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제

惠帝

중국 황제 시호 중의 하나로 이 시호를 받은 황제들의 말로는 모두 비참한데 시법을 봐도 이 글자가 좋은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1 전한 혜제 유영(劉盈)

전한의 역대 황제
1대 태조 고제 유방2대 혜제 유영3대 소제 유공
시호효혜황제(孝惠皇帝)
유(劉)
영(盈)
생몰기간BC 211년 ~ BC 188년 9월 26일
재위기간BC 195년 6월 23일 ~ BC 188년 9월 26일

고제 유방의 차남으로 적자로서는 장남이다.[1] 효혜황제(孝惠皇帝)라고도 불린다.

진시황 재위 37년이었던 기원전 210년에 패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항우에게 패해 도망가던 아버지에 의해 마차에서 집어던져진[2] 적도 있지만 하후영 덕택에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그래서 장성해서도 생명의 은인인 하후영을 극진히 대우했다고 한다.

기원전 195년 5월에 16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으나, 실권은 어머니 여후가 쥐고 있었다. 고제는 만년에 혜제가 연약하니 폐하고, 대신 척부인의 아들 조왕 유여의를 태자로 봉하려는 뜻을 비쳤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에 앙심을 품은 여후는 고제가 죽자 척부인을 가두고 유여의를 죽이려고 했다.

일단 유여의를 장안으로 소환했는데 혜제는 계속 한 자리에서 계속 먹고 자면서 보살폈기 때문에 여후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기원전 194년 12월, 혜제가 아침 일찍 사냥나간 사이 잠들어 있던 유여의를 죽이고 그 어머니 척부인은 삭발하고 빨간 옷을 입힌 후에 방아를 돌리게 하다가 나중에는 을 뽑고 , , 을 모두 자르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이고 뒷간에 던져서[3]이것을 '인간 돼지'라고 부르며. 무슨 생각이었는지 유여의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혜제에게도 이 꼴을 보여주었다. 충격을 받은 혜제는 1년 정도 병상에 누워있다가 병이 나은 뒤에도 상심하여 주색에 빠져 자연 몸이 상했다.

결국 기원전 188년 8월, 재위 7년 만에 23세의 나이로 장안 미앙궁에서 사망하고 9월에 안릉에 안장되었다. 그의 황후 장씨는 장이의 아들 장오와 노원공주의 딸인데 노원공주가 그의 친누나였으니 장씨는 그의 외조카가 된다. 철저히 여후에 의한 정략결혼이었으며 혜제가 총애하지 않아서인지 둘 사이에서는 소생이 없었다.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일곱 아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혜제의 친아들인지 불명확하며 그 중 둘은 황제가 되었지만 요절한 둘을 제외하면 모든 아들들이 한문제 즉위 후 처형되었다.

그의 뒤는 소제가 이었다.

2 서진 혜제 사마충

항목 참조

3 혜종(혜제) 건문제

항목 참조
  1. 고제가 어느 여인에게서 낳은 제왕 유비는 장남이었지만 서자였다.
  2. 아이들이 있으면 자기가 타고 있던 마차가 무거워서 마차의 속도가 나지 않는다고 집어던진 것이다. 머나먼 후손그 아들을 투척한 일화와 비슷한 듯 하나 다른 일화. 후손이 한 행동은 훌륭한 장수의 죽음을 걱정했기 때문이나 이 아버지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한 짓이다. 유방이나 한나라 입장에서 볼 때 어쨌든 유방이 살아남는 게 중요했을 테니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윤리철학적 논쟁을 신나게 펼쳐 볼 수 있을 만한 이야기.
  3. 변소에 넣었다고 해서 옛날의 재래식 변소를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시 중국의 뒷간은 돼지 우리를 겸하고 있었다. 돼지 우리 옆에 약간 높게 용변을 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놓고 사람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 용변을 보면 그것을 아래 돼지 우리에 있던 돼지가 들어와서 먹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척부인을 여기의 돼지 우리 부분에 넣었다고 봐야지 재래식 변소 구덩이에 사람을 빠뜨렸다면 독소 때문에 사람은 몇 시간도 못되어 죽어버린다. 물론 변소가 아니라고 해서 여후의 사악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천하의 여후도 똥독은 싫은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