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1991년)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민주당(1990년)/신민주연합당민주당(1991년)새정치국민회의
통합민주당(1995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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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1991년)의 당로고를 확인할 수 있는 사진.[1]

1991년 9월 16일 창당되어 1995년 12월 21일까지 존속한 한국의 정당. 제14대 국회 기간 동안 사실상 유일한 야당이었다.

민주당계 정당의 역사가 워낙 복잡하게 얽혀있어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현 민주당계 정당의 직접적 전신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정당 중 하나이다. 민주당계의 양대 계파인 동교동계와 친노계가 결합했다는 점에서 그 상징성이 크다.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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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3당 합당에 따라가지 않은 채 반년의 반항을 거친 꼬마민주당노무현 등 몇몇 스타 정치인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조직력의 현저한 약세를 절감하고 있었고, 3당 합당으로 졸지에 소수야당이 된 평화민주당은 재야 인사들을 영입하여 신민주연합당으로 개편하였으나 지방선거에서 패배해버렸고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에 맞서기 위해서는 야권 통합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에 두 당이 합당을 추진하여 1991년 9월 16일 민주당이란 이름으로 창당된다. 그러나 꼬마민주당의 박찬종, 김광일 의원과 고영구 부총재는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2]

당시 신민당과 꼬마민주당의 당세는 거의 10:1에 가까웠으나, 당명을 민주당으로 하고, 김대중이기택이 공동대표를 맡으며, 대의원 구성도 1:1로 하는 등 신민당 측이 많은 양보를 하였다.

여담으로 당시 영국의 외신은 1990년 창당된 민주당이 없어지고 1991년 민주당이 창당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다가 방송사고를 내는 바람에 그냥 자막으로 1990과 1991을 붙여서 보냈다고 한다. 그러니 헷갈리게 같은 이름으로 창당 반복하지 말자.

다음해인 1992년 3월 24일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3]에서 97석을 차지하며 선전하였으나, 부산직할시에서 출마한 노무현, 김정길 등은 전원 낙선하는 등[4] 지역구도의 벽을 뚫지 못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후보로 내세웠으나 막판 초원복집 사건으로 지역감정이 유발되고 민자당 지지층이 결집하면서 김영삼에게 190만 표 차로 패배하고 만다. 낙선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고, 그 후로는 이기택이 단독 대표로 당을 이끌었다.[5] 이후 통일국민당이 군소 정당으로 전락하면서 사실상 유일한 야당이 되어 민자당과 맞섰다.

1995년 3월 7일, 새한국당[6]을 흡수하여 당세를 확장하고,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선다. 조순 서울특별시장을 당선시키는 등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을 앞섰으나, 이기택이 동교동계와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천한 장경우 경기도지사 후보가[7] 민주자유당 피닉제이인제 후보에게 패하면서 이기택과 동교동계의 불화가 심화되는 결과를 낳고 만다. 그리고 결국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여 1995년 9월 5일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동교동계 인사들이 집단 탈당하면서 제2야당으로 전락한다.

다시 소수가 된 이기택, 노무현 등 잔류 인사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시민운동 계열 인사들과 합작을 모색하지만, 결국 1995년 12월 21일 개혁신당과 통합, 통합민주당(1995년)으로 개편하여 소멸되었다. 이후의 역사는 통합민주당(1995년) 항목 참조.

3 역대 선거결과

4 관련 항목

  1. 왼쪽부터 이종찬(1936), 이기택, 김근태. 1995년 입당한 김근태가 있는 걸로 봐서 1995년 전당대회 사진으로 보인다. 2016년 기준으로 이종찬을 빼면 전부 고인이 되셨다.
  2. 박찬종은 신정치개혁당을 만들었고, 김광일통일국민당에 입당하지만 14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대선을 앞두고 정주영의 당 운영을 비판하면서 탈당하여 김영삼 정부의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다. 고영구 부총재는 정계와 거리를 두고 본업인 변호사로 복귀했다가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정보원장을 맡았다.
  3. 해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이 자신과 거리를 두던 신민주연합당 내 정치발전연구회 소속 정치인 중 일부를 공천탈락시켜 논란이 되었다. 노승환은 이에 반발하여 탈당하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4. 부산 해운대구가 지역구였던 이기택은 전국구로 옮겨 낙선을 면했다. 다른 꼬마민주당 출신 의원 중에는 장석화(서울 영등포갑)만 살아남았고 1990년 진천-음성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던 허탁도 낙선했다.
  5. 다만, 당내 다수파는 동교동계였으므로 이기택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6.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존재했던 정당으로 전형적인 보수정당이었다. 1992년 대선 당시 김영삼에 맞서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민자당을 탈당한 이종찬김현욱, 이영일, 장경우 등과 함께 1992년 10월 창당했다. 주로 민주자유당 내 민정계(민주정의당)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름이 어떤 당신한국당과 비슷하다.
  7. 동교동계가 밀었던 인물은 이종찬이었다. 그런데 내면을 보면 둘 다 민정계의 새한국당 출신이라는 점에서 도긴개긴이었다.(...) 도대체 왜 충돌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