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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信
대한민국 공군의 참모총장 | ||||
5대 김창규 | → | 6대 김신 | → | 7대 장성환 |
김신 | ||||
1922년 9월 21일 ~ 2016년 5월 19일 | ||||
복무 | 대한민국 공군 | |||
기간 | 1948년 ~ 1962년 | |||
임관 | 공군 학사사관 2기 | |||
최종계급 | 중장 | |||
최종보직 | 공군참모총장 |
1 일생
김구와 최준례 사이에서 태어난 2남 2녀 중 차남. 형제들 중에서 누나들은 김신이 태어나기 전에 급사했고, 형인 김인은 1945년 요절했다.[1]
젊은시절 가족과 찍은 사진. 왼쪽부터 장남 김인 - 김구 - 김신.[2]
맨 우측 인물이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던 백범 김구를 수행하던 김신의 모습이다. 38선 경계에서 찍은 사진이다. 백범 좌측의 인물은 김구의 비서인 선우진이다.
김구가 매우 아꼈던 아들로, 일찍 죽은 형 김인을 대신해 아버지를 도와 여러 일을 수행했다. 해방 후에 위 사진과 같이 아버지를 따라 북한을 방문했다.[3] 아버지인 김구처럼 공산주의를 혐오했으며, 아버지가 암살당한 후 20대 후반의 나이에 우익으로 진로를 확정짓고[4] 대한민국 공군의 창군 멤버가 된다. 당시 일본군 출신자 중심이던 한국 공군에선 최연장자였던 최용덕 장군과 함께 소수의 중국 공군 출신 중 한 사람.[5]
6.25 전쟁 당시, 북한군과 빨치산 토벌에 앞장섰다.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유인촌 전 장관이 그의 배역을 맡은 바 있다. 전방에 나서지 않고 후방 빨치산 토벌에 참가한 것을 소외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사실 백범의 아들이 전방에서 지휘하다가 생포될 경우 벌어질 정치적인 문제를 본다면 후방 빨치산 토벌에 참가하는게 나은 일이다.[6] 그런데 실제로는 공군 전투조종사로 공중전에 참가했었다. 빨간마후라도 사실 김신 장군의 공군시절 이야기가 바탕이었다.# 게다가 이는 본인도 원하던 역할이었다. 정치관도 이승만 정권 입장에서 볼 때 확고하며 흠잡을 구석이 없는 반공주의자이고 확실한 기술관료로서의 자질 역시 충분했기 때문에 김구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이승만이 주도한 제1공화국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공군 10전투비행전대장 시절에는 유엔공군이 5백회 넘게 출격하고도 실패한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전장의 흐름을 바꾸었다. 이후 현역 장교로 공군본부 작전국장, 공군 제10전투비행단장 등 군내 요직을 역임하고 미국 유학을 거쳐 38세에 공군 중장으로 공군참모총장에 올랐다.[7][8]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당시 육군본부에 긴급 소집된 쿠데타군소속 각군 지도부회의 사진(게재는 1989년) 여기에는 장도영, 박정희, 김신도 끼어있다.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주 중화민국 대사[9]와 교통부 장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10] 등 힘든 길을 걸어온 아버지와는 달리 탄탄대로의 인생을 걸었다. 덕분에 백범일지 간행 등 아버지와 관련된 각종 사업들이 활발하게 전개할 수 있었고, 오늘날 김구가 가장 대표적인 민족지도자겸 독립운동가로 기억되는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창군기 열악했던 대한한국 공군을 설계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애쓴 공로와, 군사정변에 협력한 정치적 면모가 있다.
2016년 5월 19일, 향년 94세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공군의 창설멤버이자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군인이었으므로, 장례식은 21일 공군장으로 엄수되었고, 국립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2 여담
그의 자녀들(그러니까 김구의 손주들)은 대한주택공사의 사장, 국가보훈처장, 기업인 등 사회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런데 김진 전 주공사장은 뇌물을 받고 중요서류를 넘겨주는 범죄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또 김양 전 보훈처장도 와일드캣 도입 비리로 2015년 구속되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명성에 제대로 먹칠을 한 셈.
고명딸[11](백범의 손녀)은 빙그레 회장이자 국회의원인 김호연[12]과 결혼했는데 그 김호연은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13]의 동생이다. 덧붙여 하마터면 세상 빛을 못 볼 뻔한 백범일지의 간행 역시 그가 주도한 사업이다.
김신 이후 김구의 후손들에게서 공군장교가 계속 배출되고 있는데 사위와 외손자가 2대에 걸쳐 공군장교에 친손자도 공군장교! 공군장교 입대가 거의 집안 전통이 된 모양새다. 집안의 위상이나 인맥을 고려하면 한국 공군의 로얄 패밀리라 할 수 있다. 해방 직후부터 권력층에 편입된 독립운동가의 후손 중엔 가장 잘 나가는 케이스.
여담으로 1960년 그의 집에서 운전병 네명이 가스중독으로 질식사한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1992년 안두희가 고백(?)했을때, 그는 당시 소령에 불과한 김창룡이 어떻게 단독으로 암살을 지휘하냐며 041400209223002&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92-04-14&officeId=00020&pageNo=23&printNo=21794&publishType=00020 깠다.
그의 집에는 김구와 장제스가 악수하는 사진도 걸려있다고 한다. 장제스 동상을 국내에 보존하자고 하는 등 의리있는 모습을 보여줬다[14]. 1989년 때 북한에 납북될 뻔했으나, 당국의 조치로 막아냈다.
장우룡 화백의 그대에게/BOUT-1에서 군기 반장 역할을 하고 있는 염신현 중령은 김신 장군이 모델이다.
- ↑ 그도 아버지를 따라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주로 임시정부 소속 비밀공작원으로서 정보수집에 일조했다고 전해진다. 임시정부가 자리잡은 중국 충칭은 오늘날도 석탄 매연과 습한 날씨가 어우러진 심각한 대기오염으로 악명높다. 이로인해 당시에도 폐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며, 김인 역시 이를 피하지 못했다. 김인으 광복을 몇 달 남기지 못한 채 요절했다. 페니실린 주사를 맞으면 살 수 있었던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 김구는 "다른 동지들도 맞지 못한 비싼 주사를 내 아들이라고 해서 맞힐 수는 없다"라고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여담으로 그의 아내 안미생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조카로서, 남편 사후에도 김구의 비서역할을 수행했다.
- ↑ 당시 김신은 임시정부 내무부 민정과에서 활동했다.
- ↑ 당시 북한에서는 김구, 이승만을 격렬히 혐오하여, 곳곳에 두 사람을 원색적으로 비방하는 벽보가 나붙어있었다. 남북연석회의 개최가 확정되자 부랴부랴 벽보를 수거했는데, 채 떼지지 않는 벽보는 급하게 먹칠을 해서 가렸다고 한다. 그런데 애초 세초가 가능한 먹물의 특성상, 먹칠을 했음에도 마르면서 가려진 비방문구가 희미하게 드러나보였다고 한다(...). 자신을 맹비난하는 벽보를 가리키며 백범이 말없이 웃자, 북한측 수행원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얼굴만 뻘개졌다고 한다.
- ↑ 애시당초 백범 선생도 김일성의 암살 미수에 개입한 적이 있었고, 그 전부터 자유시 참변 등으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을 싫어했다. 임시정부에 좌익 계열이 사실상 없던 것도 초기 임정의 진로를 둘러싸고 김구 등이 주축이었던 현상유지파와 갈등을 겪던 창조파와 개조파가 후에 임시정부에서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창조파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신채호였다. 물론 신채호는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좌익 독립운동가들과 친했을 뿐 본격적인 좌익이라거나 공산주의자로 볼 수는 없다.
- ↑ 미국에서 비행교육을 받은 탓에, 미군이 작성한 대한민국 공군의 출신성분 보고서에는 미군 출신으로 기재되어 있다. 다만, 해당 보고서에는 일본 항공사에서 민항기를 몰았던 사람을 일본군 수송기 조종사(...)로 기재하기도 했다.
- ↑ 김신 장군은 자신이 백범의 아들보다는 전투기 조종 실력이나 전쟁시 공적으로 평가받는걸 더 선호한다.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은 것은 군인으로서의 당연한 자존심이다.
- ↑ 당시 각군 참모총장은 중장 계급이 맡는 일도 흔했다. 당장 5.16 당시 장도영도 중장 계급으로 육군참모총장을 맡고 있었다. 심지어 최경록 장군처럼, 참모총장을 역임한 뒤 서열상 하급자인 2군사령관으로 이동하는 일도 있었는데 이것이 당시로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 ↑ 38세라는 나이에 참모총장이 된 점은 지금 시선에선 벼락출세로 보이겠지만, 식민지배를 겪어 인력풀이 적은데다 창군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당시로선 흔한 일이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진급한 3,40대 장군, 제독들이 넘쳐나던 시대였다.
- ↑ 신생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서 당시 대만은 미국 다음 가는 우방국이었다.
- ↑ 참고로 초대 독립기념관 관장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이자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안춘생 장군이다. 이후 노무현 정권 당시 임명된 김삼웅을 제외하면, 역대 관장들은 독립운동가 또는 그 후손들이 임명되었다.
- ↑ 외동~이란 표현을 쓰려면, 자녀가 그 딱 한 명이어야 한다. 이 경우 아들 가운데 딸이 있는 것이므로 고명딸이라 부르는 게 맞다.
떡국 같은 데 올리는 고명 맞다. - ↑ 김호연 역시 공군장교로 군복무를 했다.
- ↑ 아들 문제로 불미스러운 일을 벌인 바 있다. 비자금 조성 혐의로 2011년 1월 31일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으며, 결국 수감생활 했으나 사면되었다. 여담으로 그 역시도 공군장교 출신이고, 아시안게임 승마 금메달로 병역을 마친 막내아들이 예외일 정도로 다들 공군 장교 출신이다. 심지어 누나 김영혜도 공군장교로 복무했다.
군사기업(한국화약)이니까 당연하지 않나? - ↑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존속이 어려웠을 것이다.
- ↑ 김신은 2016년 5월 19일 별세했고, 필리프 드 골은 아직 생존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