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우로

이름석우로(昔于老)
생몰년도? ~ 253년

1 개요

신라 초기 석씨 왕가의 귀족, 장군. 기록이 모호한 신라 초기에서도 여러 전쟁에서 활약한 몇 안 되는 명장. 조분 이사금 시대에 대장군으로서 경상도 지역 안쪽의 신라 주변 소국의 반란이나 고구려, 의 침략을 방어해내며 활약했다. 신라 10대 임금인 내해 이사금의 둘째 아들이다.

2 생애

2.1 무인으로서의 전성기

아버지 내해 이사금 재위기 태자이던 시절 209년 7월 이음(利音)과 함께 6부의 군사를 이끌고 포상팔국의 난을 진압하고 포로 6천여명을 되찾아왔다. 이후에도 231년 7월 지금의 김천시에 있었던 소국 감문국 정벌, 233년에는 동해 바다를 건너온 왜군의 침략을 영덕군 사도성에서 격파했고 243년에는 고구려의 북쪽 변경 침략을 방어하러 출정했으나 여기서는 이기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리고 247년 사량벌국(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의 소국)의 난[1]에서 활약하였다. 아마 군공의 갯수만 따진다면 삼국시대 장군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들것이다.

이렇듯 완벽한 군공을 지녔고 아버지 내해 이사금이 국왕이고 본인은 태자였지만 정작 왕위는 계승 서열이 더 낮아 보이는 조분 이사금, 그 다음은 첨해 이사금에게 돌아갔다. 우선 조분 이사금에게 왕위가 돌아간 이유는 조분이 전전왕 벌휴 이사금의 적장손이었던 점이 가장 컸다. 골정과 이매가 벌휴 이사금 시기 때 모두 태자에 올랐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그 다음 왕위는 당연히 골정의 아들 조분에게 넘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내해 이사금의 어머니 내례부인의 힘으로 인해 조분보다 나이가 많았던 내해가 대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물론 내해는 골정의 딸 즉 조분의 누이와 결혼하면서 골정의 사위 신분이라는 것도 이용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한 점이 마음에 걸려왔는지 내해 이사금은 조분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켰고 비록 우로가 태자에 위치에까지 올랐지만 자신의 사위 신분으로 조분을 왕위계승 1순위로 올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왕위계승에서는 물러나긴 했지만 우로는 조분 이사금 시절 때는 곧바로 대장군과 최고관직인 서불한에 임명이 되었고, 조분 이사금의 딸과 결혼하면서 아들이 없던 조분 이사금의 뒤를 잇는 왕위 계승서열 1순위에 또다시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조분 이사금이 죽은 이후 왕위는 조분 이사금의 동생인 첨해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2.2 비참한 최후

그리고 첨해 이사금 제위 3년만에 석우로는 왜국 사신에게 괜히 모욕적인 발언을 하는 바람에 왜와의 전쟁을 촉발시켰다.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는

첨해왕 7년 계유(서기 253)에 왜국 사신 갈나고가 방문하자 우로가 대접을 맡았다. 사신을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于柚村)(현재의 울진으로 추정)으로 피난해 있게 되었다. 우로가 아뢰었다. “지금의 환란은 제가 말을 삼가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마침내 왜군에게 가서 말했다. “전에 한 말은 농담일 뿐이었는데 어찌 군대를 일으켜 이 지경까지 이를 것을 생각하였겠느냐?” 왜인이 대답을 하지 않고 그를 붙잡아 장작더미 위에 얹어 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가버렸다.

자신의 태도로 자초한 일이니 스스로 전쟁에 책임을 지겠다며 적진으로 갔으나 분노한 왜군에 의해 화형당한다. 왜 굳이 이런 거친 표현을 써서 화를 불렀는지는, 위에도 적혀있듯 석우로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왜군과 싸운 경력도 있는만큼 평소에 일본이란 나라를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석우로가 화형당한 이 부분에 대해, 선왕의 핏줄이자 수많은 공적을 세우고 현재도 군권을 가지고 있던 우로를 첨해 이사금이 왜군의 침략을 핑계삼아 숙청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후에 왜 사신이 찾아오자, 이번엔 원한을 품고 있던 석우로의 부인이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 사신을 불태워 살해하여 왜가 살해된 사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복수가 복수를 낳는 상황.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는

미추왕(味鄒王) 때 왜국 대신이 와서 예방하였는데, 우로의 처가 국왕에게 청하여 왜국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하게 되었다. 그가 흠뻑 술에 취하였을 때, 그녀가 장사(壯士)를 시켜 뜰에 끌어내려 불태워서 지난날의 원수를 갚았다. 왜인들이 분개하여 몰려와 금성을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고 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는데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을 포로로 삼고 해변으로 와서 무릎뼈를 뽑고 돌 위에 포복시켰다. 조금 있다가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신라에 있는 대사로 하고 돌아갔다. ... 죽은 왕의 처는 신라인과 공모하여 일본 대사에게 "왕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면 그대와 결혼하겠다"고 속여 왕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자 곧바로 대사를 죽이고 왕의 시신을 꺼내 다른 곳에 묻었다. 그때 대사의 시신을 왕의 시신 밑에 묻고 "존비(尊卑)의 순서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덴노가 이 소식을 듣고 진노하여 신라를 정벌하러 군대를 보내자 신라인들이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여 일본군은 철수했다.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신라왕은 정황상 왕위에 매우 가까운 갈문왕이었던 우로를 왕으로 착각해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본다.

3 평가

본인의 성격은 고대 국가의 고위 귀족 출신답지 않게도 솔선수범하고 병사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던 듯 하다. 그 일화로 고구려가 쳐들어와서 그걸 막으러 북쪽으로 갔을 때, 음력 10월인 겨울이어서 갑자기 한파가 불었다. 군사들이 피곤해하자 우로는 직접 나무를 해서 불을 피우며 병사들을 배려하고 거기에 병사들이 감격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가 전장에서는 명장이었을지는 몰라도 정작 외교현장에서 실언을 해 안 해도 될 전쟁을 하게 해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물론 스스로 목숨을 걸고 책임을 지는 모습으로 전쟁을 막기는 했지만. 그의 아내 역시, 아내로서는 옳은 일을 한 셈이나 나라를 어렵게 만든 꼴이니 뭐라 평하기는 어렵다.

4 기타

이후 16대 흘해 이사금이 석우로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해당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지만 시대차가 너무 난다. 석우로가 죽은 딱 그 해에 유복자로 태어났다고 쳐도 죽을 때 100살을 넘는다는 말인데 아주아주 장수했다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이런 부분이 한두번도 아니고 신빙성이 좀 낮다. 아들이 아니라 손자 혹은 증손일 가능성이 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신라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백제 쪽에 붙으려고 했다. 후삼국시대아자개에서도 다시 한 번 재현되지만 상주시 지역은 고신백 삼국의 가운데쯤인 요충지라 단순한 지역 하나 이상의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