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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최익성(崔益城 / Ik-sung Choi) |
생년월일 | 1972년 2월 11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경상북도 경주시 |
학력 | 경주고-계명대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4년 신고선수 입단 |
소속팀 | 삼성 라이온즈(1994~1998) 한화 이글스(1999) LG 트윈스 (2000) KIA 타이거즈(2001~2002) 현대 유니콘스(2002~2003) 삼성 라이온즈(2004) SK 와이번스(2005)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6번 | |||||
유정민(1993) | → | 최익성(1994) | → | 안윤호(1995) |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67번 | |||||
김인철(1990~1994) | → | 최익성(1995) | → | 하춘동(1996~2002) |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3번 | |||||
류명선 (1989~1995) | ➡ | 최익성 (1996~1998) | ➡ | 찰스 스미스 (1999~2000) |
한화 이글스 등번호 33번 | |||||
이종운 (1998) | ➡ | 최익성 (1999) | ➡ | 김종석(2000~2004)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4번 | |||||
라이언 글린(2003) | → | 최익성(2004) | → | 신동주(2005) |
1 소개
전 프로야구 선수. 현 ㈜저니맨스포츠그룹 대표 겸 독립 야구단 저니맨 외인구단 구단주.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저니맨. 동봉철, 이동수와 함께 삼성 라이온즈 출신 3대 저니맨 중 한 명이자 가장 유명한 저니맨이 되시겠다. 타이거즈 팬들에게는 그냥 잠깐 스쳐지나간 이적생이겠지만 굵직굵직한 이정표를 많이 남겼다. 일단 2001년 7월 29일에 벌어진 해태 마지막 홈 경기의 2번 타자이다.[1] 또한 2001년 8월 2일에 벌어진 첫 KIA의 경기에서는 인천 SK전에서 KIA 타이거즈 역사상 1호 홈런을 친 타자.
2 선수 시절
삼성 라이온즈 1기 시절.
LG 트윈스 시절.
현대 유니콘스 시절.
삼성 라이온즈 2기 시절.
SK 와이번스 시절.
경주고등학교와 계명대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 삼성 라이온즈에 연습생으로 입단했다. 방위 복무를 마치고 이듬해 백인천 감독을 만나 기량이 한층 성장하게 되는데, 1997년 .296/.394/.494의 3-4-5를 아깝게 못찍은 비율스텟에 22홈런 33도루로 20-20 클럽에 가입하며 부동의 리드오프로 자리매김했다.[2] 그와 한시즌에 가장 비슷한 성적을 올린선수는 1992년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이순철이었다.(.309/.389/.494 21홈런 44도루), 1997년 2승2패로 맞선 LG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기선을 제압하는 선두타자홈런을 쳐내기도 했다. 김상엽의 빛나는 호투에도, 그도 사람이었기에, 아쉽게 투수층이 얇은 삼성은 그해 한국시리즈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1998년에도 13홈런을 기록했었지만 그중에 절반 가까이가 1회 선두타자 홈런이었다. 강동우와 번갈아가며 출전하였지만.. 1998년에 새로 부임한 서정환 감독과의 궁합이 문제였다. 1998년 서정환 감독이 부임한 후 신인 강동우가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출장 기회를 조금씩 잃어 가면서 저니맨 인생이 시작되었다. 훗날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서정환과 궁합이 전혀 맞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서정환은 2군 코치이던 시절 최익성에게 특유의 타격폼을 놓고 대놓고 악담을 퍼부었고 # 백인천 쉴드가 없어지자 최익성은 트레이드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2001년 홍현우의 보상 선수로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하자 하필이면 그 당시 2군 코치도 서정환….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여튼 돌정환 사람 대놓고 가리는 사람치고 명장 없다
1998 시즌 종료 뒤 노장진을 상대로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됐다. 이 트레이드는 당시 한화 이글스 사장이 과감한 팀 컬러의 변경 목적으로 진행시킨 것이었는데, 1998 시즌 도중 임명된 이희수 감독은 현장에 대한 프런트의 월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결과 초반 이영우의 부상으로 최익성이 활약했지만 이희수 감독이 고집한 의견인 "트레이드를 실패시켜야 현장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최익성은 대타 아니면 2군으로 한정된다. 이 때부터 선수 인생이 꼬인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1999년 한국시리즈 주전으로 활약해 팀의 우승에 기여하는 등 자신의 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1999 시즌 종료 후 하필이면 선수협 사태에 연루되어 괘씸죄로 인해 투수 송유석, 내야수 신국환을 상대로 LG 트윈스로 또 다시 트레이드됐다. 2000 시즌 종료 후에는 홍현우의 FA 이적에 따른 보상 선수로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했고, 2002 시즌 도중에는 외야수 장정석을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됐다가 2003년에 방출됐다. 2004 시즌을 앞두고 친정 팀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다가 방출됐고, 2005 시즌을 앞두고는 SK 와이번스로 이적하는 등 롯데 자이언츠와 두산 베어스 유니폼만 빼고 다 입어 봤다.[3] 그리고 2005 시즌 후 SK 와이번스에서 방출당하는 것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2002 시즌 도중 KIA에서 현대로 트레이드되었을 때, 하도 갑자기 된 트레이드여서 최익성을 본 KIA 선수들이 너 왜 현대 유니폼 입고 있냐? 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때 당시 KIA 감독이었던 김성한과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3 평가
수차례의 부상을 이겨낸 호타준족형이자 장종훈 못지않은 연습벌레 스타일로 그 성장이 기대되었으나,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가서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일찍 떠나야 했던 비운의 선수.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당시 삼성 코치였던 서정환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998년 서정환이 감독이 되자 잠깐 1번타자로 뛰더니 여지없이 강동우에게 1번타자를 내주었다.[4] 그리고는 1998 시즌 후 바로 노장진과 트레이드. 노장진도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일조하긴 했지만 술 때문에 다시는 마운드에 서지 못했다. 그래도 1999년 한화에서 우승반지는 한 번 껴봤다. 그리고 1차전 사직 경기에서 대타로 나와 홈런을 때리면서 한국시리즈 역사상 4번째 대타 홈런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다만 2003년 현대 유니콘스 우승 당시에는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연습벌레여서 또는 그냥 자신만 잘 한다라는 생각때문에 처세술은 그닥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 이종범이 일본으로 건너간 상황에서 최고의 1번타자로 2할대 중후반의 타율에 15-20개 이상의 홈런과 25개 이상의 도루는 계속 할수 있는 기량임에도 늘 어떤 이유에선지 보이지 않았다. 부상이 잦기도 했고.. 다만 해태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의 기대[5]에도 그 성적을 못 낸 게 한이라고 할 수 있다.
4 은퇴 이후
2005시즌 후 SK 와이번스에서 방출당한 후, 국내 다른 팀과 미국 마이너리그 입단을 타진했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갔고, 이후 강남에서 술집을 운영하며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그 와중에 MBC 주말 드라마 2009 외인구단에 출연했으며, 2010년 3월 자신의 자서전격인 저니맨이라는 책을 출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은 미국, 일본에서도 출간될 예정이다. 오오 익성甲. 참고로 저 책을 출판해주겠다는 출판사가 없자, 스스로 출판사를 세웠다.
현재는 IPTV 스포츠채널인 IPSN/I Golf(둘다 같은 계열채널임)에서 해설을 하고 있는 중. 그리고 대놓고 편파중계라는 채널의 특성상 삼성 라이온즈를 위한 편파해설 작렬! 그러나 IPTV다 보니 해설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지못미.
2011년 9월 14일 SBS의 맞선 프로그램 짝에 출연했다.
2012년 9월부터 이숭용 XTM 해설위원, 재활전문가 어은실 박사와 함께 프로야구에서 방출됐거나 입단에 실패한 선수들을 위해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저니맨 야구 육성 사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압구정에서 소주방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름이 <꼬추>다. 검열삭제?
여담으로 2009년에 사사방과의 인터뷰에서 서정환을 공개디스 한적이있다. 예나 지금이나 선수시절 감독을 디스하는데 아주 드문 경우인데 서정환에게 원한이 많았던거 같다. [6]
2015년 12월부터 김용민과 함께 지식라디오 김용민,최익성의 스포츠인물평전을 진행하고 있다. 링크
1편은 최익성 본인의 이야기이고 2편인 12월15일자 방송에서는 스승이었던 백인천이 출연해서 최익성과 서정환과의 불화를 증언, 확인시켜 주었다.
2016년 5월 독립구단인 저니맨 외인구단 창단을 발표했다. ##. 연천 미라클의 운영 모델을 따라 갈것이라고 밝혔으며, 향후 한국독립야구리그가 발족하면 참여 할 것으로 보인다.
5 연도별 성적
알록달록 무지개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4 | 삼성 라이온즈 | 1 | 1 | .00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00 |
1995 | 3 | 3 | .00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00 | |
1996 | 57 | 131 | .252 | 33 | 7 | 0 | 4 | 16 | 18 | 3 | 19 | .397 | .344 | |
1997 | 122 | 480 | .296 | 142 | 25 | 2 | 22 | 65 | 107 (2위) | 33 (5위) | 79 | .494 | .394 | |
1998 | 110 | 374 | .262 | 98 | 15 | 0 | 13 | 42 | 74 | 20 | 66 | .406 | .372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9 | 한화 이글스 | 68 | 163 | .288 | 47 | 10 | 0 | 9 | 26 | 31 | 11 | 18 | .515 | .357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2000 | LG 트윈스 | 64 | 183 | .257 | 47 | 13 | 1 | 2 | 30 | 21 | 7 | 30 | .372 | .360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2001 | KIA 타이거즈 | 60 | 143 | .252 | 36 | 8 | 1 | 4 | 9 | 24 | 6 | 26 | .406 | .365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2002 | KIA / 현대 | 45 | 75 | .280 | 21 | 1 | 0 | 1 | 8 | 10 | 2 | 15 | .333 | .391 |
2003 | 현대 유니콘스 | 33 | 47 | .191 | 9 | 2 | 1 | 1 | 5 | 9 | 0 | 9 | .340 | .316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2004 | 삼성 라이온즈 | 18 | 16 | .125 | 2 | 1 | 0 | 0 | 3 | 2 | 0 | 3 | .188 | .263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2005 | SK 와이번스 | 40 | 70 | .214 | 15 | 1 | 1 | 4 | 12 | 13 | 3 | 13 | .429 | .333 |
KBO 리그 통산(12시즌) | 621 | 1686 | .267 | 450 | 83 | 6 | 60 | 216 | 309 | 85 | 278 | .430 | .369 |
- ↑ 마지막 경기가 아니다. 해태의 진짜 마지막 경기는 2001년 7월 31일 인천 SK 와이번스전이었다. 그 다음 날인 8월 1일 경기부터 '해태' 대신에 'KIA'라는 명패를 달고 경기를 하였다.
- ↑ 그 덕에 마구마구에서는 최익성이 배영섭이 등장하기 전 무려 6~7년 간 부동의 중견수 자리를 차지한다.
- ↑ 두산은 원래부터 화수분 야구로 외부 선수 영입이 적었고, 롯데는 알다시피 비밀번호 찍느라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 ↑ 97최익성과 98강동우를 비교하자면 그동안 (보통 수비부담 때문에 8~9번을 맡는 포지션인)유격수 류중일이 1번을 맡아야 했을 만큼 1번타자 기근에 시달리던 삼성이 확실하게 얻은 1번타자이면서 호타준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최익성과 강동우는 1990년대 말 포스트 이종범을 노릴정도로 장타력과 정확도, 도루능력과 수비능력 모두 갖춘 1번타자였다. 삼성 입장에서는 복에 겨운 케이스였다. 특히 비슷한 타율(.296 vs .300)에 누적스텟은 최익성의 우세였다. 게다가 최익성의 1998년 성적은 .262에 13홈런 20도루.. 붙박이로 나온게 아닌 것을 보면.. 감독과의 궁합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케이스. 게다가 강동우의 부상아웃으로 삼성의 리드오프는 2011년 배영섭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 ↑ 2001년의 김성한은 왕년의 거포 수집가였다. 신동주, 이동수에 최익성까지
- ↑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kbotown2&mbsIdx=1990045&cpage=5&mbsW=&select=&opt=&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