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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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대문
종류네이버 카페
매니저버섯모듬 (sirimaster)
개설일2004년 9월 18일
회원 수60,653명
(2016년 5월 5일 기준)[1]
랭킹열매 5단계(25단계)
주소[1]

1 개요

대한민국 최대, 최장의 역사 동호회

네이버카페. 한국 인터넷의 역사 관련 커뮤니티 중 하나로, 주로 역사를 주제를 다루며 역사 외에도 학술, 문화 및 시사 관련 이슈도 많이 다루고 있다.

2004년 9월 18일 디시인사이드 역사 갤러리에서 활동하던 '강희대제'[2][3]에 의해 설립되었다. 본래는 임진록2 확장팩 조선의 반격의 부흥길드에서 시작했는데, 몇 차례 과정을 거쳐 역사 카페로 전환되었고 현재 정식 명칭은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이다.

고수들이 많아서 진입장벽이 높다는 잘못된 이미지가 형성되어있었으나 후술할 몇 차례의 정변 이후 어그로성으로 활동하는게 아니면 실력이 허접하다고 까이는 일은 없다.어차피 어딜가나 고수는 소수다

2016년 5월 5일 현재 회원은 약 6만 명이고 게시글 수는 약 9만 9천 개이다.[4]

2 성향

특정 사상을 위한 역사학을 배격한다.

아베 정권의 역사관이나 북한의 사상은 당연히 반대하는데 그뿐 아니라 배타적 반일주의반공주의도 대체로 반대한다. 이런 환경이기에 디시인사이드, 오늘의 유머, 일베저장소 같은데서 친일파, 좌빨로 오해 받을 주제도 어느정도 이야기가 가능하다. 그렇기에 일간베스트한텐 좌편향/ 빨갱이, 오늘의 유머한텐 친일파라고 모욕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일베와 오유를 벌레라고 욕해도 차단당하고, 실제로 차단된 사례가 있다. 부흥이 대인배라 그런 게 아니라 법치주의를 존중하기에 그런 것이다.

전체적인 정치 성향은 극단성을 배격하는 온건한 성향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면 제재를 받는다. 특히 한국 현대사/정치 쪽으로 그런 경향이 강하다.

환빠같은 경우에는 웃고 넘기는 경우가 다수이지만, 계속해서 댓글이나 글로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면 제재를 받는다.[5] 애초에 2015년 들어서는 엔간한 환Q들은 죄다 끝장이 났고 환빠도 점점 세가 줄어가는 지라 환빠개그는 있어도 진짜 환빠가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동북아역사재단 논란이 될 때 유사역사학자들을 비판하니 유사역사학자들에게 식민사관 소리를 들었다. 국정 교과서 사태에는 국정세력들을 비판하니 좌파, 진보 집단이란 소리를 들었다. 고대사 관련 유사역사학자들, 그러니까 이덕일류는 식민사관 및 강단사학 추종 사이트로 몰고 근현대사 관련 유사역사학자들은 좌파 소굴이라 몬다. 그냥 여기저기서 다 까인다. 좌좀은 수꼴이라 까고, 수꼴은 좌좀이라 까고...그렇긴한데 전체적으로 다른 오래된 인터넷 커뮤니티처럼 온건 보수적인 편이다. 단, 북한에 대해선 약간 편집증(?)적인 반응을 보이기에 관련 글 작성시 주의를 요한다. 사실 다른 한국 사회가 그렇듯 카페 운영 유지와 논란 방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좀 과하다(?) 싶은 면이 있긴하다.

간혹 논쟁이 붙을 시 서로 역사관이 다른 상대방을 분탕종자, 어그로종자, 편파적인 인간으로 몰아가는 무개념 회원들도 있으나, 이런 회원들 대부분은 다른 회원들에게 지적받고 비판받는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카페 운영진으로부터 처벌을 받는다.

민족주의 성향을 배제하는 성향이 강한 편이다. 그래서 박유하, 이영훈 등의 학설에 대한 견해나, 조선총독부 청사 해체에 대한 견해 등이 일반 대중들의 인식과는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지나쳐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옹호하는 경향을 보이는 회원들도 일부 존재한 적도 있다. 요지는 언론 보도로 알려진 드러난 몇몇 자극적인 문장만 가지고 책 내용을 판단하지 말고 읽어 본 다음 판단하라는 것. 그러나 박유하 개인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책의 내용을 옹호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비판 역시 카페 내에서 적지 않게 나왔다.[6]

참고로 박유하의 연구에 대해서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크다. 유시민 같은 100명이 넘는 지식인들이 검찰 기소는 과하다는 의견을 냈을 정도. # 다만 박유하 항목에 나와있듯이 비판론도 만만치 않은 실정. 사실 유시민 등의 의견도 책의 내용보다는 과연 민족감정을 이유로 개인의 연구의 자유를 국가에서 강제해도 되는 것이냐는 관점에서 제기한 면이 크다.

그 외에도 이영훈 같은 학자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무조건 비판할 게 아니라 '식민지 시혜론'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진지하게 접근할 것을 주장하는 회원들도 많다. 다만 아베 담화에 대한 발언이 나오자 실망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영훈의 근대에 대한 해석은 갈리는 것과 달리 한국 현대사 부분은 비판하는 게 주류다. 특히 자기 영역을 벗어난 것과 과도한 이승만 옹호가 비판의 이유다.

2016년 7월이후로 메갈리안 사태로 인해 여성사에 대한 언급 자체가 금지되었다.[7]

3 명칭

이름이 부흥이라 특정 종교를 연상할수 있는지라 변경 논의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바뀔 일이 없어 보인다.

부흥 카페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역사 카페였던 것은 아니다. 본래 설립될 때에는 임진록2+: 조선의 반격천년의 신화[8]를 플레이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게임 관련 카페로 “부흥 길드” 내지는 “부흥회”로 불렸다. 이어서 불멸의 이순신 안티 카페, 드라마 칭기즈 칸 팬 카페 등을 타이틀로 내세우기도 하다가, 결국 2005년 12월 부터는 전쟁사를 주로 다루는 카페가 되었다.

이어서 2007년 9월 11일에는 “【부흥】전쟁의 역사 - 네이버 역사 전문 까페”로 이름을 바꾸었으며[9], 2008년 8월에는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가 되었다.[10] 이후 같은 이름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4 약력

  • 2004년 9월 18일 설립
  • 2005년 6월 1일 카페 이름 '【부흥】전쟁의 역사'로 변경
  • 2007년 2월 5일 네이버 '대표 카페' 선정
  • 2007년 7월 11일 회원 10, 000명 돌파
  • 2008년 8월 9일 카페 이름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로 변경
  • 2009년 3월 28일 회원 20,000명 돌파
    • 6월 11일 '2009 네이버 대표카페 선정'
  • 2010년 2월 5일 회원 25,000명 돌파
  • 2011년 6월 22일 회원 30,000명 돌파
  • 2012년 2월 8일 '2011 네이버 대표카페 선정'
    • 11월 8일 회원 30,500명 돌파
  • 2013년 3월 1일 네이버 카페 스토리 선정
    • 3월 25일 '2013 네이버 대표카페 선정'
    • 6월 29일 회원 40,000명 돌파
  • 2014년 3월 30일 회원 45,000명 돌파
    • 8월 17일 열매 5단계
    • 11월 1일 회원 50,000명 돌파
  • 2015년 6월 12일 회원 55,000명 돌파
  • 2016년 3월 22일 '2015 네이버 대표카페 선정'
    • 3월 27일 회원 60,000명 돌파

5 운영사

5.1 운영 논란

2006년 말 급격히 인원이 팽창한 부흥 카페는 관해 각종 분쟁과 부침을 겪었다. 2007년 잦은 '정변'의 와중에, 일종의 임시체제가 들어서기도 했는데, 이 시기에는 레오폴트, 달의 시, 베오울프, jagsjj 등이 매니저를 맡았다.

이 2007·2008년의 기간에는 운영을 놓고 벌어진 권력다툼과 일부 기득권을 가진 회원의 배타성이 두드러져서, 부흥 카페의 대외적인 이미지가 악화된 원인이 되었다. 대표적인 분쟁으로 초대 매니저 강희대제와, 그와 친밀한 관계이던 히엔, 베오울프(곰늑대),송태조조광윤 등의 쿠데타 시도가 실패하여 오히려 축출 된 속칭 “11·25 사태"를 들 수 있다.[11][12]

이후 세계의 왕실이야기 카페의 계열 인물들이 주축이 되어 배타적인 권력형 운영진을 구성하였으나,[13] 왕실 파벌의 만행으로 인해 카페가 파행운영되면서 이에 대한 반감들이 누적되고 점차 파벌과 관련이 적은 운영진이 늘어나면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결국 2009년 초에 왕실 계열 인물 하나가 광범위한 사료 조작과 표절을 이유로 축출되었고[14], 2009년 8월에는 욕설 사건으로 같은 계열의 인물 하나[15]가 축출되었다. 결국 이렇게 11·25 사태 이후 권력을 잡았던 핵심 관계자가 축출되고 왕실파 역시 자중지란으로 무너지면서 정치판을 방불케 했던 운영진의 파벌 다툼과 권력 남용은 일단락되었다.역사카페 역사가 무슨 얼음과 불의 노래

당시 부흥 카페의 모습은 커뮤니티가 친목질에 빠졌을 때 어떻게 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일부 기득권을 지닌 회원들이 신규 회원을 배타적으로 대하고[16] 그들 사이에서도 파벌이 생기며 규칙의 적용에서 예외적으로 특혜를 받는 등의 폐해가 나타났다. 더 골때리는 건 위에서 대략적으로 설명했지만 이렇게 형성되고, 카페의 주도권을 장악한 파벌은 엄격하기 짝이 없는 규칙에서 예외적 특혜까지 받는 상황이 벌어지고 해당 파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압박을 가해서 스스로 탈퇴하게 만들거나 꼬투리를 잡아 추방시켜버렸던 것. 사실상 이 때문에 해당 파벌이 아닌 사람들은 대부분 쫓겨나거나 해당 파벌 눈치나 봐야했다. 설령 운영진이리 할지라도. 사실상 해당 파벌이 아니고, 해당 파벌에 협조하지 않았음에도 버틸 수 있었던 사람은 최고 원로급이라고 할 수 있었던 학생과 쟉스즈 둘뿐이었다.[17] 최고 원로급들이나 되어서야 해당 파벌에 협조하지 않고도 살아남는 게 가능했다는 건 당시 부흥의 파벌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다.

이런 문제들이 누적되어 2009년 이후 카페가 쇠퇴하고 이미지가 급격히 나빠지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오랜 정변과 숙청, 세밀한 규칙과 집행과 주변 커뮤니티와의 갈등을 통해 통해 까칠하고 폐쇄적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져 왔으며, 회원들 중에서도 이런 부흥의 모습에 질려 카페를 탈퇴하거나 사실상 접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레오폴트 이후 예테보리 등 남아있던 부흥 네임드 중 몇몇이 주축이 되어 부흥을 살려 보기 위해 이전에 축출당한 앨런비, 아케치 등의 인물들에게 재가입 요청을 해보기도 했으나 대부분 불발로 끝났다.[18] 여기에 당시 사회 분위기가 사람들이 점차 역사에 관심이 멀어질 때라 신규회원 수 감소까지 겹쳐 과거의 영광의 부활은 더욱 멀어져 버렸다.

이런 오랜 정변을 거쳐 부흥 카페의 활동량은 계속 떨어졌고, 2008~2010년의 일 평균 게시글 수는 2007년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2009년 하반기부터 2010년 상반기에 이르는 기간에는 규칙이 개정되었고, 스탭이 신규로 모집되는 등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정변’은 없었다. 매니저에 관한 불신임 논란이 있었던 정도.

하지만 2010년은 동시에 다른 카페들과의 충돌이 잦았다. 부흥이 쇠퇴할 동안 급속도로 성장한 네이버 역개루 카페와 2010년 4월·6월·7월 3차례에 걸친 분쟁이 대표적이다. 이 기간을 이용해 책사풍후를 위시한 환빠들의 지속적, 대대적인 공격이 있기도 했다. (그와 나광팔·마광팔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 이후 시간이 지나고 여러 카페와 교류는 서로 교류/대응하지 않는 것으로 굳어졌다.

그 이외에 세계의 왕실이야기 카페[19]와 동맹이었고, 다음 토탈워 카페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나 2008년 경 분쟁으로 인해 사실상 관계가 단절됐다. [20] [21]

5.2 개혁과 부흥

운영진은 이런 침체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정치와 종교 주제의 언급을 허용하는 등 개방적 정책을 시도했다. 우선 2010년 10월에 전격적으로 정치 주제 금지가 풀렸고, IF 글이나 정치/종교 논쟁 때문에 다소 강경해졌던 정책도 다시 완화되었다.또한 2011년 1월 인터파크가 제휴를 제안해와 3월부터 제휴를 시작했으며 무료 서평 이벤트도 간간히 들어오게 되었다.

2011년 3월 20일, 매니저 예테보리가 부당하게 추방된 회원들에 대한 제재기록을 삭제·무효화한다는 공지를 올렸다. [22] 다만 조직적으로 카페를 공격했던 등 일부 블랙리스트 회원들에 대한 제재는 유지되었다. 다만 이미 카페나 블로그의 "역덕 1세대"들의 화력이 쇠퇴 분위기라 돌아온 네임드 회원은 많지 않았으며, 돌아왔어도 활동이 많지 않았다.

부흥 카페는 초기부터 규칙으로 환단고기, 규원사화를 전제로 한 발언 자체를 금지했다. 이 규정은 2009·2010년 적지 않은 규칙개정에도 변하지 않는 기준이었다. 그러나 2011년 4월 스탭 송군에 의해 “부흥 헌장”이라는 8개조의 규정으로 간소화되면서, 무조건 환빠라는 이유만으로 처단되지는 않게 되었다. 부흥 8조법 비록 지나치게 분방한 회원들의 활발한 활동이 문제로 지적 되었으나, 큰 틀에서 부흥 카페는 증가세가 되었다.

이후로도 정치 글 허용 여부는 오랜 논쟁 거리였다. 2013년에 정회원 이상을 대상으로 한 투표에서 허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다만 2014년에는 정회원 이상만 이용할 수 있는 특정 게시판에서만 이를 언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려나 키배가 종종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는 큰 문제 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밖에 무단전재, 지나친 뻘글, 지역드립 등은 확실히 어그로를 끌고, 심하면 운영진의 철퇴(추방령)를 맞을 수 있다.

2011년 9월 제9대 매니저 예테보리가 13개월의 임기를 마치며 새 10대 매니저로 부매니저였던 솔저가 올랐다. 이후 본좌급 회원들의 유입으로 역사 카페로서 입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실제로 부흥은 여전히 다른 역사커뮤니티(이글루스 등)들의 침체 분위기에 대응해 비해 활황을 띄고 있다. 사실 역개루, 세계의 왕실이야기 등 역사 관련 카페들에 가입한 회원들이 상당수 부흥 카페에도 가입해 있다.

2016년 2월 부흥 학회가 출범했다. 정기적으로 학술 발표회를 실시하며 관련 정보는 카페에 공지된다.

2016년 4월 5일 11대 매니저 피스키퍼 (송군) 이후로 버섯모듬이 12대 매니저로 부임하였다.

6 부흥 학회와 학술발표회 개최

2016년 6월 현재까지 총 세 차례의 학술발표회가 열렸다. 2016년 2월 부흥학회가 출범하여 학회의 개최와 운영, 시기에 대한 규정들이 체계화되었다.

  • 1차 학술회: 2015년 8월 22일 토즈스터디 삼성점에서 개최
  • 1.5 학술회: 2015년 10월 24일 성균관대학교에서 개최
  • 2차 학술회: 2015년 12월 26일 토즈 대학로점에서 개최
  • 3차 학술회: 2016년 2월 20일 대구광역시 중구 제우스 문화센터에서 개최[23]
  • 4차 학술회: 2016년 7월 23일 토즈 대학로점에서 개최
  • 5차 학술회: 2016년 11월 19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학로 공유공간 벌집에서 개최

7 사건, 사고

8 트리비아

  • 모 회원이 카페 역사를 다룬 꽤 고퀄의 게시물을 연재했으나 무슨이유에서인지 중단되었다.
  • 2016년 여름 한창 폭염이 기승할때, 아재 타령이 유행하던 온라인 세상의 조류에 휩쓸렸는지 아재개그 대열풍이 불었다 (....)
  1. 네이버의 역사주제 카페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2. 이하 네이버에서 주로 사용한 닉네임을 인물의 명칭으로 사용한다.
  3. 참고로 이 사람은 부흥에서 물러난 이후, 송가연 전기톱 살해 협박 사건을 일으켜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았다. 본인의 사과문 어떤 이들은 많이 안타까워했으며, 어떤 이들은 샘통이라고 비웃었다. 관련 위키는 송가연 전기톱 살해 협박 사건을 참고. 어쨌든 이 사건 이후로 해당 유저는 모든 SNS를 탈퇴하고 블로그를 닫는 등, 인터넷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4. 여담이지만 일년전쟁사 매드무비 한글자막도 이 카페의 한 회원이 달았다.
  5. 대부분의 환빠들은 녹음기여서 증거 미제시로 처벌된다.
  6. 옹호하는 측도 잘못 알려진 점을 지적한 것만 옹호하지 책의 주장 자체를 옹호하는 건 소수다. 마녀사냥식 비판만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박유하의 주장 자체를 상당히 옹호하는 사람도 욕을 안 들어먹었다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여기서 신문고도 아니니 닉네임을 언급할 수 없으나 박유하를 심하게 옹호하던 호박 아바타를 쓰던 유저는 이 카페에서 굉장히 논란이 됐었다.
  7. 메갈리아, 양성평등, 미러링에 관한 글과 이로부터 직간접적으로 파생되어 분란발생의 소지가 있는 모든 글의 작성이 금지대상이다. 이 규정은 매우 포괄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여성/남성 비하의 함의가 있든지 혹은 젠더문제로 판단될 경우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글 작성시 각별한 유의가 필요하다.
  8. 카페 내 모 회원의 조사에 따르면 부흥 길드의 설립은 2000년으로 조선의 반격의 출시일보다 더 일찍 생겼다 카더라.
  9. 당시 회원들은 주로 전쟁사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밀덕까지는 아니지만, 이는 전쟁사를 위한 별도의 게시판이 있고 무기 사진이나 그림 등을 올릴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회원들이 대부분 남자, 10·20대(특히 고등학생부터 군입대자 이상까지)니까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2007년 9월 전체적인 의견을 수렴하여 카페 이름에서 “전쟁사”라는 부분을 떼어냈으며, 메뉴 중에서도 전쟁사 부분을 축소시켰다.
  10. 하지만 정작 네이버 공인 대표 카페가 된 것은 2009년 6월의 일이며, 대표카페 선정은 2015년 3월 17일의 일이다.
  11. 여기엔 뒷이야기가 있다. 사실 베오울프와 강희대제, 히엔은 왕실까페 출신 운영진을 몰아내기 위해 앨런비 같은 다른 운영자들과 공모했다가, 자기들 셋을 제외한 나머지들이 싫다는 이유로 다른 운영자들까지 강퇴시키는 배신(....)을 저질렀다. 하지만 강퇴된 사람들이 세컨닉으로 들어와 항의하자 자기들끼리 포기하고는 공중분해되기 시작했고(...) 자기들은 송태조의 선동에 속아넘어갔을 뿐이고 송태조가 이 사건을 계획한 진정한 흑막이라며 면피를 시도했다. 그러나 정작 송태조는 강희나 히엔이 관계되기 싫어하던 자신을 끌어들여놓고는 누명을 씌웠다며 그들과의 채팅 기록을 부흥 운영진들에게 제출하였고 이 과정에서 강희대제가 사실은 왕실까페 출신 운영진과 여전히 친했으며 당시 부흥 운영자 레오폴드가 강희에게 언제든지 운영권을 돌려주겠다고 한 사실, 쿠테타 계획을 송태조에게는 전혀 알려주지 않고 자기들이 피해자라며 감성팔이해서 끌어들여 총알받이로 쓰려고 한 사실이 폭로되어 강희, 히엔, 베오울프는 역관광당했다. 이 사건은 인터넷 권력싸움의 추잡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12. 이 때 반항이 생각 이상으로 커서, 부흥이 어쩌다 이리 추잡한 꼴이 되었냐는 한탄 여론이 넘쳐났고 최고 원로이자 중도파 유저였던 학생(닉네임이 학생이다)이 대노하여 앨런비와 아케치를 비롯한 당사자 중 몇몇에게 한마디씩 했을 정도. 이런 와중에도 초대 매니저 강희대제의 지인이자 원로급에 속했던 이시민은 철저한 중립 행보와 규정 준수로 파벌 싸움으로 스텝진과 네임드 몇몇이 갈려나가던 와중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아 여러 가지로 강희대제와 많이 대비되는 행보를 보였다.
  13. 이때 왕실파의 입깁이 어느 정도였나면, 왕실이야기 파의 주축들이 챗방에서 당시 부흥 내 주요 인사들에게 공개적으로 부흥에 대한 충성 선언을 하는 것을 요구하자 다들 받아들였을 정도. 북한 빨갱이들의 자아비판같은 행동이었으나, 정작 이러한 일을 진행한 왕실카페는 당시 기준 공산주의는 물론 좌익 계통에 대해 백안시했다는 게 개그(...)극과 극은 통한다 이런 일련의 행위들로 인해 처음에는 나름 왕실파에 우호적이었던 중도파 전체가 반 왕실파로 기울게 된다.
  14. 닉네임은 루돌프. 추가로 부흥 내 권력다툼도 한 원인이었다. 본래 루돌프는 왕실 카페 파벌로 왕실 카페 매니저 레오폴트와 매우 친밀한 관계이자 실질적인 브레인이나 다름없었는데, 레오폴트가 부흥 매니저로 집권한 이후 왕실 카페 출신들의 비중이 늘면서 그의 영향력도 자연히 이전보다 커졌다. 그러나 부흥의 네임드 중 하나였던 쟉스즈와의 논쟁에서 사료조작이 들통났고, 추가로 스스로 평소에 유럽 유학중이라고 주장했으나 아이피 추적 결과 이는 거짓임이 밝혀졌고, 채팅방에서 이를 추궁당하자 자신과 관련된 일들에 대해 해명을 하겠다고 해놓고는 블로그를 폭파하고 네이버를 탈퇴(...) 이전 문서에는 원로 중 한 명인 학생이 이 사실을 밝혀냈다고 되어있었으나, 학생은 이러한 카페의 알력 다툼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
  15. 누군가 하면 매니저로도 일한 경력이 있던 왕실파의 대표 레오폴트. 루돌프의 정체 탄로 이후 충격에 빠져 반폐인이 되어 버렸다가 욕설 신고에 허망하게 날아가 버렸다. 다른 스텝들과 관계가 원만하던 때나 왕실카페파가 활발하던 시기에는 규정을 위반해도 가벼운 처벌로 넘어가거나 몇 차례 쫓겨났어도 재가입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영구 강퇴는 루돌프 사건으로 인해 왕실까페파 전체가 위축되어 버렸기에 가능했던 일. 매니저 출신임에도 참으로 허망한 최후였다.
  16. 농담이 아니라 이 당시 사건들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부흥을 알고 있던 다른 역사 커뮤니티들이 두고두고 부흥을 놀려먹는 껀수가 돼 버리고 말았다. 특히 부흥 극초기 마광팔과 책사풍후, 나광팔이 부흥에서의 규정 위반 행위로 위한 영구탈퇴 이후 세컨이나 수하들을 잡입시켜 부흥 내에서 선동행위를 벌이곤 하여 당시 신규유저들에 대해 기존 유저들이 다소 민감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생겼는데, 문제는 도를 넘어 사이버상의 언어폭력과 정치질, 친목질을 그대로 아무 관계없는 신규 유저들에게 가하는 경우가 상당했던 것. 상당수의 신규 유입 회원들은 순수하게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혹은 환빠들의 정보를 접했지만 이게 과연 맞는걸까 하면서 네이버 최대 역사 카페였던 부흥에 왔다가 상기한 일을 겪고 상처만 안고 타 역사 커뮤니티로 가거나, 아니면 반감으로 완전히 환빠가 돼 버리는(!)인외마도 루트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생겨났고, 몇몇 부흥 회원들의 부흥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 타 역사 커뮤니티에서 잦은 충돌을 일으키는 일도 생겨났다. 그러다 저런 일이 생겨났으니 당연히 부흥에 대한 인식은 그야말로 곤두박질... 전/현 부흥의 원로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현직 스텝이나 네임드 중에서도 당시를 기억하는 자들은 이 시기를 부흥 최대의 흑역사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17. 이 두 사람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지식과 뛰어난 글솜씨로 부흥 뿐만 아니라 인터넷 역덕후 전체에서 거의 성인으로 대우받는다고 해도 될 수준의 초거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왕실 파벌 내부에서도두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공공연히 있었을 정도니 둘이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후폭풍이 엄청나게 커질 게 뻔해서 건드리지 못 했다. 하지만 학생은 카페의 정치적 문제에 아예 관심 자체를 두지 않았고, 쟉스즈는 약간 관심을 가졌지만 그래봤자 가끔 견제나 하는 수준이었기에 왕실 파벌이 날뛰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애당초 두 사람은 부흥카페 내부에서의 정치적 분쟁에 관심 자체가 거의 없었고, 휘말리기도 싫어하던 편이었다.
  18. 이는 부흥 쪽이 자처한 게 크다. 애초에 권력다툼에서 자신과는 관계없는 누명까지 쓰고 밀려나 버린 사람들에게 보낸 네이버 쪽지의 내용이 "과거의 잘못은 묻지 않겠다"였으니 누가 오려 하겠는가?(...) 앨런비의 경우 이에 대해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내는 글을 올리며 더더욱 역개루로 방향을 선회하기도 했다. 쪽지 내용이 저런 식으로 작성된 데에는 당시 매니저였던 예테보리가 앨런비, 아케치 등의 복귀 추진에 소극적이었던 탓이 크다.
  19. 레오폴트를 위시한 왕실파의 몰락으로 사실상 관계 단절
  20. 토탈워 카페의 분쟁의 실질은 부흥 카페의 한 스탭이 다음 토탈워 카페에서 욕설을 퍼부었던데 있다. 더욱이 부흥의 11.25사태 이후 쫓겨난 사람들이 간 곳 중 하나가 바로 다음 토탈워 카페. 슬프게도 이곳은 현재 부흥을 떠나 정착한 유민들이 부흥에서 했던 행동을 반복해서 부흥의 암흑기를그대로 재연하는 중이다.
  21. 일단 다음 토탈워와의 분쟁은 2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1차의 경우 레오폴트에게 숙청당했던 회원이 토탈워를 방문한 레오폴트를 공격한 게 발단이 된 것이라 쌍방 과실로 여겨져 크게 문제가 안 됐다. 하지만 2차는 레오폴트가 가만히 있던 다음 토탈워 카페에서 갑자기 난동을 부리고 욕설을 하기 시작해 토탈워 회원들의 분노를 샀다. 거기다 다음 토탈워 카페의 운영진들은 2차 사건의 발단이 토탈워 운영진 중 한 명이 부흥에서 레오폴트가 규정을 위반했다고 신고했던 사건(해당 신고는 유야무야됐다.)에 대한 보복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판단해 더더욱 분노, 이런 일이 한번만 더 생긴다면 끝장을 보겠다는 공식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2차 욕설 사건으로 안그래도 회원들이 떠나가며 치명타를 여러 번 맞았던 당시의 부흥은 분노한 토탈워 측 회원들이 대량으로 이탈하면서 마지막 치명타를 맞았다. 당시 운영진 중 한명이 후일 밝힌 바에 따르면 운영진들은 왕실파던 비왕실파던 이 사건으로 인해 카페의 쇠락과 활력 감소가 가시화되면서 원흉인 레오폴트에게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22. 이전까지는 추방된 회원들이 직접 “복권신청”을 해야 했으며, 현재까지도 그 제도는 이어진다.
  23.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열린 첫 학술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