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2세

Isabel II

통일 스페인의 역대 국왕
페르난도 7세이사벨 2세아마데오 1세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 2세와 마리아 이사벨 공주,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 1852년
왕호스페인의 여왕 이사벨 2세
(Isabel II Reina de España)
이름마리아 이사벨 루이사 (María Isabel Luisa)
생몰년도1830년 10월 10일 ~ 1904년 4월 10일 (73세)
출생지스페인 마드리드
사망지프랑스 파리
재위기간1833년 9월 29일 ~ 1868년 9월 30일 (35년 1일)
퇴위1870년 6월 25일

스페인 역사상 이사벨 1세후아나에 이은 세 번째 여왕이자,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유일한 여왕이다.

1 칭호

이사벨 2세의 칭호는 스페인이 입헌군주제로 이행한 1837년을 기점으로 달라진다. 1837년 이전의 칭호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양 시칠리아, 예루살렘, 나바라, 그라나다, 톨레도, 발렌시아, 갈리시아, 마요르카, 세비야, 사르데냐, 코르도바, 코르시카, 무르시아, 메노르카, 하엔, 알가르브, 알헤시라스, 지브롤터, 카나리아 제도, 동서인도, 대양의 제도 및 육지의 여왕, 오스트리아 여대공, 부르고뉴, 브라반트 및 밀라노의 여공작, 합스부르크, 플랑드르, 티롤과 바르셀로나의 여백작, 비스케이 및 몰리나의 영주 등등 이신 이사벨 2세(Doña Isabel II por la Gracia de Dios, Reina de Castilla, de León, de Aragón, de las Dos Sicilias, de Jerusalén, de Navarra, de Granada, de Toledo, de Valencia, de Galicia, de Mallorca, de Sevilla, de Cerdeña, de Córdoba, de Córcega, de Murcia, de Menorca, de Jaén, de los Algarbes, de Algeciras, de Gibraltar, de las Islas Canarias, de las Indias Orientales y Occidentales, Islas y Tierra firme del mar Océano; Archiduquesa de Austria; Duquesa de Borgoña, de Brabante y de Milán; Condesa de Aspurg, Flandes, Tirol y Barcelona; Señora de Vizcaya y de Molina &c. &c.)'

그리고 입헌군주제가 시행된 1837년 이후의 칭호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의 은총과 스페인 군주국 헌법에 따르는 제(諸)스페인의 여왕이신 이사벨 2세(Doña Isabel II, por la gracia de Dios y la Constitución de la Monarquía española, Reina de las Españas)'

2 생애

2.1 3살에 여왕이 되다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와 그의 조카딸이자 네 번째 아내인 양 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장녀. 1830년 10월 10일에 태어났다.
1833년 9월 29일 아버지 페르난도 7세가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3살배기 아기였던 이사벨이 스페인의 여왕으로 즉위하고 모후인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섭정이 되었다.

페르난도 7세는 3번의 결혼에서 자식을 두지 못했다. 4번째 아내인 마리아가 드디어 임신하자, 만약 딸이 태어나더라도 무조건 자신의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1830년 3월에 살리카법을 폐기하고 이전의 왕위계승법을 부활시켜 여성도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사전 준비를 마쳤다. 몇 개월 뒤 장녀 이사벨이 태어났고, 1832년에 차녀 루이사가 태어났다.

2.2 카를로스 전쟁

포르투갈 내전스핀오프[1]

어린 이사벨이 즉위하자, 페르난도 7세의 남동생인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가 조카딸의 즉위는 무효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살리카법대로라면 자신에게 왕위계승권이 있기 때문. 카를로스는 '카를로스 5세'를 자칭하며 자기가 스페인의 국왕이라 선언했고, 이로 인해 스페인은 '카를로스 전쟁'이라 불리는 7년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카를로스를 지지하는 세력은 기존의 기득권층인 교회귀족이 중심인 보수파였고, 이사벨 2세를 지지하는 세력은 의회의 주요 정당들이 중심인 진보파였는데 이는 여왕의 즉위가 페르난도 7세의 반동 전제군주정을 몰아내고 입헌주의에 근거한 의회정부를 재건할 호기로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내전 초기에는 반군이 승리할 것처럼 보였으나 의회가 교회의 재산을 국고로 몰수하는 강경책을 써서 카를로스파의 돈줄을 끊고, 정부군의 활약과 반군의 내분 등으로 1839년 이사벨 2세의 여왕 즉위가 확고하게 굳어졌다.

참고로 카를로스파는 계속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이후에도 두 차례에 걸쳐 전쟁을 일으켰지만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집권한 후 차기 스페인 왕위를 여왕의 현손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잇도록 함으로써 한 세기 넘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2]

2.3 불안정한 치세

어린 여왕은 어렵사리 왕위를 지켰지만 카를로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40년 진보당을 이끄는 발도메로 에스페르테로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여왕의 모후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섭정 자리에서 물러나 망명했고, 에스페르테로가 대신 섭정이 되어 급진주의 정책을 펴다가 3년 뒤인 1843년 마리아 크리스티나파 장군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실각하고 말았다. 새로 구성된 내각은 의회가 섭정을 두지 않고 여왕이 친정하는 것을 인정하도록 했는데, 이때 여왕은 13세였다.

친정은 1868년까지 25년간 계속되었지만 그동안 장군들이나 정파들이 서로 대립하는 와중에 쿠데타가 계속되고 집권당이 교체되는 등 정국은 매우 불안정했다. 하다못해 이런 와중에 이사벨 2세가 구심점 역할이라도 제대로 했으면 조금이라도 나았겠지만, 여왕은 일관성 없는 태도로 정치에 개입해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양쪽을 오가며 보수반동 정치를 해 국민의 평판이 바닥을 쳤다.

여왕의 치세 중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으로는 나폴레옹 3세와 연합해 멕시코 제국을 지지한 것과 1859년 모로코와의 전쟁으로 영토 일부를 확보한 것, 멕시코쿠바를 둘러싼 미국과의 관계 악화 등이 있다.

이사벨 2세의 재위기간 35년 동안 6개의 헌법, 41개의 내각, 15번의 군대 봉기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종합하면 내치는 실패하고 외치는 불안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4 망명과 퇴위, 사망

이러한 여왕의 무능력함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스페인 각지에서 반란이 잇따랐고, 마침내 1868년 프란시스코 세라노 장군과 후안 프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군이 항복하자 같은 해 9월 30일 여왕은 프랑스로 망명해 이를 9월 혁명이라 한다.

망명은 했지만 왕위는 포기하지 않았던 이사벨 2세는 1870년 6월 25일 망명지 파리에서 왕세자 알폰소 12세에게 양위했는데, 스페인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사보이 왕가의 아마데오 1세를 옹립했다. 1874년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알폰소 12세가 즉위하자 이사벨 2세는 수도 마드리드로 귀환하기도 했으나 정신 못차리고 다시금 정치에 개입하려하자 또다시 스페인 국외로 쫓겨나 프랑스에서 살다가 1904년 4월 10일 파리에서 사망했고, 유해는 스페인의 엘 에스코리알 궁전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

1846년 10월 10일 여왕의 친가쪽과 외가쪽 모두 사촌 관계가 되는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와 결혼해 슬하에 12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유아 때 사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은 알폰소 12세를 포함한 1남 3녀 뿐이었다.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1822년 5월 13일~1902년 4월 17일)

여왕의 혼담이 오갈 때 각국 왕실에서는 저마다 배우자감을 추천해 국익을 도모하려 했는데, 영국빅토리아 여왕은 코부르크 가문[3]의 사람을 내세웠고 프랑스루이 필리프 1세는 자기 아들[4][5][6] 내세워 서로 기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이사벨 2세는 정치적인 이유로 사촌인 프란시스코와 결혼했는데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인지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고, 일각에서는 프란시스코가 성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그런데 이에 대해선, 프란시스코도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어서 살리카법으로도 프란시스코와 이사벨의 남자 후손은 계승권을 갖게 되니, 일부러 이사벨 2세의 자식이 프란시스코의 자식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카를로스파가 일부러 프란시스코에게 문제가 있다는 소문을 의도적으로 조장했다는 말이 있다.
  1. 농담이 아니라 전쟁의 명분은 둘다 왕위 계승 문제였고, 실질적인 이유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충돌이었으니...
  2. 사실 카를로스파의 직계는 남계후손이 끊기면서 1936년에 단절되었다. 살리카법으로 따지면 다음 계승자는 카를로스의 동생인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와 이사벨 2세의 손자인 알폰소 13세인데, 이렇게 되면 카를로스파 입장에서는 이사벨 2세의 후손을 인정하는 꼴이 돼버리므로 카를로스파는 부르봉-파르마계에서 후손을 추대했으나 스페인 사람들은 아마데오 1세의 병크 이후 이탈리아 출신 왕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3. 부군인 앨버트 공의 가문.
  4. 대략 14촌이다. 루이 필리프 1세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의 5세손이고 그 아들은 6세손인데(루이 13세의 7세손), 이사벨 2세는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5세의 고손녀(즉 루이 13세 기준으로 7세손)니 서로 항렬은 같다. 여담이지만 같은 항렬로는 이들 외에 루이 17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루이 19세가 있는데 나이차가 45~55세(...)이다.
  5. 근데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인해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왕은 프랑스 부르봉의 왕을 역임할 수 없다. 루이 14세, 펠리페 5세참고
  6. 사실 이러한 이유가 있는데 1830년에 7월 혁명으로 부르봉 왕가의 샤를 10세와 쥘 드 폴리냐크를 위시한 극우왕당파가 물러나고 루이 필리프와 빅토르 드 브로이 공작(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의 증조할아버지)을 위시한 오를레앙파가 정권을 잡았지만 귀족은 이후 샤를 10세를 추종하는 극우왕당파와 루이 필리프를 추종하는 오를레앙파로 나뉘어졌다. 이 와중에 극우 왕당파가 앞서 언급한 카를리스타들과 같은 정치적 입장(친카톨릭, 보수반동)으로 손을 잡자 루이 필리프는 먼 친척이자 민주주의라는 면에서 비슷했던 이사벨 2세와 손을 잡아 샤를 10세와 쥘 드 폴리냐크, 장 밥티스트 드 빌레를 위시한 극우 왕당파를 막으려 한 것이다. 사실 루이 필리프 정권 보면 알겠지만 정통성 면에서는 샤를 10세의 아들인 앙굴렘 공작과 손자인 보르도 공작이 살아있었고 귀족의 반이 이들을 추종했기 때문에 상당히 위태로웠다. 루이 필리프 1세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