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스 전보 사건

영어 : Ems Dispatch 혹은 Ems Telegraph
프랑스어 : Dépêche d'Ems
독일어 : Emser Depesche

전 세계의 판도와 미래,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까지 완전 개판으로 뒤바뀌게 되는 근본적인 계기[1]

보불전쟁(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 당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휴양지인 엠스에서 가진 회담내용을 전보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부쳤는데, 비스마르크가 이를 일부러 왜곡한 뒤 언론에 퍼뜨려 프랑스와 프로이센 양국의 적개심을 일거에 촉발시킨 사건이다.

1 사건의 배경

1870년 초 스페인의 왕위 계승문제로 또 스페인이야 프랑스프로이센간의 갈등이 촉발됐다. 1868년 이사벨 2세가 혁명으로 실각한 이후 스페인 왕위가 쭉 공석이었는데, 스페인 측에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방계가문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2] 대공 레오폴트[3] 에게 이를 계승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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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엔촐레른 대공 레오폴트의 초상화.

레오폴드 대공은 수락을 했지만 프랑스는 거세게 반발했다. 부르봉 왕조가 이어지던 스페인 왕위가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조로 교체되면, 프랑스 입장에서는 앞뒤로 적에게 둘러싸이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 특히 프랑스는 당시 요로결석으로 고생하던 나폴레옹 3세 대신, 스페인 왕가 출신의 황후 외제니(Eugénie)의 주도 하에 전쟁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결사반대를 천명했다. 한편 프로이센 빌헬름 1세 조차도 레오폴드공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반대했는데 혁명으로 여왕을 쫓아내고 폭도떼들이 무엄하게 신이 내려준 왕권을 갖다 바치는게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4]이었고 거기다가 아무 연고 없는 타국 사람이 내전이 벌어진 나라에 갔다가 무슨 험한 꼴[5]을 당할지 몰라서 레오폴드공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게 된것.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2 경과

결국 1870년 7월 11일, 라인란트-팔츠(Rheinland-Pfaltz)주의 작은 마을 바트 엠스(Bad Ems)[6]에서 휴양중이었던 빌헬름 1세를 주프로이센 프랑스 대사 뱅상 베네데티(Vincent Beneditti) 백작이 방문해 접견을 요청하는데 빌헬름 1세는 베네데티가 요청한 스페인 왕위를 영구히 포기한다는 서약을 이미 끝난 일인데다가 그런 식의 요청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며 무시하고 접견 자체를 거부했다. 애초에 왕위 요청은 스페인에서 한 것이고 프로이센에서 사양했으며, 사건이 다 끝난 마당에 제3자인 프랑스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 자체가 외교상으로 결례였다. 비스마르크가 일방적으로 조작하지 않았더라도 독일에선 발끈할 만한 사항.

여기다 유럽의 최강국인 프랑스 입장에선 벼락 출세한 주제에 너무 잘난 척 한다며 국력이 급성장한 프로이센을 무시하던 상황이었고 국민감정이 쌓여 가던 두 나라에서 이는 충분히 불이 붙을만한 소재였다.

1870년 7월 13일, 프랑스 외무대신 아게노르 드 그라몽 공작(Agénor de Gramont)[7]의 지시를 받은 베네디티 대사가 빌헬름 1세를 다시 찾았다. 그라몽이 내린 지시 내용은, '(이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호엔촐레른가의 대공이 절대 스페인의 왕위에 오르지 않는다고 보장해 달라'는 프랑스의 요구사항을 빌헬름 1세에게 전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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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 사진. 중앙 2명 중 왼쪽의 흰 수염을 기른 사람이 빌헬름 1세, 흰색 모자를 쓰고 그를 돌아보며 얘기를 나누는 사람이 사생팬베네디티 백작 대사.

사실 이 날 방문은 빌헬름 1세 입장에서 꽤 불쾌할 만한 상황이었는데, 대사가 사전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아침 산책중인 빌헬름 1세를 불러세운 것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된 격식도 없는 즉석 회담이었고, 나중에 빌헬름 1세는 그를 “무척 성가셨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빌헬름 1세는 프랑스의 요구를 최대한 정중하고 우호적으로 거절했으며,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쿨하게 헤어졌다. So cool 그 날 빌헬름 1세는 몇 가지 제안을 대사에게 추가로 전달했고, 비서인 하인리히 아베켄(Heinrich Abeken)을 통해 베를린비스마르크에게 이 추가 제안을 포함한 당일 회담 내용을 전보로 보냈다.


...가 끝이면 이 항목은 개설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3 비스마르크의 전보 주작수정(!)

갈리아의 늙은 황소[8]에게 붉은수건(투우)을 흔들어 볼까 합니다.

(몰트케와의 대화중에)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를 자극하려는 용도로 몰트케 등과 상의한 후 다음과 같이 내용에 양념을 쳤다.

원래 비서가 작성한 전보는 이러했다.

국왕 폐하께서 제게 이렇게 써 주셨습니다.

"베네데티 백작이 산책로에서 짐을 가로막더니 상당히 성가신 태도로 '짐은 호엔촐레른 대공의 (스페인 왕위) 계승에 관해 다시는 동의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본국에 전보로 보내도록 윤허해 달라고 요구했소. 그런 식의 약속은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만큼, 짐은 이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소. 물론 짐은 그에게 '짐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고, 짐보다 당신이 파리마드리드를 통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우리 정부가 그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틀림없이 알 것'라고 말했소.

(장관 중 한 명의 조언을 받으신) 국왕 폐하는 상기 요구사항에 대해 더 이상 베네데티 백작을 만나시지 않겠다 하시고, 이 문제에 대해 백작이 이미 파리로부터 전달받은 것과 같은 내용을 폐하께서 (레오폴드로부터) 확인받으셨으니 대사에게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보좌관을 통해 전달하도록 명하셨습니다. 폐하는 프랑스 황제에게 이번 베네데티 백작의 요청과 그 거절 사실에 대해 양국 대사와 언론을 통해 의견을 교환해도 좋다고 제안하셨습니다.

즉 빌헬름 1세는 프랑스의 강경한 반발에 대해 '애초에 나나 우리 정부가 관여한 일이 아니니 잘 모르겠다.'며 둘러대는 한 편, '그러니 보장도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며 우회적으로 거절 의사를 밝히면서도 대화창구는 열어두겠다는 비교적 온건한 회답을 한 것. 그러나 당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거꾸러뜨리고 프로이센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등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이던 와중이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분위기를 더 날카롭게 수정했다.[9]

호엔촐레른 대공의 왕위 계승 포기 소식이 프랑스에 전해지자, 엠스의 프랑스 대사가 '국왕 폐하(빌헬름 1세)는 호엔촐레른 왕가가 앞으로 스페인 왕위에 일절 관여하지 않을 것을 약조했다'는 전보(telegram)를 보낼 수 있도록 승인해 달라고 국왕 폐하에게 요구했다. 폐하는 그로 인해 대사의 접견을 거부했으며, 보좌관을 통해 더 이상 대사와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빌헬름 1세가 한 말은 죄다 빠지고, 오직 대사와 만나지 않겠다고 한 내용만이 남았다. 즉 대사의 무례한 요구에 분노한 국왕이 접견을 거부했다는 뉘앙스가 된 것이다.

결국 이 전보는 비스마르크가 수정한 대로 언론에 배포되었다. 이 때 비스마르크는 자국 언론사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언론과 제3국 영국의 언론사를 통해 배포했다. 당시 전쟁의 당사국이 아니라 중립국이였던 영국을 통해 사건을 알리면서 정보의 신뢰성을 높인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용의주도함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는 부분.

4 프랑스 통신사의 2차 수정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인데, 이 수정된 전보 내용을 받은 프랑스 통신사 아바(Havas)는 번역 과정에서 두 가지 결정적인 오역을 터뜨려 불에 기름을 부어 버렸다. 이 오역은 대다수 프랑스 언론에 그대로 실렸다.

  • 대사의 요구질문(il a exigé)이라고 오역.
  • 보좌관(adjutant)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실어버린 것. 문제는, 독일어로 이 단어는 꽤 고위급의 보좌관이라는 뜻인 데 비해, 프랑스어에서는 부관 혹은 보좌관 이라는 뜻도 있지만 '하사관'이란 뜻도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프랑스에서는 사건의 전모가 '그저 질문을 하러 간 우리 대사를 빌헬름 1세가 문전박대한 것은 물론, 일부러 '부사관 나부랭이' 에게 회신을 들려보내 모욕을 줬다'투로 양념을 쳤다. 결정적으로 이 신문 보도가 나간 것은 사건 다음날인 7월 14일로, 하필이면 프랑스의 국경일바스티유 기념일. 당연히 애초에 신문사에서 이러한 문맥 양념과 타이밍은 의도적이었고 수년간 갈등을 빚어왔던 프로이센에 빨리 선전포고 하라는 주문이었다.

여기서 한가지 반전으로, 나폴레옹 3세 본인은 엠스 전보와 그 후 사건을 듣고도 전혀 선전포고할 생각이 없었다. 수십년간 유럽서 정치판서 굴러먹은 감각으로 볼때 프로이센과의 전면전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1860년대 후반부터 혹시 모를 실전에 대비해 보고 받은, 장부상 머릿수만 많고 실력이 떨어지는 프랑스군의 실상을 알고 현실은 시궁창이란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민 감정은 나폴레옹 3세 혼자서 막을 수 있는게 아니었다.

5 결과

프랑스 조야는 프로이센의 언플에 말 그대로 뒤집어졌고, 곳곳에서 항의집회가 열리면서 전쟁을 요구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나폴레옹 3세는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해 침묵을 지켰다간 폭동이 일어날 것이고 외교적으로 해결하려다간 아무짝에 쓸모없는 황제 따위는 쫓겨날 터라 결과를 예상하고도 전쟁을 선택한다.

독일 역시 국민적 민족 감정이 들고 일어났는데 이미 시대적 사명이였던 독일 통일 문제에 수십 년 간 이래라저래라 참견질하는 프랑스를 꺾지 않고는 통일이 어렵다는 현실적 문제와 나폴레옹 시기 해방 전쟁의 향수가 살아나며 군부와 왕실 정치권이 아닌 부르주아 언론에서조차 "파리로~"를 외치고 대학생들의 자원 입대 열풍이 불었다. 결국 양국의 여론이 최악으로 치달은 끝에, 결국 사건 엿새만인 7월 19일에 프랑스의 선전포고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른바 보불전쟁)이 발발했다.

본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내용은 그닥 변한건 없다. 엠스전보는 제3자가 볼 땐 거기서 거기였고 실제 역사상 큰 비중도 아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언론의 편집자들이 죄다 언어능력이 떨어져서 비스마르크의 의도대로 움직인것도 아니고 대충 대화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양념이 들어갔는지 원본에서 뭐가 빠졌는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외교판에서 구를대로 구른 각국 외교관들도 이를 알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다만 언론사 특유의 선정성을 이용한 여론 자극과 이로 인해 불붙은 여론, 그리고 현대 역덕후들의 그 유명한(?) '엠스 전보'라며 희대의 낚시꾼 비스마르크가 아니었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if 떡밥 때문에 고평가(?)받는 해프닝일 뿐이다. 보불 전쟁 항목을 보더라도 양국은 이미 수년 전부터 전쟁준비에 열심이었고 국민감정은 여러 사건 끝에 최악이었으며 엠스전보가 아니더라도 곧 터졌을 사건이라는 게 통설이다. 즉 엠스 전보 사건은 어디까지나 전쟁을 일으키는 방아쇠 중 하나에 불과했지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었다는 것.

엠스전보사건의 결과는 보불전쟁 항목 참고.
  1. 이 역사적 파장이 얼마나 큰지 이 전쟁이야 말로 근대에서 현대로 바뀌는 진정한 분기점이라는 얘기가 있을정도다.
  2.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가문은 개신교 칼뱅파이지만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은 가톨릭이다
  3. Leopold Stephan Karl Anton Gustav Eduard Tassilo Fürst von Hohenzollern(1835~1905). 훗날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독립한 루마니아 왕국 초대 국왕 카롤 1세의 형이자, 2대 국왕 페르디난트 1세의 아버지. 루마니아 왕위를 계승할때 루마니아 정교회로 개종한다. 정작 본인은...
  4. 빌헬름 1세는 왕세제시절에도 독일에서 1848 혁명시 강경진압을 주장하다 살해당하기 전에 영국으로 도주한 전적이 있을 정도로 보수적인 왕권신수설론자였다.
  5. 조금만 앞서 봐도 나폴레옹 3세의 부추김에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에서 황제로 등극(?)했다가 처형당한다.
  6. 17세기 부터 유명했던 온천 휴양지. 바그너와 같은 유명 작곡가는 물론이고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니콜라이 1세알렉산드르 2세도 좋아하던 휴양지라고. 참고로 독일어 Bad는 영어의 'Bath'에 대응하는 뜻으로, 욕조나 목욕탕 혹은 온천이란 뜻이다.
  7. 당시 그라몽은 이 전보 사건의 책임을 모두 베네디티 대사에게 뒤집어 씌웠고, 사건 이듬해 베네디티는 '프로이센에서의 임무(Ma Mission en Prusse)라는 책을 내 이를 반박했다.
  8. 갈리아는 로마시대 프랑스 지방을 부르던 말이고 늙은 황소는 당연히 나폴레옹 3세이다.
  9. 훗날 그는 상황이 자기 뜻대로 움직였다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