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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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43대 희강왕 김제륭44대 민애왕 김명45대 신무왕 김우징
시호민애왕(閔哀王)
김(金)
명(明)
생몰년도음력817년[1] ~ 839년 1월 23일 (23세)[2]
재위기간음력838년 ~ 839년 1월 23일 (2년)

1 개요

한국판 맥베스

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장자 인겸의 4남)인 대아찬 김충공(金忠恭, 후에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봉)이고 어머니는 귀보부인(貴寶夫人, 후에 선의태후(宣懿太后)로 추봉) 박씨이다. 부인은 각간 영공의 딸인 윤용왕후 김씨(允容王后 金氏)였다.

누이 중 하나는 희강왕의 왕후인 문목왕후(文穆王后), 또 하나는 신무왕의 계비이자 헌안왕의 생모인 조명부인(照明夫人)이다.

희강왕은 원성왕의 차남이었던 예영의 장손이었고, 민애왕은 원성왕의 장남 인겸의 넷째 아들의 아들이었고, 신무왕은 원성왕의 차남 예영의 손자였으니 그냥 가까운 친족끼리 서로 죽이고 오르고 했던 것이다. 참 잘나가는 족보다

민애왕 석탑에서 나온 기록에 따르면 흥덕왕 10년(835년) 18세의 나이로 시중이 되었다. 하지만 해신에서는 중년으로 나오던데... 얼굴이 노안이었다고 생각하자 후에 신무왕이 되는 김우징의 아버지 김균정이 상대등이 됨에 따라 물러나면서 대아찬이었던 그가 후임이 된 것인데 아마도 후에 왕위쟁탈전을 벌이는 두 파벌을 적절히 견제하려는 흥덕왕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흥덕왕이 죽은 후에 벌어진 왕위쟁탈전에서 아찬 김이홍(利弘)과 함께 김제륭을 밀었다. 이 과정에서 김균정은 살해되었고, 김우징과 김양은 도망갔는데, 김양은 화살까지 맞았다고 한다. 이에 희강왕은 다음해 그를 상대등으로, 이홍은 시중으로 높여주었다.

문제는 김우징이 청해진장보고에게 도망가고 왕족들이 합류함으로서 점점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는 것. 이에 다시 한번 쿠데타가 일어나고(838), 희강왕은 자결하고 김명이 민애왕으로 즉위한다. 상대등에는 아찬 김귀(金貴), 시중에는 아찬 김헌숭(金憲崇)을 임명했다.

2 반란과 최후

838년 2월 김우징이 드디어 장보고의 군사 5천을 빌리고 같은해 12월 평동장군 김양을 필두로 염장(閻長)·장변(張弁)·정년(鄭年)·낙금(駱金)·장건영(張建榮)·이순행(李順行) 등을 거느리고 난을 일으켰다. 무주(지금의 광주)로 진격한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월성을 향해 진격했다.

민애왕은 김민주(金敏周) 등을 파견하여 무주 철야현(鐵冶縣: 지금의 나주 부근)에서 반란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했다. 그리고 그대로 대구까지 밀린 모양. 그 다음해 1월 23일, 달벌(達伐: 지금의 대구)에서 10만의 대군을 파견하였으나 이런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토벌군은 싸움에서 대패하였다. 이때 절반 이상이 전멸했다고 한다.

민애왕은 별궁인 월유댁(月遊宅)으로 도망갔으나 김양을 따르는 병사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후 대왕의 예로 장사지냈다.

장지는 알 수 없다. 현재 경주에는 민애왕릉이라고 전해오는 왕릉이 있긴 하다.

민애왕 석탑에 대한 내용은 # 이 링크 참조.

3 삼국사기 기록

一年春一月 민애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一月 아버지를 추증하고 어머니를 선의태후로 삼았으며, 부인을 윤용왕후로 삼다
一年春一月 김귀를 상대등으로, 헌숭을 시중으로 삼다
一年春二月 우징이 청해진 대사 궁복의 도움으로 군사를 일으키다
一年冬十二月 김양이 평동장군이 되어 김민주의 군대를 철야현에서 대파하다
二年春閏一月十九日 김양의 군대가 달벌 언덕에 이르다
二年春閏一月 왕군이 패하고, 김양의 군사가 왕을 시해하다

  1. 경문왕팔공산에 세운 민애왕석탑의 사리함기에서 나온 기록이다. 연령이 꽤 젊은데 장보고를 다룬 각종 매체에서 민애왕은 어쩐지 중년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민애왕의 생년이 알려진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2. 삼국사기》신라 본기에는 19일로 나와 잇으나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1월 22일에 사망했다고 하고 있으며 『민애왕석탑사리함기』에서는 1월 23일에 사망했다고 나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