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어 : Μιχαήλ Η' Παλαιολόγος 미하일 옥토스 팔레올로고스
라틴어 : Michael VIII Palaiologos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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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1223~1282
재위 : 1259~1261(니케아 제국의 황제) 1261~1282(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 | |||||
요안니스 4세 | ← | 미하일 8세 | → | 안드로니코스 2세 | |
라스카리스 왕조 | 팔레올로고스 왕조 | 팔레올로고스 왕조 |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며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Δυναστεία Παλαιολόγων)의 창시자.
목차
1 생애
1.1 즉위 전
아버지는 제국군 총사령관(megas domestikos)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콤니노스 팔레올로고스(Ανδρόνικος Δούκας Κομνηνός Παλαιολόγος)였으며 어머니는 알렉시오스 3세의 손녀인 테오도라 앙겔리니였다.
훗날 '아주 교활한 그리스인'이라고 불릴 정도의 책략가로, 젊어서부터 능력을 드러내서 용병들의 지휘관을 맡았으며 막 30여세가 된 1253년에는 이미 제국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동년 요안니스 3세의 종손녀인 테오도라와 결혼했으며 그 자신도 알렉시오스 1세의 먼 후손이었고 미남이기까지. 그야말로 엄친아.
때문에 당시 황제였던 테오도로스 2세에게 많은 견제를 받았다. 사서에서는 황제가 그를 질투했다고 하지만 사적인 감정 이전에 군주의 입장에서 보면 유능하고 인기있으며 혈통도 좋은 고위직 인물은 견제를 받는게 당연했다.[1] 문제는 테오도로스 2세가 아버지처럼 간질 환자인데다 주변의 정세가 불투명한 와중에 유능한 인물이 적다는데 있었다.
일단 1256년에 미하일은 역모죄로 몰려 룸 술탄국으로 망명했었다. 테오도로스 2세는 미하일을 다시 불러들여 총사령관직에 복직시켰으나, 대 이피로스 전선에 500여명의 병력만을 주고 투입시켰다. 그러던 1257년에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궁정 관료들의 불합리하다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차 투옥시켰다. 선조와 이순신의 관계가 떠오르지만, 여러차례 의심을 샀고 후일 실제로 반역을 저지른 것을 보면 테오도로스 2세의 시기섞인 의심은 미하일의 역심이 본인의 것이든 주변의 것이든지 간에 어느정도 타당해 보인다.
황제와 미하일파의 갈등이 격화되던 1258년 테오도로스 2세가 덜컥 죽어버리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어린 황제 요안니스 4세의 섭정으로 테오도로스 2세가 지명한 게오르기오스 무잘론과 요안니스 무잘론 형제가 있었으나 이들에게는 귀족층의 지지와 군사적인 기반이 너무나 부족했다. 때문에 섭정 형제들은 선황제 사후 8일만에 선황제의 장례식에서 참살당했고 차기 섭정으로 - 추측상 정변의 배후로 추정되는 - 미하일이 등극하게 되었다.
정황상 의심스러웠으나 선황제에게 부당하게 의심받았다는 여론과 마그니시아의 재무성에 있던 자금을 뿌린 덕분에 미하일은 사회 각층의 지지를 받았다. 귀족층은 물론이고 윤리적으로 까다로운 교회, 일반 신민 심지어 요안니스 4세에게도 말이다.
대내적인 지지와 대외적인 상황이 맞물려 돌아가자 그는 주변을 설득하여 1258년 12월 섭정 명의로 니케아 제국의 공동황제로 즉위했다.
1.2 영광의 치세 초기
국내의 정치판도가 변하는 와중 국외의 상황 또한 급변했다. 유력한 경쟁자였던 트레비존드 제국, 룸 술탄국, 불가리아 제국 등이 차례로 약체화 되어 가는 와중 니케아 제국이 두각을 드러내자 나머지 경쟁국들이 연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피로스 군주국을 중심으로 아케아-아씨나 공국, 테살리아, 세르비아, 시칠리아 왕국 등이 연합하였고 미하일은 동생 요안니스에게 야전군을 보내 출정시켰다. 1만 수천여의 니케아군과 2만여의 반니케아 연합군은 마케도니아 서부에서 격돌했고 이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니케아 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1259년 9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한 경쟁자들을 모두 탈락시킨 미하일은 옛 황도만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라틴 제국으로 눈을 돌렸다. 1260년의 공성은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라틴 제국의 후원자인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막혔으나 결국 1261년 7월 25일에는 총사령관 알렉시오스 스트라티고풀로스가 수비군이 떠난 틈을 타서 입성에 성공하였고, 보두앵 2세를 쫓아내고 황도를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1261년 8월 15일 미하일 8세는 환도식을 거행하였고,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와 함께 수복 된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1.3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
1.3.1 도망치는 집토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미하일은 1204년 이전으로 제국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수도의 성벽을 수리하고, 교회와 병원을 정화하고, 다시 유럽령 영토가 제국의 중심부가 될 수 있도록 복구 및 정복사업을 펼치는 등 대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것이 당연지사. 기존의 중심지였던 비티니아와 이오니아 지역으로부터 인력과 자원이 유럽으로 빠져나가자 소아시아의 주민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고, 구 제국령 수복을 위한 군비확장 때문에 중과세가 이어지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라스카리스 황실에 대한 처우도 불만을 키웠다. 어린 황제 요안니스 4세는 눈이 뽑혀 폐위 당했고, 니케아 제국은 군주국(Despotes)에 불과한 지방정권으로 격하되었다. 불굴의 영웅 테오도로스 1세와 희대의 명군 요안니스 3세 그리고 그들의 후손 테오도로스 2세와 요안니스 4세의 가계가 부정당한 것이다!
결국 다양한 요소가 결합한 끝에, 이러한 불만은 아르세니오스 아우토리아노스 총대주교의 황제에 대한 파문으로 폭발했다. 명목상으론 요안니스 4세를 실명시키고 폐위시킨 것이 이유였으나, 소아시아의 주민들은 니케아 제국에 대한 향수와 현정부에 대한 실망을 가진차에 중과세까지 이어지자 아르세니오스 총대주교에게 공감하기 시작했다.
1.3.2 분열의 시작
파문당한 황제는 총대주교에게 '양해'를 구하고, 파문을 거두어 달라 청했다. 꼬장꼬장하고 금욕적인 총대주교는 이에 황제가 굽히고 참회할 것을 - 마찬가지로 쿠데타로 제위를 차지했던 알렉시오스 1세가 거친옷을 입고 맨바닥에서 자며 40일 동안 사죄했던 것처럼 - 요구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총대주교가 라스카리스의 지지자들과 결탁한 것이라 의심해버렸고, 4년간이나 대립각을 세웠다. 1265년에서야 주교회의(Synod)를 열어 아르세니오스를 면직시켰으나 후임 총대주교도 황제와 대립하여 파문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1267년 새로이 총대주교가 된 요시포스가 파문을 거둠으로서 공식적인 갈등은 해소되었으나 여론은 악화 될대로 악화되어 소아시아의 주교들은 반항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이유가 근간에 깔린 종교계의 아르세니오스 분열(Arsenite Schism, Arsenian schism)은 50여년 간이나 이어져 극심한 사회적 분열을 초래했으며, 말기 제국사에 큰 그림자를 남기게 된다.
1.3.3 악몽의 다중전선
'집토끼'인 소아시아령이 극심한 여론 악화와 사기저하로 흔들리는 와중, 동쪽으로부터 튀르크의 침식이 시작되었다. 미하일 자신이 1261년에 정복한, 요안니스 3세 시절 부터 시작한 마지막 동방 수복의 마무리가 된 라오디키아(Laodikeia) 지역이 튀르크 부족들에 의해 넘어간 것이다. 라오디키아 자체는 경제적으로 중요하지도 않았고 동부 최전방에 불과 하였으므로 제국 측은 별다른 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중요한 것은 유럽의 전선들이었기에.
일단 베네치아 공화국이 후원하는 라틴 제국을 무너트렸으므로 제노바 공화국과 연합하여 해전이 주가 되는 전선이 형성되었다. 에게해의 섬과 베네치아 조계지를 수복하기 위한 이 전선은 엄청난 예산을 잡아먹으며 일진일퇴의 공방으로 1277년까지 이어졌고, 평화조약 이후에도 베네치아가 적대적으로 돌아서는 등 제국의 골치거리가 된다.
남은 망명정권인 이피로스 군주국과의 전쟁은 유럽에서 주 전선이 되었다. 제국군 총사령관이 패하자 동생 요안니스가 대타로 나갔고 미하일 본인도 친정하는 등 관심을 아끼지 않았고, 결국 이피로스는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부 그리스에 대한 원정도 이어졌다.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포로가 된 기욤 공작을 교황의 중재로 풀어주기로 하고 영토할양을 약속 받았으나, 이단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교황의 허가를 받은(...)약주고 병주고 기욤 공작이 영토 할양을 거부하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피로스 전선이 비교적 쉽게 풀려 사실상의 주 전선이 된 남부 그리스 전선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1264년이 되자 당분간의 진격은 정지되었다.
전선 자체는 3중(...)전선 이었으나, 외교적 적대 관계는 불가리아의 북, 룸 술탄국과 튀르크계 공국 및 부족의 동, 베네치아의 남, 이피로스와 주변의 테살리아, 아케아-아씨나, 세르비아 그리고 바다너머 시칠리아가 개입한 서부 까지... 동서남북뭐이미친으로 고립 된 희대의 다중전선이었다.
사방의 적을 거꾸러트리며 패권을 외치던 1025년, 1180년의 제국과 막 지역강국을 벗어난 1261년의 제국을 미하일은 착각한 것일까? 그러나 분명 벅찼음에도 전선은 유지되었고 최대한 국력을 기울여 전선 그 자체를 없애는 - 주로 남부 그리스가 된다 - 정책 자체도 타당해보였으며 기반인 소아시아가 유지되었기에 아직까지는 할만했다. 그러나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1.3.4 균열, 필사의 외교
1260년대의 제국은 베네치아와 겨루는 해군을 운용하면서 지역 수비를 담당하는 지방수비군을 두었고, 전선에 나갈 야전군을 따로 운용하면서 1만 미만 수천 단위로 3개의 전선에 동시에 파견했다. 거기다 펠라고니아 전투나 남부 그리스 원정에서 보듯, 제국이 작정하고 원정군을 조직하면 1만 수천을 넘겼다. 정예함이 예전만은 못했고 쉬이 집중하기 힘든 여건이었으나 어쨌든 군사력은 여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도 한계가 왔다. 소아시아의 사기가 떨어지고 제국 정부의 관심이 유럽으로 쏠린사이 튀르크 공국과 부족들이 1261년의 라오디키아 함몰을 시작으로 동부 국경을 본격적으로 넘어오기 시작한것이다. 유럽의 영토가 아직 복구 중 이었고 심지어 전장이 되기도 하여 사실상의 인적·물적 기반은 소아시아 지역이었기에 이는 중대한 사태였고, 미하일은 소아시아로 군을 보내 방어선을 정비하고 튀르크족을 몰아내면서 국경너머로 응징원정을 가했다. 그러나 이들을 통제할 룸 술탄국은 통제력을 상실한채 분해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고 일 칸국의 위협에 튀르크인들은 비교적 만만한 서쪽으로 재차 넘어왔다. 유럽의 전선을 유지한 채로 소아시아에 투입할 여력은 없었고 사실상 제국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미하일은 외교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일단 1265년부터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평화협상이 시작되었다. 동년 룸 술탄국의 상위 군주인 일 칸국의 칸에게 미하일의 딸을 시집보냈고 1266년에는 킵차크 칸국의 칸에게 다른 딸을 시집보냈다.[2] 튀르크족을 억제하기 위한 이러한 일련의 외교는 이후 불가리아의 북방 전선을 안정시켰고 칸국들로부터 지원을 이끌어내는 등의 결실을 보았으나 당장 급한 동부 국경의 위기를 진압하는데는 별 효과가 없었다.
서방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외교도 진행되었다. 이단으로 규정되어 서유럽과 단절 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교회통합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으나, 시칠리아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비테르보 조약(1267년)이 체결되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기존의 적인 시칠리아, 아케아-아씨나 공국 외에도 세르비아, 헝가리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등이 참여하였고 '이단 황제를 내쫓고 정통한 라틴 제국의 황제를 로마 제국의 제위로 복귀시키기 위한 십자군'이 계획 되었다. 에게해에서는 베네치아와의, 남부 그리스에서는 아케아-아씨나 공국과의 소모전이 다시 일어났다.
더 이상의 전쟁을 감당할 수 없던 미하일은 유럽의 전선을 안정화 시키고 동부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교황청에 굽히는 자세를 취했다. 시칠리아의 카를로 1세의 원정이 태풍으로 좌절되고 신임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가 올라 교회통합에 관대한 태도를 보이자 미하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협상에 열성적으로 임했다. 그렇게 1274년에 겉으로 나마 교회통합이 달성되어 외교적인 지위가 격상되었다. 덕분에 여력이 생기자 다시 알바니아의 시칠리아 세력을 밀어 붙였고 남부 그리스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이 실시되었다. 지상전의 경우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와 외교적으로 굴복시키는 정도로 그쳤으나 해전이 대체로 승리로 끝나서 1277년에는 베네치아와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1.3.5 위기의 절정
먼저 외교적인 이익을 위해 번갯불에 콩볶아 먹듯 해치운 교회통합이었기에 1274년의 통합 당시부터 국내의 반발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하일의 파문을 거두었던 요시포스 총대주교를 필두로 통합반대파가 생겨났으며 황제에게 적대적이던 아르세니오스 파 역시 통합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내부의 분열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동쪽에서는 다시 튀르크의 침입이 이어졌다. 1260년대 중반 잠시 잠잠했던 동부국경은 1270년을 전후하여 파플라고니아와 리키아 지역의 붕괴로 재앙의 막이 올랐으며 제국 정부 측은 일단 중요도가 높은 비티니아와 이오니아 지역이나마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팽창 된 군비로 인해 재정이 악화되었고 지방수비군이 와해 되었으며 튀르크를 쫓아낼 전투력과 기동력을 갖춘 야전군은 유럽에 묶여 움직이지를 못했다.
국외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그레고리우스 10세가 1276년에 죽자 후임 교황들은 동로마 종교계의 분열된 여론을 인식하고는 겉으로만 통합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미하일 8세가 외교적인 이득을 위해 자신들을 이용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결국 교회통합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으며 알바니아 지역에서는 다시 카를로 1세의 시칠리아군이 침략해왔다. 1280년 여름부터 시작된 베라트 공방전이 1년의 지루한 공성전 끝에 지쳐 나가떨어진 시칠리아 군을 제국군이 추격하면서 승리로 막을 내렸으나, 이미 제국 내부의 분열은 극심했고 제국의 대외관계는 카를로 1세의 앙주 가문 편을 드는 신임 교황 마르티누스 4세의 파문으로 다시 고립 상태가 되었다. 이미 1279년 교황청-시칠리아 왕국-베네치아 공화국[3]이 합의한 오르비에토 조약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목표로 한 해로 원정 계획으로 발전해 있었고 카를로 1세는 아케아 공국을 합병하여 원정로를 확보하고 라틴 제국의 명목상 황제를 사위로 들여 명분까지 확보했다. 동서남북으로 고립 된 악몽의 재래였다.
1.3.6 시칠리아의 만종
1282년의 제국은 더 이상의 전쟁을 감당할 수 없었다. 재정의 근간인 소아시아가 튀르크의 침입으로 붕괴되는 와중 유럽의 전선은 한계까지 확장되어 야전군이 묶인 상태였고, 베네치아와의 전쟁상태가 다시 시작되어 해군도 줄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종교계의 분열로 내부의 혼란이 계속되었고 재정은 이미 파산직전인데다 외교적으로는 다시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시칠리아 왕국의 카를로 1세였다. 서쪽의 위협을 제거해야 동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미하일은 대규모 군사원정을 반복하는 시칠리아 왕국도 국력의 소모가 심할 것이라 보았고, 이를 이용하기 위해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명분을 가진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를 충동질 했다.[4] 전쟁을 위해 반복 된 물적·인적 수탈로 불만이 쌓여있던 시칠리아 인들은 동로마 요원의 공작으로 더욱 불만을 키워갔고 아라곤 왕국은 시칠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동로마의 자금을 밑천삼아 함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대망의 1282년 3월 30일, 팔레르모 시에서 축제를 즐기던 시칠리아 인들에게 마침 파견되어 있던 프랑스 군인이 다툼을 벌이다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팔레르모 전역에 저녁기도를 위한 종이 울렸다. 만종 소리를 시작으로 시칠리아 섬 전역에 동시다발적인 반란이 일어나 프랑스인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살해당했고 4월 28일에는 마지막으로 버티던 메시나까지 점거당해 원정을 위해 주둔 중 이던 함대까지 불타버렸다.
주민들은 자신들을 교황에게만 충성하는 자유민으로 선언하였고,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카를로 1세가 군대를 보내자 '마침' 가까운 튀니지에 주둔하면서 '해적을 소탕하려한다'며 교황의 추궁을 회피하던 페드로 3세의 함대를 받아들였다. 결국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페드로 1세' 타이틀을 추가하는데 성공했고 반란과 그 진압을 위해 국력을 소비한 카를로 1세는 동방원정을 포기하고 시칠리아로 관심을 돌렸다. 그렇게 서쪽의 적은 치밀하고 정교한 외교·첩보 공작 끝에 제거되었다.
1.3.7 천사(Michael), 스러지다
서쪽의 복잡한 외교관계가 그럭저럭 단순해지고 위협도 사라지자 미하일의 관심은 동쪽으로 향했다. 야전군과 지휘관이 부족하여 실시하지 못했던 방위선 점검과 응징원정을 행하며 소아시아의 상황을 살폈고 유이민들을 불러모았으며 더 나아가 완충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트라케시아(Thracesia), 라오디키아 지역에 대한 원정도 계획했다.
그렇게 황제가 소아시아로 관심을 쏟는 사이, 잠잠해졌던 서쪽 전선이 테살리아의 침공으로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동방원정 계획을 잠시 접은 미하일은 이번엔 원정으로 빠르게 평정할 수 있으리라 보고 야전군을 소집함은 물론 사위인 킵차크 칸국의 칸에게 지원병까지 요청했다.
그러나 58세의 황제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 했다. 수도에서 서쪽으로 군을 이끌던 미하일은 쓰러져 트라키아의 파코미오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지를 못했고, 동서남북의 적과 23년간 쉴새없이 싸웠던 황제는 그렇게 죽었다.
2 평가
재위기간의 활동을 보면 능력있는 황제가 주변의 상황이 곤란하여 분주히 돌아다니다 뜻을 못 이룬것 같지만 착각이다.
당장 재정 악화만 보아도 군사활동을 줄였으면 소아시아를 보전하여 충분히 극복 가능한 수준이었다. 중앙야전군도 전대 황제들 덕분에 충실했고 지역방위를 위한 요새와 이를 지킬 수비군 역시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외교적으로 고립 된 지위를 자처하여 사방으로 적을 만들었고 나중엔 군사활동을 줄이고 싶어도 상황 자체가 악화 되어 그러지를 못했다.
종교계 건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더 자존심을 굽혔다면 파문 사태는 막을 수 있었고, 통합건 역시 외교적인 이득을 위해 섣불리 진행하다 더 큰 손해만 봤다. 종교지도자들이 당시에는 지역민들의 대변인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뼈아픈 실책이였다. 얼마나 종교계의 신망을 잃었는지, 사망 당시에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일단 암매장했다가 나중에서야 이장할 정도였다.
결국 미하일이 싸지른 일들은 후임 황제가 처리해야 했다. 평범한 수준은 되었던 안드로니코스 2세는 40년이 넘는 긴 치세 내내 군비축소, 종교계와의 관계개선, 대외 관계 재정립 등 조정의 시기를 지내며 안밖으로 굴욕을 감내해야했고 후대로부터 욕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미하일 8세의 증손자이자 안드로니코스 2세의 후임인 안드로니코스 3세의 시기가 되면 다시 적극적인 군사원정을 나설 정도로 제국은 국력을 추스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조정의 시기 동안 세르비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등이 성장해버렸고, 이후 내부 분열과 흑사병의 시대가 찾아오자 제국은 약소국으로 굴러떨어지게 된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정통 로마 제국을 복원한 업적이 있는 황제이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폭군이자 제국 멸망의 원흉인 암군으로 평가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