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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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鍾泰
1920년 02월 19일 - 2007년 07월 16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1920년 광주군(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박정희 정권 때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전라남도 광산군 선거구에서 제6대, 제7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69년 예춘호, 양순직 등과 함께 3선 개헌을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였다.

이후 유신 쿠데타가 일어나고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나주군-광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김윤덕 후보와 민주공화당 임인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재야 소속으로 민주헌정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때 사회를 보다가 국군보안사령부로 끌려가서 고초를 겪었다.

전두환 정권 때는 동교동계 소속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광주직할시 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1년 상공위원회 뇌물 사건으로 구속된 이재근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국회 상공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과는 다른 계보인 정치발전연구회 소속이라는 이유로 민주당 공천에서 예비역 육군 소장 출신 임복진에 밀려 탈락하자 탈당하였다.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자 고문을 맡았다.

2007년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