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왕정

프랑스의 역사
Histoire de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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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 중세앙시앵 레짐프랑스 근대 정부 체제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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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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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민의 왕국
Royaume des França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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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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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 1848년
국가파리의 노래
위치오늘날의 프랑스
수도파리
정치체제입헌군주제
국가원수국왕
언어프랑스어
종교가톨릭
주요사건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으로 타도
통화프랑
성립 이전부르봉 왕정복고
멸망 이후프랑스 제2공화국

1 개요

1830년 7월 혁명으로 부르봉 왕조를 타도하고 루이 필리프 1세를 왕으로 세운 입헌군주제 왕정이다. 1848년에 2월 혁명으로 붕괴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신설된다.

2 역사

열렬한 왕권신수론자였던 샤를 10세는 의회의 폐지 및 언론 통제등을 시도하였고, 이에 프랑스 전역에서는 부르봉 왕가에 대한 반감이 커져만 갔다. 이러한 와중에 1830년 5월 하원의원의 선출을 위한 총선이 있었고, 자유주의자들이 대승을 거둔다. 샤를 10세는 의회를 해산시키려고 했지만, 이는 이미 부르봉 왕가에 대한 반감이 커져있던 상황에서 기름에 불을 끼얹는 꼴밖에 되지 않았고, 언론인과 지식인 등의 부르주아 계층과 함께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위는 곧 무장봉기로 확산됐고, 파리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진다. 결국 샤를 10세는 폐위되고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가 시민들의 왕으로 오르면서 7월 왕정이 열리게 된다.

7월 왕정의 문을 연 7월 혁명은 부르주아 계층이 주도한 부르주아 혁명이었고, 그에 따라 상위 부르주아(haute bourgeoisie)라고 불리는 금융자본업자들이 정국을 주도하였다.[1] 이에 시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노동자 계층들의 불만은 커져가면서 투표권 확대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해서 일어났고, 이러한 시위세력은 당시 새로운 사상인 아나키즘공산주의와 결부되어 왕정 자체를 위협하는 움직임으로 번져나가게 된다. 이에 루이 필리프 1세는 결사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과 같은 강경대응을 하지만 점점 더 높아져가는 투표권 확대의 목소리를 억누르기에는 부족했다. 1848년 2월 22일 수도 파리에서는 투표권 확대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예정되어있었다. 정부가 이 시위를 원천봉쇄하려고 시도하자 7월 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2월 혁명이 발발한 것. 그렇지만 7월 혁명과의 차이가 있다면 7월 혁명 당시에는 군주제 자체는 유지하되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려고 했지만 이번 혁명에서는 아예 군주제를 철폐하고 공화정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목표였다는 점이다. 결국 루이 필리프는 왕위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고, 알퐁스 드 라마르틴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주의자들이 프랑스 제2공화국을 수립한다.

3 사회

은행가·자본가들의 지배하였던 사회구조였던만큼, 전반적으로 농민·노동자들은 권력의 중심에서 비켜나있었다. 당연히 국가의 주요정책들도 부르주아들에게 유리하게 수립되어서 파리는 런던과 함께 유럽 금융 시장의 중심 무대가 되었고 전국적으로 철도 건설을 비롯한 각종 토목사업이 활발히 진행됐다. 한편 나폴레옹 시기에 이미 시작됐던 산업혁명은 7월 왕정 시기에 본격적으로 가속도가 붙었지만 영국이나, 후일 독일제국의 발전도에 비하면 심히 미약한 수준이었다.[2] 기본적으로 자본이 영국의 투자에 많이 의존하는 형태였고, 2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각종 중공업 및 화학공업의 발전은 안습 수준이었다. 산업혁명이 발발한 후에도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농업이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농업중심국가였고, 이는 이후 역사에서 두고두고 프랑스의 발목을 잡게 된다.[3] 산업혁명 초기의 모든 국가들이 그렇듯이 자유방임주의와 결부돼 노동자들의 작업조건은 최악이었고, 이에 노동자들은 불만을 품고 대규모 시위[4]를 일으켰지만 정부에서는 무력까지 동원하면서 강경하게 이들을 찍어눌렀다. 이에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공산당이 탄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상을 대표하는 사상가가 바로 조세프 프루동.

또한 인쇄술을 바탕으로 언론과 출판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프랑스 문학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오노레 드 발자크, 빅토르 위고와 같이 프랑스가 자랑하는 대문호들이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 이 시기이며 유럽 전역을 휩쓴 낭만주의 사조와 결합되어 시, 미술, 음악 등에서도 많은 예술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다.
  1.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때도 선거권은 납세액을 기준으로 일부 시민들에게만 주어졌다.
  2. 여담이지만 그래서 영국이나 독일에서 부르주아라고 하면 보통 산업 자본가 계층을 일컫는 데 반해서 프랑스의 부르주아는 금융 자본 계층이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3. 1,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프랑스가 독일에게 전력상으로 밀렸던 원인 중의 하나가 이렇게 뒤쳐진 산업구조였다. 물론 시대에 뒤쳐진 전술탓이 더 크긴 했지만
  4. 1831년 임금인상과 작업환경 개선을 요구하면서 리옹에서 방직업 노동자들이 일으킨 시위는 세계 역사상 최초의 파업으로 기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