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티에르


Adolphe Thiers
1797년 4월 15일 ~ 1877년 9월 3일

1 개요

프랑스정치인이자 역사가, 언론인. 보불전쟁 막바지에 강화교섭을 진행하였으며 직후 성립된 프랑스 제3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청년기

프로방스 지역에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법학을 전공했다. 대학교 졸업 이후 변호사로 등록했지만 정작 주전공인 법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고, 문학/역사/언론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26살이었던 1823년에는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역사서를 출간했고, 이것이 제대로 대박을 쳐서 1834년에는 프랑스 아카데미(Académie française)에 들어가게 된다.[1]

2.2 초기 정치 경력

티에르는 7월 혁명 과정에서 샤를 10세 축출에 상당한 공을 세웠고[2] 7월 왕정에도 참가하기 시작한다. 1832년 내무부 장관으로 시작하여 외무부 장관, 무역부 장관, 의회 의장과 같은 요직을 두루 거쳤고 1840년에는 세인트헬레나에 매장된 나폴레옹의 유해를 프랑스 본토로 이장시키는 일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직후 당시 내란이 한창이던 스페인 개입 문제[3]를 놓고 국왕 루이 필리프 1세와 충돌을 빚은 끝에[4] 모든 관직에서 사퇴하고 역사서 저술에 몰두한다.

1848년 혁명 당시 루이 필리프는 티에르에게 다시 수상직에 오를 것을 권유했지만, 이미 대세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한 티에르는 이를 거부하고 혁명 세력에 참여한다. 새로 수립된 프랑스 제2공화국 초대 대선에서는 루이 나폴레옹을 뽑았으며 두고두고 까인다. 루이 나폴레옹의 친위 쿠데타에 의해 공화국이 붕괴되고 프랑스 제2제국이 수립된 후로는 의원직만 가진 채로 별로 두드러진 정치 활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폴레옹이 아직 대통령이던 시절에 깠다가 쿠데타 직후 코렁탕 먹었었거든. 조용히 칩거하면서 티에르는 그 당시로는 엄청난 고령이었던 70대에 접어들었고, 그렇게 사라져가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2.3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

엠스 전보 사건에서 보불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티에르는 전쟁을 반대한다. 하지만 프랑스 내 다수의 반응은 전쟁을 원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여론에 휩쓸린 나폴레옹 3세는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프로이센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제대로 박살난다.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힌 직후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제2제국은 붕괴된다. 전쟁을 반대한 선견지명을 보여준 덕분에 티에르의 정치적 위상은 급상승했고 임시 정부는 그에게 입각할 것을 제의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항전을 결의한 임시 정부와 달리 티에르는 조기 강화협상을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입각을 고사한다.[5] 그 대신 임시정부는 그에게 외교 특사를 맡겨서 영국,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러시아 등의 개입을 이끌어보려고 했지만 프로이센에는 당대 최고의 외교 천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있었고, 비스마르크가 전쟁 이전에 이미 다 손을 써놨던 탓에 여타 열강들의 개입은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1871년 2월에 접어들면서 임시정부는 항복을 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고, 티에르는 임시정부의 수장 겸 협상단 대표로 강화교섭을 진행한다. 하지만 1871년 3월 굴욕적인 강화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나고[6][7] 일시적으로 밀린 티에르와 임시정부는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긴다. 한편 파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정부가 수립되니, 이것이 바로 파리 코뮌. 파리 코뮌과 임시정부 간의 대치는 5월까지 이어졌지만 결국은 프로이센군의 지원을 받은 티에르의 임시정부가 코뮌을 붕괴시키는데 성공한다.

2.4 이후

코뮌을 진압한 이후 프랑스에는 공식적으로 공화정이 수립됐고, 티에르는 새 공화정의 대통령직에 오른다. 티에르에게는 보불전쟁의 상흔을 지우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고, 티에르의 노련한 경제 운영 덕분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은 프랑스 국민들의 애국페이와 더불어서 재빠르게 지불된다. 하지만 보불전쟁에서 제대로 개쪽을 당한 군대를 재편하기 위해 도입한 징병제[8]는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여기에 왕당파들과의 헤게모니 싸움에 밀리면서 티에르는 1873년 사임하게 된다. 사실 정말 사임할 의사는 없고, 의회를 협박할 심산으로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의회가 낼름 승인해버렸다. 이후에도 티에르는 보수계열 공화주의자들의 막후 보스로 활동하다가 1877년 사망한다. 여담이지만 파리 코뮌을 진압했던 탓에 공산주의자들에게 티에르는 천하의 개쌍놈이었고 사후 15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무덤은 종종 좌파들에게 반달당하곤 한다.

이후 나폴레옹 3세를 조졌던 독일 제국에선 보나파르트 제정 복고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비스마르크의 반대파인 주불 독일 대사인 해리 폰 아르님 백작. 빌헬름 황제도 이에 지지를 표명했지만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공화국이어야 군주국들의 대불 동맹이 유지될 수 있다고 프랑스 공화국의 유지를 강행하려 했고 이에 반발한 아르님 백작이 티에르 정부는 곧 공산주의자들이나 군부 독재로 대체될 것이 뻔하니 독일에서 쿠데타를 사주하여 왕정을 복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결국 대사건으로 번지게 된다.
  1. 그러나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티에르의 저작을 제대로 된 저작물로 쳐 주지 않는다.
  2. 역사가로 얻은 명성이 언론인으로써 대중에 호소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3. 이 당시 스페인은 이사벨 2세와 이사벨 2세의 외삼촌이었던 카를로스 대공 사이의 왕위계승전쟁이 한창이었다. 카를로스 대공의 이름을 따 보통 카를리스타 전쟁이라고 많이 불리는 편.
  4. 티에르는 스페인에 개입할 것을 원했지만 평화주의자였던 루이 필리프는 개입을 꺼려했다.
  5. 그리고 굴욕적인 종전 이후 '티에르가 하자는 대로 일찍 강화했으면 이런 개쪽은 안당했을거 아니냐'라는 여론이 대두되면서 티에르는 패전에 대한 비난여론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사실 독일군이 파리 시내에서 하루종일 승전 퍼레이드를 펼치는 것을 허락해서 미친듯이 까이긴 했다. 단지 패전이 티에르의 채임으로 안돌아갔을 뿐이지.
  6. 파리 시내에 설치된 모든 대포를 철거할 것을 비스마르크가 요구했다.
  7. 그 당시 티에르를 두고 많은 프랑스인들이 매국노라고 깠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던만큼 티에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리고 당시 시대 분위기 상 티에르 역시 민족주의자였고, 비스마르크와 강화교섭을 끝내고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엉엉 울었다고 전해진다.
  8. 복무기간이 무려 5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