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도 히로시

2016001_gondohhiroshi_l.jpg

이름곤도 히로시(権藤博)
생년월일1938년 12월 2일
출신지사가토하시
학력사가 현립 토하시 고등학교
프로 데뷔1961년
포지션투수, 3루수, 유격수
투타우투우타
소속팀주니치 드래곤즈(1961~1967)
지도자 경력주니치 드래곤즈 2군 투수코치(1973~1980)
주니치 드래곤즈 투수코치(1981~1983)
킨테츠 버팔로즈 투수코치(1988~1989)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투수코치(1991~1993)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수석 코치 겸 배터리 코치(1997)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1998~2000)
주니치 드래곤즈 투수코치(2012)
196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신인왕
호리모토 리츠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곤도 히로시
(주니치 드래곤즈)
죠노우치 쿠니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1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호리모토 리츠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곤도 히로시
(주니치 드래곤즈)
코야마 마사아키
(한신 타이거스)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역대 감독
오오야 아키히코
(1996~1997)
곤도 히로시
(1998~2000)
모리 마사아키
(2001~2002)

1 소개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야구해설가, 야구평론가.

프로 첫 해부터 대활약했던 뛰어난 재능을 갖춘 선수였으나, 그에 맞춰 뒤따라온 엄청난 혹사로 인해 몸이 망가져 선수생활을 일찍 접어야 했던 비운의 인물.

또한 지도자로써는 다니는 팀마다 투수진을 개선하는 데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으며, 무엇보다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게 38년 만에 구단 사상 2번째 센트럴리그 -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겨준 감독이다.

2 프로 입단 전

원래는 내야수로 뛰었지만,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투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잠만, 누군가랑... 투수로 전향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엔 한번도 고시엔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뛰어난 활약을 본 니시테츠 라이온즈 측에서 입단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곤도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사회인야구브리지스톤 구루메공장 야구부에 입단하여 선수로 뛰었다. 그 후 1960년 도시대향야구대회에서 보강선수로 출전해 맹활약. 활약에 감명받은 여러 구단의 추파를 받았고, 1961년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한다.

곤도는 야구 이외에도 신체능력 자체가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스포츠에서도 높은 평판을 받아 그를 영입하려 했다. 심지어는 1964 도쿄 올림픽허들 선수로 출전해달라는 요청까지 있었을 정도.

3 혹사로 일찍 끝난 비운의 선수 시절

20160224000928.jpg
비운의 에이스.

1961년 주니치에 입단한 곤도는 첫 해부터 맹활약을 펼치는데, 세부성적을 보면 도저히 미쳤다고밖에 말하지 못한다.

무려 69경기 등판[1], 32완투, 12완봉, 35승 19패, 429.1이닝, 310 탈삼진, 방어율 1.70이라는 정신나간 성적을 기록하고 사와무라상다승왕,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 신인왕을 동시에 석권한 것! 심지어 저 성적 중에서 구원등판수와 패전 수를 제외한 나머지가 전부 그 해 리그 최다 기록이었다![2]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 당시 기준으로도 엄청난 혹사였다. 오죽했으면 이 혹사 때문에 "비, 비, 곤도, 비, 곤도"란 유행어[3]까지 생길 정도.

이듬해에도 전년보단 덜하지만 61경기 등판[4], 23완투, 6완봉, 30승 17패, 362.1이닝, 212탈삼진, 방어율 2.33을 기록하면서 다승왕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 미친 혹사의 끔찍한 말로가 그를 기다렸다.

이 미친 혹사도 한 몫했지만, 잘못된 어깨관리[5]로 인해 결국 곤도의 어깨는 망가져 버렸고, 결국 이듬해인 1963년엔 10승, 그 다음 해인 1964년엔 꼴랑 6승밖에 거두지 못하며 곤도는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곤도는 1964년을 끝으로 투수를 포기하고 내야수로 전향, 타자로 뛰게 된다.

1230964-1.jpg
타자로 전향한 곤도.

그러나 타자로 뛰면서도 이미 개박살난 몸 때문에 1967년 리그 최다 희생타를 기록한 것 빼곤 저조한 성적밖에 거두지 못했고, 결국 1968년 다시 투수로 뛰게 되지만 9시합 등판(단 1시합 선발등판), 1승 1패, 18.1이닝, 10탈삼진, 방어율 10.80의 처참한 성적만 거두고 그 해를 끝으로 은퇴하고 말았다.

통산 성적은.
투수 성적은 210시합 등판, 82승 60패, 667탈삼진, 방어율 2.69
타자 성적은 463시합 출장, 214안타, 18홈런, 85타점, 56희생타, 타율 .245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미친 혹사가 결국 몸을 망가뜨려 일찍 은퇴한 비운의 선수라고밖엔 표현할 수 없다.

4 지도자 시절

93ced9c6100189b30a5a.jpg
팀에게 2번째 센트럴리그 -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겨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 시절.

은퇴 후엔 주니치 드래곤즈, 킨테츠 버팔로즈,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등에서 코치로 뛰면서 투수진을 개선시키는 데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하지만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장의 성적을 위해 투수진의 혹사에 반대하는 의견을 고수하면서 감독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긴테쓰에서 오기 아키라 감독이 요시이 마사토 등의 주축 투수들을 지나치게 혹사시키는 것을 두고 불화를 겪기도 했다.[6]

그리고 1998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으로 취임해선 첫 해부터 자율야구를 시행하면서 사이토 타카시, 노무라 히로키, 미우라 다이스케, 카와무라 타케오 등이 포진한 안정적인 선발진과 마무리 사사키 카즈히로를 중심으로 시마다 나오야, 이가라시 히데키, 세키구치 이오리, 아와노 히데유키 등의 중간계투진을 로테이션화한 독특한 투수운용을 보여주었고, 비록 홈런을 뻥뻥 쳐대는 대형 거포가 있진 않지만 컨택이 좋은 타자들이 연달아 안타를 뻥뻥 때려대면서 상대팀을 조지는 머신건 타선을 구축하면서 그 해 구단 사상 38년만의 2번째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일본시리즈에서도 히가시오 오사무가 이끄는 세이부 라이온즈[7]를 4승 2패로 조지고 구단 사상 38년만의 2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면서 팀을 최고의 황금기로 이끌었다.

img_2edb94c14b067f93707f596c90a8ea85362008.jpg
1998년 일본시리즈 우승이 결정된 후 헹가래를 받는 곤도.

이듬해인 1999년[8], 그 다음해인 2000년에도 팀을 3위로 이끌면서 4년 연속 A클래스로 이끌기도 했으나,[9] 자율야구 방침에 불만을 품은 주전 선수들, 그리고 TBS 방송사의 요코하마 프런트진과 대립하면서[10] 결국 2000년을 끝으로 곤도는 사임한다. 그리고 요코하마엔 또다시 암흑기가 찾아온다. 명장을 몰라보는 병신들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주니치 드래곤즈 등 여러 구단에서 투수코치를 맡았으며, 프로필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투수코치로도 활동했다.

5 기타

원래 콘도 등의 성씨는 외래어 표기법/일본어의 표기 법칙에 따라 곤도로 적어야 하지만, 이 사람 같은 경우엔 특이하게도 성씨의 발음 자체가 그대로 곤도라서(히라가나 표기가 ごんどう=곤도) 딱히 외래어 표기법에 맞출 필요가 없다.
  1. 44경기 선발등판, 25경기 구원등판.
  2. 다만 최다탈삼진센트럴리그에선 1991년부터 수상했기에 곤도는 이 상을 당연히.. 못 탔다.
  3. 의미는 간단하다. 경기가 우천취소가 되어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닥치고 다음 경기는 곤도 등판. 이 패턴이 계속되는 것. 류현진의 원조
  4. 39경기 선발등판, 22경기 구원등판.
  5. 가네다 마사이치 항목에서 알 수 있듯, 당시 투수들에게는 어깨를 식힌다는 개념이 없어서 등판 후 아이싱은 커녕 어깨에 뜨거운 것을 대고 있었다. 김성근김인식도 이런 잘못된 어깨관리 때문에 일찍 투수를 포기했던 것. 그리고 이 둘, 특히 전자는 정신 못 차리고 후배 선수들까지도 어깨가 박살나게..
  6. 오기 아키라 감독은 스즈키 이치로의 타격폼을 수용하는 듯 열린 사고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지만, 투수 운용에 있어서는 승리를 위해 투수들을 연투 등으로 혹사시키는 근시안적인 모습을 자주 보였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10.19 당시 더블헤더 3일 전 완투를 한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를 2경기 모두(즉 하루에 2번)에 구원등판시킨 것. 결국 아와노는 1번째 땐 어찌저찌 롯데 타선을 막아내어 팀 선배 나시다 마사타카가 팀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나 마찬가지인 적시타로 갖다준 팀의 승리를 지켜냈으나, 2차전에서 이 해 수위타자를 차지한 타카자와 히데아키에게 동점 투런 홈런을 맞아 블론세이브를 저질러 팀의 리그 우승 실패에 일조하고 말았다.
  7. 참고로 세이부는 1985년 한신 타이거스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선물한 구단이기도 하다(...) 고마워요 세이부
  8. 이 해 요코하마는 센트럴리그 역대 기록인 팀타율 .294을 기록했고 4번타자인 로버트 로즈.369 37홈런 153타점의 괴물 성적을 찍었다.
  9. 왜 4년이냐면 곤도의 전임 감독 오오야 아키히코 시절인 1997년의 2위도 포함하기 때문.
  10. 다만 구단 사장과는 형제 같은 친밀한 관계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