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종전 전에 사망한 탓에 사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1 개요
이름 | 러시아어 : Бронисла́в Владисла́вович Ками́нский 영어 : Bronislav Vladislavovich Kaminski 한국어 : 브로니슬라프 블라디슬라보비치 카민스키 |
출생 | 1899년 6월 16일, 러시아 제국 비텝스크[1] |
사망 | 1944년 8월 28일, 나치 치하 폴란드 우치 |
복무 | 러시아 제국군(1918 ~ 1921) SS 무장친위대(1941년 ~ 1943년) |
최종 계급 | SS 여단지도자(Brigadeführer) |
주요 보직 | 카민스키 여단장 |
주요 참전 | 적백내전 바르샤바 봉기 |
주요 서훈 | 1급 철십자 훈장 |
나치 독일의 송요찬[2]
제2차 세계대전 중 활동한 SS 소속 무장친위대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여단지도자(Brigadeführer).
원래 독일이 아닌 소련 출신이었으나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신의 조국도 배반하고 무장친위대에 들어가 동족을 살육했으며, 오스카 파울 디를레방어,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와 함께 바르샤바의 악귀. 결국 그 학살이 자신의 죽음을 불렀다. 오늘날까지도 디를레방어 사단과 함께 인간 백정 부대로 평가받는 카민스키 여단의 여단장을 맡고 있었다.
2 생애
2.1 초창기
1899년 6월 16일 벨라루스 비텝스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폴란드인, 모친은 독일인이었으나 카민스키는 자신이 러시아인이라는 자각을 지니고 있었다. 레닌그라드 소재 공과대학에 재학 중 적백내전이 터지자 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하였고 전역 후 대학교를 졸업해 화학 공장에서 취직해 근무하였다. 그러나 소련 성립 이후인 1930년 반혁명 분자로 몰려 잠시 투옥되었고, 1937년 대숙청이 시행되었을 때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단 농장화 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직장에서 쫓겨나 벨라루스 브랸스크에 있던 노동 교화소로 끌려갔고 여기서 증류실에서 근무하는 형벌을 받았다. 이 시점에서 카민스키가 러시아에 대한 애국심을 버리고 나치 독일에 협력할 마음을 품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2 독소전쟁
1941년 나치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독일-소련 국경이 혼란해지고, 더불어 카민스키가 있던 브랸스크에도 독일군이 쳐들어왔다. 카민스키는 같이 수감되어 있던 친구 콘스탄틴 보스코보이니크(Konstantin Voskoboinik)와 같이 수용소에서 풀려났고, 독일군에게 부역할 것을 약속하며 브랸스크 지방의 자치권을 얻어냈다. 브랸스크의 대표자는 보스코보이니크가 맡았고 카민스키는 그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브랸스크 주변에는 소련계 파르티잔이 활동하여 치안이 불안정했다. 보스코보이니크와 카민스키는 친독계 성향 소련인을 모집해 자경단을 조직하여 치안 유지에 나섰다. 자경단을 조직한 후에 카민스키는 브랸스크 일대의 자치원을 독일군에게 양도하고, 집단 농장을 폐쇄한 뒤 반공 성향을 지닌 러시아인, 벨라루스인을 모집하였다. 1942년 보스코보이니크가 소련군 공수부대와의 교전 중에 사망하자 카민스키는 자경단의 수장이 되었다. 카민스키는 러시아 국민 해방군(Русская Освободительная Народная Армия)으로 바꾸었다. 당시 인원은 2만 명 정도였다.
카민스키의 군대는 동족인 소련인으로 구성된 파르티잔임에도 그들을 철저하게 진압하여 해방군 사령부 주변에는 목 매달린 파르티잔 시체가 흔히 보였고 이로 인해 침략군인 독일군에게도 큰 신뢰를 받고 있었다. 독일군 제2군 사령관 루돌프 슈미트 상급대장[3]과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제2군의 상급 제대인 중부집단군의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도 이들이 자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보장해 주었다. 카민스키는 로코 공화국(Lokot Republic)을 세워 공화국의 지배자가 되었고 해당 지방의 민병대를 여단으로 재편해 스스로 여단장이 되었다. 이들의 활동으로 골머리를 앓던 소련 정부에서 "귀순하면 사면해 주겠다"고 통보하여 해방군에 다수의 탈주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부대 자체가 망할 뻔했으나 카민스키는 탈주자의 즉결 처분을 지시해 해방군의 붕괴를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1942년 후반에는 단순히 알보병만으로 구성되어 있던 부대가 BT 전차 등의 기갑 전력을 노획하기도 하는 등 무시 못할 세력으로 자리잡았다.[4]
2.3 무장친위대가 되다
1943년에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이 벨라루스 인근에서 철수하고 소련군의 승리가 이어지자 카민스키는 숱한 위협에 직면했다. 독소전쟁의 승기가 소련으로 기울면서 불안감을 느낀 부대원들이 탈주를 시도하거나 카민스키를 암살하려 여러 차례 시도한 것이다. 카민스키는 원래 진주하던 곳인 브랸스크에서 자신의 고향인 비텝스크 근방으로 부대를 이전했다. 1944년이 되자 카민스키는 포로 수용소에서 풀려난 포로들,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범죄자, 무장친위대원들을 규합해 부대를 재편하였고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음과 동시에 여단지도자로 승격하였다. 본래 부대 명칭은 "카민스키 특무 여단", 즉 카민스키 여단이었으나 6월에 SS 무장돌격여단 RONA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뀌었다. 8월에는 <제 29 SS 무장척탄병 사단>으로 승격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르샤바 봉기가 터지자 카민스키는 부대를 이끌고 바르샤바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카민스키의 부대는 원래부터 무장은 별 볼일 없었고, 인적 구성도 범죄자가 태반이라 제대로 된 현대전 수행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고 부녀자 강간, 전리품 약탈, 비전투원 학살 같은 일에만 특화되어 있던 부대였다. 카민스키 여단의 막장 실태는 다른 독일군 부대에게도 알려져 사기를 떨어뜨렸고, 진압군 사령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도 카민스키를 싫어했는데 그가 하인리히 힘러의 지휘를 직접 받는다고 생각하여 바흐-첼레프스키의 명령을 대놓고 항명하는 경우가 적잖았기 때문. 그 탓에 같은 무장친위대 장교에게도 미움을 받았다.
카민스키 여단의 약탈 행위는 힘러에게까지 보고될 정도로 도를 지나친 상황이었다. 원래 약탈품은 모두 힘러에게 가야 했으나 카민스키 여단이 그걸 무시하고 자신들이 모두 착복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간인 1만 명을 학살하는 일명 "오코타 학살(Ochota massacre)"을 저질렀다.
2.4 최후
바르샤바 봉기가 한창 진행 중이던 8월 28일, 카민스키는 무장친위대 회의를 위해 독일 본토로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우치 시에서 기관총에 피격되어 사망하였다. 당시에는 폴란드 파르티잔의 습격으로 발표되었으나 현대에는 카민스키를 혐오한 무장친위대가 회의를 연다는 거짓말로 유인한 다음 몰래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며 실질적인 명령은 에리히 폰 뎀 바흐가 내린 것으로 여겨진다. 카민스키 사망 이후 카민스키 여단은 해산되었고 남은 부대원은 안드레이 블라소프의 자유 러시아 군단에 편입되었다.
3 평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오스카 파울 디를레방어와 같이 바르샤바 봉기를 악독하게 짓밟은 3인방 중 한 명. 특히 소련 출신임에도 독일군에 부역한 점은 안드레이 블라소프와 비슷하다. 카민스키 여단과 비슷한 인간쓰레기 부대인 디를레방어 여단도 바르샤바에서 악마 같은 행동을 자행했으며 오늘날 폴란드에서 그들이 무슨 평판을 받을지는 뻔하다.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현대 중국에서 당하는 취급과 비슷할 듯.
카민스키 여단의 행태가 어찌나 답이 없었는지 진압군 사령관 에리히 폰 뎀 바흐마저도 카민스키를 혐오했다. 이 인간은 폴란드인 출신으로 무장친위대에 병으로 입대해 대장까지 진급한 골수 파시스트이고 발트 3국, 소련 일대에서 악독한 파르티잔 색출 작전을 지시해 확인된 사망자만 20만 명이 넘어가는 똑같은 인간쓰레기인데도 그렇다. 결국 카민스키는 자신이 그토록 충성하던 나치 독일에 의해 죽음을 맞고 말았다.
4 주요 서훈 내역
- 철십자 훈장
- 파르티잔 소탕전 기념 훈장
- 동부전선 동계 전투 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