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플로이드

그룹 로고. 고정된 로고는 없으며, 왼쪽은 초기 시절, 오른쪽은 《The Wall》에 사용된 로고이다.
1967년 스톡홀름 라이브에서. 왼쪽부터 리처드 라이트, 로저 워터스, 닉 메이슨, 시드 바렛.왼쪽부터 닉 메이슨, 시드 바렛 데이비드 길모어, 로저 워터스, 릭 라이트.
1971년에 출시된 앨범 《Meddle》에 수록된 사진. 왼쪽부터 로저 워터스, 닉 메이슨, 데이비드 길모어, 릭 라이트.로저 워터스 퇴출 후의 사진. 왼쪽부터 데이비드 길모어, 닉 메이슨, 리처드 라이트.
2005 Live 8 공연[1]에서 다시 모여 찍은 사진. 왼쪽부터 데이비드 길모어, 로저 워터스, 닉 메이슨, 리처드 라이트.마지막 정규 앨범 《The Endless River》 제작 후 찍은 사진. 왼쪽부터 데이비드 길모어, 닉 메이슨.

1 소개

Pink Floyd
핑크 플로이드
장르프로그레시브 록, 사이키델릭 록, 스페이스 록, 록 오페라
활동년도1963~ 2015
출신영국
관련 페이지공식 홈페이지, 트위터, 페이스북
프로그레시브 록의 전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밴드 중 하나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1996년에 미국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었고, 2005년에 영국 음악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었다.

2013년 기준, 공식적으로 인정된[2] 총 앨범 판매량 1억 1,840만 장의 위엄을 자랑하며, 역대 아티스트 최다 음반 판매량 7위에 빛나는 전설적인 밴드이다.[3]

2 멤버

핑크 플로이드 멤버
시드 바렛
데이비드 길모어
닉 메이슨
로저 워터스
리처드 라이트

3 디스코그래피

Pink Floyd Discography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A Saucerful of SecretsSoundtrack from the Film MoreUmmagummaAtom Heart Mother
MeddleObscured by CloudsThe Dark Side of the MoonWish You Were HereAnimals
The WallThe Final CutA Momentary Lapse of ReasonThe Division BellThe Endless River
Pink Floyd Discography (Live)
Delicate Sound of ThunderP.U.L.S.EIs There Anybody Out There? The Wall Live 1980-81
Pink Floyd Discography (Single)
Arnold LayneSee Emily PlayApples and Oranges
It Would Be So NicePoint Me at the SkyWhen the Tigers Broke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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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사

핑크 플로이드 역사의 요약본. 핑크 플로이드의 이름을 붙인 시점을 시작으로 하고 있으며, 멤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 시드 바렛
기타.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의 주요 작곡가. 정신 건강 문제로 인해 두 앨범 후 떠나게 됨.
  • 데이비드 길모어
기타. 처음에는 시드 바렛이 연주에 불참할 때 자리를 채우도록 요청받음. 후에 주요 작곡가가 됨. 로저 워터스가 떠난 후 밴드를 이끔.
  • 닉 메이슨
드럼. 유일하게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한 멤버.
  • 로저 워터스
베이스. 시드 바렛이 떠난 후 주요 작곡가가 됨. 《The Final Cut》 이후 1985년에 떠남. 그를 빼고 계속하려 하자 밴드를 법원으로 끌고감.
  • 리처드 라이트
키보드. 《The Wall》 제작 동안 쫒겨남. 《A Momentary Lapse of Reason》에서 재등장하지만, 《The Division Bell》까진 복귀되지 않음. 2008년에 사망. 《The Endless River》에 유작으로서 출현.

4.1 참고 사항

'역사' 항목의 세부 내용은 영문 위키피디아를 기반으로 작성하였으며, 내용의 사실 여부에 대한 검수는 Glenn Povey가 저술한 『The Complete Pink Floyd: The Ultimate Reference』를 통해 이뤄졌음을 알려드립니다.

4.2 초기 시절(1963~1967)

4.2.1 태동(1963~1965)

로저 워터스닉 메이슨의 만남이 핑크 플로이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로저 워터스는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는 동안 닉 메이슨과 만났고, 둘은 키스 노벨, 클라이브 멧카프, 노벨의 누나 쉬라크가 만든 그룹에 참여해 처음으로 음악을 함께 연주했다. 건축학 동기인 리처드 라이트는 같은 해에 참여했고, 그룹은 'Sigma 6'라는 이름의 밴드가 되었다. 로저 워터스는 이 때 메인 기타를 맡았고, 리처드 라이트는 당시 키보드가 드물었기 때문에 리듬 기타를 맡았으며, 닉 메이슨은 드럼을 맡았다. 당시 밴드는 기껏해야 취미 수준에 그쳤기에, 밴드는 대학 지하에서 개인적으로 연주를 했다. 주로 서처스[4]의 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1964년 9월, 기타리스트 밥 클로스가 밴드에 들어와 로저 워터스가 베이스를 맡게 되었다. 이후 밴드는 'Meggadeaths', 'The Abdabs', 'The Screaming Abdabs', 'Leonard's Lodgers', 'The Spectrum Five' 등의 많은 이름으로 변경되었고, 결과적으로 'The Tea Set'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밥 클로스가 밴드와 참여한 같은 해에 클라이브 멧카프와 키스 노벨은 자신의 밴드를 만들기 위해 밴드를 떠났고, 다른 멤버들 보다 두 살 어린 기타리스트 시드 바렛이 밴드에 참여했다. 밴드에 처음 참여했을 때의 시드 바렛은 매우 밝고 사교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모두가 냉정할 때, 바렛은 매우 외향적이었죠. 바렛과 관련된 첫 기억은 굳이 날 찾아와서 자신을 소개하는 그의 모습입니다.

-닉 메이슨

여담으로, 로저 워터스와 시드 바렛은 소꿉친구다.

클라이브 멧카프와 키스 노벨의 공석을 채우기 위해 밥 클로즈는 밴드에 보컬 크리스 데니스를 영입했다. 1964년 12월에 첫 녹음을 했는데,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릭 라이트의 연줄을 이용해 잠시 빌린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다고 한다. 1965년 초, 크리스 데니스가 바레인으로 떠나게 되어[5] 시드 바렛이 밴드의 리더가 되었고, 같은 해에 밴드는 카운트다운 클럽의 고정 밴드가 되었다. 클럽에서 90분 가량의 연주 세트를 총 세 번씩 연주했는데, 세트 내에서 곡의 반복을 최소화하기 위해 곡의 길이를 늘리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밴드는 긴 솔로 연주를 통해 지루함을 최소화한 채로 곡의 길이를 늘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러한 과정 및 결론은 핑크 플로이드의 대곡 위주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다. 대학 강사와 부모의 압박으로 인해 밥 클로즈는 1965년 중반에 밴드를 그만두었고, 시드 바렛이 메인 기타가 되었다. 이후 1965년 말에 밴드 이름을 'The Pink Floyd Sound'로 변경했는데, 시드 바렛이 자신과 똑같은 이름의 밴드가 있는 것을 보고 이름 교체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이름의 유래는 두 블루스 연주자인 Pink Anderson과 Floyd Council.

4.2.2 본격적 시작, 계약 체결(1966~1967)

좌측부터 로저 워터스, 닉 메이슨, 시드 바렛, 리처드 라이트.

'The Pink Floyd Sound'로 이름을 바꾼 밴드는 1966년부터 R&B 위주의 곡을 유료로 예약을 받아 연주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1966년 3월에 런던정경대학의 강사인 피터 제너는 시드 바렛과 리처드 라이트의 음향효과에 감명받아 파트너 앤드류 킹과 함께 그들의 매니저가 되었다. 매니저가 된 후, 앤드류 킹은 모아둔 돈을 이용해 블랙힐 엔터프라이즈를 설립하고, 밴드를 위한 새 악기와 도구를 구매했다. 리처드 라이트가 본격적으로 키보드를 다루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때. 그리고 이 즈음에 피터 제너가 밴드의 이름에서 'Sound'를 없애는 것을 제안했고, 이후 밴드는 핑크 플로이드로 정착되었다. 이후 5월부터 두 매니저의 지도 하에 밴드는 런던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에서 연주를 했고, 이 과정에서 밴드가 무대의 조명효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조명효과에 대한 관심은 후의 핑크 플로이드의 독특한 무대 스타일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는 동안 두 매니저는 연줄을 이용해 영국의 잡지들에 밴드와 관련된 기사를 실어 핑크 플로이드의 유명세를 높였다.

새 잡지 IT(International Times)가 발매되는 날 밤, 핑크 플로이드라고 불리는 팝 그룹이 기묘한 색의 모양들이 번쩍이는 앞에서 요란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매우 몽환적이다.

-선데이 타임즈

1966년 말부터 시드 바렛의 오리지널 곡들이 밴드의 주요 연주 목록이 되었는데, 상당수가 첫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그렇게 음악적 스타일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핑크 플로이드의 연주는 "음악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돈을 내는 것을 거부하는 안습한 상황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런던의 UFO 클럽에서 소규모의 팬층을 형성하며 제대로 활동할 수 있었고, 이는 잡지 기사와 함께 핑크 플로이드가 메이저 음악 시장으로 진입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67년, 핑크 플로이드는 메이저 음악 시장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IT 공동 설립자이자 UFO 클럽 매니저인 존 보이드와 핑크 플로이드의 계약 담당자 브라이언 모리슨의 주선 하에 〈Arnold Layne〉과 〈Candy and a Currant Bun〉의 녹음이 67년 1월에 이루어졌다. 녹음으로부터 3일 후 , 핑크 플로이드는 EMI와의 계약에 성공했고, EMI는 밴드의 첫 싱글 〈Arnold Layne〉을 1967년 3월 10일에 발표했다. 곡의 복장 도착에 대한 주제 때문에 일부 라디오 스테이션에선 곡의 재생을 거부했지만, 싱글은 영국 음악 차트의 20위에 등극하며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두 번째 싱글 〈See Emily Play〉를 1967년 6월 16일에 발매되었으며, 영국 음악 차트의 6위에 등극해 첫 싱글보다 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BBC의 여러 방송에 등장하며 영국에서 메이저 밴드로 부상했지만, 이 때부터 시드 바렛의 정신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계약이 이뤄진 이후부터 바렛은 주기적으로 LSD를 복용하고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때부터 시드 바렛은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로부터 완전히 거리를 두고 있었죠.

-닉 메이슨

4.2.3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1967)

계약 담당자 브라이언 모리슨과 EMI 프로듀서 노먼 스미스는 핑크 플로이드의 첫 녹음 계약을 협상했고, EMI 스튜디오[6]에서 그들의 첫 앨범의 녹음을 가지게 되었다. 1967년 8월, EMI 콜럼비아는 첫 정규 앨범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을 출시했고, 앨범은 14주 동안 영국 음악 차트 6위에 머무르며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결과로 핑크 플로이드의 큰 팬층이 형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시드 바렛의 정신상태는 악화되었다. 밴드 멤버들은 곧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매니저 피터 제너의 의견은 달랐으며, 대체 기타리스트의 영입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시드 바렛을 의상실에서 찾았지만 정신이 나가있었다. 로저 워터스와 난 그를 끌어다 무대에 올려놨지만, 밴드가 연주를 시작해도 시드는 기타를 들고 서있기만 할 뿐이었다.

-준 차일드[7]

시드 바렛의 정신상태 악화 때문에 여러 공연들이 강제로 취소되고, 로저 워터스가 바렛을 위해 개인적으로 정신 상담을 준비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시드 바렛의 정신 상태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밴드는 9월의 유럽 투어와 10월의 첫 미국 투어를 강행했지만 결과는 암담했다. 토크쇼에선 쇼호스트의 말을 전부 씹고 앉아만 있었고, 연주를 거절하고 도망을 시도하는 등 여러 해프닝이 있었다. 앤드류 킹은 결국 미국 투어를 조기에 끝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후 지미 헨드릭스의 영국 투어를 서포트했다. 이와 함께 시드 바렛의 정신상태는 최악에 이르렀고, 결국 12월에 멤버들은 다른 기타리스트를 영입하는 것에 동의했다.

4.3 과도기(1968~1972)

4.3.1 데이비드 길모어 영입(1968)

왼쪽부터 닉 메이슨, 데이비드 길모어, 로저 워터스, 시드 바렛, 리처드 라이트.

1967년 12월, 데이비드 길모어가 기타리스트로 영입되었다. 데이비드 길모어와 시드 바렛은 핑크 플로이드 활동 전부터 서로 알고 있던 사이였는데, 히치하이크로 같이 프랑스까지 여행을 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1968년 1월에 블랙힐 엔터프라이즈는 데이비드 길모어를 새로운 멤버이자 서브 기타리스트로서 공식 발표했으며, 밴드는 시드 바렛을 작곡 담당의 멤버로 밴드에서 활동하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시드 바렛이 작곡한 세 번째 싱글 〈Have You Got It Yet?〉은 공연마다 구조가 바뀌는 바람에 제대로 연주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정신상태는 호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즈음에 자신이 작곡한 것이라며 백지를 밴드에게 들이댄 것은 꽤나 유명한 일화.

시드 바렛은 우리의 친구였지만, 거의 매일 그를 목졸라 죽이고 싶었습니다.

-로저 워터스

시드 바렛과 밴드 활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밴드 내에서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고, 이러한 사실은 1월의 사우샘프턴 공연에서 표면으로 올라오게 된다.

공연장으로 향하는 도중, 시드 바렛을 불러와야 하냐는 질문에 우리는 "아니, 내버려 두자."라고 답했습니다.

-데이비드 길모어

공연에 데려가지 않는 것은 사실상 퇴출을 의미했고, 결국 1968년 3월에 시드 바렛은 밴드를 떠나는 것에 동의한다. 이후 계약 담당자 브라이언 모리슨은 그 후 그의 직책을 매각했고, 스티브 오루크가 밴드의 새 매니저가 되었다. 블랙힐은 시드 바렛의 퇴출을 1968년 4월 6일에 발표했다. 시드 바렛의 퇴출 후, 작곡 및 밴드의 방향성은 대부분 로저 워터스에 의해 결정되었다.

4.3.2 A Saucerful of Secrets(1968)

1968년에 밴드는 《A Saucerful of Secrets》를 발매한다. 앨범은 시드 바렛이 밴드에 남긴 마지막 업적인 〈Jugbans Blues〉를 포함하고 있으며, 로저 워터스는 〈Set the Controls for the Heart of the Sun〉, 〈Let There Be More LIght〉, 〈Corporal Clegg〉를 작곡하고 리처드 라이트는 〈See-Saw〉, 〈Remember a day〉를 작곡하는 등 시드 바렛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가한다. 앤드류 킹은 그들에게 자신의 음악을 만들라고 격려했고,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밴드에게 레코딩 스튜디오의 사용법을 가르쳐줬다고 한다. 그러나 EMI의 프로듀서 노먼 스미스는 시드 바렛이 밴드를 떠난 이후 밴드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스미스는 두 번째 엘범에 기대를 버렸습니다. 그는 언제나 "이런 20분짜리의 형편없는 소음을 낼 순 없다."라고 말했죠.

-리처드 라이트

여담으로 로저 워터스와 닉 메이슨 둘 다 악보를 읽지 못했는데, 덕분에 그 둘 만이 알 수 있는 새로운 표기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치 건축 다이어그램 같았습니다.

-데이비드 길모어

1968년 6월에 출시된 앨범의 앨범 커버는 Hipgnosis가 디자인했는데, Hipgnosis는 이 앨범을 시작으로 《Animals》까지의 모든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아트를 담당하게 된다. 추가적으로, 이 앨범은 EMI가 밴드에게 앨범아트 제작을 전적으로 맡긴 두 번째 앨범이다.[8] 앨범은 11주 동안 영국 음악 차트 9위에 머물러 있었다. 평은 전체적으로 좋았으나, 호평만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파티의 배경음악처럼 듣고 잊어버려라.

-레코드 미러[9][10]

종교적 체험같다.

-존 필[11], 타이틀 트랙의 라이브 공연을 듣고.

길고 지루하다.

-NME(New Musical Express)

앨범 출시 다음 날에 밴드는 하이드 공연에서 첫 무료 콘서트를 개최했고, 1968년 7월에 두 번째 미국 투어를 진행했다. 첫 미국 투어가 시드 바렛의 정신상태 때문에 흐지부지 끝난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첫 미국 투어. 투어를 함께한 밴드로는 소프트 머신과 더 후로, 둘 다 당시에 엄청난 인기를 끌던 밴드이다. 그후 1968년 12월에 싱글 〈Point Me at the Sky〉를 내지만, 처참하게 망한다. 덕분에 약 5년 간 싱글을 따로 출시하지 않았다.

4.3.3 Music from the Film More부터 Meddle까지(1969~1971)

1971년에 찍은 사진. 왼쪽부터 리처드 라이트, 데이빗 길모어, 로저 워터스, 닉 메이슨.

약 1년 가량의 공백을 가진 후, 핑크 플로이드는 1969년 6월에 《Music from the Film More》를 출시한다. 비록 영화의 사운드트랙이고 앨범 자체가 큰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여러 의미에서 핑크 플로이드에게 큰 의미를 끼치는 작품이다. 처음으로 노먼 스미스의 도움을 받지 않은 작품이자 처음으로 시드 바렛의 도움 없이 제작된 앨범이기 때문이다. 추가적으로, 이 앨범은 핑크 플로이드의 사실상 유일한 하드락 계열 곡이라 할 수 있는 〈The Nile Song〉이 수록되어있다.

Music from the Film More》를 낸지 약 4달 후에 출시된 《Ummagumma》는 핑크 플로이드의 현 스타일의 태동이라고 볼 수 있다. 맨체스터에서의 라이브 공연을 제외하면 앨범은 시드 바렛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실험적 태도로 점철되어 있다. 출시 후, 곁다리라 할 수 있는 라이브 공연은 큰 호평을 받는데 성공했지만,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아마 내가 들었던 최고의 라이브 공연일 것이다.

-IT

최고의 라이브 앨범.

-Vox

앨범을 만들기 위해 나사 빠진 구조를 어찌저찌 끌고온 느낌이다.

-스타일러스 매거진

밴드 내에서도 실험을 상당한 실패로 보고 있다.

끔찍하다.

-데이비드 길모어

실패한 실험작.

-닉 메이슨

그러나 핑크 플로이드의 실험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이는 1970년 10월에 출시된 《Atom Heart Mother》에서 이어진다. 밴드는 스코틀랜드 작곡가 론 기신과 성가대의 도움을 받는 등 외부의 다양한 도움을 받아 기존의 스타일로부터 탈피하고자 했으며, 앨범의 수록곡 〈Alan's Psychedelic Breakfast〉는 아침밥 먹는 소리를 그대로 녹음하는 대범한 시도를 가했다. 그 외 아무런 의미가 없는 앨범아트의 젖소나 무의미한 가사, 신문기사에서 따온 앨범의 타이틀에서 밴드가 기존의 음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다양한 노력을 실감할 수 있다. 이러한 실험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영국 음악 차트에서 처음으로 1위에 등극했다. 출시 후 영국과 유럽 투어를 가졌으며, 처음으로 실이익을 창출했다. 덕분에 이미 유부남이었던 닉 메이슨과 릭 라이트는 런던에 집을 구매했고, 데이비드 길모어는 개인 농장을 구입해 그곳으로 이주했으며, 로저 워터스는 집에 레코딩 스튜디오를 설치했다. 그런데 막상 밴드 내에선 앨범을 상당히 나쁘게 평가한다.

쓰레기통에 던져 아무도 듣지 못하게 하면 더 나은 앨범이 될 것입니다.

-로저 워터스

우리는 그 때에 아무거나 써먹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데이비드 길모어

Atom Heart Mother 투어』 후에도 핑크 플로이드의 실험은 멈추지 않았다. 주로 기타 리프나 기본적 소리에 큰 관심을 가졌고, 스튜디오에서 날을 새며 가정도구들을 이용한 음악을 만들고자 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도는 후에 《The Dark Side of the Moon》과 《Wish You Were Here》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들은 1971년 10월에 출시된 《Meddle》에서 완성되었다. 다양한 음악을 추구하던 기존의 시도들의 성공과 더불어 밴드가 결성된 때부터 지속적으로 시도했던 컨셉트 앨범이 완벽한 뼈대를 잡게 되었다. 그렇게 핑크 플로이드는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로서의 정착에 성공했으며, 시드 바렛의 공백을 완전히 메울 수 있게 되었다. 앨범에 대한 평가도 매우 긍정적이었고, 영국 음악 차트에서 82주 간 3위에 머물러 있었다.

《Meddle》은 데이비드 길모어의 등장이 밴드의 강한 결속력의 원동력임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밴드가 제대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고 명확하게 표명한다.

-롤링 스톤 지

예외적으로 좋은 앨범.

-NME

Echoes는 핑크 플로이드가 갈망하던 음악적 정점이다.

-NME

4.4 전성기(1973~1978)

4.4.1 The Dark Side of the Moon(1973)

핑크 플로이드의 상징이 된 앨범커버. Hipgnosis와 조지 하디의 합작으로, 앨범 전체의 컨셉을 아우르는 디자인으로 찬사를 받았다.

핑크 플로이드는 《Obscured by Clouds》의 발매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72년 5월부터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제작에 착수한다. EMI 엔지니어이자 최초의 컨셉트 앨범으로 평가받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엔지니어 알란 파슨스와 프로듀서 크리스 토마스의 도움을 받아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1973년 1월까지 연주 및 녹음이 이루어졌으며, 세계 투어를 다니는 동안 세부적인 요소를 다듬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로저 워터스가 모든 앨범의 가사를 작성했는데, 로저 워터스의 독주 체재는 어떻게 보면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12]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빌보드, 영국 음악 차트에서 1위를 수상하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비평가들에게도 찬사를 받았다.

앨범과 동화되도록 하는 조직적, 구성적 풍부함을 가진 앨범. [13]

-롤링 스톤 지

또한,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계기로 핑크 플로이드는 북미 음악 시장에 완벽하게 자리를 잡는 것에 성공했다. 이 앨범 전까지 핑크 플로이드에 대한 북미의 반응은 '기묘한 음악을 하는 언더그라운드 밴드'에 불과했다. 물론 이전에도 인지도 자체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앨범의 판매량 및 순위는 암담했다. 《The Dark Side of the Moon》 전의 앨범들 대다수가 빌보드 50위 밖에 머물러 있었으며, 위에서 언급한 《Meddle》도 70위라는 안습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나마 제일 좋은 성적을 거둔 《Atom Heart Mother》와 《Obscured by Clouds》가 각각 55위와 46위였다.

엄청난 성공을 거둔 앨범은 현재 상업적으로 제일 성공한 락 앨범들 중 하나이다. 14년 간 빌보드 차트에 머물러 있었고, 세계적으로 약 4,300만 장을 판매해 전 세계에서 제일 많이 판매된 앨범 3위를 기록했다. 이러한 성공은 핑크 플로이드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 주었다. 로저 워터스와 리처드 라이트는 새로운 집을 구입하고 닉 메이슨은 차 수집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후 북미에서 레코드 계약을 맺고 있었던 캐피톨 레코드와 계약을 파기하고, 선금으로 당시 돈으로 100만 달러를 받는 조건을 제시한 콜롬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했다. 유럽에선 EMI 산하의 레코드 회사인 하베스트 레코드와 계약을 지속했다.

4.4.2 Wish You Were Here(1974~1975)

『The Dark Side of the Moon 투어』 종료 후, 핑크 플로이드는 1975년 1월에 《Wish You Were Here》의 본격적인 제작을 시작했다. 알란 파슨스는 자신의 밴드 'Alan Parsons Project'에서 성공한 덕분에 밴드의 제안을 거절했고, 브라이언 험프리스가 공백을 메우게 되었다.

초기에 새 앨범은 「Household Project」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가정도구를 이용해 음악을 만들고자 했던 프로젝트로,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성공 이후 상업화된 밴드의 초심을 찾고자 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성공은 밴드에게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남겨두었고, 닉 메이슨의 가정 문제, 로저 워터스와 음반사 간의 마찰로 인해 그들의 프로젝트는 난항을 겪게 된다.

그 때는 밴드 활동 중 제일 어려운 시기에 속한다고 봅니다.

-리처드 라이트

고문 같았습니다.

-로저 워터스

결국 데이비드 길모어의 제안으로 「Household Project」는 폐지된다. 프로젝트 폐지 후 밴드는 앨범의 새로운 컨셉을 모색했고, 1974년에 세 개의 컨셉을 구상하게 된다. 이 컨셉들 중 하나는 《Wish You Were Here》의 시작점이 되었는데, 길모어가 고안한 4가지 리프[14]가 로저 워터스에게 시드 바렛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이를 시작으로 시드 바렛의 삶과 시드 바렛에 대한 추모, 특히 시드 바렛의 부재에 관한 내용이 앨범의 컨셉으로 자리잡는다.

저는 제가 느꼈던, 시드의 부재에서 비롯된 표현할 수 없는 우울감에 최대한 가까이 가고 싶었습니다.

-로저 워터스

이후 앨범 작업이 진행 중이던 6월에 시드 바렛은 예고 없이 스튜디오를 방문했는데, 이는 앨범에 절망감이라는 새로운 컨셉을 부여했다. 이러한 컨셉은 스튜디오에 들어선 뚱뚱한 대머리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봤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스튜디오 방문 당시의 시드 바렛. 10년 전의 바렛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가히 충격적이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서야 시드 바렛을 알아본 밴드는 그와 짧은 대화를 나눴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시드 바렛은 밴드와 잠시 앉아 이야기를 나눴지만, 정신은 모두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스톰 토거슨[15]

시드 바렛의 방문 후, 밴드의 절망감[16]은 앨범에 반영되어 새로운 컨셉을 부여했다.

그래서, 네가 천국과 지옥을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해?[17]

-〈Wish You Were Here〉의 첫 가사.

이러한 밴드 내의 복잡한 사정들을 뒤로 한 채 1975년 9월에 발매된 앨범은 빌보드, 영국 음반 차트에서 공동 1위를 수상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4.4.3 Animals와 밴드 내 불화의 시작(1976~1978)

앨범 커버를 촬영한 장소인 Battersea 발전소.

1975년에 밴드는 이슬링턴에 있는 3층짜리 건물을 구매한 후, 건물을 창고 겸 레코딩 스튜디오로 개조했다. 이후, 1976년에 《Animals》의 녹음을 새로 만든 스튜디오에서 시작하게 된다.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서 따온 《Animals》의 컨셉은 로저 워터스의 주도 하에 나온 컨셉이며, Hipgnosis가 다지인한 앨범 커버에서도 최종적으로 워터스의 선택이 반영되었다. 앨범의 상당한 부분의 주도권을 가져간 셈이다. 이러한 독주는 밴드 멤버 간 불화의 시초가 된다.

새 스튜디오인 브리타니아 로우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 사진의 인물은 로저 워터스.

작곡에서도 로저 워터스의 독점이 나타났다. 데이비드 길모어는 〈Dogs〉를 제외한 모든 곡들의 작곡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리처드 라이트와 닉 메이슨은 참여조차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Animals》는 리처드 라이트가 참여하지 않은 핑크 플로이드의 첫 앨범이 되었다. 데이비드 길모어는 당시 첫 아이의 출산으로 인해 작업에 열중할 상황이 아니긴 했지만, 릭 라이트와 닉 메이슨은 당시 특별한 일이 없었음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이러한 독점은 밴드 멤버 내, 특히 데이비드 길모어와 로저 워터스 사이에서 음악적 방향에 대한 분쟁을 불러일으킨다.

저는 제 의견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지만 길모어는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고, 그 결과 그가 얻어낸 것은 자신의 의견 중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리처드 라이트

워터스는 아이디어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일부러 길모어를 화나게 했습니다.

-닉 메이슨

길모어와 워터스 사이의 분쟁은 곡 저작권의 지분과 관련된 문제에서도 나타난다. 밴드는 기여한 곡의 수에 비례해서 지분을 나눠가지는 형식을 취했는데, 데이비드 길모어가 〈Dogs〉의 대부분을 작곡했음에도 불구하고 로저 워터스에 비해 지분이 압도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한 곡에만 기여했으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가 되는 점은 곡의 길이다. 〈Dogs〉는 거의 20분에 달하는 대곡으로, 앨범의 러닝 타임의 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곡의 수로만 지분을 나눠가지는 바람에 1/5만 가지게 되었으니 불만이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로 인해 데이비드 길모어와 로저 워터스 간의 사이가 멀어졌고, 리처드 라이트와 로저 워터스 간의 사이도 불편해졌다.

《Animals》는 고난이었습니다. 재미있게 만든 음반이 아니었죠. 이 때 로저 워터스는 자신이 밴드의 유일한 작곡가라고 정말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밴드가 지속될 수 있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자아도취를 시작했을 때 그의 갈등을 덜어줄 사람은 내가 되었죠.

-리처드 라이트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앨범은 1977년 1월에 출시되었다. 앨범은 빌보드, 영국 음악 차트에서 각각 3위와 2위를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좋은 평만을 듣지는 않았다.

앨범은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불평한다. 마치 이제와서 처음 안 것 마냥. – 그들의 메세지는 무의미하고 단조로워졌다.

-롤링 스톤 지

가장 극단적이고 자비없는 음악 덩어리들.

-NME

앨범 출시 후, 밴드는 대형 스타디움에서 콘서트를 열기 시작한다. 이는 밴드에게 더 큰 압박을 부여했으며, 밴드 내의 갈등 또한 심화시켰다. 로저 워터스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혼자서 다음 공연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리처드 라이트는 밴드를 떠나겠다고 협박하며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등 험악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밴드의 스트레스도 상당히 심해져, 몬테리얼 올림픽 스타디움에선 로저 워터스가 앞 줄에 있는 열성 팬에게 침을 뱉는 사건도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찾던 것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우리가 성취할 것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데이비드 길모어

4.5 로저 워터스의 독주 체제(1978~1985)

4.5.1 경영난, 리처드 라이트의 퇴출, The Wall(1978~1981)

1978년, 핑크 플로이드의 자산관리사 Norton Warburg Group(NWG)은 세금 납부를 최소화하기 위해 벤처 자금 130만 프랑(현재 돈으로 약 300억 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했다.[18] 그러나 투자는 쫄딱 망해버렸고, 핑크 플로이드는 경영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7월에 로저 워터스는 다음 앨범을 위한 두 개의 컨셉을 밴드에게 제안한다. 첫째는 《Bricks in the Wall》이라는 가제를 사용한, 현재의 《The Wall》이 되는 컨셉이었고, 다른 하나는 후에 로저 워터스의 첫 솔로 앨범인 《The Pros and Cons of Hitch Hiking》의 컨셉이 되는 것이었다. 데이비드 길모어와 닉 메이슨은 고심한 후에 전자를 선택했다고 한다. 앨범에 밥 에즈린이 공동으로 참여했는데, 핑크라는 가상의 인물의 일대기의 틀을 제작했다. 앨범의 주인공 핑크는 로저 워터스의 어린 시절을 모티브로 했는데,[19] 이로 인해 로저 워터스의 스타일이 앨범에 더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The Wall》의 제작 기간에도 멤버들 간의 불화는 여전히 아물지 못했다. 제작 도중, 데이비드 길모어와 닉 메이슨은 리처드 라이트의 앨범의 기여도 부족에 불만을 느끼기 시작했다.

릭이 한 일은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닉 메이슨

라이트는 앨범을 만드는데 협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로저 워터스

본격적인 문제가 터진 것은 1979년 8월,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온 제안에서 시작된다. 콜럼비아 레코드는 1979년까지 앨범을 완료하면 특별 보너스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당장 돈이 급했던 밴드는 제작을 위해 다시 집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리처드 라이트는 다시 집결하라는 로저 워터스의 명령을 거부하고 휴가가 끝나고 나타난 것이다. 이로 인해 밴드 내의 불만, 특히 로저 워터스의 불만이 폭발했다. 이렇게 밴드 내의 관계는 험악하기 그지 없었고, 로저 워터스는 리처드 라이트에게 소송을 거는 것을 고려했다고 한다. 다행히 문제가 법정까진 가지 않았고, 로저 워터스는 밴드의 동의 하에[20] 릭 라이트를 코카인 복용, 기여도 부족이라는 명분하에 퇴출시킨다. 퇴출된 후에도 리처드 라이트는 세션 멤버의 형식으로 같이 공연을 다녔다.

이후 앨범의 본격적 출시 전, 싱글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가 빌보드와 영국 음반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앨범의 홍보 역할에 성공하고, 1979년 11월 마지막 날에 출시된 앨범은 빌보드에서 15주간 1위를 차지하고, 영국 음반 차트에서 3위를 차지하며 성공을 거둔다. 출시 당시의 평가는 미묘한 편이다.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나 강렬하다.

-멜로디 메이커

이제는 친숙한 워터스의 주제 강박관념.

-롤링 스톤 지

《The Wall》의 라이브 공연에 사용된 인형들. 왼쪽부터 '엄마', '학교장'.

《The Wall》은 괴랄한 라이브 투어로도 상당히 명성이 있는 편인데, 이러한 괴랄함은 제랄드 스카프[21]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랄드 스카프는 『The Wall Tour』를 위한 애니메이션 제작 및 앨범의 등장인물 '엄마', '전 부인', '학교장' 등의 풍선 인형들의 제작을 맡았는데, 제랄드 특유의 혐오감을 불러오는 스타일[22]이 앨범의 광기가 넘치는 스타일과 완벽한 조화를 이뤄냈다. 이러한 요소들을 뒤로한 채, 밴드 내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로저 워터스는 다음 공연장에 가기 위해 개인 차량을 이용하고, 다른 밴드 멤버들과 다른 방을 사용하며 멤버들과 더더욱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고, 공연 후 밴드 멤버끼리 제대로 말을 섞는 경우도 크게 없었다고 한다. 라이브 공연 도중에는 릭 라이트도 세션 멤버로서 공연에 참여했으며, 빚을 갚느라 바빴던 밴드와 다르게 혼자 실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영화의 한 장면.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의 주제를 여과없이 보여주는 장면이다.

The Wall》은 영화로도 제작되는데, 처음은 애니메이션과 라이브 공연을 합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감독 알렌 파커의 제안으로 하나의 독립된 영화로 제작 방향이 결정되었으며, 이전의 애니메이션 영상과 함께 따로 배우를 고용해 촬영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곡들은 로저 워터스가 새로 녹음했으며, 《The Final Cut》의 수록곡 일부가 포함되었다. 주인공 핑크의 역할은 처음엔 로저 워터스가 맡을 예정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밥 겔도프가 맡게 된다. 밥 겔도프는 처음에는 《The Wall》의 스토리가 'X알같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1982년 8월에 개봉된 영화는 약 2,200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아카데미 음악 상을 수상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제작비가 1,000만 달러 정도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상업적 성공은 미미한 편이다.

4.5.2 The Final Cut, 로저 워터스의 퇴출(1981~1985)

1982년, 로저 워터스는 밴드에게 영화 《The Wall》의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던 《Spare Bricks(가제)》를 제안했다. 그러나 얼마 후 포클랜드 전쟁이 시작되었고, 로저 워터스는 포클랜드 전쟁과 이에 대한 전 영국 총리인 마가렛 대처의 주전론적 대응에 대한 비판, 전사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추모를 기반으로 컨셉을 다듬었다. 그리고 이는 즉시 《The Wall》에서 사용된 주제를 재탕하는 것에 반대한 데이비드 길모어와 로저 워터스의 논쟁을 불러왔다. 《The Wall》의 오케스트라 파트를 담당한 마이클 카멘이 리처드 라이트의 공석을 채우며 둘 사이를 중재하고자 했지만, 둘 사이의 유대감은 사실상 없어졌다. 심지어 로저 워터스와 데이비드 길모어는 따로 작업을 했다고 하며, 로저 워터스는 데이비드 길모어의 기여도가 거의 없다고 생각해 《The Final Cut》의 크레딧에 길모어의 이름을 넣지 않았다. 서로 같은 밴드의 멤버라고 생각하지 않는 수준에 다다른 것이다.

그렇게 1983년 3월에 출시된 《The Final Cut》은 모든 곡의 작사 및 작곡과 앨범 커버의 디자인까지 로저 워터스가 담당했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데이비드 길모어의 곡 일부도 수록될 예정이었지만, 로저 워터스가 시간을 좀 더 달라는 데이비드 길모어의 요청을 무시하고 출시했다. 이러한 로저 워터스의 태도는 당연히 관계의 악화를 불러왔고, 데이비드 길모어는 1978년부터 시작했던 솔로 활동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된다. 이러한 밴드 내의 갈등을 뒤로한 채, 앨범은 영국 음악 차트와 빌보드에서 각각 1위, 6위를 기록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최상의 성과. 아트 록의 더없는 걸작.

-롤링 스톤 지, 별 5개의 평가와 함께.

비록 흠[23]이 있지만, 《The Final Cut》은 걸작이다.

-콰이터스[24]

에릭 클랩튼과 로저 워터스의 합동 투어 사진.

《The Final Cut》 출시 후, 밴드 멤버들은 사실상 전부 따로 놀다시피 했다. 1984년에 데이비드 길모어는 두 번째 솔로 앨범 《About Face》를 출시했고, 로저 워터스는 첫 솔로 앨범 《The Pros and Cons of Hitch Hiking》의 본격적 투어를 시작한다. 리처드 라이트는 데이브 해리스와 새 밴드 'Zee'를 결성한 후 《Identity》를 출시했고, 닉 메이슨 또한 1985년에 솔로 앨범 《Profiles》를 출시했지만 둘 다 깔끔하게 묻혔다.

《The Pros and Cons of Hitch Hiking》의 출시 후, 로저 워터스는 핑크 플로이드가 재결합을 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이후 핑크 플로이드의 매니저 역을 맡고 있던 스티브 오루크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피터 루지를 새로운 매니저로 고용했으며, EMI와 콜럼비아에게 밴드를 떠난 것을 통보했다. 밴드를 떠난 이유에 대해선 서로 간의 주장이 엇갈리는데, 데이비드 길모어는 로저 워터스가 핑크 플로이드를 해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떠났다고 주장하고, 로저 워터스는 밴드 멤버가 소송을 빌미로 협박하며 자신을 퇴출시켰다고 주장한다.[25] 여하튼 로저 워터스는 1985년 12월에 밴드를 떠나게 되고, 밴드를 떠난 후 나머지 멤버가 핑크 플로이드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소송을 걸었으며, 데이비드 길모어는 언론에 핑크 플로이드는 계속 활동할 것이라고 장담하며 이에 대응했다.

로저 워터스는 여물통의 개 같은 존재이며, 저는 그와 싸울 것입니다.

-데이비드 길모어, The Sunday Times에서.

4.6 데이비드 길모어 리드 체제(1986~1995)

4.6.1 A Momentary Lapse of Reason(1986~1987)

데이비드 길모어 소유의 수상 레코딩 스튜디오 '아스토리아'의 사진.

1987년 데이비드 길모어는 《A Momentary Lapse of Reason》의 작곡을 위한 새로운 음악가를 찾기 시작했다. 리처드 라이트는 법적 문제로 인해 밴드로 재영입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밴드의 세션 멤버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상 정식 멤버와 똑같은 취급을 받았으니 세션 멤버라는 위치가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세션 멤버였기 때문에, 밴드는 리처드 라이트에게 주당 11,000 달러를 지급하며 같이 활동했다.

릭의 존재는 우리를 법적으로, 음악적으로 더 강하게 만들어 줬습니다.

-데이비드 길모어

녹음 및 제작은 길모어의 개인 배이자 레코딩 스튜디오인 아스토리아에서 진행되었다. 작업 과정은 순탄치 못했는데, 닉 메이슨의 드럼 연주가 곡을 연주할 수준이 되지 못해 대부분의 드럼 파트는 세션 멤버에게 맡기게 되었다. 예전부터 닉 메이슨의 역할이 연주보단 음향효과 제작에 더 중점이 놓이긴 했지만,[26] 연주에서 드럼 파트를 담당하는 멤버가 드럼 실력이 부족해 세션 멤버에게 맡겼다는 것과 이전에는 음향효과 제작과 드럼 연주를 큰 무리없이 병행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난감하다. 거기에 이전까지의 대부분의 작사를 로저 워터스가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후에 데이비드 길모어가 로저 워터스 없이 작업하는 것이 힘들다고 시인했으니, 로저 워터스가 없는 첫 작업이 상당히 난항을 겪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앨범은 1987년 9월에 출시되었다. 《The Wall》과 《The Final Cut》에서 제외되었던 Hipgnosis가 다시 앨범 커버의 디자인을 맡았으며, 밴드의 초심을 살리자는 취지에서 《Meddle》과 같이 밴드 멤버의 사진을 앨범 내에 수록했다. 앨범은 빌보드와 영국 음악 차트에서 3위를 기록했다. 출시 후 평은 "데이비드 길모어의 솔로 앨범 같다."로 입이 모였으며, 로저 워터스는 아주 신랄하게 까댔다.

노래들은 전체적으로 질이 낮고 길모어의 가사는 삼류다.

-로저 워터스

로저의 비평은 일리가 있습니다. 이건 밴드의 앨범이라 할 수 없습니다.

-리처드 라이트

앨범 출시 후 밴드와 로저 워터스의 사이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로저 워터스는 미국의 기획자들에게 연락해 『A Momentary Lapse of Reason 투어』를 취소하려 했으며, 밴드가 북미를 투어하는 동안 로저 워터스는 자신의 두 번째 솔로 앨범 《Radio K.A.O.S.》의 투어를 진행해 맞불을 놓았다. 《Animals》에 사용하는 나는 돼지의 저작권비를 낼 것을 요구하는 사건도 있었는데, 밴드는 이에 대응해 돼지에 크고 아름다운 성기를 달아버렸다. 이렇게 서로 못잡아먹어 안달이 난 동안 1985년부터 진행된 법정 공방의 결과가 12월 23일에 나왔는데, 닉 메이슨과 데이비드 길모어는 핑크 플로이드의 이름을 계속 사용할 권리를, 로저 워터스는 《The Wall》과 《The Final Cut》의 저작권을 얻게 되었다.

4.6.2 The Division Bell(1987~1995)

앨범 커버. 마주본 두 얼굴은 시드 바렛과 로저 워터스를 부재를 상징한다고 한다.

1992년에 밴드는 멕시코에서 열린 자동차 경주인 카레라 팬아메리카나(La Carrera Panamericana)를 촬영한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제작했다. 경주에 직접 참여도 했는데, 닉 메이슨은 완주에 성공했지만 매니저 스티브 오루크와 데이비드 길모어는 사고가 났다. 다행히 사망자 및 중상자는 없었으며, 매니저의 다리가 약간 골절되었다고 한다.

1993년 1월, 그들은 브리타니아 로우 스튜디오로 돌아와 새로운 앨범의 작업을 시작했다. 리처드 라이트를 포함한 밴드는 약 2주 가량의 즉흥 연주를 통해 새 아이디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The Wall》의 스토리라인을 만들었던 밥 에즈린도 앨범 제작에 참여했고, 컨셉이 잡힌 후의 제작은 데이비드 길모어의 아스토리아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계약상으로 리처드 라이트는 밴드의 멤버가 아니었지만 《Wish You Were Here》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인 작곡에 참여해 5곡을 공동으로 제작했다. 후에 데이비드 길모어의 아내가 되는 폴리 샘슨도 작곡에 참여해 앨범 내에서 제일 높게 평가 받는 〈High Hopes〉을 작곡했다.

〈High Hopes〉는 앨범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곡입니다.

-밥 에즈린

또한, 밴드는 앨범의 오케스트라 파트를 구성하기 위해 마이클 케이먼을 고용했고,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믹싱을 맡았던 크리스 토마스와 핑크 플로이드의 여러 앨범에서 색소폰을 맡았던 딕 페리, 《A Momentary Lapse of Reason》의 작사를 담당했던 안토니 무어도 다시 참여했다. 작가 더글러스 애담스가 앨범의 제목을 제공했으며 Hipgnosis가 앨범 커버를 제작했다. 앨범 커버는 모아이 석상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1994년 3월에 출시된 앨범은 빌보드와 영국 음악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성공을 거둔다. 앨범 출시 후 리처드 라이트가 다시 정식 멤버로 영입되었고, 핑크 플로이드의 마지막 투어인 『The Division Bell 투어』가 10월 29일까지 진행되었다.

4.7 그 후(1995~2015)

4.7.1 로큰롤 명예의 전당 수록(1996)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서의 공연. 연주곡은 〈Wish You Were Here〉.

1996년 1월 17일, 밴드는 스매싱 펌킨즈의 보컬 빌리 코건의 추천으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수록되었다. 영상에서 알 수 있듯이, 로저 워터스는 참가하지 않았다. 퇴출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서로 간의 사이의 개선이 크게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래와 같은 언급을 한 것으로 보아 약간이나마 관계 개선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각기 다른 음악을 만들었던 두 멤버들에게 이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데이비드 길모어, 시상식에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 박물관에 전시된 《The Wall》의 모형.

이후 로큰롤 명예의 전당 박물관에 《The Wall》과 《The Division Bell》의 모형이 전시되었다.

4.7.2 Live 8 재결합(2004~2006)

Live 8 공연 후 찍은 사진. 왼쪽부터 데이비드 길모어, 로저 워터스, 닉 메이슨, 리처드 라이트

2005년 7월 2일, Live 8 콘서트에서 시드 바렛을 제외한 핑크 플로이드 4명의 멤버가 24년 만에 다시 결합해 공연했다. 《The Wall》 영화에서 주인공 'Pink'의 역할을 맡았던 밥 겔도프가 재결합을 주선했는데, 첫 시도는 2004년에 닉 메이슨에게 제안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닉 메이슨은 제안을 거절했고, 그후 밥 겔도프는 데이비드 길모어에게 연락했지만, 데이비드 길모어 역시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로저 워터스는 제안에 찬성했으며, 찬성으로부터 약 2주 후에 로저 워터스와 데이비드 길모어의 만남이 있었다. 약 2년 만의 만남이었다. 이후 데이비드 길모어 또한 재결합을 찬성했고, 데이비드 길모어로부터 재결합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 리처드 라이트는 이에 즉시 동의했다.

재결합 찬성 후, 밴드는 블랙 아일랜드 스튜디오에서 며칠 간 리허설을 가졌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따로 지낸 것 때문에 연주의 페이스나 스타일에서 마찰이 있었다고 하지만, 공연은 큰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수십 년 만에 여기 이 세 사람과 같이 서있는 것이 매우 감동적입니다.

-로저 워터스, 공연 시작 전에.

공연이 끝나고 데이비드 길모어가 무대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로저 워터스가 그를 불려들여 멤버들끼리 서로 포옹을 했다. 이로써 모두에게 멤버들 간의 갈등이 해소되었음을 보여주었다. 포옹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은 일요일 신문들의 특집 기사로 올라갔으며, 공연 후 로저 워터스 퇴출 전의 앨범들의 판매량이 급등했다. 이 '급등'의 정도가 엄청난데, 《The Wall》은 약 3,600%,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약 1,400%,《Wish You Were Here》는 약 1,000% 증가했다. 최소 10배 이상이 팔려나간 셈이다.

이렇게 서로 간의 관계도 개선하며 같이 공연도 했지만, 완전한 재결합은 이뤄지지 않았다. 밴드는 당시 돈으로 약 2,400억 원에 달하는 투어 계약을 거절했으며, 로저 워터스와 데이비드 길모어는 서로 재결합은 없을 것이라며 못을 박았다.[27]

Live 8을 위한 리허설을 하는 동안, 핑크 플로이드는 내가 원했던 무언가가 아니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이제 핑크 플로이드에서 제가 포함된 투어나 앨범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멤버들과의 반감같은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전 할 만큼 했습니다. 전 60살이 넘었습니다. 이제 혼자 일하는 것이 더 편합니다.

-데이비드 길모어, 라 리퍼블리카[28]와의 인터뷰에서.

4.7.3 시드 바렛과 리처드 라이트의 죽음(2006~2008)

시드 바렛은 2006년 7월 7일에 자신의 집에서 60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뇨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변인에 따르면 큰 고통없이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의 가족은 2006년 7월 18일 캠브릿지 화장터에서 그를 매장했는데, 로저 워터스를 포함한 핑크 플로이드의 멤버들은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슬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밴드의 모두는 시드 바렛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자연스레 매우 화나고 슬펐습니다. 시드는 초기 시절 밴드의 지도자였고, 우리가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유산을 남겼습니다.

-리처드 라이트

비록 시드 바렛은 핑크 플로이드에서 떠난 후 35년 간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29] 언론은 그의 음악에 대한 공헌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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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 바렛 추모 콘서트에서 찍은 사진. 중간의 인물은 오아시스의 베이스를 맡았던 앤디 벨.


2007년 5월 10일, 로저 워터스를 포함한 밴드 멤버들은 바비칸 센터에서 열린 시드 바렛의 추모 콘서트에서 다시 만났다. 모두 콘서트에 참여해 연주를 했지만 같이 연주하진 않았다. 밴드는 시드 바렛이 작곡한 〈Bike〉와 〈Arnold Layne〉을 연주했고, 로저 워터스는 시드 바렛의 노래의 솔로 버전인 〈Flickering Flame〉을 연주했다.


이후, 리처드 라이트는 2008년 9월 15일에 65세의 나이로 숨졌다. 사망 원인은 암이지만, 정확히 어떤 암에 걸렸는지는 불명. 사망 후 멤버들끼리 추모식을 가졌다고 한다.

4.7.4 이후 행보, The Endless River(2008~2015)

키딩턴 홀에서의 자선 콘서트.


2010년 7월, 로저 워터스와 데이비드 길모어는 자선단체 Hoping Foundation을 위해 키딩턴 홀에서 함께 공연을 가졌다. 당시 있었던 청중은 200명 가량으로,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데이비드 길모어는 자선 이벤트에 등장해준 로저 워터스에 대한 답례의 차원에서 2011년 5월 O2 아레나에서 열린 로저 워터스의 《The Wall》 공연에서 〈Comfortably Numb〉을 연주했고, 콘서트의 마지막에 닉 메이슨도 잠시 참여했다.

2011년 5월, O2 아레나에서의 영상.
오늘 밤은 데이비드가 〈Comfortably Numb〉을 연주하는 영광을 저에게 준 밤입니다. 그리고, 기묘하고 매우 행복한 우연으로 인해, 지금 여기에 우리의 옛날 밴드의 다른 멤버가 와 있습니다. 닉 메이슨입니다 여러분!

-로저 워터스, 《The Wall》 공연 후.

런던 사우스 뱅크에 설치되었던 앨범의 홍보물.


2012년, 데이비드 길모어와 닉 메이슨은 《The Division Bell》을 제작하던 시기에 리처드 라이트와 만들었던 것들을 리처드 라이트에 대한 헌사의 의미에서 앨범으로 모아 발매하고자 한다. 밴드는 새로운 부분의 녹음을 도울 세션 멤버들을 모집했는데, 로저 워터스는 참가하지 않았다.

저는 이 앨범이 라이트의 연주가 핑크 플로이드의 심장이었다는 것을 알리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닉 메이슨

이후 데이비드 길모어의 부인 폴리 샘슨이 《The Endless River》를 2014년 7월에 트위터에서 발표했으며, 앨범은 2014년 11월애 발매되었다. 앨범은 영국 아마존에서 제일 많은 예약 구매가 이루어진 앨범이 되었고, 빌보드와 영국 음악 차트에서 각각 3위와 1위에 올라섰다. 락의 불모지인 한국에서도 가온 차트 4위에 등극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앨범 출시 후 데이비드 길모어는 《The Endless River》가 핑크 플로이드의 마지막 앨범이라고 언급했으며, 앨범을 위한 별도의 투어는 없었다. 2015년 8월, 데이비드 길모어는 핑크 플로이드는 이제 끝났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밴드의 5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저와 메이슨은 라이트가 남긴 것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고 생각합니다. 유감스럽지만, 이제 끝입니다.

-데이비드 길모어

5 음악적 스타일

5.1 장르

핑크 플로이드의 모든 음악을 관통하는 가장 근본적인 장르는 블루스의 스타일과 유사하다. 극초기의 밴드가 블루스 위주의 음악을 연주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도 있지만, 후술될 데이비드 길모어 특유의 기타 연주가 블루스에 기반하기 때문에 핑크 플로이드의 전반적 음악에서 블루스의 스타일이 나타난다. 앨범 곳곳에서 사용된 색소폰 덕분에 재즈의 느낌도 나는 편.

초기의 핑크 플로이드의 스타일은 사이키델릭 록으로 분류되며, 이로 인해 핑크 플로이드는 영국의 첫 사이키델릭 록 밴드로 평가된다. 그러나, 밴드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때 부터 프로그레시브적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다.

1967년, 그들은 놓칠 수 없는 독특한 소리를 개발했다. 길고 연속적인 음악들이 하드 록, 블루스, 컨트리, 포크의 분야에 손을 뻗고 있다.

-롤링 스톤 지

핑크 플로이드가 후크송을 연주하거나 라디오에 실을 수 있는 수준의 짧은 곡을 연주하는 광경을 본 사람은 사실상 없을 것이다. 핑크 플로이드가 자아도취, 파티, 로맨스 같은 전형적인 팝 스타일을 사용하는 것을 본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적 세계는 넓고, 격렬하고, 도전적이다. 다른 밴드들이 음악에 가사를 깔끔하게 맞춰 끼우는 동안, 핑크 플로이드는 가사를 자신만의 생명을 갖고 있는 것 같은 음악에 집어넣는다. 길고 독립된 인스트루멘탈 파트는 겉치레가 아닌, 밴드의 음악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제레 오닐[30]

저희가 왜 사이키델릭 록 그룹으로 지명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멤버들은 서로를 그런 방식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저희는 단지 재미를 위해 연주했습니다. 특정 음악의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죠.

-리처드 라이트, 1968년.

이렇게 특정 연주에 얽매이지 않는 실험적 스타일을 지니고 있던 밴드는 후에 큰 무리없이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로서 정착할 수 있었다.

5.2 데이비드 길모어의 연주


2006년 5월, 로얄 알버트 홀[31]에서 연주한 〈Comfortably Numb〉의 기타 솔로.
로저 워터스가 핑크 플로이드의 작곡가라면, 길모어는 밴드의 목소리이다. 그는 밴드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앨런 디 페르나[32]

지미 헨드릭스와 반 헤일런 사이의 공백을 메워주는 기타리스트.

-앨런 디 페르나

비록 데이비드 길모어의 시작은 시드 바렛의 대체자에 불과했지만, 현재 데이비드 길모어의 연주 스타일은 핑크 플로이드의 상징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블루스의 스타일에 기반한 연주에 깔끔한 아르페지오, 여러가지 이펙트 페달을 이용한 소리는 그의 상징과도 같다. 특히 비브라토와 트레몰로는 예술의 경지에 이른 수준. 거기에 데이비드 길모어는 롤링 스톤 지 선정 최고의 기타리스트 톱 100위에서 14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드 바렛은 순위에 아예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순수 연주 실력 만큼은 데이비드 길모어가 훨씬 뛰어난 셈.

연주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연주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다. 특정 부분에선 상당한 속도를 보여주지만, 전성기 시절인 7, 80년대에 이름을 날렸던 기타리스트들과 비교했을 땐 느리다. 하지만 위 문단에서 언급된 요소들이 비교적 단순한 연주로도 강렬한 소리를 만들어내며, 이 덕분에 락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길모어의 연주는 어느정도 알아볼 수 있다.

제 손가락은 독특한 소리를 만듭니다. 빠르진 않지만, 저는 제 연주가 매우 알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비드 길모어

5.3 음향 효과

핑크 플로이드의 첫 패닝[33] 컨트롤러인 'Azimuth Co-ordinator'.

다양한 장비를 이용한 음향 효과 또한 핑크 플로이드의 주목할 만한 음악적 스타일이다. 1967년 5월, 퀸 엘리자베스 홀에서 연주했던 〈See Emily Play〉는 쿼드러포닉[34] 효과를 이용한 첫 공연으로 평가받는다. 이를 이용해 당시 무대의 270º 가량의 범위를 음향으로 덮어 스월링 효과를 만들어냈다. 후에는 보다 더 좋은 장비를 이용해 무대의 전 범위를 커버할 수 있었다. 이외 핑크 플로이드가 이용한 음향 효과 중에서 제일 높게 평가받는 것은 녹음 시 두 개 이상의 마이크를 사용해 입체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홀로포닉 시스템으로, 《The Final Cut》이 이를 활용한 최초의 음반으로 평가받는다.

5.4 무대 효과

우린 라이브 공연에서도 별 이상한 짓들을 했었죠. 저희는 관객들을 위해 테이프를 만들었습니다. 약 30분 길이의 테이프였는데, 우리가 공연을 시작하기 전의 대기시간에 재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테이프는 쿼드러포닉 음향 효과를 이용한 새소리들, 멀리서 이야기하는 사람들, 백조들이 물에서 기어나오고, 트랙터가 움직이고, 비행기가 위에서 날아가는, 전부 다른 음향 효과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관객들은 이 소리들을 들으면서 음악을 듣기 위한 자신만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죠.

-데이비드 길모어

핑크 플로이드의 라이브 공연에서 무대 효과는 가장 중요하고 섬세한 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음악을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효과들을 사용한 공연은 핑크 플로이드 이후의 아티스트들의 라이브 공연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5.4.1 조명 효과

핑크 플로이드는 라이브 공연에 조명 효과를 결합한 첫 밴드라 할 수 있다. 시드 바렛이 밴드를 주도하던 시기에는 리퀴드 라이트 쇼[35]가 밴드 뒤의 커다란 화면에 재생되었고, 수동으로 조절되는 수십 개의 스트로브 라이트[36]를 사용했다. 이러한 조명 효과들은 밴드의 그림자를 제외한 모두를 보기 힘들게 하는 효과가 있었고, 시브 바렛이 이것을 이용해 자신이 연주할 필요가 없는 부분에서 팔을 움직여 그림자가 다양한 모양을 이루게 해 시각적 미를 추가했다.

동 증기 레이저를 사용하고 있는 무대의 사진.


로저 워터스의 퇴출 후, 핑크 플로이드의 조명 효과는 정점에 달했다. 밴드의 라이팅 디자이너 마크 브릭맨은 수백 개의 자동화된 조명과 레이저를 활용해 환상적인 무대를 연출해냈으며, 1994년의 『The Division Bell 투어』에선 핵연구나 고속촬영을 위해 사용했던 기술인 동 증기 레이저[37]를 무대 효과로서 최초로 사용했다. 이 레이저를 방출하는 기기는 당시 돈으로 대 당 약 12만 달러로, 무대 효과의 일부로 사용하기에는 매우 큰 금액이었다.

'Mr. Screen'의 사진. 동 증기 레이저를 사용하고 있는 위의 사진에서도 등장한다.


'Mr. Screen'이라고 불리우는 커다란 원형 화면은 핑크 플로이드의 라이브 무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1974년의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라이브 공연에서 처음 나타났으며, 주로 곡의 주제나 분위기에 맞춘 녹화된 영상이나 애니메이션이 재생되었다. 1977년의 『In the Flesh 투어』와 1980년부터 1981년까지 진행되었던 『The Wall 투어』에선 화면의 가장자리에 스포트라이트가 추가로 설치되었다. 'Mr. Screen'을 이용한 효과는 『A Momentary Lapse of Reason 투어』와 『The Division Bell 투어』에서 극한을 보여주었는데, 기타 솔로와 같은 화면이 불필요한 부분에서 화면이 수평으로 기울며 빛을 한 곳에 집중하는 역할을 했다.

『The Division Bell 투어』에서 사용된 '공'. 위에서 언급한 'Mr. Screen'이 기울어지는 효과도 등장한다.
급한 사람은 5:19, 8:04 부분 참고.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라이브 공연 이후로 사용된 '공' 또한 핑크 플로이드의 공연에서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이다. 『The Division Bell 투어』에서 이 구체는 직경 약 5m의 발광체가 되었으며, 스테이지의 천장에서 내려오면서 약 7.5m의 꽃과 같은 형태로 펼쳐졌다. 펼쳐진 공 안에선 12 킬로와트의 램프가 자리잡고 있다.

5.4.2 소품

《The Wall》의 시작을 알리는 비행기.

핑크 플로이드의 뛰어난 소품 활용은 라이브 무대의 특수 효과에 큰 영향을 주었다. 투어에선 언제나 많은 양의 폭죽과 드라이아이스가 사용되었으며, 1973년의 『The Dark Side of the Moon 투어』에선 상당한 크기를 자랑하는 모형 비행기가 관중의 위로 날아가 스테이지에 부딪히며 웅장한 폭발 효과를 주었다. 이 비행기는 『The Wall 투어』와 『The Division Bell 투어』에서 반복되었고,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로저 워터스의 『The Wall 투어』에서도 사용되었다. 『A Momentary Lapse of Reason 투어』에서도 이 비행기 효과는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는데, 앨범의 분위기에 맞춰 비행기가 침대로 교체되었다.

일반 돼지.《The Wall》 전용 돼지.
'Nuclear Family'의 사진.

핑크 플로이드가 풍선 모형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1973년이지만, 본격적 활용과 함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거대한 돼지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7년이다. 이 돼지와 함께 지렁이로 가득 찬 냉장고, 캐딜락, TV 등이 하나로 묶여있는 'Nuclear Family'가 같이 사용되었다.

로저 워터스의 《The Wall》의 라이브 공연에 사용된 '교장'.

풍선 모형은 1980년부터 1981년까지 진행되었던 『The Wall 투어』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앨범의 등장인물을 꼭두각시 형태로 완벽하게 재현했다. 덕분에 풍선들은 떠있는데 그치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으며, 눈에는 스포트라이트를 설치해 위압감을 심어주었다.

1980년의 라이브 공연에서 설치되었던 벽.

위의 글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사물을 이용한 특수 효과들은 『The Wall 투어』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밴드의 앞에 벽돌이 쌓이면서 벽이 제작되었는데, 완성된 벽은 길이 49m, 높이 11m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이 벽은 사이드 1의 마지막 곡인 〈Goodbye Cruel World〉가 끝남과 동시에 완성되었으며, 투병한 일부 벽돌에서 앨범의 주인공 '핑크'의 연기를 했던 로저 워터스가 독백을 하는 장면과 데이비드 길모어가 벽의 위에서 〈Comfortably Numb〉의 기타 솔로를 연주할 때를 제외하면 벽을 쌓은 후 밴드의 모습은 사실상 보이지 않았다. 앨범의 클라이맥스인〈The Trial〉에선 애니메이션이 벽 전체에서 재생되었고, 곡이 끝남과 동시에 음향 및 조명 효과와 함께 벽이 무너졌다.

5.5 음악적 컨셉

어두운 관념의 전달자.

-롤링 스톤 지

핑크 플로이드의 관심사는 진실과 환각,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 인과 관계와 기회, 동정심과 무관심이다.

-제레 오닐

〈Echoes〉는 대화, 연민, 조화가 핵심이 되어 역할한다.

-George Reisch

심오한 주제들은 핑크 플로이드의 단골 주제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거의 모든 앨범이 광기, 부재, 전쟁 등의 암울하고 심오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로저 워터스는 이러한 주제들에서 앨범을 듣는 모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핑크 플로이드의 진정한 컨셉이라 언급한 바 있다. 시드 바렛이 밴드를 떠난 1968년부터 로저 워터스가 밴드를 떠난 1985년까지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적 방향성은 대다수가 로저 워터스에 의해 결정되었고, 이 때문에 로저 워터스에게 '락 음악계에서 제일 우울한 사람'이라는 안습한 칭호가 붙었던 적이 있다.

5.5.1 환멸, 부재

'환멸'의 대표적인 예시로는 《Wish You Were Here》의 〈Have a Cigar〉를 들 수 있다. 〈Have a Cigar〉의 가사는 음악 산업의 대표들의 횡포와 아티스트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비판한다. 밴드를 칭찬하지만 밴드 멤버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대목이 그야말로 백미라 할 수 있다.

밴드는 정말로 환상적이야, 정말로 내가 생각하던 것 그대로야. 그런데, 누가 핑크지?[38][39]

-〈Have a Cigar〉의 가사 중 일부.

그 외 노래의 화자인 음악 산업의 대표가 밴드와 한 팀인 것 마냥 이야기하며 상업적 부분만 신경쓰는 모습은 당시 로저 워터스가 음반 산업계에서 느꼈던 환멸을 잘 표현하고 있다.

상업의 세계의 비인간적 면모들.

-데이빗 데트머[40]

'부재'는 핑크 플로이드와 상당히 친숙한 소재이다. 이러한 소재들이 핑크 플로이드에 깊숙히 자리잡게 된 계기로는 1968년 밴드를 떠나게 된 시드 바렛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로저 워터스의 아버지를 들 수 있는데, 이 둘은 핑크 플로이드의 '부재'에서 큰 역할을 차지한다. 시드 바렛의 부재에 대한 내용으로는 《Wish You Were Here》에서 주로 나타나며, 《The Division Bell》에서도 일부가 나타난다.

아무도 네가 어디있는지 몰라. 얼마나 가까운지, 얼마나 먼지.[41]

-〈Shine on You Crazy Diamond Part 2(Parts 6-9)〉의 첫 가사.

여담으로 시드 바렛이 핑크 플로이드에 남긴 마지막 곡인 〈Jugband Blues〉는 자신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곡이다.[42]

내가 여기에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준 너에게 감사해.[43]

-〈Jugband Blues〉의 가사 중 일부.

로저 워터스의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내용은 로저 워터스의 유년기를 그대로 가져왔다고 봐도 무방한 《The Wall》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나며, 전쟁을 컨셉으로 잡고 있는 《The Final Cut》에서도 나타난다.

아빠는 바다를 건너 날아가셨지. 기억만을 남겨둔 채.[44]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1〉의 첫 가사.

'부재'라는 주제는 시드 바렛과 로저 워터스의 아버지를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존재, 꿈 등 다양한 매체들을 묘사한다.

나는 내 눈의 한구석에서 무언가를 잠깐 보았지.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사라졌어. 이제 그것에 손을 댈 수 없어. 아이는 자랐고, 꿈은 사라졌어.[45]

-〈Comfortably Numb〉의 가사 중 일부.

아무도 거기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관한 것입니다. 곡은 〈Wish We Were Here〉로 불렸어야 했습니다.

-로저 워터스

존재라는 사상이, 그곳에 있는 척 하지만 정신은 그곳에 있지 않는다는 사실과, 인간에 의해 심리적으로 적용되는, 존재를 억압하는 장치와 동기로 인해 보류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주제인 부재로 모인다: 사람의 부재, 감정의 부재.[46]

-스톰 토거슨의 〈Wish You Were Here〉에 대한 평가.

그 외 《Obscured by Clouds》는 나이가 듦에 따라 젊음에서 나오는 활발함의 부재를 앨범의 컨셉으로 다루고 있고, 《The Division Bell》의 〈Keep Talking〉은 소통의 부재와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위에서 언급했듯이 앨범아트는 시드 바렛과 로저 워터스의 부재를 상징한다.

5.5.2 소외, 전쟁

핑크 플로이드의 노래에서 나타나는 '소외'는 주로 정신과 관련되어 있다.

넌 문을 닫고, 열쇠를 던져버리지.[47]

-〈Brain Damage〉의 가사 중 일부.

이러한 정신의 소외와 관련된 주제는 《Wish You Were Here》의 〈Welcome to the Machine〉에서 잘 나타난다. 또한, '기계'라는 인위적 요인으로 인해 나타나는 소외는 《Animals》에서 나타나는 소외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무슨 꿈을 꾸었니? 괜찮아, 무슨 꿈을 꿀지 너에게 말해두었으니까.[48]

-〈Welcome to the Machine〉의 가사 중 일부.

《Animals》의 〈Dogs〉는 칼 마르크스의 소외 이론[49]과 일맥상통한다. 〈Dogs〉의 '개'는 자본주의의 노동자의 위치에 있는 존재로서 본능적으로 사는 것을 최소화하며, 자신의 안녕을 위해 타인과의 접촉을 꺼리며 타인을 신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넌 네가 거짓말 하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어야 해. 그래야 그들이 너에게 등을 맡길 때 칼을 넣을 기회가 생길 거야.[50]

-〈Dogs〉의 가사 중 일부.

'소외'라는 주제의 정점은 《The Wall》에서 나타난다. 《The Wall》에서의 '벽'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존재이며, 앨범의 첫 사이드는 앨범의 주인공 핑크가 어떻게 '벽'을 만들게 되었는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소외의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핑크 플로이드의 또다른 테마인 '전쟁'이다.

핑크 플로이드에서 전쟁이라는 테마는 소외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되었으며, 이러한 묘사는 초기 시절의 밴드에서도 나타난다. 전쟁이라는 테마 내에선 주로 '전쟁의 가치'와 관련된 것을 다루는데, 전쟁이라는 것이 개인에게 어떤 가치가 있으며, 개인에게 어떤 것을 가져다 주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클레그 상병은 의족이 있었지. 1944년의 전쟁에서 얻었어.[51]

-〈Corporal Clegg〉의 가사 중 일부.

여기 베라 린[52]을 기억하는 사람 없나요? 그녀가 우리는 평화로운 날에 다시 만날 거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나요?[53]

-〈Vera〉의 첫 가사.

또한, 전쟁이라는 주제 내에서, 전쟁으로 인해 서로와 대립하지만 전쟁이 없다면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 그들. 우리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야.[54]

-〈Us and Them〉의 첫 가사.

《The Final Cut》의 마지막 곡인 〈Two Suns in the Sunset〉에서도 핵폭탄으로 인해 전부 녹아버려 마지막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매우 극단적인 형식으로 같은 주제를 강조한다.

소수의 감정을 마침내 이해했어. 다이아몬드와 재, 적과 동료. 우리 모두 마지막엔 평등해.[55]

-〈Two Suns in the Sunset〉의 마지막 가사.

그 외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The Final Cut》은 포클랜드 전쟁을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으며, 앨범은 또한 로저 워터스의 아버지와 전사자들을 향한 진혼곡이기도 하다.

5.5.3 광기

"달의 어두운 면에서 만나자."[56]가 의미하는 바는, 모든 것이 미쳐서 자신이 유일한 미친 사람인 것 같다고 느낀다면,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로저 워터스, 2005년.

시드 바렛이 밴드를 리드하던 때 부터 밴드가 해체하기 직전까지, 광기라는 주제는 핑크 플로이드와 함께했던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드 바렛이 밴드의 음악적 방향을 주도하던 시기의 광기는 주로 기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아무렇게나 써내린 것 같은 가사에서 나타나는 몽환적 느낌은 시드 바렛이 활동하던 시기의 광기에서 나타나는 주된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아놀드 레인은 옷을 모으는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지.[57]

-〈Arnold Layne〉의 첫 가사.

시드 바렛이 떠난 후, 특히 《The Dark Side of the Moon》 이후의 앨범들에서 나타나는 광기는 광기 그 자체가 아닌, 광기를 유발하는 요소들과 그 요소들인 인간에게 초래하는 결과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다. 위에서 언급된 환멸, 부재, 전쟁, 소외와 같은 주제들 또한 광기를 유발하는 요소의 하나이다.

광기의 표출보다는 광기를 유발하는 습관과 사회적 구조, 기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George Reisch, 《The Wall》에 대한 평가.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경우 앨범의 거의 전부가 이러한 광기를 유발하는 요소들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Time〉과 〈Money〉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너는 젊고 인생은 길고, 낭비할 시간도 있지. 그러던 어느 날 넌 10년이 지났다는 것을 알아챘지. 아무도 언제 시작할지 말해주지 않았어, 시작 신호를 놓친거야.[58]

-〈Time〉의 가사 중 일부.

공평하게 나누되 내 파이에는 손대지 마.[59]

-〈Money〉의 가사 중 일부.

그 외 〈The Great Gig in the Sky〉는 죽음에 대해 묘사하고 있으며, 위해서 언급했듯이 〈Us and Them〉은 전쟁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하나되어 〈Brain Damage〉에서 표출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앨범의 'The Dark Side of the Moon'이 의미하는 바 또한 광기이며,[60] 문단의 시작에 언급된 "달의 반대편에서 만나자."는 광기의 표출을 의미한다.

《The Wall》은 광기의 오페라라 할 수 있을 만큼 광기의 요소들과 광기의 표출에 대한 묘사들이 노골적이고, 극단적이다. 광기를 유발하는 요소들에 대한 묘사는 주로 사이드 1에서 나타나는데,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1~3〉, 〈Mother〉이 대표적이다.

아빠는 바다를 건너 날아가셨지. 기억만을 남겨둔 채.[61]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1〉의 첫 가사.

우리에게 교육은 필요 없어. 우리에게 세뇌는 필요 없어. 교실에서의 암울한 풍자는 그만.[62]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의 첫 가사.

내가 무언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63]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3〉의 가사 중 일부.

자, 자 아기야 울지 마렴. 엄마가 네 악몽을 전부 현실로 바꿔줄테니.[64]

-〈Mother〉의 가사 중 일부.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 주인공 핑크는 '벽'을 만들게되고, 자신으로 하여금 '벽'을 만들게 한 요소들이 한꺼번에 표출되어 앨범 후반의 파시즘적 광기가 나타나게 된다.

영화 《The Wall》의 〈In the Flesh〉. 노골적인 나치의 패러디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광기라는 주제에서 제일 핵심적인 요소는 그저 이러한 광기를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광기를 극복할 것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

앨범은 긍정을 수용하고 부정을 거절하는 간곡한 권고와 같습니다.

-로저 워터스, 《The Dark Side of the Moon》에 대한 언급.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마지막 곡 〈Eclipse〉에서 '태양'의 아래 모든 것이 조화롭게 움직이지만 '달'로 인해 가려진다. 광기를 상징하는 '달'이 없다면 조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65]

《The Wall》에서의 주인공 핑크는 자신의 광기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망치 제국'을 건설하던 도중 자신의 행위에 의문을 가지게 되며, 이러한 의문에 대한 심판은 〈The Trial〉에서 나타난다.

형사 법원은 당신 앞의 '감정'을 보여준 죄로 잡힌 범죄자를 소개할 것입니다.[66]

-〈The Trial〉의 가사 중 일부.

여기서 '감정'은, 당연히 광기를 상징한다. 노래의 진행과 함께 핑크는 자신이 '벽'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된 요소들과 마주함과 동시에 타인과의 소외와 광기의 표출의 원인이 되었던 '벽'을 파괴함으로써 광기를 극복한다.[67]

6 업적 및 영향력

최고의 상업적, 음악적 성공을 이룬 밴드.

일단 상업적 성공의 스케일부터가 남다르다. 2013년 기준 핑크 플로이드의 누적 앨범 판매량은 약 2억 5,000만 장으로, 세계 최다 음반 판매 아티스트 7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앨범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약 4,300만 장을 판매해 세계에서 제일 많이 팔린 앨범 3위를 차지하고 있다.[68] 밴드 멤버 각각의 재력도 상당한 수준인데, 선데이 타임즈에서 선정한 영국 백만장자 아티스트 목록에서 로저 워터스는 1억 5,000만 파운드(약 2,610억 원)로 12위에 등극했으며, 데이비드 길모어는 8,500만 파운드(약 1,500억 원)로 27위, 닉 메이슨은 5,000만 파운드(약 900억 원)으로 37위에 등극했다.

음악적 성공은 역시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이 당시와 현대의 록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록 밴드의 신디사이저 활성화에 기여했으며, 라이브 무대의 다양한 효과들은 글램 록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 거기에 거의 모든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는 핑크 플로이드의 영향을 받았다고 봐도 무관하며, 다른 장르의 수많은 아티스트들도 핑크 플로이드의 영향을 받았다. 데이빗 보위는 시드 바렛에게 영감을 받았다 하고, 현재 최다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밴드 U2의 기타리스트 엣지는 《Animals》의 〈Dogs〉를 듣고 나서 첫 딜레이 페달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 외 , TOOL, 라디오헤드[69], 크라프트베르크, 마릴리온, 나인 인치 네일스, 오브, 스매싱 펌킨스 등 많은 아티스트들이 핑크 플로이드의 스타일에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다.

컨셉트 앨범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밴드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컨셉트 앨범이란 개념은 기존의 싱글 중심에서 앨범 중심의 창작이라는 변화 과정 속에서, 한 앨범의 통일성 및 일관성을 강조하는 조류 속에서 생겨난 것이라 정확히 어떤 앨범이 최초라고 단정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보통 시초격으로는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이 꼽히고, 그 후로 핑크 플로이드를 비롯한 프로그레시브 록 뮤지션들이 더욱 본격적인 컨셉트 앨범을 정립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6.1 주요 업적 및 수상 목록

  • 《The Dark Side of the Moon》, 빌보드 차트 741주 연속 기재로 기네스북 수록.
  • 《The Dark Side of the Moon》,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 43위 등극.
  • 《The Dark Side of the Moon》, National Recording Registry에 등재.
  • 롤링 스톤 지 선정 최고의 아티스트 톱 100에서 51위 등극.
  • MSNBC(미국 케이블 TV 채널.) 선정 최고의 락 밴드 톱 10에서 8위 등극.
  • VH1(미국의 케이블 방송사.) 선정 최고의 아티스트 톱 100에서 18위 등극.
  • 1980년 - 《The Wall》, '그래미상 최우수 엔지니어드 앨범, 논-클래식' 수상.
  • 1982년 - 《The Wall》 영화의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 BAFTA(British Academy of Film and Television Arts)에서 '최고의 오리지널 곡' 수상.
  • 1982년 - 《The Wall》 영화,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
  • 1995년 - 《The Division Bell》의 수록곡 〈Marooned〉, '그래미상 최우수 록 연주 퍼포먼스' 수상.
  • 2008년 -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로부터 '폴리음악상' 수상.

무려 왕에게 상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 그 외 1996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 2005년에는 영국 음악 명예의 전당, 2010년에는 Hit Parade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었다.

7 투어 목록

  • 핑크 플로이드 월드 투어(1968)
  • The Man and the Journey 투어(1969)
  • Atom Heart Mother 월드 투어(1970)
  • Meddle 투어(1971)
  • The Dark Side of the Moon 투어(1972~1973)
  • French Summer 투어(1974)
  • British Winter 투어(1974)
  • Wish You Were Here 투어(1975)
  • In the Flesh 투어(1977)
  • The Wall 투어(1980~1981)[70]
  • A Momentary Lapse of Reason 투어(1987~1990)[71]
  • The Division Bell 투어(1994)[72]

8 빌보드 순위

그림에 표기된 앨범의 년도는 출시년도가 아닌, 앨범이 빌보드 순위에 올랐던 년도를 나타낸다. 헷갈리지 않도록 하자.

9 기타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핑크 플로이드의 팬이며 핑크 플로이드의 곡을 들으며 작품을 쓴다고 한다.

그 외에도 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작가인 아라키 히로히코가 좋아하는 밴드인 듯. 크레이지 다이아몬드, 에코즈, 아톰 하트 파더 등 여러 스탠드의 이름에 그들의 곡명을 붙였다. 그런데 4부 이후로 핑크 플로이드와 관련된 이름을 가진 스탠드의 등장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다른 스탠드들처럼 별 생각없이 가져다 쓴 것으로 추정된다.

  1. 2005년 7월 G8 참가국에서 열린 자선 콘서트.
  2. 각국의 음반산업협회의 인증.
  3. 흔히 말하는 2억 ~ 2억 5,000만장은 공식적인 판매량이 아닌 추정치이다.
  4. Love Potion No.9(원곡은 R&B 그룹 클로버스의 곡이다.)로 유명한 영국의 록밴드.
  5. 영국 공군의 기술자였다고 한다. 발령이 바레인으로 난 것으로 추정된다.
  6. 애비 로드 스튜디오. 비틀즈가 녹음한 곳 맞다.
  7. 시드 바렛의 어시스턴트.
  8. 처음은 비틀즈의 앨범.
  9. 주간 영국 음악 신문.
  10. 그래도 전체적인 평은 긍정적으로 주었다.
  11. 영국 라디오 DJ 겸 저널리스트.
  12. 사실 시드 바렛이 퇴출된 이후, 로저 워터스가 밴드의 기둥 역할을 맡고 있긴 했다.
  13. 원문: "A fine album with a textural and conceptual richness that not only invites, but demands involvement." 더 좋은 번역이 있으면 수정 바람.
  14. 완전히 운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15. Hipgnosis의 멤버
  16. 로저 워터스가 특히 절망감이 심했다고 한다. 소꿉친구가 폐인이 되어 눈 앞에 나타난 상황이니, 절망감이 제일 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7. 원 가사: So, so you think you can tell heaven from hell?
  18. 세금 좀 줄여보겠다고 300억 원이라는 돈을 투자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영국의 괴랄한 조세정책을 생각해보면 아주 무리는 아니다. 괜히 비틀즈가 《Revolver》에 〈Taxman〉을 수록한 것이 아니다.
  19. 흥미로운 점으로는 핑크의 유년기 시절은 로저 워터스의 유년기 시절을 그대로 가져오다시피 했다는 것인데, 실제로 로저 워터스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전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20. 데이비드 길모어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동의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21. Gerald Scarfe.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
  22. 구글 이미지 검색. 혐오주의.
  23. 로저 워터스의 독주를 비꼰 것.
  24. The Quietus. 영국의 음반 잡지.
  25. 비교적 최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나가면 기존 멤버는 두 명만 남게되니 밴드가 자연스레 없어질 것이라 예상했다고 한다. 즉 길모어의 주장대로 워터스는 밴드의 해체를 어느정도 염두하고 밴드에서 나간 셈이다. 인터뷰 영상. 4:20 부분 참조. 또한 자신이 밴드에서 나가는 것 자체는 필연적인 선택이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한편, '핑크 플로이드'라는 이름은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원년 멤버 한 명이 나가는 것을 명분으로 한 해체는 불가능했고, 덕분에 이를 두고 소송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26. 《The Final Cut》과 《A Momentary Lapse of Reason》의 음향효과 대다수는 닉 메이슨의 담당이다.
  27. 로저 워터스는 자선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공연에 한해서 다시 결합해 공연하는 것에 찬성했다.
  28. La Repubblica. 이탈리아의 신문.
  29.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솔로 앨범이 몇 개 존재한다.
  30. Jere O'Neill. 덴버 대학교의 교수 겸 작가.
  31. 데이비드 길모어의 세 번째 솔로 앨범 《On an Island》의 투어의 일환.
  32. Alan Di Perna. 기타 월드 지의 평론가.
  33. Panning. 소리 신호를 스테레오 및 멀티-채널 음장(사운드 필드)으로 분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34. 네 개 채널의 녹음 재생 시스템. 스테레오 녹음이 두 개의 채널에 좌우 신호를 기록하는 반면, 쿼드러포닉은 전후 신호를 네 개 채널로 기록하여 현장감을 높임으로써 음장(사운드 필드)의 표현을 쉽게 한다.
  35. 색을 입힌 기름과 알콜의 층들이 램프의 열을 받아 변화하는 컬러 패턴을 만들어내는 효과.
  36. 깜박임을 방지하기 위해서 48∼ 2,000pps의 전류를 방출하도록 설계된 조명 장치. 고속 동작 상태에 있는 물체를 촬영할 때 화면이 깜박이는 것을 방지하고 좋은 화질을 얻기 위해 이 조명기를 쓴다. 스트로브 라이트는 필름 카메라 촬영 속도와 같은 속도로 작동해야 하므로 통상 카메라와 동조시켜 사용한다.
  37. 증기화 한 구리를 빛의 매체로서 사용한 레이저.
  38. 원 가사: The band is just fantastic, that is really what I think. Oh by the way, which one's Pink?
  39. 문서를 제대로 읽었다면 알 수 있겠지만, 밴드 내에 '핑크'가 이름인 멤버는 없다.
  40. 미국의 작가.
  41. 원 가사: Nobody knows where you are, how near or how far.
  42. 좀 더 세밀히 파고들면 자신의 정신 질환에 대한 자책, 밴드와의 작별 등 여러 내용을 담고 있다.
  43. 원 가사: I'm most obliged to you for making it clear that I'm not here.
  44. 원 가사: Daddy's flown across the ocean. Leaving just a memory.
  45. 원 가사: I caught a fleeting glimpse, out of the corner of my eye. I turned to look, but it was gone, I cannot put my finger on it now, the child is grown, the dream is gone.
  46. 원문: The idea of presence withheld, of the ways that people pretend to be present while their minds are really elsewhere, and the devices and motivations employed psychologically by people to suppress the full force of their presence, eventually boiled down to a single theme, absence: The absence of a person, the absence of a feeling. 더 좋은 번역이 있으면 수정 바람.
  47. 원 가사: You lock the door, and throw away the key.
  48. 원 가사: What did you dream? It's alright we told you what to dream.
  49. 총 4 단계로 이루어진 소외의 과정을 다루고 있는 이론이다. 자본주의의 체제로 인해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물건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 제 1단계이며, 노동자가 순수하게 생존을 위해 반복적인 노동을 하는 것에서 자신의 정신적 에너지에 도움이 되는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 제 2단계, 이러한 반복적인 노동으로 인해 인간의 자유의지, 자각, 본능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 제 3단계,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되는 것이 제 4단계이다.
  50. 원 가사: You have to be trusted by the people that you lie to. So that when they turn their backs on you, you'll get the chance to put the knife in.
  51. 원 가사: Corporal Clegg had a wooden leg. He won it in the war, in 1944.
  52. Vera Lynn. 영국의 여성 가수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주로 활동했으며, 대표곡은 〈We'll Meet Again〉, 〈The White Cliffs of Dover〉 등이 있다. 가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위 곡은 〈We'll Meet Again〉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53. 원 가사: Does anybody here remember Vera Lynn? Remember how she said that we would meet again some sunny day?
  54. 원 가사: Us, and them. And after all we're only ordinary men.
  55. 원 가사: Finally I understand the feelings of the few. Ashes and diamonds, foe and friend. We were all equal in the end.
  56. 원 가사: I'll see you on the dark side of the moon.
  57. 원 가사: Arnold Layne had a strange hobby, collecting clothes.
  58. 원 가사: You are young and life is long, and there is time to kill today. And then one day you find, ten years have got behind you. No one told you when to run, you missed the starting gun.
  59. 원 가사: Share it fairly but don't take a slice of my pie.
  60. 하지만 앨범의 마지막 가사 '달의 어두운 면 같은 건 없어. 사실 다 어둡지.(원 가사: There's no dark side of the moon really. Matter of fact it's all dark.)'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상 앨범에서 '달'은 광기 그 자체를 상징한다.
  61. 원 가사: Daddy's flown across the ocean. Leaving just a memory.
  62. 원 가사: We don't need no education. We don't need no thought control. No dark sarcasm in the classroom.
  63. 원 가사: Don't think I need anything at all.
  64. 원 가사: Hush now baby, baby, don't you cry. Mother's gonna make all your nightmares come true.
  65. 곡의 가사 '태양 아래 모든 것은 조화롭게 있지만 태양은 달에 가려졌어.(원 가사: And everything under the sun is in tune, but the sun is eclipsed by the moon.)' 때문에 결국 광기가 지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곡의 제목인 '일식'이 이루어지는 시간을 고려했을 때, 찰나의 실수로 인해 광기인 '달'이 '태양'을 가리게 두지 않는다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로저 워터스가 의미한 바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66. 원 가사: The crown will plainly show the prisoner who now stands before you, was caught red handed showing feelings.
  67. 하지만 '벽'에 대한 평가와 〈The Trial〉의 평가는 사람에 따라 엇갈린다. '벽'을 타인과의 소통을 단절시키는 수단이자 광기의 표출을 도와주는 방공호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The Trial〉의 재판을 이러한 '벽'을 파괴함으로써 광기를 극복하는 모습으로 평가하는 쪽이 다수이지만, '벽'을 다양한 요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으로 고려해 〈The Trial〉의 재판이 핑크의 존재의 최소한의 당위성조차 파괴하는 행위, 즉 사형로 평가하는 의견도 적지 않으며, 마지막 곡 〈Outside the Wall〉과의 흐름을 고려했을 때 무리는 아니다.
  68. 1위는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2위는 AC/DC의 《Back in Black》.
  69. 기타리스트인 조니 그린우드가 핑크 플로이드의 굉장한 팬이기도 하다. 닉 메이슨에게 '핑크 플로이드 트리뷰트 밴드 중에서 최고다.'라는 칭찬을 듣고 라디오헤드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
  70. Is There Anybody Out There? The Wall Live 1980-81》의 모태.
  71. Delicate Sound of Thunder》의 모태.
  72. P.U.L.S.E》의 모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