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AB Datuk Seri Anwar bin Ibrahim
한때는 권력 2인자였지만 지금은 야당지도자로 추락한 비운의 인물
일명 말레이시아의 황장엽
20세기 마지막 토사구팽 희생양
말레이시아의 정치인으로 한때는 이슬람 운동가였으나 1982년 당시 총리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의 권유를 받고 여당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에 입당하였다. 1993년 미국의 부통령에 해당되는 부총리직에 오르면서 권력 2인자이자 후계자로 등장하지만 5년만에 실각하여, 지금은 야당인사로 변신하였다.
1 생애
풀라우피낭의 부킷머르타잠 출신이다.요놈하고 고향도 비슷하네?[1] 말레이시아 자체에서는 다수민족이자 원주민이지만 피낭에서는 소수민족인 말레이인 출신이다. 그의 조상 중에 인도인이 있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으나 검증된 바 없다.
뭐 피낭의 사회적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이슬람 운동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이슬람 단체인 말레이시아이슬람학생민족연합의 대표로 일했었고 말레이시아이슬람청년운동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이 시절 반정부 운동을 벌이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코로 퀘티아우 고렝 원샷을 해야 했던 적이 있었으나 풀려났다.
1982년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당시 총리의 권유를 받고 UMNO로 입당하였다. 여기서부터 보면 황장엽이 따로 없다. 황장엽이 주체사상의 이론을 닦아 김일성의 독재체제를 굳혔다면, 안와르는 강경한 친말레이적 교육방안 등으로 사실상 마하티르의 독재에 협력했다. 마하티르 입장에서는 이러한 안와르를 예뻐할 수밖에 없었고 이 와중에 여러 장관직을 맡으며 내각의 주요 실세로 떠오르다가 1993년 가파르 바바 당시 부총리의 사임으로 그 직을 이어받는다. 명실공히 권력 2인자에다가 아예 마하티르의 후계자로 떠올랐으니 모든 것이 좋을 줄 알았다.
그런데...
2 실각
1998년 9월 2일 갑작스럽게 부총리직이 박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결국 권력실세에서 파멸되었다. 18일 후 경찰에 구속되었고 모진 고문을 받다가 결국 수감되어, 2008년까지 정계 복귀를 박탈당한다.
물론 마하티르가 아무리 독재를 해도 설상 윗동네처럼 막장은 아니었던 나머지, 장성택처럼 처형당하는 일은 면했으나 어쨌건 숙청되었음은 확실하다.
당시 정부는 안와르의 숙청 이유를 동성애 및 부패혐의 등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는 검증된 바 없으며 본인은 이를 부인했다. 때문에 안와르가 왜 몰락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유력한 설로는 정치적 대립이다. 당시 아시아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이에 대한 해결책을 두고 마하티르와 파열음이 발생했는데, 이 때 안와르의 방안이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마하티르는 외환위기에 대해 서방의 음모로 보고 외환 유출을 막기 위해 자본시장을 틀어막았지만, 안와르는 이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 결과 안그래도 이십년 가까이 해먹은 마하티르는 차기 권력유지에 위험을 느껴 정치적 숙청을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안그래도 1998년 말레이시아는 APEC 정상회담을 개최했고 이 와중에 외국에서 온 관리들에게 당시 살벌한 말레이시아의 인권실태가 비춰지면서 마하티르는 불리한 입지에 놓이게 되었다. 바로 신공항(동년 5월 개항)에 도착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그의 아내인 완 아지자를 먼저 만나지를 않나, 외국 정상들 앞에서 물대포를 쓰면서까지 대규모 시위진압을 강행하지를 않나... 하여튼 마하티르의 김정일스러운 독재가 문제가 되면서 앞으로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했다.
한편 아내인 완 아지자는 인민정의당(PKR)을 창당하였고 당시 중학교를 갓 졸업한 딸 누룰 이자는 이에 충격을 받고 후에 대학 졸업과 함께 PKR의 수뇌부에 올라 아버지의 석방을 위한 투쟁을 하였다. 결국 UMNO의 장기독재에 염증을 느낀 주민들은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2008년 총선에서 야당이 개헌저지선을 넘기는 사상 최초의 이변을 남기면서, 개혁성향인 나집 라작이 총리가 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나집은 그야말로 김정은스럽기 다름없어, 주민들의 민주화 약속을 져버리고 철권통치를 강행, 민심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