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坊
통일신라 시대 때 당나라 동해안(동중국해) 연안 각지에 설치된 신라인들의 거주지. 한마디로 현재 북미에 존재하는 코리아타운과 비슷한 것이다.[1] 환빠중엔 이런 부류의 거주지를 직할통치라고 왜곡해서 대륙백제설, 소소하다면 요서경략설 같은 걸 신봉하기도 한다.
주로 교역하던 상인들이 많았으나, 견당사라고 불리는 사신단, 학문을 익히러 간 유학생, 불법을 배우러 간 구법승, 그리고 경제적 난민과 정치적 망명객도 상당수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진다.
본래 중국에서 방이란 성 안에 구획된 거주지역을 일컫는 용어이다. 중국의 성은 여러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 방에는 방정이라는 책임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방이란 신라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방을 가리킨다. 즉 신라인만의 마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대도시의 일부분 구역이 신라방인 경우가 많았다. 신라방의 방정은 신라인이 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방의 책임자가 총관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자치행정기관이자 신라인을 위한 숙박시설인 신라소도 있었다. 신라원이라는 사찰(절)도 많았는데, 장보고가 세운 절로 엔닌 대사가 방문한 적산원赤山院(적산법화원)이 유명하다. 상당한 자치권이 있었다는 건 일본 승려 엔닌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데, 귀국명령을 받고도 신라방에 숨어서 이를 피했고,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신라소에서 보증함으로써 체류가 허가되기도 했다.
신라방은 산동성 등주 등 주로 바다 근처 도시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그곳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은 주로 상업과 해운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신라인의 해상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업과 선박수리업 등이 발달했으며, 당나라에 왕래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교통 편의를 제공하고 현지 사정을 알려주는 역어와 통사가 있었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관리가 된 신라인도 다수 확인된다. 최치원이나 장보고는 좋은 예. 특히 장보고는 적산원등 신라방과 자주 엮인다.
일본 승려 엔닌의 기행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신라방에 거주하는 신라인에 관해서 비교적 자세히 써 있는데, 양쯔강 하류와 대운하가 연결되는 회하 하류 지역에 신라 상인들이 많이 활동했다고 한다.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당나라와 신라가 멸망한 뒤에도 신라방 사회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1072년 송나라에 넘어간 일본인 승려 성심의 기행문인 '삼천대오대산기'에 따르면 당시 고려인(신라인)들이 초주 일대에서 운송업에 종사하며 일본인 승려의 통역과 여행에 관한 일들을 주선해 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