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차승 백 (Cha Seung Baek)[1] |
한국명 | 백차승(白蹉承) |
생년월일 | 1980년 5월 29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
출신학교 | 부산고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8년 시애틀 매리너스 아마추어 FA 계약 |
소속팀 | 시애틀 매리너스 (2004, 2006~2008)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8~2009) 유마 스콜피온스 (2010) 오렌지 카운티 플라이어스 (2010~2011) 오릭스 버팔로즈 (2012) 무사시 히트 베어스 (2015) 지바 롯데 마린스(2015) |
1 개요
한국계 미국인 야구 선수로, 보직은 투수이다. 메이저리그에서 잠시 활동한 적이 있으며, 2012년은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뛰었다. 2015시즌 종료 후 무소속.
2 아마추어 시절
부산고 시절, 차승 백은 최고 150km/h를 넘는 불같은 강속구를 던지는 우완 파이어볼러로 1학년 때부터 다른 선배들을 제치고 에이스로 활약하며 팀을 봉황대기 4강에 올렸으며, 2학년 때는 고려대 측과 입학 가계약에 합의했을 정도로 누구나 다 인정하는 초고교급 투수였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한국 청소년 대표팀으로 선발된 차승 백은 1998년 9월 12일 일본에서 열린 대만과의 경기에 선발로 출전했다. 5회까지 피칭을 마친 그는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며 투수 교체를 요구했고, 이에 최주현 당시 청소년 대표팀 감독은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것은 허락하고, 대신 1루 수비를 볼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백차승은 이러한 지시를 무시하고 그대로 덕아웃으로 들어와 버렸으며, 이후 경기는 한국의 역전패로 끝났다.
문제는 해당 경기 직후 차승 백의 감독 지시 거부 사실이 사방팔방으로 퍼진 데다 차승 백의 아버지가 미국행을 위해 일본까지 찾아와서 태업을 조장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언론을 통해 나온 바람에[2] 분위기가 엄청나게 험악해졌다는 것이다. 결국 대한야구협회는 이후 상벌위를 열고 감독과 차승 백에게 각각 징계를 내렸으며, 그 중 차승 백은 무기한 자격 정지 처분을 받게 된다.
이러한 징계 처분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긴 한데, 일단 당시 차승 백에 대한 여론이 너무나 나빴던 터라 그냥 넘어가는 건 불가능하고, 어떤 식으로든 처벌이 내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그 내용에 비해선 이게 엄청 대단한 중징계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 무기한 출전 정지는 아마추어 야구대회를 주관하는 대한야구협회(KBA)에서 받은 처벌이지 프로리그를 주관하는 한국야구위원회(KBO)로부터 받은 게 아니기에[3] 한국프로야구 리그와는 무관한 징계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차승 백은 징계 당시 이미 3학년으로 졸업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물론 현재는 KBA-KBO 협정이 개정되어, KBA에서 무기한 출전 자격 이상의 징계를 받은 선수는 징계 해제일로부터 1년 이상 경과해야만 KBO 구단에 입단할 수 있게 되어 있다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규정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국내 프로야구 리그에서 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해당 징계 탓에 국제 대회 출전에 지장이 생길 수 있긴 하지만, 야구는 축구와 달리 A매치/국가대항전이 매우 드물고, 리그 경기를 우선시 할 때가 많은 터라 국제 대회 출전은 실상 큰 문제가 안 된다. 더욱이 그대로 국내에 남아 정상적으로 지명을 받아 국내 리그에서 뛰며 실력을 키웠다면 KBO 측의 입김과 언론의 압박에 의해 그나마의 징계도 얼마 안 가 풀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심지어 그 김성민의 징계도 얼마 안 가서 해제됐다.[4][5]
그럼에도 이 일로 인해 한국에서 뛰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한국에서 뛸 마음이 전혀 없던 건지 차승 백은 해당 사건 이후 곧장 미국으로 떠났다.[6] 여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론은 존재하나, 실상 당시 인터뷰 내용 등을 찾아봐도 알 수 있듯 본인의 미국 진출 의지가 무척 높았던 터라 징계 여부와 관계없이 한국에서 뛸 생각은 없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더욱이 KBA의 징계 내용이 발표된 것이 1998년 9월 24일 오후인데,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을 마무리한 것은 그 다음 날인 9월 25일이란 것만 봐도 이미 오래 전에 구체적인 선까지 미국 구단과의 계약을 진행해 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실질 협상은 같은 해 5월부터 시작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여담이지만 당시에는 관련 규정이 없었다고는 하지만,[7]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명백한 템퍼링으로, 아무리 규정이 없었다고는 해도 그런 일을 벌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리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든 게 사실이다.
3 프로 시절
1998년 9월 25일, 시애틀 매리너스와 입단 계약을 맺은 차승 백은 잠시 한국으로 돌아와 신변을 정리한 뒤 미국으로 완전히 건너갔다. 하지만 시애틀 입단 이후에도 잦은 부상을 겪으며 수차례 수술대에 올랐고, 이 과정에서 구위가 크게 떨어졌다. 구위 하락에 따라 성적 역시 매우 실망스러운 수준이었으며, 이때 받았던 평가가 '구속만 빠를 뿐이지, 다른 면은 한없이 평범한 투수'였다.
이후에도 계속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르내리다가 2008년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 되었는데, 로테이션을 꾸준히 돌며 6승을 거두는 등 그나마 미국 진출 이후 가장 좋은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다시 부상이 찾아왔고, 결국 이듬해인 2009년 10월 8일 샌디에이고에서도 방출당했다. 결국 수많은 마이너리그 유망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의 한계에 부딪쳐 특별하게 내세울 것 없는 그저 그런 선수로 전락한 것이다.
2010년 초, 인터뷰를 통해 언플과 함께 구단에서 방출된 이후 일본 측의 오퍼를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이후 2년 동안 독립리그에서 메이저리그의 재기를 뛰었으나 별다른 실적을 올리지 못했으며, 다른 메이저리그 구단의 제안도 받지 못했다.
2011년 말, 일본 측 오퍼를 쭉 거절했던 차승 백은 오릭스 버팔로즈의 테스트를 받고, 1년간 계약금 포함 4,000만엔이란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한국행 제의도 왔으나 외국인 선수 신분으로 뛰어야 하기 때문에 포기했다고 한다. 물론 이번에도 언플은 잊지 않았다.
하지만 2012년 시즌 시작 당시 심각한 팔꿈치 통증이 발생하여 6월까지 계속 재활에만 매달려야 했다. 이후 어느 정도 회복하긴 했지만 2군에서 몇 차례 등판했을 뿐 결국 1군 무대는 단 한 번도 서지 못했다. 본인은 오릭스에 남길 희망했으나 오릭스 입장에서는 재계약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후 2012년 11월 경에는 한국으로 입국, 부산에서 개인 훈련을 하며, 국내에서 뛰고 싶다는 의사를 재차 밝혔다. 다만 이마저도 인터넷 검색이나 기사를 봐도 매우 짤막하게 언급되는 수준이며, KBO는 물론 구단들 역시 아무런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활약할 여지가 남아 있는 베테랑 투수인 건 사실이나, 각종 규정과 병역 문제를 무릅쓰고 영입해야 할 정도로 매력적인 선수는 아니라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다.
결국 2013년 들어서도 그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밝힌 구단은 나오지 않았으며, 최악의 경우 이대로 반 강제 은퇴 수순을 밟을 가능성까지 생겼다. 2013년 5월 국내 보도에 의하면 이미 마이너리그라든지 일본 실업리그까지 가서 테스트를 받았으나 모두 탈락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별다른 근황이 나오지 않다가 2015년 2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입단 테스트에 참가했지만 결국 탈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4월 10일 일본의 독립 리그 BC리그의 팀인 무사시 히트 베어스(武蔵ヒートベアーズ)에 입단하면서 어찌어찌 끈을 계속 붙들게 됐다. 그리고 아직 프로 무대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지 2015년 7월 28일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결국 성공해 공식 입단했는데, 2015시즌 2군리그에서 4경기에 등판해 1승, 평균자책 3.95(13 2/3이닝 6실점 6자책), 20피안타 6피사사구 8탈삼진을 기록했으며 1군 승격은 하지 못한 채 시즌 종료 후 팀을 나왔다. 한신 타이거스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불합격되었고, 2016년으로 넘어 와서도 팀을 구하지 못한 상태.
여담이지만 2013년 경에 무기한 자격정지 징계가 제1회 WBC를 앞두고 있던 2006년에 이미 풀렸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요약하자면 WBC 당시 차승 백을 대표팀 멤버로 차출할 계획을 잡고 KBO가 직접 KBA에 요청, KBA가 이를 받아들여 징계를 해제했다는 이야기다. 징계 해제 이후 1년이 지난 만큼 KBO에서 뛸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만족한 셈이지만, 단지 그뿐이다. 차승 백의 경우는 아래에 언급할 국적 문제 및 병역법 위반으로 인해 여전히 국내에서 뛸 수 없는 처지다.
4 국적 문제와 언론 플레이
1999년 해외 유학을 사유로 병역 연기를 요청했고, 국방부 측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1년 후인 2000년 연기 기간이 만료되고 추가 연기 신청 요청이 없자, 그를 징병검사 대상자로 선정한다. 같은 해 6월 별다른 사유 없이 징병검사에 불참하면서 국방부는 그를 병역기피 의심자 겸 출입국 사무소 즉시 통보 대상자로 분류했으며, 이에 아버지 외 1명이 귀국 보증을 선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차승 백이 재차 국방부 측의 귀국 요청에 불응하면서 결국 병역법 위반 혐의로 고발 조치되었고, 아버지 외 1명은 귀국 보증 위반으로 각각 5천만원의 벌금을 부과 받았다. 이후 2005년 미국 국적을 가진 여성과 결혼하여 한국 국적을 포기함과 동시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고, 그해 겨울 미국인 신분으로 한국에 귀국이 아닌 입국을 한 바 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 치고는 그 진행 과정이 꽤 치밀한 느낌인데 각종 인터뷰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선 항상 이야기하길 거절하는 탓에 그가 미국 국적의 여성과 결혼한 것 외에도 뭔가 다른 방법으로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스티브 유 문서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미국 국적(시민권) 취득은 기간이 오래 걸리고[8] 절차도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간혹 병역기피를 위해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일 때문에 그를 스티브 유 같은 놈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존재하며, 이에 대해선 저마다의 시각에 따라 다소 의견이 갈리는 편이다.[9]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2005년도 이후부터 차승 백은 한국에서는 도저히 야구할 길이 없어 어쩔수 없이 미국으로 진출한 것이며, 이후에는 제2의 스티브 유이란 식의 비난을 받은 탓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며, 자신은 KBA 측 탁상행정의 억울한 희생자라는 언론플레이를 지속적으로 벌였다는 점이다.[10]
물론 상술한 바와 같이 자격정지가 내려진 것에는 KBA의 행정 문제도 어느 정도 작용했으며 해외 진출이나 국적 변경 자체로는 병역법 위반 빼고는 크게 욕을 먹을 만한 구석이 없겠지만, 한국에서 야구를 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사실 왜곡이다. 아무리 야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당시 KBA에서 무기한 자격정지를 받았다 해도 얼마 안 있으면 시행될 신인드래프트를 통해 프로 구단 입단도 가능했을 터이며, 설령 자격정지로 인해 프로 구단 입단에 실패해 해외로 진출했다 해도 KBA 자격정지는 2006년에 이미 해제된 상황이었기에 국적을 변경하지 않았다면 메이저리그에서 실패하더라도 국내로 돌아와서 군복무를 마치고 2007년에 있었던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를 통해 재기를 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언플이 먹혔는지 빅토르 안이 2014 소치 동계올림픽 3관왕을 달성한 이후 선수 유출/귀화 문제를 다룬 기사에 차승 백의 사례가 나오기도 했는데, 애초에 해외 교포 출신인 미셸 위, 추성훈, 이충성이나 훈련 환경 악화를 견딜 수 없어 타국으로 귀화한 빅토르 안의 사례와는 달리 차승 백은 한국에서 우대 받으며 성장할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며, 그곳에서 좀처럼 성장하지 못한 탓에 병역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어지면서 미국 국적 취득한 것이지, KBA나 KBO가 자신들의 위신을 위해 유망한 선수 하나를 죽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언론플레이만 보고 괜한 오해는 하지 말도록 하자. 뭐 아무리 언론플레이 해도 이젠 몸도 예전 같지 않고, 심지어 나이도 너무 많이 먹어서 슬슬 은퇴를 고려해야 할 시기다 보니 탐낼 만한 구단 자체가 없다.
5 기타
제2회 WBC 당시, 샌디에이고의 5선발로 그럭저럭 활약하고 있던 차승 백을 국가대표로 선발하자는 이야기가 김인식 당시 대표팀 감독으로부터 나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접한 차승 백은 국제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팀내 입지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국가대표로 뽑힌다 하더라도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박찬호가 불참 의사를 밝힌 직후였던 터라 김인식 감독이 어려운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언론플레이를 했을 뿐, 별다른 뜻은 없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다. 차승 백이 대표팀 합류를 원했더라도 실제 선발됐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가 병역법 위반 사범이란 것만으로도 충분히 논란거리가 되는데[11] 그런 구설수를 감수하고 선발해야 할 정도로 뛰어난 선수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떻게 보자면, 생각없이 무작정 미국행을 택하는 많은 유망주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산 증인이기도 하다. 메이저리그에서 오퍼가 들어올 정도의 유망주라면, 한국에서는 좋은 대우와 지원을 받으며 상당한 시간을 들여 성장할 만한 기반을 얻을 수 있다. 더욱이 이전에 비해 한국 프로야구 리그 자체에 대한 세간의 평가도 많이 좋아진 터라, 류현진, 강정호와 같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성공을 거둔 뒤 만족스러운 조건에 메이저리그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설령 윤석민과 같이 해외 리그에서 적응을 못하고 실패하더라도, 한국에서의 실적만 있다면 돌아오더라도 충분히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미국행을 택할 경우 생활 방식도 다르고 말도 안 통하는 상황에서 좋은 대우나 지원을 기대하긴커녕 거의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하며 우월한 신체 능력과 재능을 갖춘 북미, 중남미 계열 선수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이 경쟁에서 승리[12]하면 정말 다행이겠지만, 무릎 부상을 당하는 등 여러 팀 마이너를 거친 끝에 옵트아웃을 선언하고 귀국한 이학주의 사례와 같이 부상 등 한순간의 실수로 경쟁에서 밀리면 그야말로 나락까지 추락하게 되는데, 보통은 버리는 카드 수준으로 전락하여 여러 구단으로 돌려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부상을 털고 기회를 잡아 재기할 수 있다면 모를까 어지간해서는 끝내 방출되고 이후엔 독립 리그나 타국 리그 용병으로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가 선수 생활을 마감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박찬호와 김병현 이후 미국으로 수십 명에 달하는 고교 유망주들이 건너갔으나 결국 살아남은 건 추신수 뿐이고, 대부분은 메이저리그를 밟아보지도 못한 채 쓸쓸히 은퇴하거나 국내 리그로 돌아와야 했다는 걸 상기해 보자.[13] 그마저도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 대상이 아니라면 2년 간의 유예기간을 거쳐야 하며, 차승 백처럼 국적을 포기한 상태라면 그 미약한 가능성마저 완전히 사라지지만 말이다.
한신 타이거즈 입단 불합격 이후 2016년 현재, 이제는 어디에서도 차승 백과 관련된 소식을 찾아볼 수 없다. 김현수, 오승환, 박병호, 강정호 등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한국인 선수들의 활약상이 자주 보도되고 있으며, 특히 오승환은 도박 파문도 거의 극복하면서 MLB에 완벽하게 적응했고, 마이너부터 시작해 메이저로 올라와 이름값이 다소 떨어지고 약물 전과가 있는 최지만마저 점차 조명을 받고 있는 것에 비해 차승 백은 사실상 국내 팬들에게는 이미 아웃 오브 안중에 그냥 듣보잡 선수로 추락한 상황이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는 관심이 생명인데 차승 백은 완전히 듣보잡으로 추락한 것.
차승 백은 국적회복을 하지 않는 한에는 KBO에서 뛰려면 외국인선수 신분으로 뛰어야 하는데, KBO리그는 1, 2군 구분없이 외국인선수 보유 숫자는 3명으로 제한하기 때문에[14] 즉시전력감 선수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연봉제한 철폐로 외국인선수에 대한 기대치 자체가 많이 올라갔다. 따라서 차승 백처럼 버리는 카드 당장 시간적 여유가 필요한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는 건 무리다. [15] 그렇다고 사실상 병역기피가 명백한 상황에서 한국 국적 회복 신청을 받아줄 리도 없고. 입국거부나 안 되면 다행. 한국행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나오는 얘기다.
사실 본인이 직접 미국 국적을 취득했으니 KBO에서는 당연히 외국인 선수 신분이 맞고, 외국인 슬롯을 써야 하는데 차승 백은 부상 복귀 이후 마이너리그에서 방어율이 9.28이다. 미국 독립리그에서도 방어율이 5점대이며, 이후 베네수엘라 윈터리그 까지 갔지만 거기서도 5점대 방어율. 어렵사리 진출한 NPB에서는 1군 무대를 밟아보지도 못했다. 요즘 KBO리그에 오는 외국인 선수들은 대부분 풀타임은 아니라도 메이저 경력 정도는 있으며 없을 경우에는 AAA에서 날아다니는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차승 백의 메이저리그 커리어(통산 16승 18패 평균자책점 4.83)는 KBO리그에 온 외국인 선수들을 기준으로 봤을 때 나쁜 성적이 아니지만, 이미 나이도 30대 중반에 접어든데다 부상 이후에는 마이너에서도 패전처리급의 성적을 기록한 선수를 외국인 슬롯 한 장 버려가며 영입할 팀은 없으며, 설령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과 같이 해외 교포 선수 영입과 관련된 규정이 생긴다고 해도 논란을 무릅쓰고 병역기피 혐의를 가진 선수를 영입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결론적으로 미국과 일본에서의 활약에 실패했고 한국에도 올 수 없다면, 이제 남은 선택은 독립리그나 대만, 호주행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미 은퇴가 임박한 선수라 의미는 없지만.
- ↑ 찰스 백, 스티브 백 같은 영어 이름으로 바꿨다는 루머가 돌았으나 본인이 직접 부인했으며 미국 여권 이름도 그대로 이 이름을 쓰고 있다고 한다.
- ↑ 단, 이는 잘못된 내용의 기사로 차승 백의 부친이 일본으로 직접 온 적은 없다고 한다.
- ↑ 과거 1982년 김일권이 국가대표 무단이탈로 비슷한 수준의 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 물론 그도 당시에는 아무 지장 없이 KBO에서 뛸 수 있었다.
- ↑ 하지만 선수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미 선술한대로 고려대와 입학 합의한 상태였기에 KBA의 징계는 직격타가 될 수도 있었다. KBA의 징계는 대학부에서도 통하기 때문. 대학입학이 무의미해진 상태에서 대회와 징계가 9월 중순에서 말이였던걸 생각해보면 드래프트도 사실상 의미가 없다. 현실적 신고입단이나 프로지명 재수만이 남았는데, 미국에서 오퍼가 올 정도의 선수에게 당연히 고려해볼만한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 ↑ 사실 해당 대회에서 청소년 대표팀의 부진을 되짚어보는 기사에선 선수들의 투지부족과 함께 협회의 준비부족을 꼽았는데, 실로 무능하다못해 한게 없을 정도였다. 상대팀 선수에 대한 사전정보는컨녕 선수명단조차 현장에서 받았고, 지명타자제도가 있는줄도 몰랐으며, 뒷바라지를 해주기위해 동행한 협회관계자는 대회기간중 귀국한 단장을 제외한 단 한명이였다.# 이런 처참한 실상을 가리기위해 불성실한 모습을 보인 선수를 유독 심하게 대했을거란 의혹을 거둘수 없다.
- ↑ 당시 고졸우선지명으로 픽했던 송승준마저 미국으로 떠나 버리는 바람에 롯데 자이언츠로서는 여러 모로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 ↑ 봉중근을 졸업 전에 템퍼링으로 빼간 게 규정 신설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전에는 관련 규정이 사실상 없었다.
- ↑ 미군에 입대한다든가 하는 특별 케이스가 아닌 시민권자와의 결혼을 통한 귀화는 적어도 4-5년(결혼 후 영주권 받는데 반년에서 1년, 이후 3년 후에 시민권 신청이 가능하고 신청 후 또 반년에서 1년정도 후에 시민권 획득 가능)정도가 걸린다.
- ↑ 병역법 위반 자체는 욕먹어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국민을 우롱한 스티브 유와 아예 같은 취급을 하는 건 좀 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후로도 대표팀에까지 선발되었던 이대은이 해외파라는 이유로 경찰 야구단 입단이 무산될뻔 한 일이 벌어진 것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대은은 KBO 이사회의 결정으로 상무 및 경찰 야구단에 지원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 ↑ 그런데 어째선지 해당 언플 기사를 본 이후 징계를 내린 KBA가 아닌 엉뚱한 KBO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 야구에 깊이 관심없는 사람들에게 KBA는 듣보잡이라지만.....
- ↑ 국적이 바뀌면서 법적 처벌을 하지 못할 뿐 범죄사실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 차승 백의 한국 국적 포기는 스티브 유와 마찬가지로 처벌을 피하기 위한 해외 도피로 간주되기 때문에 공소시효가 무기한 정지된 상태이다.
- ↑ 박찬호 이 사람 하나로 설명된다. 첫 메이저리거인지라 동양인 인종차별이 끝내줬다고 한다. 2016년 대한민국에서 조선족이 차별당하는 것을 생각하면 똑같다. 물론 그 중에서도 한국에 나름대로 동화된 조선족은 성공하는 사람도 많다. 박찬호는 미국 문화에 동화되면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 애써서 성공한 거다.
- ↑ 송승준, 김선우, 채태인, 봉중근, 서재응, 최희섭, 류제국처럼 돌아와서 KBO 주전이 된 선수는 그나마 성공한 사례고, 최창양, 조진호, 이승학, 권윤민, 안병학, 오철희 등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 ↑ NPB의 경우는 1군은 출전 인원 제한(최대 4명)이 있지만 선수단 전체 외국인 선수 보유 한도는 무제한이다. 그래서 나이 어린 유망주나 폼이 떨어진 외국인 선수를 영입해 쓰기도 한다. 차승 백이 뜬금없이 일본진출을 할 수 있었던 이유다.
- ↑ 일례로 팀 공헌도가 컸던 넥센 히어로즈의 브랜든 나이트(現 넥센 히어로즈 2군 총괄 투수코치)마저도 한국인 선수들처럼 2군에서 후배들을 이끌다 시즌 후 명예로운 은퇴를 하지 못하고 2014 시즌 중 갑작스럽게 퇴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