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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薛卿東
1901년 03월 19일 ~ 1974년 1월 20일

1901년 3월 19일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아버지 설흥업과 어머니 조성녀 사이에 무녀독남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이 좀 어둡다. 아버지가 세살 때 돌아가셨으며, 어머니와 단 둘이서 함경북도 부령군으로 이사해 무산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미래를 생각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유학보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굉장히 과감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쿠라 고등상업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은 하지 못하고 중퇴했다.

결국 한국으로 귀국해 부령군청에서 잠시 일을 하다가 본격적인 사업의 길을 걸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사업 수완이 뛰어난 듯하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그는 일본인을 동업자로 끌어들여 삼광운송점과 삼광상회를 세우며 운송업과 곡물, 해산물 위탁판매 를 해서 부를 축적했으며, 뒤이어 동해수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청진 앞바다에서 정어리를 잡아 이를 가공해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에 힘입어 어선 70척에 비행기로 고기를 탐지할 정도의 함경도 거부로 성장했다. 그러나 광복과 함께 북한의 공산군이 점령하면서 월남해 무역회사인 대한산업과 부동산 회사인 원동흥업을 세워 남한에서도 곧 거부 대열에 올라섰다. 6.25전까지 그가 수원시에 세운 성냥공장은 한국시장을 석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인해 전재산을 모두 날렸으나, 전쟁이 끝난 뒤 방직공장을 인수하여 대한방직주식회사를 설립, 사장이 되었다.마이더스의 손

그러나 4.19 혁명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그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의 기간산업 건설에 참여할 기회를 얻어 대한전선의 시설확충에 입김을 불었다.이후 텔레비전, 냉장고, 선풍기등 전자제품 생산을 해 당시 가전제품 판매율 2위로 올랐으며,[1] 이의 호황에 힘을 실어 그의 기업체군은 대한재벌로 불리게 되었다. 나이 70세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지병이 생기자 장남 설원식을 비롯한 2세들에게 사업기반을 물려 주고 물러났다.

결국 1974년 1월 20일 별세했다. 향년 72세.
  1. 당시 1위는 금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