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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스티븐 맥마나만 (Steven "Steve" McManaman) |
생년월일 | 1972년 2월 11일 |
국적 | 잉글랜드 |
출생지 | 리버풀 커크데일 |
신체 조건 | 185cm |
포지션 | 미드필더 |
소속 클럽 | 리버풀 FC (1990-1999) 레알 마드리드 (1999-2003) 맨체스터 시티 (2003-2005) |
국가 대표 | 37경기 3골 |
1 소개
해외에서 가장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린 잉글랜드 선수.
2 클럽
2.1 리버풀
다른 많은 리버풀의 전설들처럼 어린 시절 에버튼 FC의 팬이었던 맥마나만은 에버튼으로부터 1년간의 스쿨보이 계약을 제의받았지만, 리버풀에게 스쿨보이 계약 + 2년간의 연습생 계약을 제시받은 아버지(역시 에버튼 팬)가 리버풀의 조건을 선택하면서 리버풀 유스로 입단하게 된다.
1990년도에 데뷔한 맥마나만은 1992/1993 시즌부터 팀의 주전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1993/1994 시즌 그는 팀에 새로 부임한 로이 에번스의 주문 아래 윙어에서 플레이메이커로 포지션을 변경하였고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그는 1994/1995 시즌 칼링컵 결승에 올라 홀로 2골을 기록하여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에도 그는 리버풀에서 맹활약을 펼쳤고, 리버풀의 새로운 축구를 선도하는 일명 '스파이스 보이즈'의 리더로 간주되며 팀의 간판 스타가 된다.
2.2 레알 마드리드
맥마나만이 리버풀과 재계약하지 않고 보스만 룰로 이적을 시도하자 전 유럽의 명문들이 그에게 달려들었고, 결국 레알 마드리드가 계약만료 6개월을 남겨둔 맥마나만과 계약 체결에 성공했다. 맥마나만이 수령하게 된 주급은 6만 파운드로 당시 세계 최고 주급 기록을 경신했다.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시점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상당히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델 보스케 감독이 부임한 뒤로 살아나는 모습을 보이면서 챔피언스리그에서 승승장구하였다. 맥마나만은 페르난도 레돈도를 보조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결승전에서 발렌시아를 상대로 멋진 발리슈팅으로 골을 기록하면서 팀의 3:0 승리를 이끌어 팀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페레즈가 회장이 되면서 루이스 피구의 영입과 함께 갈락티코 정책이 시행되자 그는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된다. 페르난도 레돈도와 아넬카, 카랑뵈 등이 팀을 떠나고 구단은 그를 방출시키려 하였으나 그는 잔류를 원하며 버텼다. 이에 델 보스케 감독이 그에게 적은 기회가 전해주었다. 하지만 이후 그는 미들스브러와 이적이 합의되었다는 이야기와 첼시와 스왑딜이 합의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였으며 그는 이를 부인하며 잔류해 주전경쟁을 하겠다고 버텼다. 이 상황에 팬들의 90%는 맥마나만을 지지하였으며 동료선수 미첼 살가도도 맥마나만이 배신당했다며 맥마나만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그는 팀에 잔류하여 경기에 나서기 시작하였고 팀을 위해 활약하면서 팀의 4년만에 리그 우승 탈환에 일조했다.
다음 시즌 그는 지네딘 지단이 레알로 입단하면서 입지가 더욱 줄었으나 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 라이벌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교체로 투입되어 쐐기골을 넣으며 2:0 승리를 이끌고 팀의 결승 진출에 공헌하며 팀이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후 호나우도가 영입되며 더욱 입지가 줄어들었고 데이비드 베컴이 레알에 입단하자 끝내 팀을 떠나게 되었다.
2.3 이후
레알을 떠난 뒤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한 그는 2시즌간 활약한 뒤 은퇴를 선언하였으며 현재는 세탄타 스포츠, ESPN을 거쳐 BT 스포츠의 정규적인 전문가(pundit)으로 나온다. 분석 및 평가는 대체로 좋은 편.
3 국가대표
그는 잉글랜드 대표로 유로 1996과 1998 프랑스 월드컵, 유로 2000 대회에 참전하여 활약하였다.
4 여담
같은 성씨를 쓰는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의 축구선수 칼럼 맥마나만과는 실제로 먼 친척 사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