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요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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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육군제1야전군사령관
초대 백선엽2대 송요찬3대 유재흥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10대 백선엽
권한대행 이형근
11대 송요찬12대 최영희
역대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12대 장도영
권한대행 신응균
13대 송요찬14대 박병권


宋堯讚

1918년 2월 13일 ~ 1980년 10월 18일


6.25 전쟁 당시 활약한 국군의 장성. 거침없는 맹장으로 특히 미군들로부터 '타이거 송'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다른 평가로는 '석두(石頭)', 한마디로 돌머리가 있다(...).[1] 대충 어떤 스타일인지 감이 오시리라 믿는다.


2 전쟁 전

본관은 여산으로 1918년 2월 13일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출생하여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 8.15 광복 당시 일본 육군 오장(하사)까지 진급하였다. 광복 후에는 최경록 장군의 도움을 받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5월 1일 육군 참위(현재 계급으로 소위)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부산에서 제5연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하다가 그 해 9월 5일, 제5연대의 일부 병력을 중심으로 강릉에 제8연대를 창설하게 되자 그를 따라 강릉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강릉에서 대위로 진급, 1947년 3월 1일부로 제8연대 제3대대장의 지휘를 맡게 된다.

이후 소령 진급 후 제1연대를 거쳐 1948년 6월 11연대 부연대장으로 임명되어 제주도에서 공비 토벌 임무(라고 쓰고 4.3 사건이라 읽는다)를 수행중에 제9연대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육군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2.1 4.3 사건의 초토화 작전

대한민국 제1공화국 당시 실제 학살행위가 확인된 군인들
탁성록송요찬최덕신추가바람

한국의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조 이사무
제주도에서 북괴 이상의 만행을 저질러 국군의 명예를 더럽힌 자.

4.3 사건이 진상이 밝혀지기전만 해도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받았으나 4.3 사건이 재조명되면서 그가 지시한 학살행위가 드러났다.

해안선에서 거리가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역을 비워서 유격대를 고립시킨다는 것이 초토화 작전의 개념인데, 송요찬의 제9연대는 모든 중산간마을을 태워버린건 물론이고 거기 사는 주민들은 '모두 유격대를 도와주고 편의를 제공'한다고 가정하고 주민들을 대량학살한다는 계획을 골랐다.[2]

중산간마을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렸는데, 토벌대는 미처 내려오지 못한 주민들은 물론 소개령이 아직 안 내려졌거나 아직 내려받지 못한 마을에 사는 주민들까지 모조리 살해했다.[3]

또한 초토화작전 시기 때는 중산간마을 사람이 아니라도 청년들을 재판도 없이 총살하는게 흔했는데 중산간마을에서 해안마을로 도피해온 사람들도 청년이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해서 모두 죽이기도 했다. 역시 원래부터 해안선이나 그 가까이 마을에 살던 주민들도 가족중에서 청년이 없으면 마찬가지로 모두 죽였다.[4]

당시 토벌대로 복무한 이들의 증언이다.

난 9연대 군수참모로 제주에 갔습니다. 당시 인사참모는 최세인, 정모참모는 탁성록, 작전참모는 한영주였습니다. 제주에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인데, 하루는 직속부하인 구매관 강의원(姜義遠‧육사 4기생)이 안 보이는 겁니다. 알아보니 송요찬 연대장의 지시에 의해 처형됐다는 겁니다. 난 9월 1일부로 대위 진급을 했는데 9월의 어느 날 연대장이 부르더니 다짜고짜 ‘너 재판장 해라. 이 놈을 죽여야 돼!’라고 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범죄사실도 모르는 사람에게 덮어놓고 사형언도를 하라는 겁니다. 사관학교에서 군법회의에 대해 몇 시간 배우긴 했지만 재판을 해본 일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요. 재판정에 나가보니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사람이 반쯤 죽어 있었어요. 피고인은 제주도지사였던 박경훈이었습니다. 도지사 관사에서 쌀 한 말을 공비에게 줬다는 게 범죄사실이었지요. 쌀 한 말에 사람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 시골에서 쌀 창고 열쇠는 늘 할머니가 갖고 다니던 게 기억 나 “피고가 직접 쌀을 주었느냐?”고 물었지요. 이에 당시 57~58세 가량 된 박경훈 지사는 “아닙니다. 저도 구속돼 조사 받는 과정에서 알게 됐습니다. 우리 집사람 친척이 와서 굶어죽게 됐으니 도와달라고 해서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아무리 도지사 관사에서 쌀이 나왔다 하지만 부인의 행위를 책임질 수는 없으므로 무죄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법무관 등 몇 사람과 평의에 들어갔지요. 어떤 사람은 “사형 집행을 하라고 하는데 한 20년 어떻습니까?”라고 했습니다. 15년을 말하는 이도 있고, 10년을 말하는 이도 있고. 고심 끝에 심판관들에게 “이건 무죄이지만 부인을 데려다 사형을 한다고 하면 곤란하니까 한 3년이 어떻겠소?”라고 제안하고 동의를 얻어 3년을 언도했습니다. 아직도 무죄인 사람에게 3년형을 언도한 것이 양심에 가책이 됩니다. 어쨌든 재판결과를 연대장에게 보고했더니 “이 공산당 같은 놈의 새끼!”라며 철모로 나를 갈기는 겁니다. 하도 맞아서 머리가 크게 부었습니다. 같이 재판에 참여했던 최세인 인사참모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헌병대장 송효순은 동기생인데 매일 술을 먹고 괴로워했습니다. 물어봐도 말은 안 하고.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로는 헌병들이 사람들을 동굴에 몇 십명씩 데려다놓고 갈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한 것 같습니다. 그는 굉장히 착한 사람이거든요. 결국 손을 써서 중간에 제주를 떠났습니다. 또 한영주 작전참모는 밤낮으로 연대장에게 맞았습니다.
- 김정무(77세,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당시 제9연대 군수참모, 준장 예편, 육사2기 동기회장. 2002. 9. 25. 채록)의 증언.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보고서, 235

본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 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하여 군은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奉持)하여 차등(此等)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추를 가하여 본도의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자를 철저 숙청코자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 조선일보, 1948년 10월 20일.

Ibid, 264

이 포고문 속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대목들이 들어 있다. 우선 제주도의 지형상 진압대상 지역으로 설정한 ‘해안선으로부터 5㎞ 이외의 지점’은 한라산 등 산악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해변을 제외한 중산간마을 ( 제주의 마을은 ‘해변마을’과 ‘중산간마을’로 나뉜다. 행정에서 중산간이란 ‘표고 200m 등고선에서 표고 600m 등고선 사이의 지역’으로 정의된다(「제주도개발특별법」 제2조). 그런데 통상 해변에서 약 5㎞이상 떨어진 지역의 마을을 ‘중산간마을’이라고 부른다. 5㎞미만 지역의 마을이라 하더라도 해변을 따라 형성된 일주도로변의 마을보다 산쪽에 위치해 있으면 보통 ‘중산간마을’이라 한다.)전부가 해당된다.
Ibid, 264
9연대는 한라산 쪽을 향해서 내륙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적으로 간주했다
- Harold Fischgrund(81세, 미국 버지니아, 당시 9연대 고문관, 2001. 10. 20 채록) 증언.

Ibid, 265

당시 계엄령은 법적 근거도 없는 모호한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계엄사령관인 송요찬 조차도 계엄령이 뭔지 몰랐으니까요. 하루는 홍순봉 경찰청장과 함께 있는데 송요찬이 찾아왔어요. 우리 세 명은 일제 때 만주군과 일본군에서 같이 복무했고, 해방 후에도 함께 경찰전문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어서 서로 잘 아는 사이였지요. 송요찬은 홍순봉에게 ‘위에서 계엄령을 내리라고 하는데 어떡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계엄령이라면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하고 구체적 지침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송요찬도 답답한 노릇이었지요. 또 송요찬은 무식한 편이었습니다. 반면에 홍순봉은 일제경찰로서 만주에서 근무할 때 조선인 중에서는 최고직책을 얻을 정도로 실력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튼 홍순봉이 계엄령이니, 포고령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대신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중산간이라고 해서 무조건 죽인다는 것은 계엄령이라고 해도 안되지요. 일제 때 만주에선 그런 게 있긴 했습니다. 특정지역을 설정해 무조건 발포하는 것이지요
- 김호겸(서귀포경찰서장 역임)의 증언 (제민일보 4‧3취재반, 앞의 책, 377~378쪽)

Ibid, 280

송요찬 연대장은 초토화 작전을 폈다. 거처 가능한 곳을 없애라, 또는 불태워 버리라고 했는데 이런 건 육지에서도 없었다. 초토화 작전이 상부의 지시인지 또는 연대장 독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송요찬 연대장은 일본군 출신으로서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였다
- 윤태준, 73세,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 당시 제9연대 보급과 선임하사, 중령 예편, 2001. 5. 2. 채록 증언.

Ibid, 294
위의 증언들에서 확인 가능하듯이 제주도에 내려진 계엄령을 무차별 학살을 저지른 주범 중 하나다.

이러던 사람이 4.19 혁명 때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줘 서울시민들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하는 짓이 너무 다른 것에 해석이 여러가지다. 4.3 이후 사람이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고, 송요찬이 원래 무식한데석두라는 그의 별명을 보면 묘하게 설득력 있다 4.3 같은 사태를 본인이 지휘하는 입장으로 겪다보니 미쳐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4.19 혁명이 발발한 당시에는 군인들이 6.25 전쟁에서 고생하고 희생한 반면 경찰에 비해 대접이 좀 박했다고 한다. 그래서 군인들 또한 시민들만큼 국가에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고, 시민들이 일제히 봉기하자 군인들은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경찰과는 다른 행동을 하게 된 것. 제주도민들은 공산당으로 보였지만 서울시민들은 공산당으로 안 보이는 눈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사실 당시 제주도 사람들은 본토 사람과 말이 완전히 달랐다. 즉, 정말로 제주도민을 서울시민과 다른 사람으로 인식했을 가능성도 있다.[5]


2.2 4.3 사건 이후

제11연대의 제주도 평정작전 임무를 인수받아 수행하던 중 이듬해(1949년) 2월 제9연대 수도여단(여단장 이준식 대령)에 배속되어 서울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강릉에 주둔하고 있는 제6사단 제10연대장으로 전보되었다.

그는 제10연대장 재직시 '양양 돌입사건'[6]을 주도했고, 이 때문에 7월 24일 해임되었으나 군사재판은 면했다. 이후 육군보병학교 학생감과 제5사단 제15연대장을 거쳐 1949년 4월 최영희 대령 후임으로 헌병사령관에 임명되었다.


3 전쟁 중

좌천되었던 송요찬을 살린 것은 전쟁이었다. 헌병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은 전쟁 발발 당시 적의 공세에 밀려 대한민국 국군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자 헌병들을 진두지휘, 낙오병을 수습하여 국군을 재편성하는데 기여하였다.

이후 1950년 8월 10일 대구방위사령관에 임명되어 임시수도인 대구를 지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 해 9월 1일 백인엽 대령[7]의 후임으로 수도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송요찬은 안강과 경주시 부근에서 전투를 수행하여 1군단이 반격작전을 감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 전공으로 9월 20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수도사단은 이후 북진작전에서 회양, 신고산, 원산 점령에 이어 함흥, 흥남을 거쳐 (연해주-만주) 국경 인근까지 진출하는 등 맹활약하는데, 이러한 수도사단의 활약은 송요찬의 지휘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소만 국경을 목전에 두고 송요찬의 수도사단중공군의 남하로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1950년 12월 18일 흥남에서 묵호항으로 상륙한 수도사단은 1951년 1월 27일 다시 강릉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주로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 동부전선에서 활약하다가 중공군 5월 공세시 백선엽 소장의 명을 받고 적의 좌측 돌파구에 해당하는 대관령을 점령, 적의 강릉 진출 기도를 봉쇄하는 등의 활약[8]을 보였다.

이후 월비산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1951년 11월 15일 지리산 일대의 공비(빨치산)토벌을 위해 편성된 백야전전투사령부(사령관 백선엽 소장)에 배속되어 작전을 실시했다. 이듬해 1952년에는 새로 재편된 제2군단(역시 사령관 백선엽 소장)에 배속되어 춘천 북방으로 이동, 수도고지 전투 등을 수행했다.

1952년 7월 8일 육군소장으로 진급한 송요찬은 수도사단의 지휘권을 이용문 장군에게 인계하고 전라북도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남부지구경비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으로 영전했다.

그러나 1952년 10월 8일 다시 수도사단장으로 전보, 지형능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송요찬은 도미유학 대기 중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로 전황이 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금성의 동남방의 방어를 담당하던 제8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된다. 이때 송요찬은 금성천 이북까지 진출, 최후의 대공세였던 1953년 7월 13일 공산측의 공세를 물리치고 휴전선의 확정에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국군이 확보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4 전후

미 지휘참모 대학, 3군단장, 육군 중장 진급, 제1야전군사령관(1957년)을 거쳐 1959년 2월 백선엽 대장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임무를 수행하다가 4.19 혁명때는 이승만 대통령이 내린 비상계엄 지시에 따라 군 병력을 서울 시내에 진주시키기는 했지만, 절대 무력 사용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4.19 혁명 성공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4.19 직후 김종필 등 젊은 장교들의 정군운동에 따라 1960년 5월 23일 사임하고 14여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정군운동의 주역들은 함께 예편되었다가 이후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며 야심을 드러낸다. 5.16 군사정변 이후 장도영이 체포되자 송요찬은 군부의 내각수반국방장관을 역임했다.

1980년 10월 18일 6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5 대중 매체


김진태가 MBC 드라마 제2공화국제3공화국에서 해당 인물의 역할을 맡았다. 특히 제2공화국에서는 초반 계엄사령관 부분에서의 비중이 제법 높았다.
  1. 나중에 이를 알게된 송요찬은 "내가 석두(石頭)면, 그놈들은 철두(鐵頭)"라고 말했다는 후문/ 사람들이 자신을 '송석두'장군이라 불러 실제로 이름이 '송석두'라고 아는 사란들도 많았다. 하루는 한 병사에게 '너 내 이름을 아느냐'라고 묻지 그 병사가 '네! 송석두 장군입니다!'라고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송요찬 장군이 웃으며 '내가 석두면 너는 철두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2. 1차출처: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April 1, 1949. 2차출처: 4.3 진상조사서 449쪽
  3. 출처 4.3 진상조사서 378쪽~391쪽
  4. 출처: 4.3 진상조사서 391쪽~400쪽
  5. 경남지역에서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사건의 생존자 증언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그 사람들(토벌군)은 전라도 군인들이라 그런가...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더라." 같은 한반도 남부인 경상도, 전라도도 이럴 정도였는데, 제주도 사투리는 아예 이해 자체를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6. 1949년 동해안에 배치된 한국군 제6사단 10사단이 북한 제38여단이 계속 도발하자 1949년 7월4일 단독 북진해서 당시 북한 땅이었던 38선 이북의 양양(정확히는 양양 남부 일부)으로 돌입하고 남대천 이남의 80고지와 더 북쪽의 기사문리(현 양양군 현북면)라는 곳까지 점령한 사건이다. 북한군은 일시 후퇴하는 척하면서도 술수를 부렸다. 바로 그물로 가린 어선에 위장한 병력들 태워 남하, 그대로 국군의 후방을 기습공격한 것. 이를 잘 물리쳤으면 좋았겠으나, 한국군은 1개 중대 규모의 피해를 입는 대패를 맛보고 철수했다. 북에서는 제2차 고산봉 전투라고 부른다.
  7. 백선엽의 동생으로 인천대학교인천전문대학 등이 포함된 선인학원 이사장이었다. 망나니+막장으로 유명하다. [#]
  8. 사실 송요찬은 백선엽 장군의 명령을 쌩까고(...) 장시간 부대를 대기시켰다가 자칫 대관령 점령을 말아먹고 국군과 UN군의 전체 작전에 커다란 차질을 가져올 뻔했다. 참다못한 백선엽 장군이 직접 찾아가서 항명죄로 파면시키려고 하자 그제야 겁먹고 부대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