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도(武士道)의 일본식 표기.
목차
1 일본의 무사계급인 사무라이들의 덕목으로 여겨지던 관념
무사도는 죽는 것이라고 보았다 (武士道と云ふは死ぬ事と見付けたり) - 하가쿠레
원래 사무라이들은 스스로 무장한 토착세력으로, 후에 중앙의 통제가 약해지자 각지의 귀족들이 장려하여 만든 사병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지닌 만큼 사무라이들의 행동은 양아치나 다를 바가 없었고 무력을 쥔 사무라이들은 권력을 장악하여 점차 귀족화되었다. 특히 사무라이 중에서도 지방귀족화한 것을 다이묘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자신의 권세를 뽐내기 위하여 교양을 쌓기도 했다.
그런 사정과는 별도로 사무라이의 전성기라고할 수 있는 센고쿠 시대(일본의 전국 시대)까지도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은 시정잡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무사도가 탄생한 것도 그 당시의 사무라이의 삶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 바로 무사도였으며 근대화 이후 일반적으로 알려진 일본의 무사도와는 크게 다르다.
당초의 무사도는 사무라이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하여 주군을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비열한 수를 써도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전란 속에서 가문의 이름을 남기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무라이의 갑옷과 투구는 동시대 다른 국가 군사집단의 방어구에 비해 유난히 장식적이고 눈에 잘 띄는 모습이었고, 여기에 화려한 가문 문장을 그려넣은 깃발을 사용했다. 서양의 기사들이나 중국의 군웅들도 깃발은 썼지만 이런 군기는 본래 공인받은 지휘관에게 국왕이 부여하는 표식이었고, 병사까지 등에 직접 가문 깃발을 꽂고 다니는 것은 일본에서만 볼 수 있었던 현상.
한 편으로 센고쿠 시대가 끝나고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선 에도 시대가 되자 그런 사고방식은 오히려 막부에 의하여 은연 중에 압력의 대상이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애초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익을 미끼로 다이묘들을 모아서 세운 것이기 때문에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지방세력의 견제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유교에 중점을 두고 충과 의를 강조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고 도쿠가와 막부가 쓰러지자 계급사회의 통념인 무사도는 사민평등의 이름 아래 매장되었다. 사무라이라는 말만들어도 치를떨며, 마녀사냥식으로 갔었으니 사무라이 정신은 이 시대로 끊긴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일본이 급격히 군국주의화하자 주군의 말한마디에 부하가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무사도의 이용가치를 발견한 군인계층이 이것을 발굴해내어 국민의 일반적인 도덕관념으로 교육하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국가 막장 테크인 셈.
당시 군국주의에 사용된 무사도는 니토베 이나조의 1900년대에 저술한 '부시도'(무사도)에 근거한다. [1] 당시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는 서양에서 인기있는 책 중의 하나였는데 대표적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이 책을 읽고 극찬을 했으며 추신구라, 오륜서와 함께 본인의 애독서 목록에 올라간것으로 유명하다. 이걸 일본이 역수입하여 교육에 쓰인 것이 현재 알려진 무사도이다. 이 것을 토대로 일본 전국민에게 무사도란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군국주의가 바로 적용되기도 하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군국주의에 맞는 세뇌 교육책으로 무사도를 선택하여 계획적인 역수입을 한 것이라는 의혹이 있다. 수뇌부에게 부시도가 없었는 이유
게다가 절대적 충만이 부시도의 모든 내용을 이루지는 않는다. 사무라이는 기본적으로 사대부인지라, 충 외에도 효인의예지신을 따라야 하므로, 주군이 이에 위배되는 명을 내리면, 사무라이는 목숨걸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목숨걸고 간언을 해야 한다. 이는 군국주의 시대에 병사들을 사무라이의 후예라고 합리화시키며, 여러 가지 막장 행위를 강요한 일본군 수뇌부부터가 부시도가 없었다[無士道]는 것을 입증해준다. 무사도만 없었으면 몰라 걔들은 뇌까지 없었다 당시 실제 사무라이의 후손이거나, 사무라이를 자처한 사람들은 이러한 인과 충의 딜레마로 인하여 군부에 동참하지 않고 은둔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정신력으로 기술력이나 병력의 차를 극복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패전으로 군대가 폐지되고 군인계층이 몰락함에 따라 무사도도 다시 한 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애초에 역사 속의 사무라이들은 승리를 위해 신식 무기를 도입하는데 열심이었다.당장 에도 말기만 하더라도 여전히 칼을 쓰긴 했지만, 군함이나 대포의 이용에는 꽤 적극적이었다
참고 포스팅 - Bushido way total Bullshit
대표적인 무사도적 관념에는 이런 것이 있다.
- 주군에게 불충을 저지르면 할복. 죄질이 악랄한 경우는 참수이며 이 경우 상당한 불명예로 가문이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계급도 박탈당하는 일이 많다.
- 등 뒤의 상처는 적에게서 도망치다 생긴 비겁한 상처라고 여겨져 처벌의 대상이 됨.
등 뒤에서 기습당한다면? - 사무라이끼리 칼을 뽑으면 양쪽 모두 처벌의 대상이 됨. 켄카료세바이(喧嘩両成敗)라고 한다.
- 사무라이가 칼을 뽑았을 경우 반드시 자신이 죽거나 아니면 상대방이 죽어야한다.
- 사무라이는 체면을 중시하며 굴욕을 받았을 때는 반드시 결투로 이것을 청산해야한다. 이것을 부레이우치(無礼打ち)라고 부른다. 단, 양측이 모두 사무라이였다면 양자모두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 사무라이는 주군이 사형을 선고하면 이것을 달게 받아야하며 이것은 죠이우치(上意討ち)[2]라고 부른다.
- 사무라이는 묘지타이토(苗字帯刀)라고해서 성씨를 쓰거나[苗字] 일본도를 차고 다닐[帶刀] 권리가 주어졌다. 단, 에도 시대에는 치안 문제때문에 평민들도 무장하는 것
천조국의 총기 소지이 허락되었으나 타치 같은 본격적인 일본도는 사무라이만이 찰 수 있었다. 사무라이는 두 자루를 차고 다녔으나 은거한 사무라이나 주군이 없는 로닌은 하나만 차는 것이 보통이었다.[3] 이런 사정 때문에 일본도는 사무라이의 혼이라 하여 보관 상태가 안 좋을 경우에는 처벌[4]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단, 그것이 주군에게 하사받은 것이었다면 두말할 것 없이 할복. - 부레이우치를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이라고도 하는데 주로 이것의 대상이 되는 것은 평민계층이었다. 만약 사무라이가 평민에게 굴욕을 받고도 굴욕을 준 평민을 죽이지 못한 경우 당연히 할복. 일방적으로 사무라이가 평민을 죽이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 경우 평민도 와키자시로 저항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사무라이를 죽여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일본판 정당방위?일이 그렇게 될 경우 오히려 죽은 사무라이의 가족은 손가락질을 받는 입장이 되었다. 만약 대상이 와키자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5]에는 사무라이가 자신의 와키자시를 건네주어야했다. 이것을 이용하여 에도 시대 평민들은 사무라이를 놀려먹은 다음 사무라이가 자신에게 칼을 주기 전에 신속하게 도망치는 일종의 치킨 레이스가 유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평민의 경우, 싸우지 않는다고 평민이 처벌받는 일은 없기 때문에 발이 빠르다면 해볼 만했다.
일본의 사극에서는 이것을 이용하여 사무라이가 평민들을 괴롭히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 에도 시대에는 오히려 사무라이들이 시비를 거는 평민을 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만약 부레이우치를 하지 않았다는 소문만 나더라도 사무라이에게는 처벌의 빌미가 되었지만, 거꾸로 사무라이가 상대를 죽였을 경우 반드시 이것이 정당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할 증인이 필요했고(1) 전후를 기록한 서류를 제출해야했으며(2) 사용한 칼은 증거품으로서 일시적으로 압류되었으며(3) 얼마간의 자택근신을 명령받았다(4). 만약 증인이 없을 경우 단순한 살인이라고 여겨져 할복을 명령받거나 심각할 경우 참수형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보니 오히려 사무라이들이 몸을 사리는 진풍경이 만들어진 것. 하지만 이건 에도시대임을 생각해두자. 그 전인 전국시대만 해도 평민들에게는 사무라이들이 공포의 대상이었다. 여러 문헌 중에 잘 알려진 이야기로는 절한 평민에게 파리가 날린다는 이유로 그자리에서 참수하는 일이 벌여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도쿠가와가 어지간히 존경받는 이유가 따로 없다.
2 세계수의 미궁 시리즈에 등장하는 클래스
- 1편의 경우 부시도(세계수의 미궁) 참조.
- 2편의 경우 부시도(세계수의 미궁 2) 참조.
3 TCG 매직 더 개더링의 카미카와 블럭(champions of kamikawa, betrayers of kamikawa, saviors of kamikawa)에 등장했던 특수 기능
부시도(bushido)X로 되며, 이 기능을 가진 유닛이 적 유닛을 막거나 적 유닛에게 저지 당할 때 기본 스탯에 X/X가 더해진다.
(예: Kenzo the hardhearted가 적 5/5 좀비토큰을 방어할때, 3/4인 kenzo는 bushido 2가 있어 5/6이 되어서 적 5/5 좀비토큰을 부수고 자기도 살아남는다.)
공격/방어시 모두 적용이 되는 관계로 후에 Shards of Alara때에 나온 Exalted보다 방어면에 유리한 점이 있다. 그렇지만 플레이어를 공격할 때 적용되지 않으므로 리미티드에서만 애용받는 기술이 되었다.
4 기동전사 건담 00의 미스터 무사도
5 PRIDE의 대회 중 하나
원래는 팀별 대항전 형식으로 시작했다가 시청률이 안나와 폐지 위기까지 갔지만 대회를 웰터급 이하의 경기를 위주로 개편하면서 경량,준중량급의 선수들의 무대가 됐다.
6 독일 의 랩퍼
본명은 아니스 모하메드 유세프 페르치치. 예명은 1번 항목에서 따왔으며 본명에서 알 수 있듯이 아랍계로 그의 아버지는 튀니지 인이며 어머니는 독일인이다. 김나지움 재학 시절 마약 소지 및 반달리즘 행위로 미술 심리 치료와 감옥행 중 한 쪽을 택하라는 판결을 받았는데 이 때 미술 수업을 받으며 훗날 역시 래퍼가 되는 Fler 를 만나 그래피티 아트와 힙합에 빠져들게 되었다.
독일의 대표적인 갱스터 랩 아티스트로 분류되며 아랍계이자 무슬림답게 반-이스라엘 정서를 공공연하게 노출하여 독일 내에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이 외에도 극우적 성향과 여성, 동성애 혐오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가사로 인해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편이다.
또한 저작권에 대해서도 굉장히 무신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네오 클래시컬 다크 웨이브 밴드인 Dark Sanctuary의 음악을 무려 16곡이나 무단도용해서 샘플링으로 사용했으며, 결국 독일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았고 해당 곡이 포함된 앨범 및 싱글은 전부 판매중지 혹은 폐기처분 당했다. 다크 생츄어리 이외에도 동일한 장르의 Nox Arcana와 Sopor Aeternus의 곡들 역시 도용당했으며, 심지어 블랙메탈 밴드인 Dimmu Borgir의 멜로디를 한번도 아니고 6년에 걸쳐 두번이나 표절했다는 혐의까지 받고 있다. 어째 다 어둠에 다크한 밴드들이다
- ↑ 외국에서 서양인 친구에게 "서양에서는 종교 교육에 의해 도덕 교육이 이루어지는 반면에 일본은 어떤 방식으로 도덕 교육이 이루어지냐?"라는 질문에 당황하면서 책으로 답변한거다. 물론 당시 메이지 유신 시대의 뒤임으로 본래의 무사도는 끊긴지 오래되었으며, 어릴적 할아버지의 말들로 유추해가며, 서양의 기사도를 가미해 썼다. 정확히는 역사서가 아닌 소설책이며, 무사도도 새롭게 만들어진거다. 책 이름이 'Bushido: The Soul of Japan'
- ↑ 그 밖에도 주군의 명을 받아서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도 포함된다.
- ↑ 만약 평민이 사무라이의 흉내를 내어 두 자루를 차고 다니다 걸리면 참수형. 단, 많은 조공을 바치거나 막부를 위하여 공을 세운 경우 관청의 허가를 받아서 평민도 묘지타이토를 허가받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사무라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 ↑ 가벼운 질타나 감봉
- ↑ 에도시대에는 평민들도 자위를 위하여 날붙이를 소유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허가 되지 않은 것은 타치 같은 본격적인 일본도나 킬 두 자루를 차는 행위이다.
- ↑ 메수트 외질의 전 여자친구였으며 이전에는 페카 라거블롬의 배우자였다. 또한 독일 팝 가수 사라 코너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결혼은 그녀에게는 세 번째 결혼이다(...) 메수트 외질과 교제하던 당시에 무슬림으로 개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