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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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47대 헌안왕 김의정48대 경문왕 김응렴49대 헌강왕 김정
시호경문왕(景文王)
김(金)
응렴(膺廉) / 의렴(疑廉)
생몰년도음력843년 혹은 846년 [1] ~ 875년 7월 8일 (30세 혹은 33세)
재위기간음력861년 1월 30일 ∼ 875년 7월 8일 (14년 181일)

1 개요

신라 제48대 왕.

제43대 희강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아찬직에 있었던 계명(啓明)이다. 희강왕이 헌안왕의 아버지인 김균정과 왕위쟁탈전을 벌였던것을 생각하면 특이한 사실. 그래서 그런지 스스로도 민애왕석탑이라든지, 과거의 왕위쟁탈전의 앙금을 봉합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있다.

선왕인 헌안왕은 딸만 둘이고 아들을 두지 못했는데 그 때문에 왕족인 김응렴에게 두 딸을 시집보내 자매덮밥 실현 사위로 삼았으며 왕위를 물려주었다. 여담이지만 이 때 얻은 딸 중 언니는 870년 5월에 죽었다.

2 치세

재위기간 동안 역병, 지진, 홍수, 흉년과 같은 재난이 심심찮게 터져나왔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진골귀족들이 걸핏하면 반란을 일으키거나 각종 모략을 꾸미는 등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는 수준이었다. 이게 어느정도냐면 즉위 6년(866년)엔 이찬 윤흥과 그의 아우 숙흥, 계흥이 모반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즉위 8년엔 이찬 김예, 김현 등이 모반죄로 처형, 즉위 14년엔 이찬 근종이 반란을 일으켜 대궐을 점했다가 근위군에게 격퇴되어 거열형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난장판을 무난히 수습하고 과의 외교관계도 정상궤도에 올리는 등 나름 무난한 치적을 쌓았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각각 순서대로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이 되었다. 자식 셋이 모두 왕이 된 건 한국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케이스.[2] 궁예도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니 이것까지 치면 네 명.

사실 실패한 개혁군주인 측면도 있기에 그에 대한 긍정적인 연구도 많이 나오고 있다. 예를 들면 국학의 쇄신을 위해 노력했으며 국비유학생까지 파견해 인재 등용의 폭을 넓히고 이들을 왕의 친위세력으로 만들려고 시도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귀족들의 반란을 제압한 것도 경문왕이 그리 녹록치 않았던 인물임을 보여준다. 위에 언급된 삼국유사의 뱀들은 사실은 경문왕이 육성한 친위세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망해 가는 나라에서 뭔가 해 보려고 노력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고려공민왕이나 조선흥선 대원군 포지션에 있는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3 설화

경문왕에 관련해서는 민간에 기록된 기담이 상당히 주목 받는다.

우선 헌강왕의 두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모두 전해지고 있다. 이 때 경문왕에게 세 가지의 이로움을 알려주었다는 사람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홍륜사의 스님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낭도 중의 우두머리인 범교사라 기록되어 있다.

헌안왕 4년 가을 9월. 임금이 임해전(臨海殿)에 여러 신하들을 모이게 하였는데, 왕족 응렴(膺廉)이 15살의 나이로 참석하였다.

임금이 그의 뜻을 알아보려고 갑작스레 물었다. “너는 한동안 유람하며 배웠는데 착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는가?”
응렴이 대답하였다. “제가 일찍이 세 사람을 보았는데, 그들이 착한 행동을 한다고 여겼습니다.”
임금이 물었다. “어떤 행동인가?”
응렴이 대답하였다. “한 사람은 높은 집안의 자제인데 다른 사람과 교제함에 있어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의 아래에 처하였으며, 한 사람은 재물이 많은 부자로 사치스러운 의복을 입을 만한데도 언제나 베옷을 입고도 기뻐하였으며, 한 사람은 권세와 영화를 누리면서도 한 번도 남에게 세도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 것은 이와 같았습니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있다가 왕후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내가 사람을 많이 겪었지만 응렴 같은 자는 없었다.”
그리고 사위를 삼을 생각으로 응렴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그대는 스스로 삼가고 사랑해라. 나에게 딸이 있으니 사위를 삼도록 하겠다.”
임금은 다시 술을 가져오게 하여 함께 마시면서 조용히 말했다. “내가 딸이 둘 있는데, 큰 아이는 금년에 20살이요, 작은 아이는 19살인데 그대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장가를 들라!”
응렴이 사양할 수 없어 일어나 절을 하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곧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부모가 말하였다. “듣건대 임금의 두 딸의 얼굴은 언니가 여동생보다 못생겼다고 하니, 만약 부득이 장가를 가야 한다면 여동생에게 장가를 가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응렴은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흥륜사(興輪寺)의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이 말하였다. “언니에게 장가를 들면 3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요, 여동생에게 장가를 들면 반대로 3가지 손해가 있을 것입니다.”
응렴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제가 감히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겠사오니 그저 왕의 명령에 따르겠나이다.”라고 하였고, 임금이 맏딸을 시집보냈다.
경문왕 3년 영화부인의 여동생을 2번째 왕비로 맞아들였다.
다른 날에 임금이 흥륜사(興輪寺)의 스님에게 물었다. “대사가 전에 말하였던 3가지 이로움이란 무엇인가?”
스님이 대답하였다. “당시에 왕과 왕비가 뜻대로 된 것을 기뻐하여서 당신에 대한 사랑이 점점 깊어질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이로움입니다. 이로 인하여 왕위를 잇게 되었으니, 이것이 2번째 이로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부터 원하던 둘째 딸을 취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3번째 이로움입니다.”
임금이 크게 웃었다. - 《삼국사기

또한 뱀에 관한 설화도 전해져오고 있다.

왕의 침전에는 날마다 저녁때면 들이 수없이 모여들었다. 궁인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쫓으려 하니 왕은 말히기를 "나는 뱀이 없으면 편히 잘 수가 없으니 쫓지 말라." 했다. 왕이 잘 때에는 늘 뱀들이 혀를 내밀어 온 가슴을 덮어 주었다. - 《삼국유사

무엇보다도 경문왕 관련된 설화 중에 유명한 설화가 바로 귀에 대한 설화로 이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한국 버전이 된다. 촉수애호에 당나귀 귀까지 대단한 왕이다.

왕위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당나귀 귀처럼 되었다. 그러나 왕후와 궁인들 모두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오직 두건을 만드는 장인 한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토록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도림사(道林寺)의 대나무 숲 속에 사람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대나무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생겼다!”
그 후로 바람이 풀 때마다 대나무 숲에서 이런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생겼다!”
왕이 이 소리를 싫어해서 곧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다. 그러자 바람이 불면 다만 이러한 소리만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 - 《삼국유사

4 궁예의 친아버지?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의 친아버지였다는 사람 중 하나로 거론되는 인물. 선왕 헌안왕의 서자라는 설도 있으나 정식으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궁예는 헌안왕설보다는 경문왕설이 상대적으로 더 지지를 받고 있는 편.

사극 태조 왕건에서는 경문왕 부친설을 채택하고 있다. 물론 궁예에 대한 혈통 논란은 이렇다할 정설이 없이 논란거리라는 것을 염두에 둘 것. 자세한 것은 궁예 항목 참고. 그리고 견훤이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왕의 재위기다(867년).

본래는 평범한 화랑이었는데 당시 공주 중 한 사람과 정략결혼을 당해 왕이 되었다고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왕의 그릇에 맞지 않아 스스로 괴로워하였고 항상 왕후에게 휘둘리는 처지였다. 내레이션에서도 '당나귀 귀' 설화를 줏대없는 그의 성격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정사는 제쳐놓고 방황하던 중 지나가던 여염집 아낙과 하룻밤을 보내어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이 바로 궁예. 처음에는 그의 첫 아들을 죽여 없애겠다는 위홍의 선언에 불 같이 화를 냈지만, 점을 보는 신하는 그 왕자가 재앙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던 차였고 결국 "어찌할꼬..." 상태에서 위홍이 독단으로 일을 저질러 궁예를 죽이려 한다. 그 이후는 알려진 대로 극적으로 탈출 성공.

이후 그 아들 궁예는 왕이 된 후 순행길에 허월의 추천을 받아 한 신라 왕의 영정이 걸려 있는 절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경문왕의 영정이었고 그 정체를 알게 되어 분노한 궁예에게 칼빵을 맞는 봉변을 당한다(...).[3] 궁예에게 있어서는 줏대 없이 휘둘리다가 갓난아기인 아들을 버린 비정한 아비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직후 궁예는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신라를 '멸도(滅都, 멸해야 할 도읍)'라 부르겠다고 선포했고, 궁예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스스로 자폭한 사건으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소문이 되어 버린다. 게다가 궁예가 하도 깊게 꽂아 안 빠지는 칼을 왕건이 쉽게 뺀 것도 심상치 않은 뒷소문을 불러왔고, 간접적으로는 궁예가 흔들림 없는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등 이래저래 이후 궁예의 행보를 엇나가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 드라마에서 경문왕은 극 초반 과거 회상씬에도 출연했었지만 이후로도 궁예의 평생 트라우마 중 한 축을 담당하여 그가 사경을 헤맬 때마다 망령 같은 모습으로 여러 번 등장한다. "궁예야아아... 애비이니라..." 신라의 왕자 태생이라는 점에서도, 속세의 혈육이라는 점에서도, 자기 인생 비극의 시작이라는 점에서도 미륵임을 자처하는 궁예에게는 평생을 두고 떨쳐내고자 했던 만악의 근원.

5 삼국사기 기록

一年春二月 경문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三月 죄수를 크게 사면하다
二年春一月 이찬 김정을 상대등, 위진을 시중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秋七月 견당사를 보내다
二年秋八月 견당사 부량 등 일행이 익사하다
三年春二月 왕이 국학에 행차하다
三年冬十月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다
三年冬十一月 눈이 내리지 않다
三年 영화부인을 얻은 세 가지 유익함을 논하다
四年春二月 감은사에 행차하다
四年夏四月 일본국 사신이 오다
五年夏四月 에서 왕을 책봉하다
六年春一月 왕의 부모와 부인 그리고 왕자 정을 책봉하다
六年春一月十五日 황룡사에 행차하고 백관에게 잔치를 베풀다
六年冬十月 이찬 윤흥 형제가 모반하다 발각되어 멸족되다
七年春一月 임해전을 중수하다
七年夏五月 서울에 전염병이 돌다
七年秋八月 홍수로 곡식이 익지않다
七年冬十月 10도에 사신을 보내 위문하다
七年冬十二月 객성이 태백성을 범하다
八年春一月 이찬 김예와 김현이 모반하다
八年夏六月 벼락이 쳐 황룡사 탑이 흔들리다
八年秋八月 조원전을 중수하다
九年秋七月 왕자 소찬 김윤을 당에 보내 물품을 진상하다
十年春二月 사찬 김인이 당에 가서 숙위하다
十年夏四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年夏五月 왕비가 죽다
十年秋七月 홍수가 일어나다
十年 눈이 내리지 않고 백성이 질병에 걸리다
十一年春一月 황룡사 탑을 고쳐 세우도록 명하다
十一年春二月 월상루 중수하다
十二年春二月 왕이 신궁에 제사지내다
十二年夏四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二年秋八月 황충이 곡식에 해를 입히다
十三年 구휼책을 시행하다
十三年秋九月 황룡사 탑이 완성되다
十四年春一月 시중 위진을 상대등에, 인흥을 시중으로 삼다
十四年夏四月 당 희종이 사신을 보내와 유지를 선포하다
十四年夏五月 이찬 근종이 반역을 꾀하다 죽다
十四年秋九月 월정당을 중수하다
十四年 최치원이 당에서 과거에 급제하다
十五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十五年 혜성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다
十五年夏五月 이 왕궁 우물가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다

十五年秋七月八日 경문왕이 죽다
  1. 843년 혹은 846년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헌안왕 4년(860년)에 나이 15세로 헌안왕의 연회에 참석하여 사위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이 일이 18세 때 있던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2. 아이러니하게도 윗동네인 발해강왕의 아들들인 정왕,희왕,간왕이 모두 왕 노릇했다. 물론 이쪽은 형제들끼리 치고박았다는 설도 있다. 다만 고려는 이런 일이 의외로 있었는데 태조(혜종, 정종, 광종)와 현종(덕종, 정종, 문종), 문종(순종, 선종, 숙종)도 아들 셋이 모두 왕을 했다. 인종의 경우 아들 다섯 중 셋(의종, 명종, 신종)이 왕이 되었다. 이 쪽은 무신정권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갈린 케이스.
  3. 심지어 칼을 맞은 자리에서 붉은 피까지 흘러나온다. 공중파 심의로 괜찮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