인도계와 대등해진 측면도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긴 하다. 원체 과거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말레이계보다 중국계 화교 및 인도계가 경제적 주도권을 틀어잡고 있었던건 사실이기 때문. 말단직원이 사장한테 인종차별하는 수준이랄까?
하지만 바다 건너 있는 사라왁, 사바의 사람들은 생각도 안 했고, 이쪽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말 그대로 택도 없었다. 그러니 분리독립파가 설치지 원래 사라왁, 사바는 천연자원이 가득해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곳이어야 마땅한 곳인데, 천연자원 이득은 쭈욱 빨아먹고 이곳의 독립운동가 등은 노골적으로 탄압했다. 애초에 말레이계와 특별한 연관이 없는 땅이기도 하고.
여하간 1999년 총선에서 위기상황에 빠진 적도 있었지만 언론플레이 신공과 게리멘더링 신공을 발휘해서 어찌어찌 집권을 연장하는데 성공하고 2003년 22년의 독재를 마치고 스스로 물러났다. 하지만 물러나서도 상왕노릇하며 그의 심복들을 통해 정계에 실권을 행세하고 있다는 의혹을 여전히 받기도 했다.
4 근황: 패자의 역습(?)
이렇게 22년간, 아니면 그보다 더 긴 독재를 하며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퇴임한지 한참이 된 2010년대 들어 그가 다시 말레이시아 정계에서 논란의 중심으로 돌아오는 상황이다.
원인은 2009년 새로 취임한 나집 라작 총리 덕분인데, 일단 마하티르와 나집은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근데 이 나집 총리가 민주화를 약속해놓고는 2013년 부정선거로 재선하고 오히려 나라 말아먹으려고 새로운 독재를 할 기세를 보인다. 그래서 여기에 불만을 품던 사람들이 많아지던 시점에 하필 2015년 대형사건이 하나 더 터진다.
바로 나집 라작 총리 개인의 부정부패 스캔들인데, 요는 말레이시아에서도 IS가 기승을 부리자 이를 막으려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게 받은 2억 6천만 링깃을 기부했는데, 이것이 나집 총리의 계좌로 흘러들어갔다니 어쩌니 하는 소리들이 나왔고, 그것이 사실 기부금이 아니라 나집 본인을 위한 수단인 것으로 알려지자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소위 버르시라고 하는 노란 단체가 나섰고, 많은 사람들이 가담했다.
그런데 골때리는 건 여기에 가담한 사람의 하나가 바로 마하티르라는 점. 묘하게 자기가 쫓아낸 안와르와 오버랩된다 상술했듯 둘의 사이가 나빴고 이로 인해 마하티르계 세력들이 집권당인 UMNO(통일말레이국민조직)에서 축출당했다고 하는데, 아마 여기에 반발한 모양이다. 하지만 본인도 그렇게 독재를 해먹은 주제에, 독재자를 쫓아내는데 협력하는 꼴이 좀 우습긴 하다. 그것도 진짜 민주화에 대한 무슨 신념이 생겼다기보단 그저 자기세력 축출에 반발한 권력투쟁의 한 단면처럼 보여 더 씁쓸하다.
5 트리비아
그의 집권 초기인 1985년 현대건설이 말레이시아에서 아시아 1위, 세계 3위로 긴 페낭 대교를 건설했는데, 당시 현대건설 사장은 훗날 한국 대통령이 되는 이명박이었다. 둘의 친분에 대해 다룬 월간조선의 기사가 90년대 초반에 있었을 정도. 이명박은 마하티르를 자신의 정치적 롤 모델로 삼았다는 후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