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해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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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11대 조분 이사금 석조분12대 첨해 이사금 석첨해13대 미추 이사금 김미추
시호첨해 이사금(沾解 尼師今)
석(昔)
첨해(沾解)
생몰년도음력? ~ 261년 12월 28일
재위기간음력247년 ~ 261년 12월 28일(14년)

1 개요

신라의 제 12대 임금으로 칭호는 이사금. 성씨는 석씨이고, 전왕 조분 이사금의 친동생이며, 아버지는 벌휴 이사금의 장남 골정, 어머니는 옥모부인이다.

1.1 왕위 계승

즉위년에 아버지 골정을 세신 갈문왕에 봉했다. 이건 첨해의 즉위에 어떤 사건이 있다고 볼 수 있는 요소인데, 왜냐하면 자신의 형인 조분이 이미 왕위에 올랐던 상황이었는데도 형 때는 아버지 골정을 갈문왕에 봉하지 않았고 동생 첨해가 오르고서야 갈문왕에 봉했다는 것이다. 즉 조분은 골정의 태자 신분이 아니라 사촌인 내해 이사금사위 신분으로 왕위를 상속했기에 아버지를 갈문왕에 봉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기록을 보면 신라는 이 때 흔히 아는 장자계승이 아니라 사위 위주의 왕위계승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첨해는 당시 기준으로 보자면 적자가 없을 때에는 왕위계승 서열 3위가 된다. 1위는 조분 이사금의 맏 사위가 되는 내해 이사금의 태자였으며 거기다 신라의 병권을 책임지고 있던 석우로가 되겠으며, 2위는 뒤에 왕위에 오르는 조분 이사금의 둘째 사위 김미추가 되겠다. 즉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인물이 왕위에 올랐다는 점이다.

2 석연찮은 석우로 피살 사건

그리고 첨해 이사금 즉위 초기에 있었던 석우로의 죽음에는 매우 석연치 않은 부분이 존재하는데 당시 신라 최고의 왕족인 석우로가 왜국의 사신에게 "너희 왜국의 임금을 붙잡아다 소금 굽는 노비로 삼고, 왕비는 밥짓는 노비로 삼겠다."는 말을 술김에 해서 이후 왜 진영에 별다른 호위도 없이 털레털레 가서 사과를 하는데 왜에서는 그를 붙잡아다 불에 태워버렸다고 한다. 왜군들이 석우로를 붙잡아다 장작에 올려놓고 태워 죽여서 아주 재로 만들어버렸으니....ㅠㅠ.. 이것은 신라의 병권을 책임졌던 장수에다 왕위에 매우 가까웠던 최고 왕족이 왜 진영에 단신으로 갔다가 불에 타 죽고 말았는데도 문제는 첨해가 왜에 대해 따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첨해는 지나치게 쌓인 힘과 업적이 큰 우로가 왜인이라는 제3자들에 의해 제거되기를 원했다는 것일 수도 있다. 다른 문제로는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는

우로가 대접을 맡았다. 손님과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于柚村)(현재의 울진으로 추정)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석우로가 말하기를 "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데서... 석우로의 아내가 국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그가 몹시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으로 끌어내 불태워 전일의 원한을 갚았다

고 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는데

신라왕[1]을 포로로 삼고 해변으로 와서 무릎을 뽑고 돌 위에 포복시켰다. 조금 있다가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신라에 있는 대사로 하고 돌아갔다. ... 죽은 왕의 처와 신라인이 공모하여 대사를 죽이고 왕의 시신을 꺼내 다른 곳에 묻었다.

고 되어있다. 여기서 문제는 왜군이 신라를 쳐서 첨해 이사금이 우유촌으로 나가 있어야 할 상황까지 몰렸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첨해 이사금이 우유촌으로 간 것을 출거(出居)라고 표현하는 것을 볼 때,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군이 패전했거나 상황이 열세에 몰리자 첨해가 우유촌으로 피난을 갔고, 석우로가 개전의 책임을 지고 살해당했을 수 있다. 석우로의 지위는 최고위직인 서불한(이벌찬)에다 왕족이었으며, 신라 왕족들이 갈문왕의 칭호를 받았던 점을 미루어보면 석우로도 어떤 왕의 칭호를 받았거나 아니면 일본 측에서 왕으로 착각할 정도의 고위 인물이었다. 일본서기 측 기록은 석우로의 지위 이후 기록의 유사성으로 보아 석우로로 보인다.

첨해 이사금 때의 일은 아니고 다음 왕 미추 이사금 시대의 일화지만 석우로가 왜인들의 손에 살해당한 후 그의 아내와 아들이 왜국 대사가 신라에 와 있을 때 술에 취하게 만들고 불태워 죽여버림으로서 원수를 갚았지만 분노한 왜군이 다시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했다가 별 소득 없이 돌아가기도 했다.

2.1 이후

첨해 이사금의 재위기간은 14년 정도인데 신라 초기 왕치고는 비교적 짧은 편이다. 그의 재위기간에 기근이 심해서 명산을 찾아다니며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고 도적이 들끓었다. 그러다 비가 내릴 때는 또 큰 비가 내려 산이 40군데나 무너졌다는 기사도 있다.

외국과의 관계는 우선 전왕 때 최초로 맞붙었던 고구려와는 일단 사신을 보내 화친했다. 그러나 백제와는 여전히 자주 충돌했는데, 즉위 9년(255년) 백제가 변경에 침입했지만 격퇴했으며, 즉위 15년(261년) 달벌(현재의 대구광역시)에 성을 쌓았다. 첨해 이사금 때쯤에는 옛 진한의 모든 지역을 차지했으리라 추정된다.

3 사망

冬十二月二十八日 王暴疾薨

겨울 12월 28일, 임금이 갑자기 병이 나서 돌아가셨다.-《삼국사기

 
보통 삼국사기에서는 그냥 돌아가셨다라고 끝내는 경우가 많지만 첨해의 경우는 '갑자기'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하는데, 정말로 돌연사일 수도 있겠지만 다음 왕이 본인의 사위가 아니라 전왕 조분의 사위인 김미추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석우로가 왜군에게 잡혀 화형당해 죽도록 방치하고 왜국에 별달리 항의나 보복하려고 하지도 않은 첨해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분개한 석씨왕족과 조분 이사금의 사위였던 김미추가 힘을 합세해 반정을 일으켜 첨해를 제거했다고 보는게 유력한 해석일 듯 싶다. 아니면 왜와 백제의 공격이 거세지는 와중에서 첨해 이사금의 책임론이 부각되어 이를 근거로 원래 조분 이사금 사후 왕위 계승서열 2위였던 미추를 비롯한 김씨 계열이 반정을 주도했을 수 있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五月 첨해이사금이 즉위하다
一年秋七月 시조묘에 배알하고 아버지 골정을 세신갈문왕으로 봉하다
二年春一月 이찬 장훤을 서불한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다
三年夏四月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이다
三年秋七月 궁의 남쪽에 남당을 짓고 양부를 이찬으로 삼다
五年春一月 남당에서 첫 정무를 보고 부도를 아찬으로 삼다
七年夏四月 용이 궁의 동쪽 연못에 나타나다
九年秋九月 일벌찬 익종이 백제와 싸우다가 죽다
九年冬十月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다
十年春三月 동해에서 큰 물고기 세 마리가 나오다
十年冬十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三年秋七月 가뭄과 흉년으로 도적이 많다
十四年 큰 비가 내려 산이 무너지다
十四年秋七月 살별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다
十五年春二月 달벌성을 쌓고 내마 극종을 성주로 삼다
十五年春三月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十五年冬十二月二十八日 왕이 죽다
  1. 석우로가 왕위에 아주 가까운 고위 왕족이기도 했고 갈문왕이기도 하기 때문에 신라왕으로 일본인들이 착각한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