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어: Warszawa
영어: Warsaw 전쟁톱[1]
프랑스어: Varsovie
독일어: Warschau
이탈리아어: Varsavia
라틴어: Varsovia
리투아니아어: Varšuva
러시아어: Варшава
세르비아어: Варшава
스페인어: Varsovia
이디시어: וואַרשע
문화어: 와르샤와
1 소개
폴란드의 수도. 행정구역상 마조비에츠키에 주에 속해 있으며, 냉전 시대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있었던 도시로 유명하다. 폴란드의 젖줄이자 가장 큰 강인 비스와 강(1,069km)이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으며, 인구는 171만 명, 넓이는 516.9km²로 폴란드 제 1의 대도시인 동시에 기계, 금속, 정밀기계, 자동차, 철강, 트랙터, 광학기계 등 공업 중심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철도, 도로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여 전차, 버스 노선도 발달되어 있고 하항, 공항도 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이 도시에서 학살된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바르샤바의 생존자를 작곡하기도 했다. 시간대는 UTC+1.
2 역사
바르샤바의 본격적인 역사는 1596년부터 시작한다. 그 이전까지 한적한 어촌이었던 이곳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인 지그문트 3세가 크라쿠프를 떠나 바르샤바로 천도하면서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의 왕위를 되찾고, 또 대화재가 발생하여 큰 피해를 입은 크라쿠프를 떠나고 싶어했다. 여기다 귀족들의 세력 약화도 기대하고 있었기에 지그문트 3세가 바르샤바 천도를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1611년, 바르샤바는 정식으로 폴란드의 수도가 되었다.
바르샤바는 뒤이어 동유럽의 주요 문화 도시이자 대도시로 바뀌었다. 수많은 폴란드의 정치가와 예술가가 여기서 출생하였으며, 곳곳에 대귀족들의 고급스런 저택들이 지어졌다. 덕분에 바르샤바는 매우 아름다워져 동유럽의 파리 또는 제2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였다. 잠깐, 부쿠레슈티도 동유럽의 파리로 불리지 않았나? 파리와 모스크바에서 두 도시를 잇는 열차를 탄 승객들이 다음날 아침 눈을 떠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아무튼 그만큼 아름다웠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이 바르샤바의 역사 또한 폴란드의 역사만큼이나 고되었다. 대홍수 당시 폴란드를 대침공한 스웨덴에 의해 점령당해 값비싼 보물과 예술품이 약탈당하기도 했다. 이후 바르샤바는 다시 재건되었고, 1700년에는 약 3만명의 인구를 기록하였다.
이후 폴란드의 역사는 매우 어지러워지게 된다.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대파시킨 군신(軍神) 얀소비에스키 3세도 1696년에 죽었고, 그 이후 폴란드는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일부 영토를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폴란드는 왕위를 놓고 귀족들간의 다툼, 그리고 주변 열강의 개입으로 인해 무정부 상태로 치달았다. 바르샤바는 근교에서 발생한 전투에서 폴란드-작센 군이 스웨덴군과의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여 스웨덴에게 함락당하기도 했다. 이때 스웨덴 국왕이 누구냐면, 그 유명한 칼 12세.
그 이후로도 폴란드의 역사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게 된다. 1791년에는 세계 2번째의 성문헌법으로 유명한 5월 3일 헌법이 이곳에서 반포되었다. 그러나 이후 폴란드가 러시아와 벌인 헌법수호전쟁에서 패배, 결국 헌법은 무위가 되었고, 바르샤바에는 빈민이 넘쳐나게 되고 은행이 문을 닫는 등 막장 상황으로 치달았다. 폴란드의 민족영웅 타데우쉬 코시치우쉬코가 1794년에 봉기를 일으키고, 바르샤바에서도 봉기가 발생하여 러시아군을 몰아내기는 하나, 결국 봉기가 진압당하면서 바르샤바 외곽의 프라가 지역에서만 2만명이 몰살당하고 도시가 엄청나게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참고로 1792년 당시 바르샤바 인구가 12만명이었다.
이후 발생한 제3차 폴란드 분할에서 바르샤바는 프로이센 측으로 귀속되었다. 1807년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이곳에 바르샤바 공국이 성립되며,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토와 인구를 2배로 확장하기도 하나, 바르샤바 공국은 나폴레옹의 강요에 의해 3만명의 상비군을 유지해야 했으며, 이 때문에 바르샤바 공국의 경제는 파탄이 나버린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대침공했을 때, 70만명의 나폴레옹 군에는 12만명의 폴란드군[2]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러시아로 떠난 이후, 바르샤바 공국은 문자 그대로 허허벌판이었다고 한다. 폴란드군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전위대로서 러시아를 향해 진격했고, 또 후퇴할 때는 후방에서 프랑스군을 보호했다. 그러나 그 결과 폴란드군은 완벽히 궤멸했고[3] 바르샤바 공국은 결국 무너져내렸다. 포니아토프스키는 후에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그 이후에도 바르샤바의 기구한 운명은 계속 이어진다. 러시아는 바르샤바 공국을 폴란드 왕국으로 대치시켰으며, 러시아 황제가 폴란드 국왕을 겸하게 된다. 1830-1831년에는 11월 봉기가 발발하여 325일 간이나 이어졌으며, 결국 양쪽 모두 수만여명에 달하는 막대한 사상자[4]를 내고 끝나게 된다. 봉기 실패 후 바르샤바에는 철권통치가 행해지게 된다.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여 러시아 제국이 개혁을 실시해서 좀 숨통이 트이나 했더니, 오호 통재라, 이번에는 1863년, 1월 봉기가 발발하여 다음 해인 1864년까지 계속되었다. 봉기가 또 실패한 이후, 바르샤바에는 다시 러시아의 철권통치가 행해졌다.
이후 폴란드 왕국에 농노해방이 이루어지고 바르샤바에 근대적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바르샤바는 폴란드의 맨체스터라 불리는 우치와 함께 폴란드의 주요 공업 중심지가 된다. 또 공업 중심지이자 대도시가 됨에 따라 바르샤바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 운동과 사회 운동이 활발해진다. 1882년 당시 바르샤바의 인구는 38만 3천명, 1900년 당시 바르샤바의 인구는 60만 8천명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폴란드가 독립하게 되면서 폴란드 제2공화국이 수립, 바르샤바는 폴란드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터지고 폴란드가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밀리면서 붉은 군대가 바르샤바까지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이에 바르샤바를 넘겨줄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나, 당시 폴란드의 지도자 유제프 클레멘스 피우수트스키의 대담한 전략[5] 덕분에 다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이 전투가 그 유명한 바르샤바 전투(Bitwa Warszawska)이며, 소련의 서방 진출을 좌절시킨 전투로 유명하다.[6] 1925년, 바르샤바의 인구는 100만 3천명으로 인구가 100만을 넘기게 되었다.
폴란드 제2공화국은 바르샤바를 아름답게 가꾸어 나갔다. 도시 곳곳에 대규모 공원과 녹지가 조성되었으며, 기존의 고풍스런 건물들과 합쳐져서 바르샤바는 더욱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 국립 박물관도 설립되었다. 또한 교외 지역을 바르샤바로 편입해서 확장하였으며, 폴란드 침공 직전이던 1939년 바르샤바는 130만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대도시가 되었고, 이중 유대인이 1/3을 넘었다. 특히 도심(Srodmiescie)의 여러 거리를 화려한 꽃으로 치장하는 등 도시는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게 된다. 1936년 당시 폴란드를 방문한 정인섭 선생도 여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1938년 바르샤바를 담은 컬러영상 여기까진 좋았는데…
1939년, 폴란드 침공이 발발하면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바르샤바의 역사가 시작된다. 침공 당일인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폭격기가 바르샤바의 병원, 학교, 식수 공장, 군수품 창고 등을 폭격하며 광범위한 테러를 자행했고 폴란드의 대공포와 전투기가 여기에 대항하여 출격, 첫날에 벌써 대폭격과 치열한 공중전이 전개되었다.
이후 9월 8일부터 시작된 바르샤바 방위전에서 폴란드군 12만명은 독일군 17만 5천명의 대공세를 28일까지 결사적으로 막아내었다. 독일군은 바르샤바 이곳 저곳을 파고 들었으나 폴란드군의 거센 저항과 반격에 계속 실패를 맛보았다.[7] 독일군은 공방전 기간 동안 바르샤바 전역에 잔인한 폭격을 퍼부었고, 그 결과 바르샤바는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결국 바르샤바는 눈물겨운 저항 끝에 28일 항복했다.[8] 이후 바르샤바는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된다. 1943년에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1944년에는 유명한 바르샤바 봉기가 발발하면서 바르샤바는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봉기 때마다 매번 독일의 잔인한 학살과 고의적인 도시 파괴가 잇따랐다.[9] 바르샤바의 85%가 대전 기간 동안 파괴되었다고 전해진다.
바르샤바는 그 피해가 너무 극심해서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그나마 사정이 괜찮은 우치가 수도를 대신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바르샤바는 시민들의 열정적인 지원에 힘입어 다시 재건되었고, 폴란드 공산 정부 시절에도 폴란드의 수도가 되었다. 공산 정권 시절에는 교외에 대규모의 철강 공장이 세워지는 등 공업화의 기운이 더욱 강해졌으며, 공산 정권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이 대규모로 발발하기도 하였다. 이후 폴란드가 민주화되면서 오늘날에도 폴란드의 역사적인 도시이자 수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81년에는 바르샤바 역사지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3 도시의 풍경
원래 바르샤바는 매우 아름다운 도시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도중 1939년의 바르샤바 방위전, 1943년의 바르샤바 게토 봉기와 1944년의 바르샤바 봉기와 같은 대규모 시가전이 발생하면서 온 도시가 박살이 나고, 더군다나 공산주의 치하에서 재건에 나서는 바람에 대부분의 유럽 도시와는 분위기가 좀 다르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콘크리트 건물이 도처에 널려있고, 유럽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15층이 넘는 성냥갑 아파트[10]까지 있다. 옆동네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와 이곳을 동시에 둘러보면 실로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11]
도시의 분위기를 한껏 다운시켜 주는 건물이 "문화과학궁전"으로, 이 1955년에 이오시프 스탈린이 폴란드 인민들에게 주는 선물이랍시고 지은 건물이라 전형적인 스탈린 양식의 건물이다. 근데 스탈린은 1953년에 죽었는데 저건 스탈린 유령이 준 선물인가?[12] 폴란드 사람들은 이 건물을 무척이나 싫어하며, 이와 관련한 농담도 있을 정도.[13] 심지어는 공영방송 TVP의 뉴스 프로그램 Wiadomości가 2015년에 바꾼 오프닝 마지막 부분에 이 문화과학궁전이 나오자 반발이 매우 거셌다. 결국 2016년에 사장이 바뀌면서 뉴스 오프닝에서 이 문화과학궁전이 나오는 부분은 잘라버렸다. 뉴스 배경도 문화과학궁전 시계탑 대신 바르샤바 왕궁 시계탑으로 교체했다.[14] 모스크바 대학 본관이 이거랑 비슷하게 생겼으며, 소련 치하에 있었던 나라인 라트비아의 리가나 리투아니아의 빌뉴스에도 비슷하게 생긴 건물이 있다. 문화과학궁전을 철거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비극적인 역사에 대한 상징의 의미로 보존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래도 모스크바보다는 낫다. 모스크바에는 스탈린 양식 건물이 7개나 된다[15] 참고로 문화과학궁전의 벽면에서는 사회주의 투사들의 조각상들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엔 북한 여성도 있다.
그렇지만 폴란드인들은 바르샤바를 정말 최선을 다하여 재건하였다. '벽돌 1장까지 고증을 거쳐 재현된 도시'라는 별명이 바르샤바에 붙여져 있다. 18세기 후반 바르샤바에 체류하며 궁정화가로 활동했던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베르나르도 벨로토의 풍경화를 비롯해[16] 유치원 아이들 스케치북에 그려진 바르샤바의 풍경들과 외국 동포들이 보낸 소중한 사진들도 긁어모았으며, 쓸만한 벽돌들도 다 모아서 재건하였다. 보이스카우트도 동원되어 도시 재건에 힘썼으며, 고풍스러운 느낌을 재현하기 위하여 일부러 벽돌이 살짝 낡은 느낌이 들게 할 정도[17]로 상당히 정성스럽게 재건하였다.
덕분에 외국에서 바르샤바로 관광 온 사람들은 상당히 오래되고 고풍스러워 보이는 이 도시의 역사가 70년 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그만큼 복원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열망이 가득했다는 것. 하지만 그렇긴 해도 바르샤바 전체를 다운시키는 문화과학궁전의 위엄이란… 참고로 동유럽에서 가장 볼만한 도시로 크라쿠프, 프라하, 부다페스트를 꼽는데 바르샤바가 빠진 이유가 바르샤바 봉기 때 완전히 작살나서 그렇단다.
2016년 기준 바르샤바는 삭막한 도시가 절대아니다. 최근의 경제성장을 증명하듯 바르샤바는 그야말로 현대적인 도시이다. 구시가지의 중세적모습을 간직하면서 신시가지의 현대적 건물이 공존하고있다. 특히 문화궁전주변의 대형 쇼핑몰은 바르샤바 시민들의 핫스팟. 문화궁전을 정면으로 보고 오른편은 초대형 의류매장과 카페가 있고, 왼편에는 신중앙역과 대형쇼핑몰이 있다. 거기에 깨끗하고 정비된 기간시설 최신식 트램. 보다보면 삭막하다는 느낌을 받기에는 이제 어려워졌다.
구시가지에서 천천히 걸어 신사기지로 나오다보면 괜히 100년후 폴란드가 강국이 될것이라는 예언에 신빙성이 있어보였다.
히 자본주의와 경제성장을 통해 신시가지(문화궁전근처)에 온갖 현대적 건물이 들어섰는데 상당히 아름답다. 거기에 과거 소련식 건물에 페인트칠을 다시하거나 현수막을 걸어 도시가 삭막하지 않다. 거기에 트램이 모두 신형이고 지하철도 신형이다. 모스크바나 민스크의 비명소리의 지하철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차이.
4 볼거리
바르샤바 대학교.
일단 한 차례 완전히 작살난 다음에 다시 도시가 재건되었다 보니 별로 볼 게 없다 생각하기 쉽지만 그래도 볼거리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오늘날 폴란드의 대통령궁으로 쓰이고 있는 라지비우 궁전이나, 폴란드의 서울대학교인 바르샤바 대학[18]을 방문하는 것도 좋다. 바르샤바 대학은 전체가 마치 공원처럼 꾸며져 있어서 반드시 방문해야 할 장소 중 하나로 꼽힌다. 이외에도 교외 지역에 프레데리크 쇼팽의 출생지인 젤라조바 볼라도 볼 만하다.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도시의 인어상도 볼 만 하다.[19][20] 비스와 강 우안에 위치한, 2차대전 후 복원된 중세의 성터와 유적들도 볼 만하다. 시간이 있으면 도시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여러 도서관과 3개의 역사 박물관도 관람하는 것이 좋다. 또한 2차대전 이후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다시 복원된 볼라 지구를 둘러보는 것도 추천한다.
위에서 언급한 문화과학궁전도 배경을 생각해보면 다소 씁슬한 관람거리지만 크기만큼은 주변에 있는 현대적인 고층 빌딩과 비교해도 절대 꿇리지 않는 크기라 많이들 방문한다.
지하철은 2개선밖에 없을뿐더러 역도 얼마없어 트램이나 버스를 많이 타겠지만 막상 타보면 굉장히 깔끔하고 현대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5 자매도시
대한민국의 서울특별시와 자매도시다. 그 외에는 여기를 보자.
인천국제공항에서 2016년 현재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으로 가는 직항은 없고, 모스크바, 프라하, 암스테르담, 파리, 프랑크푸르트, 뮌헨, 도하, 두바이 등지에서 환승해야 한다.
2016년에 LOT 폴란드 항공이 인천 - 바르샤바 직항 노선에 취항할 예정이다. 기체는 LOT답게 787-8.- ↑ 해당 짤방은 폴란드공 만화다.
- ↑ 그 중 절반이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지휘하는 제5군에 소속
- ↑ 그러나 폴란드의 일만은 아니다. 단적으로 스위스 출신 6,000여 명은 돌아올 때는 300여 명 만이 살아 돌아왔다. 프랑스의 상황은 잘 알테니 생략한다.
- ↑ 폴란드 측에서 4만명, 러시아 측에서 7만명
- ↑ 바르샤바 북쪽과 중앙에서 붉은 군대의 진격을 받아내는 사이, 남쪽에서 예비 병력을 돌진시켜서 붉은 군대 방어병력을 쓸어버린 다음 후방을 급습하여 붕괴시키는 작전이었다. 여기에 폴란드의
맵핵대(對) 러시아군 정보망 교란까지 성공하여(바르샤바로 직진할 예정이었던 붉은 군대 병력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작전은 대성공. - ↑ 실제로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미하일 투하쳅스키는 폴란드를 밀어버리고 독일로 진출하여 혁명을 지원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실패로 끝났다 - ↑ 독일 제4기갑사단이 무리하게 바르샤바로 파고 들다가 하루만에 전차 수십여 대가 통구이가 된 일도 있었다.
- ↑ 9월 28일 바르샤바를 방어하던 폴란드군이 항복한 시기에 이미 폴란드군 6천명이 전사하고 1만 5천명이 부상당했으며, 75만에 달하는 시민들 중 2만 584명이 사망하고 5만명이 부상당한 상태였다. 또한
천하의 개쌍놈나치 부대는 무자비하게 폴란드 포로들을 학살했다. - ↑ 1943년의 유대인 봉기에서 바르샤바 유대인 7만명이 학살되었으며,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서는 폴란드계 바르샤바 시민 25만명이 학살되었을 정도였다. 바르샤바 봉기 이후 히틀러는 특별히 명령을 내려 바르샤바 전역에 무자비한 폭격을 퍼붓고 특수 공병 대대까지 파견하여 바르샤바를 완전히 파괴했다.
- ↑ 러시아의 모스크바나 에스토니아의 탈린, 라트비아의 리가 등의 도시 외곽 등지에서 이런 성냥갑 아파트를 찾아볼 수 있다.
- ↑ 단, 프라하도 외곽 지역으로 가면 저런 아파트 천지이다. 사실 탈린도 그렇고 동유럽이나 중앙유럽 동부, 발트 3국에 있는 도시들은 역사지구가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해도 교외 지역은 성냥갑 아파트를 비롯한 현대식 건물들에 둘러싸여진 형태를 띄고 있다.
- ↑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저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바르샤바 재건 때부터 선물한 것이다. 당시 지하철 지어줄까? 저거 지어줄까? 했는데 문화와 과학을 원했던 폴란드가 문화과학궁전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당시 스탈린은 당시 저 건물을 폴란드로 돌아올 것을 다짐하며 세웠다고 한다. 흠좀무. 이런 식으로 건물이나 시설을 선물하는 것은 폴란드 말고도 당시 다른 소련의 위성국들에게도 있었다고 한다.
- ↑ 예를 들어 "소련이 바르샤바에 세운 바르샤바의 무덤" 이라든가 "바르샤바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이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건물 안에서 일해서, 근무시간 중에는 이 건물을 볼 수 없으니까) 이라든가 "바르샤바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곳은 이 건물을 볼 수 없는 집" 등이 있다. (출처.)
- ↑ 다만 일단은 바르샤바의 상징이기 때문에 놔두는 게 낫다는 의견도 있다. 게다가 해당 부분을 부자연스럽게 잘라버리면서 오프닝이 우스꽝스러워지기는 했다.
- ↑ 모스크바 대학 본관, 교통성, 외무성, 호텔 우크라이나
왜 우크라이나란 이름이 붙은 건물이 러시아에, 호텔 레닌그라드스카야왜 모스크바에 레닌그라드가, 예술인 아파트, 문화인 아파트. 그나마 흐루쇼프 시절에 8번째 스탈린 양식 건물의 건설을 막아 7개로 끝났다.흐루쇼프 서기장 만세! - ↑ 맑고 차가운 색조의 빛을 이용해 사물의 양감을 풍부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인 벨로토의 작품들은 재건 사업에서 일종의 지침서 같은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사진 자료가 흑백 사진이었기 때문에 건물의 원래 색깔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게 된 것.
- ↑ 벽돌에 금이 간 것까지 재현했다고 한다.
- ↑ 폴란드 남부의 크라쿠프 대학과 함께 폴란드 대학의 쌍벽을 이룬다.
- ↑ 바르샤바의 상징이 바로 인어인데, 옛날에 어부의 그물에 잡힌 인어를 바르샤바(그 당시는 그냥 시골 깡촌)의 어부가 풀어주었다는 설화에서 모티프를 채용, 인어가 바르샤바의 상징이 되었다.
- ↑ 참고로 인어의 얼굴은 전간기(1차대전~2차대전 사이)의 어느 폴란드 여대생을 본따서 만든 것인데, 이 얼굴의 모델이 된 여대생은 바르샤바 봉기 발발 첫날 봉기군을 이끌고 나치 독일군에 돌격하다가 가슴에 총탄을 5발 맞고 절명했다고 한다. 잠시 묵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