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

Miss Kim

金陽, 808~857년 8월 13일

1 개요

신라의 무장, 정치가.

2 생애

태종 무열왕의 9대손. 자는 위흔(魏昕). 원성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밀린 김주원이 그의 증조부다. 김주원의 첫째 아들인 김종기의 아들인 김정여의 아들이다. 신라 중대가 끝나고 하대로 갈수록 무열왕계 왕통은 정계에서 힘을 쓰지 못했지만 김양의 집안은 제법 잘 나갔다. 특히 헌덕왕 때 김주원의 둘째 아들인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김헌창의 난 참조)이 실패하고 그 혈족이 몰살당했는데도 김양의 집안은 큰 피해가 없었는지 아버지 김정여는 파진찬을 지냈다.[1]

김양 본인도 젊은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는데 고성군(경남) 태수, 중원(충주시) 대윤, 무주(광주광역시) 도독 등 지방 관직을 역임하면서 다스리는 곳마다 행정능력이나 근무실적이 뛰어났다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실에 왕위 다툼이 일어났는데 흥덕왕의 사촌인 김균정과 김균정의 조카인 김제륭(후의 희강왕)이 대립했다. 이 다툼에서 김양은 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후의 신무왕)과 함께 김균정을 궁으로 모시고 가 왕으로 받들고 그를 호위했으나 김제륭의 군사들이 곧 김균정이 있던 궁을 포위하자 화살을 쏘아 10여 사람을 맞추는 등 분전했지만 김제륭의 부하 배훤백(裵萱伯)이 쏜 화살에 다리를 맞고 부상당했다.

결국 수세에 몰리자 김균정은 김양에게 후일을 도모하라며 김양을 탈출하게 했고 김양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다. 그 사이 김균정은 결국 김제륭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양은 크게 통곡하고 태양을 가리키며 복수를 다짐하고 산야에 숨었다. 그러던 중 간신히 살아남은 김우징이 청해진장보고에게 의탁했다는 소식을 듣자 김양도 병사를 모집하여 자신도 청해진으로 들어가 김우징을 만나 거사를 도모했다.

그 후 신라 조정에서도 다시 반란이 일어나 희강왕이 자살하고 그를 지지했던 김명이 민애왕으로 즉위하자 이를 노린 김우징은 거사를 일으킬 것을 결의, 마침내 거병하였으며 김양을 평동장군으로 삼아 청해진 군사와 함께 신라군을 연전연파했다.[2] 달벌(현재의 대구)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에서 그 5천명으로 무려 20배에 달하는 10만 신라군을 괴멸시켜버리고[3] 신라의 저항 능력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이후 반군을 피해 도망다니던 민애왕을 잡아 죽여버리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추대했다. 전란 이후에는 민심의 수습에 힘썼다.

이 때 자신의 다리를 맞춘 배훤백을 불렀는데 배훤백에게 이렇게 말했다.

"개는 각기 그 주인이 아니면 짖는다.[4] 네가 그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사(義士)다. 나는 따지지 않겠으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한마디로 배훤백을 용서했다는 의미로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배훤백이 저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냐머 모두 안심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신무왕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문성왕이 즉위한 뒤에도 승승장구했다. 소판 겸 창부령을 제수하였고, 오래지 않아 시중 겸 병부령으로 영전했다.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는 검교위위경을 제수했다. 더욱이 문성왕 4년인 842년에는 그의 딸과 문성왕이 혼인하여 국구가 된다. 그야말로 국가의 공신이자 실세로 대접받으며 살아간 것.

아무튼 영화로운 말년을 보내다가 문성왕 19년인 857년에 50세의 나이로 집에서 죽었다. 부음을 들은 문성왕은 애통해하며 김양에게 각간을 추증했고 장례 절차는 모두 김유신의 예에 따르게 했으며 무덤은 무열왕의 능역에 함께 장사지냈다. 복수귀같이 살다가 결국 복수에 성공하여 승승장구했고 죽어서까지도 최고의 예우로 대접받은 후덜덜한 인물이다. 그리고 김양이 죽은 한 달 뒤인 857년 9월에 문성왕도 세상을 뜬다.

3 무덤

김양의 무덤은 지금도 무열왕릉 바로 앞 도로변 맞은편에 김인문의 묘와 함께 있어서 접근성이 좋다. 바로 옆에 중앙선 철길이 달리고 있어서 기차를 타고 경주에 오는 사람들은 차창 밖으로 지나가면서 거대한[5] 김양의 무덤을 얼핏 보고 경주에 왔음을 실감한다.

4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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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해신에서는 배수빈이 역할을 맡았는데 여기서는 악역이자 최종보스격 인물이다. 물론 장보고를 죽인 건 염장이지만 권력에 대한 욕망도 크고 꽤 야심만만한 인물로 등장한다. 일단 사료에서는 딱히 장보고와 대립했다거나 김양이 장보고를 견제했다는 식의 기록은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진골 귀족 김양과 밑바닥에서 출세한 지방 세력가 장보고가 좋게 지냈을지는 미지수. 더욱이 똑같이 신무왕 즉위의 공로자들임에도 장보고의 딸이 아니라 김양의 딸이 문성왕과 혼인한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볼 때 김양과 장보고가 알력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6]

  1. 다만, 김주원 계통은 후에 첫째 김종기 계통도 대가 끊겨 셋째 김신의 후손이 강릉 김씨를 형성하고 있다. 즉, 김양도 결국 후손이 끊기게 된다.
  2. 장보고는 이 때 부장 정연에게 5천 병력을 내 주어 김양을 도왔다. 이 병력이 청해진에서 서라벌까지 닥돌해가며 정부군을 연전연파하는데, 이 당시 신라의 군사력도 어지간히 막장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
  3. 10만 대군 중 반절이나 죽었다고 한다.
  4. 전한한신의 참모였던 괴철유방에게 붙잡혀 가서 했던 말이 원전이다.
  5. 물론 경주에 있는 신라 왕, 귀족의 무덤치고는 평균보다 작은 편이지만 경주 아닌 곳에서는 이만한 크기의 무덤은 보기 힘들다.
  6. 조선조의 국학자였던 안정복이 실제로 이러한 주장을 했다. 장보고가 죽을 때 김양이 재상이었으면서도 그를 위해서 변호 한 마디 해 주지 않았다면서 "세력과 명성이 자기와 대등했던 장보고를 꺼려서 그런 거 아니었겠냐"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