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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BO 리그의 투수
이름 | 박정현(朴庭鉉 / Jung-hyen Park) |
생년월일 | 1969년 7월 10일 |
출신지 | 경기도 수원시 |
학력 | 유신고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언우타 |
프로입단 | 1988년 태평양 돌핀스 고졸연고 지명 |
소속팀 | 태평양 돌핀스(1988~1995) 현대 유니콘스(1996~1998) 쌍방울 레이더스(1998~1999) SK 와이번스(2000) |
1989년 한국프로야구 최우수 신인 | |||||
이용철[1](MBC 청룡)) | → | 박정현(태평양 돌핀스) | → | 김동수(LG 트윈스) |
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21번 | |||||
. | → | 박정현 (1988~1998) | → | 조규제 (1998~2000) | |
SK 와이번스 등번호 21번 | |||||
구단 창단 | → | 박정현 (2000) | → | 조규제 (2001) |
나는 투수다 명예졸업자 이름은 박정현인데 얼굴이 김범수
190cm가 넘는 키와 그런 큰 키와는 어울리지 않는 땅 위 5cm 언더핸드 투구로 유명했던 선수로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쌍방울 레이더스, SK 와이번스를 거쳤다. 하지만 당시 감독에 의해 신인 시절부터 혹사를 당해 일찍 져버린 비운의 투수. 통산 성적은 65승 54패 21세이브 3.45
최창호,정명원과 함께 짠물 트리오, 돌핀스 트로이카 3총사로 불리었다.
태평양 돌핀스 현역 선수 시절
1989년 신인왕 수상 당시 정규리그 MVP 선동열과 함께깡말랐다.
(출처 : 포토로)
쌍방울 레이더스 현역 선수시절
(출처 : 포토로)
SK 와이번스 말년현역 선수시절
1.1 선수 시절
수원 유신고를 졸업하고 1988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했다. 입단 첫 해는 6경기에 출전하여 18 2/3이닝을 던져 7.71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첫해에 신인으로 평범한 활약을 했던 박정현은 2년차인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포텐을 터트렸다. 1989년 19승 10패 2세이브 2.15, 242 2/3이닝을 투구하며 신인왕을 품에 쥔다. 동시에 다승과 평균자책점 2위를 기록.[2] 당시 신인왕 후보로서 유력한 선수로 강기웅이 있었는데 김성근은 강기웅 견제를 위해 박정현에게 역대 최다승(그전까지는 MBC의 김건우가 18승으로 신인왕 최다승을 차지하고 있었다.)을 안겨 주기로 결심하고 8-1로 이기고 있던 대 해태전에서 선발 최창호를 강판시키고 박정현을 등판시켜 19승째를 올리게 한다.[3][4]스탯만 놓고 보면 밀어주기를 하지 않더라도 20승 이상을 노려볼만 했지만, 당시 태평양이 역대급 짠물타선을 자랑하는 터라 힘들게 완투해놓고도 패전을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끝판왕을 피해가지 않고 정면 승부를 펼쳐 계속 아깝게 패하면서 무산되고 만다. 그래도 이 때 세운 19승은 2016년 현재에도 역대 신인왕 최다승으로 남아있다. [5]
1989년 선발에 불펜 알바까지 병행하며 정규시즌에만 242 2/3이닝을 던졌던 박정현은 준플레이오프에도 맹활약 혹사 하게 된다. 박정현은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10월8일)에서 선발등판아여 14회까지 완투했다. 박정현이 1차전에서 던진 투구수는 173개였다. 1차전을 승리한 이후 모두 승리에 도취된 사이 박정현은 허리를 두 손을로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현은 단지 이틀만 휴식을 후에 3차전 5회에 다시 등판했다. 구단 측에 따르면 박정현이 자청해서(?) 구원등판한 것이라 한다. 박정현은 9회 2사까지 역투(투구수 75)했으나 마지막 한 타자를 남겨둔 상황에서 허리를 부여잡으며 마운드에 주저앉아 구급차를 타고 인천중앙병원으로 실려갔다.
1990년 13승 7패 7세이브 2.63 191 2/3이닝
1991년 10승 12패 3.47 184이닝
1992년 13승 7패 6세이브 3.69 165 2/3이닝
으로 4년 연속 두자릿수 승수를 따 내지만, 결국 언더핸드로서 그렇게 많은 이닝을 던진 게 탈이 나서 1993년에는 시즌을 통채로 날려먹으며 재활로 허비한다.
1994년 복귀에 성공했지만 예전의 위력을 전혀 찾지 못하고 몰락하여 패전처리 투수로 기용되었다. (1994년 4.54, 1995년 7.71, 1996년 6.89, 1997년 6.39의 방어율을 기록)
패전처리 투수로 4년여 동안 암울한 세월을 보내던 박정현은 1998년 조규제를 상대로 가내영과 함께 쌍방울 레이더스로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1999년 초반 4연승을 올리며 질주하던 박정현은 친정 팀 현대 유니콘스를 만나 무너지며 그 해 37경기 5승 11패 평균자책점 3.92로 그 해를 마감했다.
쌍방울 해체 후 아이러니하게도 SK 와이번스가 창단되어 기존 선수들과 계약하면서 다시 인천에 돌아왔다. 하지만 2000년 32경기에 등판해 1승 2패 평균자책점 5.75에 그친 후 SK에서 방출당하며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1.2 혹사 피해자
김성근 감독의 투수 혹사 대목에서 빼놓지 않는 선수가 박정현이다. 박정현이 선발 투수의 이닝으로 따지면 박정현이 아주 많은 이닝을 던진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노리타도 있다. 하지만 1989년에 선발과 불펜으로 정규시즌에서 242 2/3이닝을 던지고 준플레이오프에서 다시 18 2/3이닝을 던진 것이 무리가 아니라는 주장은 전혀 납득하기 힘들다. 1989년 박정현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와중에 무려 18완투(정규시즌 17, 준플레이오프 1)를 했다. 1989년의 박정현 기용은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후에도 3년 간 연평균 10완투를 했다.
1989년 태평양 돌핀스가 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을때 3차전에서 자진(?) 구원등판 9회 1사까지 던지다가 허리 통증으로 주저앉아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구급차에 실려가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당시에도 언론에서 박정현의 무리한 등판을 보고 “원년(1982년) 박철순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표했다. #
박정현의 부상은 큰 키에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리는 몸에 부담이 많이 가는 폼임에도 불구하고 마구잡이로 등판시켜 망가뜨린게 중론이다.[6][7] 언더핸드는 공자체의 무브먼트와 궤도의 메커니즘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버려 혼란시키는 투구폼으로 빠른구속은 엄두도 못내고 관리를 잘해도 부상이 있을까 말까인데 키까지 커버리니 이건 부상을 안 당할래야 안당할수 없는 노릇. 실제로 김성근 감독 역시 이러한 점을 인정했다. 대표적 언더핸드인 정대현이나 김병현같은 선수들은 신장이라도 루저다.정대현은 185인데?? 4년 동안 매시즌 평균 190이닝을 선발, 중간,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노예처럼 혹사시켰다는 점에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전성기인 1989~1992년 동안 최다 이닝 소화 3위 투수가 박정현이다. 1위는 이강철 어?[8], 2위는 윤학길). [9] 1994년 복귀하고 돌핀스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4명의 10승 투수를 배출하고 정명원이 40세이브를 돌파하는 위업을 달성했지만, 그는 이미 25세의 나이에 추락해 있었다.
1.3 은퇴 후
2009년 초까지 고양시의 주엽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일하다가, 주엽고 야구부가 해체하며 물러났다. 최창호의 말에 의하면, 그 해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
1.4 트라비아
2014년 4월 10일, 마구마구2014 1주년 기념방송 예고대로 89 박정현의 엘리트 카드 가 업데이트되었다.(다른 신규 엘리트는 95 전준호(가명:박현석), 06 권오준, 02 송진우(가명:박흥진).)
과거[10] 주간야구잡지의 기사에 의하면 태평양 돌핀스 시절 한솥밥을 먹던 염경엽 넥센 히어로즈 감독(당시 태평양 돌핀스 유격수)이 옷에 대한 코치를 해줬다고 한다.
SK 와이번스의 언더스로 투수 박종훈은 박정현이 롤 모델이라고 한다. 그리고 2015년 8월 15일 문학 두산전에 시구자로 나서 박종훈과 함께 시구하였다. 동영상 링크가수 박정현이 시구한 게 아니다![11]
마구마구에서 8월 26일 자로 엘리트카드가 추가되었다! 연도는 89년, 태평양 돌핀스이다. 그리고 마구같은 특이싱커 때문에 하위호환 레어는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1.5 역대 성적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4사구 | 탈삼진 | |||
1988 | 태평양 돌핀스 | 6 | 18⅔ | 0 | 1 | 0 | 0 | 0.000 | 7.71 | 25 | 10 | 8 | |||
1989 | 38 (5위) | 242⅔ (2위) | 19 (2위) | 10 | 2 | 0 | 0.655 | 2.15 (2위) | 183 | 95 | 116 (5위) | ||||
1990 | 35 | 191⅔ (4위) | 13 (5위) | 7 | 7 | 0 | 0.650 | 2.63 | 177 | 63 | 66 | ||||
1991 | 30 | 184 | 10 | 12 | 2 | 0 | 0.455 | 3.47 | 190 | 72 | 47 | ||||
1992 | 33 | 165⅔ | 13 | 7 | 6 | 0 | 0.650 | 3.69 | 154 | 84 | 85 | ||||
1993 | 부상으로 시즌 아웃 | ||||||||||||||
1994 | 11 | 37⅔ | 2 | 3 | 0 | 0 | 0.400 | 4.54 | 43 | 15 | 15 | ||||
1995 | 1 | 4⅔ | 0 | 0 | 0 | 0 | 0.000 | 7.71 | 4 | 5 | 2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4사구 | 탈삼진 | |||
1996 | 현대 유니콘스 | 8 | 15⅔ | 0 | 0 | 0 | 0 | 0.000 | 6.89 | 18 | 15 | 9 | |||
1997 | 13 | 25⅓ | 0 | 0 | 0 | 0 | 0.000 | 6.39 | 26 | 16 | 19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4사구 | 탈삼진 | |||
1998 | 쌍방울 레이더스 | 9 | 24⅓ | 2 | 1 | 1 | 0 | 0.667 | 2.22 | 21 | 12 | 13 | |||
1999 | 37 | 124 | 5 | 11 | 3 | 0 | 0.313 | 3.92 | 110 | 69 | 56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4사구 | 탈삼진 | |||
2000 | SK 와이번스 | 32 | 56⅓ | 1 | 2 | 0 | 0 | 0.333 | 5.75 | 75 | 38 | 24 | |||
통 산 | 508 | 1090⅔ | 65 | 54 | 21 | 0 | 0.546 | 3.45 | 1026 | 494 | 460 |
2 KBO 리그의 내야수
2.1 전 KIA 타이거즈 소속 내야수
이름 | 박정현 |
생년월일 | 1981년 6월 4일 |
출신지 | 서울특별시 |
학력 | 서울고 |
포지션 | 내야수 |
투타 | 우투좌타 |
프로입단 | 2000년 해태 타이거즈 2차지명 9라운드 지명 |
소속팀 |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2000~2003) |
KIA 타이거즈 소속의 내야수였다.
서울고 졸업 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으나, KIA 타이거즈 2군에서만 4년간 활동하고 2003년 방출되었다.
2.2 전 삼성 라이온즈 소속 내야수
이름 | 박정현 |
생년월일 | 1982년 8월 9일 |
출신지 | 서울특별시 |
학력 | 배재고-단국대 |
포지션 | 내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2002년 삼성 라이온즈 2차지명 10라운드 지명 |
소속팀 | 삼성 라이온즈(2006)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56번(2006) | |||||
허연철(2005) | → | 박정현(2006) | → | 추승민(2007) |
삼성 라이온즈 소속의 내야수였다.
배재고 재학 시절 삼성에 2차 10라운드 때 지명되었으나 단국대에 진학해 2006년 입단했다. 그러나 그해 방출되었다.- ↑ KBS N 스포츠의 해설자인 그 분 맞다. 그런데 가끔 야구팬들이 중앙일보에 계셨던 동명이인인 이용철 기자와 헛갈려 하는 경우가 있다. 조심하자.
- ↑ 이 때 돌핀스의 또다른 선발 최창호와 정명원은 평균자책점 3,4위를 기록하며 돌핀스의 투수력을 입증해보였다. 참고로 89년 다승왕과 평균자책점 1위는 선동열.
- ↑ 그리고 3년 뒤, 역사는 반복된다는 교훈대로 1992년 송진우가 19승을 기록할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염종석 문서 참고.
- ↑ 이때 박정현은 자기가 경기 안나갈줄알고 식당에서 라면을 먹고있었는데 갑자기 코치가 등판지시를 하니 당황해서 빨리먹다가 급체를 했다고(....)
- ↑ 참고로 데뷔시즌 최다승은 류현진의 18승.
- ↑ 이때만 해도 선수들의 제구 안정을 위해 언더 전향은 수시로 있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196cm 언더핸드 박진철도 그런 케이스. 하지만 박정현만큼 낮은 릴리스 포인트는 아니었다.
- ↑ 이는 전형적인 김성근 감독 쉴드론이다. '큰 키로 인한 무리한 투구 폼을 가진 투수'라면 그에 맞게 관리해 줘야 옳은 일이다
- ↑ 그시절의 언더핸드이면서도 이례적으로 롱런했지만 이건 이강철이 괴물이라고 봐야.. 그리고 그 이강철도 1년에 240이닝을 던지진 않았다. 참고로 이강철의 신장은 180cm.
- ↑ 다만 1980~1990년대 프로야구는 잘하는 투수 한 명이 선발-중간계투-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등판하여 경기에서 이기게 하는 투수 운용이 주류였다. 선동열, 송진우 등의 유명 투수들 역시 선발보다는 릴리프로 등판한 적이 많았으며, 웬만한 에이스급 투수들이 이런 식으로 등판하는 것 역시 일상사.
- ↑ 이 글에서 박정현이 당시 프로 6년차라 했으니 대략 1993년경이다.
- ↑ 참고로 가수 박정현은 2012년 LG 트윈스의 유니폼을 입고 잠실 야구장에서 시구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