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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oy Mutiny
Indian Rebellion of 1857
1 개요
1857년과 1858년을 중심으로, 1859년까지 인도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에 고용된 세포이 용병들이 일으킨 대규모의 봉기.
세포이 항쟁은 힌두교와 이슬람,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 등의 벽을 넘어 인도 독립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과 함께 그 의미가 대단히 큰 사건으로, 대대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으로서 세계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는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2 배경
영국은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와 인도 제후의 연합 세력을 꺾어 벵골 지배의 길을 연 뒤 1767년 북사르 전투에서 무굴 제국의 세력을 꺾었다. 그리고 뒤이어 18세기 중후반 동안 인도 서북부의 마라타 동맹, 인도 남부를 장악한 마이소르 동맹과의 전투에서 승리 하면서 1세기 동안 인도 반도는 사실상 영국의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무굴 제국의 틀과 크고 작은 지역 왕국은 아직 존속하고 있었다. 영국의 지배는 인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매우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이에 대한 불만과 적대감이 일반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지역 왕국들의 구지배층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선 산업혁명 당시 영국에서 밀려들어오던 무수한 면직물 등으로 인하여 인도의 전통 면산업이 붕괴되었다. 그당시 면산업의 중심지였던 다카는 15만이나 되던 인구가 3~4만으로 줄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동인도회사의 토지개혁 등으로 중소농민들이 땅을 잃게되자 이들은 동인도 회사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또한 선교사들의 포교와 동인도회사 행정부의 인도인 무시가 심했다. 당장 1853년 창설된 법무위원회에서는 자문위원들이 전원 영국, 유럽인들이었으며 인도인이 단 한명도 없었다. 이러한 차별대우는 인도인들의 불만을 더욱더 상승 시켰다.
3 세포이 용병들
인도를 지배한 영국군에는 많은 인도인 용병들이 있었는데, 1850년 당시 영국군 26만 9000명 중 영국인은 4만 6000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인도 현지의 세포이였다. 이들은 이슬람, 힌두교, 시크교 등등 수많은 종교신자들로 뒤섞여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 용병을 가리켜 '세포이(sepoy, 페르시아어의 'siphai'에서 유래)'라고 불렀다. 이들은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정복을 위해 고용한 것이었다. 영국은 이들을 출신지역에 따라 3개군으로 나누어 배치시켰는데, 각각 벵골군, 뭄바이군, 마드라스군이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처우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데, 우선 나이에 따라 진급을 시키는 영국군 제도를 적용하다 보니 나이가 어느정도 있던 세포이들은 상대적으로 진급에서 불이익을 겪었다. 또한 힌두교도들은 카스트가 지배하는 인도의 바깥 세계로 나가는 것을 꺼렸는데, 영국인들이 해외 원정을 요구하면서 세포이들과 갈등을 빚었고 영국 측에서는 이에 해외 원정을 거부하는 세포이들을 해고하도록 하는 지침을 내려 대응했다. 그래도 먹고 살려고 입대한데다 돈은 준다길래 어찌어찌 원정은 하고있었는데, 1856년 일반복무규정에 의하여 벵골군의 상당수는 해외원정에서 제외되었다. 기수열외
게다가 이들 세포이 용병들의 수가 더 늘어나자 동인도 회사측은 경비를 줄이려고 세포이들의 퇴직연금 지급을 중단시켰다. 특히 벵골군 세포이들은 퇴직금의 부담을 줄이려고 뭄바이군나 마드라스군보다 급료까지 적게 받는 도중에 이 일이 터저 버렸다. 훗날에 돈아끼려다가 대형사고친 모기업이 생각난다면 착각 여기에 1856년 아와드 지역이 병합되자 세포이들은 자신의 지역에서 누려온 토지세 특권 같은 특권이 축소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사실상 세포이들은 토지세 특권을 이유로 세포이업을 세습 가업으로 삼고있었다.
4 화약 탄포 문제
(영화 '만갈 판데이'中. 리-엔필드 머스킷 소총의 장전 및 사격 방법. 1분부터 보면된다)
영국과 세포이간에는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다. 1857년 3월 29일 벵골군 세포이였던 '만갈 판데이(1827~1857)'가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하고, 지휘관의 말까지 쏘는 하극상을 벌이자 연대장은 판데이의 체포를 명령하였으나 단 한명을 제외한 모든 세포이들이 지휘관의 명령을 씹었다. 그 외에도 아그라 등 많은 도시에서 충돌이 있었다. 이는 1857년 5월 10일, 델리 북쪽 미루트에서 발생한 '화약 탄포 문제'로 항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단순한 화약 탄포가 일을 크게 만든 것은 영국인이 소와 돼지의 기름을 칠한 소총 탄포를 사용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힌두교도들은 소를 신성시하고, 무슬림들은 돼지를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무슬림이 폭발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특히 힌두교도는 쇠고기를 입에 대면 카스트를 잃게 된다. 특히 호구였던 벵골군의 세포이들은 라즈푸트(크샤트리아)/브라만 등 상층카스트가 많아서 더욱더 분노했다고 한다….본래 세포이들은 카스트에 상관없이 모집했으나 벵골군의 경우에는 플라시/북사르 전투로 인해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상층 카스트를 모집하고,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힌두교 의식/방식도 허용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로 인해 벵골 세포이들은 영국문화에게 더더욱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근거없는 소문은 아니었던게, 당시 전장식 머스킷(새로 보급된 리-엔필드 머스킷)에는 흑색화약 정량 종이에 납탄과 함께 싸서 끈으로 묶어 밀봉하는 페이퍼 카트리지를 사용했는데, 원래 머스킷 초창기에는 플라스크에 화약을 따로 담아 다녔지만, 나중에는 휴대와 사용의 편의를 위해 페이퍼 카트리지로 옮겨간다. 페이퍼 카트리지라고 하지만 총탄의 탄피를 뜻하는 카트리지와는 조금 다르다. 본격적인 탄피 시대 초기에 종이탄피가 사용된 적이 잠깐 있지만 그것과도 동떨어진, 그냥 종이로 적정량의 흑색화약과 탄약을 둘둘 말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를 사용하려면 종이로 된 화약 탄포 한쪽을 이로 찢어서 탄포 안에 든 화약을 총구에 부어 넣은 뒤, 화약이 새나오지 않도록 카트리지 종이를 탄환과 함께 뭉쳐서(혹은 탄포 종이를 먼저 쑤셔넣고 다음으로 탄환을) 총신에 쑤셔넣는 구조였다. 그런데 방수효과를 위해서 탄포 종이를 동물의 지방으로 코팅해 두었던게 화근.
사실 영국측의 초기 예상은 총신에 기름을 바르지 않아도 되니 세포이들은 분명히 좋아하겠지였고, 이것 때문에 세포이 전원에게 이 총을 지급하려고 했다. 여기에 이 문제에 대해 영국인 장교들이 "그럼 니네들이 새로 만들어서 밀랍이나 양기름으로 코팅하셔"라고 말하는 바람에 기름 문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후에 영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소기름은 확인되었으나 돼지기름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조사 내용이 어찌되었건 이 사건은 인도인의 대대적인 분노를 부르게 된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영국측은 교본을 수정해 손으로 뜯어도 되는 방향으로 수정할 것을 권고했으나 시정되지 않았고, 오히려 명령을 거부하는 세포이들을 하극상으로 불명예 제대, 심지어는 교수형까지 시켰다.
그러니까 유럽 본토에서 1820년 중반부터 썼던 것처럼 후장식을 썼어야지
5 전개
세포이 항쟁 당시 분포도. 검은색은 세포이 반란 중심지역. 남색은 항쟁 중 영국을 지원한 세포이 지역. 파란색은 영국 지지 지역. 황색은 항쟁의 영향을 받은 영국 지배지역. 연두색은 중립지역. 흰색은 영국 영국 직할 지배지역.
세포이들은 순식간에 델리를 점령하고 무굴 황제의 통치 부활을 선언했다. 여기서 항쟁은 더욱 퍼져나가 중부 인도로 세포이 항쟁이 확대되면서 전혀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는데, 대다수의 소작농민들이 참여하면서 '반란'이 '항쟁', '독립운동'의 성격을 띄기 시작한다. 동인도 회사의 토지개혁으로 심각한 경제적 곤란을 겪던 소작농들은 처음부터 확실하게 동인도회사와 영국에 대한 거부를 명확히 하고 있었고 여기에 인도고유문화를 부정하는 영국에 대한 문화적 반감도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
항쟁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농민과 시민도 참가해 영국의 지배는 위험에 빠졌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가만있지 않아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9월 델리의 세포이군을 격파한다음 무굴 황제를 체포했다. 여기에 이 항쟁은 강력한 통일 지도조직을 가지지 못한 것도 커다란 한계였다. 세포이 모두가 참여한 것도 아니었다. 75개 연대중 44개 연대나 참여한 벵골군과는 달리 뭄바이군은 3개연대만 동조했고, 마드라스군은 단 한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이 항쟁에 대해 시크교도들은 오히려 영국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시크교를 탄압했던 '무굴 제국의 부흥'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 영국은 이 때문에 시크교도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펀자브 지방의 토후와 손을 잡을 수 있기도 했다.
이후에도 세포이 항쟁은 여러 지역에서 소모적인 활동이 있었으나, 결국 영국군의 압도적인 기술력과 화력을 당해내지 못했고 결국 그들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에 부딪쳐 1859년 7월에 완전 진압되었다. 이 와중에 세포이들은 포로로 잡힌 영국인들, 민간인을 매우 우대했는데 당시 영국에서는 포로로 잡힌 여성을 안 건드려서 성불구자가 아니냐는 개드립까지 쳤다. 그러나 결국은 나중에 과격해져서 영국인을 보기만 하면 다죽여버리려 했다. 특히 칸푸르에선 반란군을 이끌던 나나 사힙이 항복하면 살려준다고 해서 항복한 영국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학살했는데 남자들은 전부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한다음 아이들과 같이 고기자르는 칼로 토막살인을 해 우물에 던져버렸다. 이로 인해 한때 인도인들에게 동정적이였던 영국 본토 사람들마저 분노하여 전부 강경파로 변하고, 영국군은 이에 대응하여 더 많은 수의 반란군과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학살로 보복하여[1] 인도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칸푸르 학살 이전에 영국이 이런 소리를 하던 건 신사의 나라이니 뭐니 뻐기던 그들도 전쟁 벌이면서 얼마나 더러운 짓을 많이 벌였으면 이렇게 하는 걸 당연했던 것...도 있지만 당시 영국군은 가난한 집안에서 돈벌고자 서로 오려던 경우가 허다해서 적국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약탈이나 강간은 워낙 흔했고 영국 여론도 이걸 비난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는 영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걸 혐오하며 약탈이나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고 심지어 시체를 뒤져 물건을 차지하는 부하까지 가차없이 교수형시킨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는 영국에서도 괴짜로 소문항목보면 알겠지만 영국군들에게 증오도 대단했다났던 걸 보면 알만했다.
6 항쟁 이후
인도 통치 개선법 제1조 지금까지 동인도 회사가 점유했거나 통치했던 영토와 그 권력을 영국 여왕 폐하가 대신한다. 제2조 여왕 폐하의 국무위원 중 헌 사람은 동인도 회사가 가졌던 권력과 그 의무를 모두 가지고 실행한다. 제3조 동인도 회사의 토지, 부동산, 금전, 저당품, 상품, 재산, 그 밖의 부동산과 동산은 이 회사의 자본금과 배당액을 제외하고는 페하에게 주어진다. |
이 사건의 여파로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해체[2]하고 무굴 황제를 폐위하여 추방시켜 무굴 제국을 멸망시킨다. 이후 총독에 의한 정치를 지나 1877년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황제' 자리를 빼앗아 황제를 칭하고 식민지 인도 제국이 세워진다.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바하두르 샤는 미얀마로 귀양을 떠나서 그곳에서 쓸쓸하게 죽었고 그의 아들들은 영국에 대항한 죄로 모두 처형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영국은 일방적인 팽창주의 정책으로 더이상 나아가기에는 한계에 부딪쳤기 때문에 이후 영국은 교역과 이권을 챙기는 실리주의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다만 이건 자기들 사정과 이득에 따른 점으로 바꾼 것이지, 당연히 인도를 위하여 바꿀 리 없다.
이전 이 항목글에서도 남미같이 완전히 서양문화가 이식된 곳이 아니라 종교와 언어에서 원래의 문화를 간직하던 아시아권에서 베트남에서는 프랑스이름,종교가 독립 후 제거 대상 1호 취급을 받은 반면,영국 식민지에서는 영어 이름과 영어 사용이 거부감없이 지속되었다면서 영국 식민지가 그래도 낫다고 옹호하고 환상을 가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제국주의랑 같은 식민지 시대를 찬양하는 헛소리다. 그 예로 프랑스어가 많이 쓰이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봐도 프랑스 이름은 상당수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아프리카라 그렇다? 그럼 영국 지배를 받은 말레이시아에서 영어 이름은 그다지 흔한 이름이 아니며 영어를 나랏말로 쓰진 않듯이 베트남과 다를 게 없다! 이런 이름이니 뭐니로 영국이 프랑스보다 낫다고 하는 건 개소리다. 그리 따지자면 스페인계 이름이 아직도 다수인 필리핀을 언급하며 스페인이 우리도 이렇게 이름으로 현지인들이 많이 쓰이니 프랑스보다 낫다고 하는 망발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거 네오나치들이니 백인우월주의 돌아이들이 자주 하는 소리잖아 즉 영국이 더 낫네 뭐다도 절대 아니다. 무엇보다 그럼 다른 영국 식민지이던 나라들은 케냐 독립 와중에 영국군이 1950년대 벌인 학살과 인권탄압은 비록 프랑스가 알제리 전쟁에서 벌인 학살과 수가 적다뿐,영국이 프랑스보다 얌전하고 잘 다스렸다? 차이는 없었다. 다수 영연방 나라들이 가난 및 경제적 문제로 속해있다고(캐나다나 호주나 뉴질랜드같은 백인 국가는 제외,물론 아일랜드같이 백인 나라임에도 영연방에서 박규 내밀며 스스로 나간 경우도 있지만) 영국이 다른 열강보다 식민지 사람들을 잘해줬다라고 개뻥을 치는 경우[3]가 종종 보이는데 전혀 아니다. 이런 논법은 서양 백인우월주의들이 쓰는 불쏘시개 책자에서도 똑같이 한다.
더 정확히는 세포이 항쟁이 있었던 무렵, 영국은 제2차 아편전쟁도 겪었기 때문. 결국 영국은 양쪽에서 벌어진 전쟁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정책을 수정하게 된다. 식민지를 위해서도 실리주의도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이득으로 겉모습만 저런게 허다했다. 당장 영국만 해도 동인도 회사 이후 겉으로는 인도제국이라며 바꾼 척하던 거랑 차이가 뭘까? 물론 그래놓고 더 야비하게 이간질하고 약탈했던 짓을 벌였던 것처럼 영국도 인도에서 아주 야비한 약탈짓 및 무슬림과 힌두교도 및 여러 민족의 이간질을 크게 벌여놓았다.
한국에서는 이 사건을 영어 표현인 대반란, 대폭동(Mutiny)[4]를 그대로 해석한 세포이 '반란'이라는 표현으로 1980년대만 해도 국내 세계사 교과서에서 가르쳤으나, 반제국주의 독립군을 반란군이라고 할 수 없고 이건 아니라는 말이 많아지면서 세포이 항쟁이란 말을 많이 쓰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대반란이라고 쓰지만 당연히 인도에서는 독립 투쟁으로 찬양한다.
세포이 항쟁을 다룬 영화 중 최근작으로는 2005년, 인도에서 제작한 'Mangal Pandey'(만갈 판데이)가 있다. 900만 달러로 제작하여 인도에서 22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은 그럭저럭 거둬들였다. 물론 그 전에도 영화화가 몇 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