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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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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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khi
이슬람힌두교의 혼합종교로써 15세기에 창립된 종교. 터번 두른 인도인들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바로 이 시크교인들 이미지이다.

2 역사

창시자는 구루 나낙(1469~1539). 인더스 강에서 영감을 받아 이슬람과 힌두교에 구애되지 않는 시크한새로운 가르침, 시크교의 가르침을 만든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1]

오늘날에 이르러 시크교는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 인정받고 있지만, 본래는 힌두교 내의 하나의 개혁운동으로 보고 있다. 자이나교불교와 달리 이슬람의 중요한 요소를 힌두교에 조화시킨 일종의 힌두-이슬람의 종합이지만 신분제도를 없애고 카스트 제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고기를 다 먹고 운동을 장려한다든지 기존의 힌두교와 이슬람을 섞으면서 꽤 다르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슬람힌두교 양쪽 모두의 몇 안되는 공통점이였던 여성 차별조차 철폐했다! 그래서 시크교인들로 하여금 지참금 문제로 아내를 패죽이거나 학대하는 일을 금기시하게 했으며 명예살인도 종교적으로 어긋난다며 금지했다. 실제로도 무심한 듯 시크하다 더불어 남에게 칼로 선교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기에 유일신이면서도 유일신 강요 종교는 절대 아니었기에 힌두교같은 다신적 종교불교같은 무신론적 종교와도 매우 우호적인 사이를 유지했다.

보고 있자면 인도의 주요 종교들에서 나쁜 점들만 제거해서 혼합한 완전체 종교의 느낌이다.

그러나 밑에서도 서술했지만 1606년 무굴 제국의 모든 종교에 관용적이던 황제 악바르가 죽자 그 뒤를 이은 자한기르 때부터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고[2], 이후 자한기르의 뒤를 이은 샤 자한[3]의 지시로 시크교 지도자가 처형당하면서 처음으로 '다른 종교가 우릴 공격하면 그때만은 칼을 뽑으라'는 방어책으로 군대 양성을 하였고 저항했다. 이 때에 확립된 것이 시크교도의 5대 상징물인데, 장발, 긴머리를 감싸 활동성을 증대시키는 터번, 스스로를 보호할 검,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빠르게 전투태세를 갖출 수 있는 반바지(팬티대용), 팔찌 등으로 과연 전투민족다운 기상이 느껴진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방어적인 무력만 벌이는 수준이었음에도 자신들을 탄압해가는 힌두교나 이슬람에게 맞서서 비BE무력적임에도 무굴 제국대에 이르러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는데, 이에 따라 무굴 제국과의 대립이 격화되어 결국 1606년 5대 교주인 아르준이 체포, 처형되면서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대신 이들은 무굴 제국에 항쟁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1658년 샤 자한이 폐위되고 뒤를 이은 아우랑제브가 이번엔 시크교만이 아닌 왕국내의 모든 힌두교에게 '개종을 하지 않으면 모조리 죽이겠다'는 최후통첩을 내리고, 힌두교를 믿는 푼디트 족의 경우엔 시크교의 조언을 듣기 위해 펀자브로 사절을 보냈다. 시크교의 9대 지도자였던 테그 바하두르가 이들이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질문에 '누군가가 여러분들 대신 나설 수만 있다면...'이라고 읊조리자 그의 아들인 고빈드 싱이 '아버지가 나서시면 어떻겠습니까.'하자 옳다구나 여긴 테그 바하두르는 직접 아우랑제브와 담판을 벌이려 델리로 갔다. 당연히 아우랑제브는 쾌재를 부르며 족치려했던 푼디트족 대신 테그 바하두르와 그를 따라온 시크교도 수행인들을 고문하고 처형시켰다.[4] 이렇게 지도자를 잃었지만 테그 바하두르의 아들 고빈드 싱이 10대 지도자로 올라서 저항운동을 벌여 결국엔 펀자브에서 무굴제국의 패권을 영원히 깨뜨려버렸다. 그 후 고빈드 싱은 지금까지 내려오는 시크교의 원칙을 확실하게 확립한다.

이들이 준수하는 원칙은 현대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도덕적이고 건전하다.

  • 앞으로는 사람을 구루(지도자)로 받들지 않는다. 시크교 경전 그란트가 지도자 역할을 한다.
  • 모든 시크교도는 동시에 모두 지도자이다.
  • 모두가 평등하다. 신분의 높고 낮음도 없고, 남녀노소의 불평등 또한 없다. 모든 이를 품어야 한다.
  • 아름다운 우주의 본모습, 그것이 바로 하나뿐인 신이다. 우리는 그 하나 됨을 명상하고 서로를 감싸 안아야 한다.
  • 불필요한 의식도 필요없고, 억압도 필요없다. 격식을 따지지 말라.

시크교와 힌두교를 탄압하고 박해함으로서 각 지방에서 일어난 강력한 반발로 인해 점차 무굴 제국은 쇠퇴하게 되고 19세기 초 '펀자브의 사자' 란지트 싱(Ranjit Singh)을 중심으로 뭉쳐 펀자브 지방에 시크 왕국을 건설하고 아프간 일부를 점령하기까지 하여 세력을 떨치며 인도를 정복한 영국과도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쟁을 시크 전쟁이라고 한다. 시크교도들은 분전하였으나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고, 결국 이들이 살던 펀자브 지방은 다시 타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영국군에 의한 약탈이나 여러 문제로 골치를 썩긴 했지만 일단 영국은 강압적으로 개종을 요구하지 않았기에 무굴 제국 때와는 달리 그럭저럭 평화롭게 유지됐다. 그러나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하고 종교에 의한 국가 분열이 이뤄지면서 서서히 시크교도들도 자기들의 나라를 가지려는 이념을 가지게 된다.

이 격식을 따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식습관이 매우 자유롭다. 그냥 고기라면 사람고기 빼고 다 먹는다. 설령 고기를 싫어해서 안 먹으면 그냥 개인 취향으로 여길 뿐이다.

3 독립운동

현재 인도에서는 시크교도만의 독립 국가인 칼리스탄을 요구하는 시크교 독립운동이 펼쳐지고 있어서 인도 정부의 골치를 썩히고 있다.[5]

이들의 독립운동을 막고자 1984년 6월 1일에 시크교 성지인 아칼탁트(황금 사원 안에 있는 건물) 공격을 명령했던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인도군 내부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시크교 출신 장군들 반발에 부딪쳤다. 아두르 파즈한 싱 대장을 비롯한 시크교인 장군들은 되려 반발만 일으키고 내전을 부채질할 것이며, 나아가 "총리도 위험하다"며 반대했지만 인디라 간디 총리는 싱 대장을 비롯한 반대파를 해임하고 아룬 바이디야 대장과 시크교인으로 유일하게 작전에 참여한 쿨딥 싱 브라르(1934~ ) 중장을 지휘관으로 황금사원에 군대를 보내니 이를 블루스타 작전이라고 한다.

인도군은 블루스타 작전으로 인도군 83명, 시크교인 492명이 죽었다고 발표했으나 뒤에 참전한 인도군 간부들이 10배 이상을 줄였다고 비난하면서 논란이 거세진다. 시크교 측은 대략 5천명 이상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인도군도 3천명에 가까운 만만치 않은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당시 전선에서 지휘하던 브라르 중장은 전차를 투입했고 아칼탁트에 포격을 가하는 통에 시크교인 사상 최악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더불어 파즈한 싱 전직 장군이 예측하던대로 1984년 10월 31일 인디라 간디 총리는 시크교도 경호원인 사트완트 싱과 베안트 싱에게 기관소총으로 벌집이 되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베안트 싱은 그 자리에서 다른 경호원들에게 사살되었고, 사트완트 싱은 부상을 당한 채로 잡혀 재판을 받고 1989년에 교수형을 당했다. 시크교 성직자들은 이 날을 순교자의 날로 기리고 이 2명을 성자로 추앙하며 아칼탁트에 헌배되었고 이 2명 유족들도 자랑스러워했다. 여하튼 이 암살 덕에 인도 각지에서 시크교인들이 마구 공격받으면서 이들도 저항하는 통에 추정으로만 시크교 및 힌두교인 합쳐 약 2~4만여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런 시크교인 학살에 인도 정부는 외면했고 열받은 시크교 과격파들은 인도항공 182편 폭파 사건을 비롯한 테러로 맞대응하고 국제적 비난을 인도 정부가 당하면서 학살을 막네 마네 뒷북을 쳤다.

한편 인디라 간디 총리는 뭣하러 시크교인 경호원을 써서 자기 목숨을 재촉했나 궁금해할지 모르겠는데, 이는 시크교인들은 사람고기 빼고 죄다 먹는다고 할 정도로 육식과 운동을 권장하고 힘을 키우는 걸 장려했기 때문에 체격이 워낙 좋고 강해 오래전부터 군인이나 경호원으로 선호된 까닭이다.[6][7] 안그래도 인디라 간디에게 측근들은 "경호원들이 동포들의 죽음에 분노했으니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시크교도 경호원들을 해고하라"는 권유를 했으나, 인디라 간디는 자신의 경호원들은 시크교의 창시자인 구루 나나크보다 자신을 더 따른다고 할 정도로 자신의 경호원들을 믿는다고 하면서 거부했다. 인디라 간디는 총에 맞기 직전까지 경호원들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목숨을 재촉하고 말았다.

참고로 2012년 11월 현재 인도의 육군 참모총장인 바크람 A.싱 대장이나 해군 참모부총장 자히르 싱 나야갈리 중장, 전직 공군 참모총장 J.J. 싱 대장을 비롯한 이들도 죄다 시크교인이며 인도 전 인구 5%도 안 되는 시크교인에서 인도 장교 및 장군층의 30%를 차지한다는 통계까지 있다.

당시 블루스타 작전 사령관 바이디야 대장도 1986년 8월 10일 집에서 나와 차를 타고 가던 길에 시크교 특공대의 기관총 공격으로 80발이 넘는 총알에 맞아 즉사했다. 그리고 시크교인들에게 배신자로 몰린 브라르 중장대장으로 진급했으나 이후로 7번 암살 위기를 겪어 부상을 당해야 했으며 군복을 벗고 이후로 숨어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지난 2012년 10월 1일 런던에 아내와 같이 여행을 갔지만 거기서 살고있던 시크교인들에게 공격을 받아 칼에 목을 맞고 큰 부상을 입었다. 대수술 끝에 겨우 살았지만 후유증이 심해 남은 평생을 병원에 자주 가야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브라르의 형제들도 그와 절연하고 자기에게 돌을 던졌다고 한다.

이들이 다수로 거주(약 3천만명)하는 펀자브 주가 바로 파키스탄이 서펀자브 주[8]와 국경을 맞닿고 있는데, 종교 특성상으로도 파키스탄과 친하게 지내기 어렵기에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에도 시크교인들이 많이 활약했다. 하지만 퍼자브 주는 인도 전체 점유율 25%, 20%, 콩 및 여러 농작물 상당수 재배를 책임지는 곳이라 인도 정부로선 펀자브를 중심으로 하는 칼리스탄(시크교인들의 나라 이름) 독립을 인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시크교도와의 분쟁은 이 일 이후에는 대체적으로 잦아든 편이며, 시크교도 정치인 만모한 싱은 2011년-2014년 동안 인도국무총리를 지냈다.

다만 아요디아 사태와 칼리스탄 독립운동 등 시크교의 분리독립 운동에 대해 시크들의 입장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사실 시크교도들은 역사적으로 힌두교도들에게는 차별을, 무슬림들에게는 박해를 받아온 비운의 집단이다. 종교 관용 정책을 펼쳤던 무굴제국악바르 대제 이 후로 시크들은 인두세를 내고, 학살을 당하는 등 이슬람 정권 내에서 주요한 박해의 대상이었다. 이 때는 마찬가지로 고통받았던 힌두교도들과 굵직한 갈등은 없었지만, 문제는 이 후 인도 공화국의 독립과정에서 발생한다. 영국의 인도인 분리 통치 정책에 의해 무슬림과 힌두 두 축으로 나뉜 인도의 대다수 집단들은 후에 성장하여 독립단체로 변모하여, 독립과정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시크들은 그 들에 비해 소수였고, 일부 지역(주로 뻔잡)에 집중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솔직히 군에 복무하는 등 독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반대되는 내용을 아시는 분 추가바람[9]) 이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그 결과, 무슬림과 힌두가 각각 파키스탄과 인도공화국으로 독립하는 와중에도 시크는 힌두 중심의 인도공화국에 편입되고 말았다.
이렇게 편입된 시크들은 남인도의 드라비다 인종들과 마찬가지로 북인도 힌두들 중심의 인도 공화국에 편입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이 것이 칼리스탄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칼리스탄 독립 운동은 뻔잡 주에 대대적으로 실시된 녹색 혁명으로 큰 경제력을 얻은 시크들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으나, 결국 아요디아 사태를 촉발시켜 힌두와 시크는 극단 대립상황에 빠진다. 이 대립상황은 94~5년 경에서야 진정되는데, 사실 대다수 시크들은 장기간에 걸친 분쟁에 지쳐있었으며, 무장투쟁과 테러 등은 시크교의 전통 무장조직인 칼싸 조직인 아깔리 달 내 강경파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지친 시크 평신도들의 지원 거부로 겨우 진정된 것이니 시크 평신도 입장에선 억울할 만도 하다.
또한 아요디아 사태와 이후의 칼리스탄 독립운동 과정에서 대대적으로 행해진 시크 사냥 과정에서 시크들이 겪어 온 비극도 잘 알려져 있다. 시크들은 그들의 긴 머리와 터번을 보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힌두들을 피해 종교적인 이유로 평생 지켜왔던 머리를 잘라야 했으며, 주기적인 힌두교도들의 시크교 지역 레이드를 피해 재산과 토지를 버리고 도망가야 했다. 이 시기에 수도 델리로 도망간 시크교도들의 수효가 얼마나 많았는지 델리의 문화가 크게 변화 하였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에 90~00년대 만 하더라도 델리의 릭샤왈라[10]는 거의 대다수가 시크교도 였을 정도 이니 그 참상은 말로 다 못다할 정도였다고 하겠다. 또한 시크들에게 아요디아 사태와 뒤 이은 시크 대학살 사건들은 절대 잊을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대한민국의 5.18 민주화운동을 겪은 광주 시민들에 비견 될 정도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4 그 외

이 교단은 남자 이름을 전부 '싱(Singh, 사자)싱하형,' 여자 이름을 '카우르(Kaur, 공주)'로 통일시킨 것이 유명하다. 그래서 시크교도들의 이름에는 이 이름이 들어가 있다. 유명한 예가 만모한 싱(Manmohan Singh) 전 인도 총리.[11]

그 외에도 특유의 터번과 장발, 수염(시크교 남자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아선 안 된다.), 그리고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이 특징적.[12] 유명한 예가 달러 멘디. 심지어는 서방 국가들은 군 복무 중인 시크교도를 배려하기 위해, 시크교도는 규정 이외의 길이로 수염을 기르고[13] 군모 대신에 터번에 군 모표를 달고 군모 대신 쓸 수 있게 하고 있다. 인도군 사진에 종종 보이는 터번 쓴 군인은 대부분 시크교도. 2014년 기준 인도군 합참의장인 비크람 싱도 시크교도이다.

물론 칼은 어떻게 봐도 결국 흉기이기 때문에 다행히 서방 국가라고 해서 여객기 내부에서까지 착용을 허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런데까지 문화상대주의를 적용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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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서도 시크교도들은 터번을 쓰게 허락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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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에서도 시크교도들은 터번을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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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도 예외는 없다... ㅎㄷㄷ 간지폭풍이 휘몰아친다

참고로 사진의 인물은 할짓 싱 사잔(Harjit Singh Sajjan)이란 인물로, 2014년까지 캐나다 육군에서 중령(Lieutenant Colonel)으로 복무하다가 2015년 트뤼도 내각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군대뿐만 아니라 경찰도 예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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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시경 소속 시크교도 경장의 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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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경은 위의 터번을 사용하게 된다.

참고로 시크교의 성지 황금사원으로 가면 공짜밥을 먹을 수 있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방도 공짜로 빌려준다고 한다. 참고로 가장 위에 있던 시크한 표정의 시크교도 어르신 뒤쪽 저 멀리에 보이는 노란 금색 건물이 바로 황금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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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원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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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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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 사진

최대 신자 국가는 당연히 인도 공화국이며, 2위는 식민지 시절의 본국이었던 영국, 3위는 캐나다라고 한다. 미국으로 잘 가지않는 이유는 캐나다가 종교에 대해서는 더 관대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미국에서도 뒤늦게 1987년 시크교인 출신 경찰이나 군인들은 모자 대신 터번을 쓸 수 있도록 허가를 얻었다.(캐나다는 1960년대에 허가를 받았다)

미국에서는 시크교와 이슬람 또는 힌두교를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터번을 쓴 이슬람 경찰이 미국 경찰이 될 수 있냐"는 불만을 하원의원이 지적했다가 "이슬람이 아니라 시크교인데도 모르느냐"는 비아냥에 데꿀멍한 적도 있다고 한다. 뉴욕 경찰청을 배경으로 하는 블루 블러드에서도, 수배 중인 이슬람계 용의자를 찾던 경관이 시크교도를 무슬림으로 착각하고 육탄전을 벌여 체포했다가 인종차별 경찰로 비난받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알고보니 그 시크교도가 뉴욕 대학교 의대 교수였다는 게 함정...그 경찰은 찍소리 못하고 비난받을 수 밖에.

인도 공화국 전체에선 소수 종교지만 자이나인 못지않는 부유층 종교인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인도군 상층부를 휘어잡은 것도 있지만 교리 자체가 직업에 충실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펀자브 주에서 농업 관련으로 부를 얻은 시크교인도 많고 해외로 가서 사업에 뛰어들거나 군대로 가서 특수부대로 근무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인도에서 추진한 녹색혁명 덕택에 얻은 부를 바탕으로 미국 등 서방국가로 떠난 이른바 NRI(none residence india) 들 중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실제로 아요디아 사태나 칼리스탄 독립운동 등 활동자금은 이들에게서 나온다. 이들이 기부하는 칼리스탄 자치운동 기금은 막대하여 황금사원에 누구라도 먹을 것과 잠자리를 내주는 기금으로 쓰인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인도 공화국에선 시크교도 수는 정말 극소수 종교라고 터부시하나, 그래도 인도 인구(약 13억 추정) 최소 2%에서 최대 8%는 된다. 이는 적어도 2,400만에서 최대 9천만명(...)이 넘기에 무시할 숫자가 아니다. 인도 정치인이 소수라 별것 아니라고 말하는 인도 내 이슬람 인구 역시 무려 1억 5천만 이상으로 인도는 세계 4번째 이슬람 국가이다만모한 싱 처럼 주류 정치계에서 거물로 성장한 정치인도 있을 정도니.

여담으로 보물찾기 시리즈에서 인도편에 나오는 팡이의 조력자 캐릭터 반디가 시크교도이다.

5 관련 항목

  1. 이러한 배경은 그와 평생을 같이 떠돌며 함께 지냈던 이슬람을 믿는 친구 마르다나의 영향이 컸다. 더불어 구루 나낙은 힌두교인이였다. 당시 이슬람이 인도에서 확장세를 펴면서 힌두교인과 무슬림들이 서로 죽일놈 보듯 배척하고 있을때 이러한 친구 관계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였다.
  2. 자한기르의 장남이 시크교도의 부추김을 받고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3. 죽은 황후를 위해 타지마할을 만들어 유명해진 바로 그 사람이다. 타지마할 축조 전에는 그래도 나름대로 개념있는 황제였지만 타지마할을 축조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정책은 그야말로 개막장이 되어 갔다.
  4. 시크교는 이 바하두르를 다른 종교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친 역사상 유일무이한 종교 지도자로서 추앙하고 있다.
  5. 연방제 인도 하에서는 자신들의 라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6. 성룡의 영화 프로젝트A를 보면 홍콩 총독부를 지키는 군인도 터번을 쓴 시크교도가 나오는데 실제로 시크교도들은 영연방 여기저기서 중요시설 경호담당으로 자주 등용됐다. 왜 그런가 하면 고기를 가리지 않고 먹는데다가, 다른 종교의 강압에 맞서고자 군사훈련이라든지 운동을 장려하기에 무예 및 총기도 잘 다루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구르카와 달리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방어 및 예방책으로 맞서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이런 점으로 경호담당으로 딱 알맞았기에 지금도 홍콩, 싱가포르아시아의 옛 영국 식민지이던 국가를 가보면 터번 쓴 시크교도들이 경호원이나 특급호텔 및 박물관이나 여러 큰 건물에서 경비원 등으로 자주 보인다. 자이나교인들이 채식하고 머리를 써가면서 경제를 잡은 것과 대조적이다.
  7. 실제로 인도의 지하철이나 헬스장에 가보면 시크교도들의 크고 아름다운 위엄을 체감해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조그마한 힌두교도들과 대대적으로 한판 붙었던 세포이 항쟁 때 왜 수적으로 우세한 힌두들이 발렸는지 납득이 간다.
  8. 보통은 파키스탄 펀자브 주로 부른다.
  9. 사실 이를 보고 친일파와 같이 비판할 일도 아닌 것이, 당시 단일민족이며 우리 나라 조선이라는 생각이 확고했던 우리와는 달리 인도는 고대 이후 통일 국가에 의해 통치된 시기가 매우 짧다. 더욱히 힌두와 시크는 더더욱 공감대가 적다. 힌두끼리도 분열되고 싸우는 걸 초대 수상자와할랄 네루가 탱크를 몰고 가서 진압하고, 마하트마 간디라는 키워드로 간신히 모은 것이 인도 공화국 초기의 성립과정이었다. 즉, 우리로 치자면, 일본이 만주국과 한반도, 대운하 이동 지역을 신생 대한민국 영토로 만들어준 기회나 다름없이 만들고는 신생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은 내부 분열에 강하게 대응하여, 분열을 막은 셈이다.
  10. 인도하면 떠오르는 자전거 택시나 오토바이 택시기사를 뜻한다.
  11. 피지의 골프 스타 비제이 싱(Vijay Singh)도 관련이 있을 것 같긴 한데….조상이 시크교도가 많은 펀자브 출신인지라.
  12. 물론 검술을 전문적으로 배운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크교도와 싸움이 난다면 칼을 뽑아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
  13. 많은 이들의 편견과 달리, 이슬람은 남성의 수염 기르기가 교리상 강요되지 않으므로(탈레반 등이 수염을 기르도록 강제하는 것도 그냥 지역 토착 풍습일 뿐이라 이단이라 욕먹고 있다.), 무슬림 장병은 미군에 규정된, 콧수염 이상의 수염은 기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