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살리에리

Antonio Salieri

1 개요

x250pxx250px
초상화영화 아마데우스에서의 살리에리

1750년 8월 18일 이탈리아 레가노 출생, 1825년 5월 7일 에서 사망.

이탈리아작곡가, 지휘자.
그리고 수많은 대음악가들의 은사(恩師)

아버지가 상인인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형에게서 쳄발로와 바이올린 등을 배웠는데 음악적 재능에 상당한 두각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읜 뒤 가세가 몰락했는지 이탈리아 곳곳을 옮겨다니며 살다[1] 1766년 당시 베네치아에서 만난 빈의 궁정작곡가 플로리안 가스만(Florian Leopold Gassmann, 1729 ~ 1774)의 후원을 받아 빈 궁정으로 진출하였다.

1774년 궁정작곡가, 1788년 궁정악장 테크를 거쳐 당시 음악계의 정점에 선 인물이었으며,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같은 동시대 작곡가들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은 물론이고 제자 양성에도 힘쓴 음악 교육자였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프란츠 리스트, 카를 체르니, 요한 네포무크 후멜, 지아코모 마이어베어 등의 저명한 음악가들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프란츠 자버 쥐스마이어와 모차르트의 아들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간 제자들이다. 게다가 대다수의 후배 무명 음악가들의 주머니 사정을 뻔히 알던 살리에리는 무료로 교습을 해줬다고 한다. 물론 유복한 음악가가 내는 돈은 굳이 사양하지 않고 받았으나, 당시 음악계의 정점에 서있는 인물이 큰 열의를 보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살리에리는 죽기 1년 전까지 궁정악장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런 성공이 바탕이 되어 위에서 언급되었듯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냈으며, 생활이 힘든 제자들을 지원하는 등 자선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실직한 음악가나 사망한 음악가의 유족을 위해 상조회를 조직하였고, 자선 콘서트를 매년 개최하는 대인배였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권에서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인이기 때문에 독일어는 죽을 때까지 유창하게 말할 수 없었다고.(...)

그가 작곡한 것들은 오페라와 종교음악이 많아, 기악곡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특히 오페라는 실패한 경우가 거의 없으며, 빈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오페라보다 살리에리의 오페라를 더 좋아했다고.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들어보자. [1]
결코 나쁘지 않다! 적어도 이 한 곡만 듣고서 판단하기에는 모차르트한테 꿀릴 게 없다. 다만 생애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평가하자면 클래식계의 사기캐인 모차르트와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 때문에 후대에는 아래에서 서술하는 바와 같이 모차르트를 질투한 2인자로 알려지게 된다.

2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하지만 그 무엇보다 살리에리의 이름을 퍼뜨리게 만든 건 바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의 대립. 모차르트가 죽은 뒤 그의 작품을 베껴썼다든지 그를 독살했다는 누명을 썼으며, 모차르트 본인이 "자신이 빈에서 출세하지 못하는 건 살리에리가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모차르트가 살리에리를 지나치게 경계한 탓도 있다. 물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 후기의 작곡 활동에 인색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모차르트가 빈의 메인으로 쉽게 진출할 수 없었던 것에는 좀 더 복잡한 이유가 있었다.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황제 요제프 2세가 죽고, 후임자 황제 레오폴트 2세는 그를 별로 대단치 않게 여겼던 것이다. 게다가 모차르트는 대주교 히에로니무스 폰 콜로레도에게 개겼(...)다가 해고된 전적이 있어 종교계에서도 그렇게 고운 눈으로 보이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모차르트는 궁정작곡가 자리를 스스로 박차고 뛰쳐나온 프리랜서.[2] 이런 정도니 살리에리가 그를 좋게 볼 리 없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누구와도 융화되지 않으려는 주제에 위로 올라가려는 건방진 모차르트를 싫어한 것은 살리에리 혼자가 아니었다. 베토벤의 제자인 이그나츠 모셀레스(Ignaz Moscheles,1794~1870)가 1823년 11월 일제포르슈타트 병원에 입원한 살리에리를 찾아가서 들은 바는 이렇다.[3]

나는 분명히 그를 싫어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가 싫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나만 그를 싫어했던 것[4]은 아니다. 그리고 내 뜻으로 그를 죽게 만든 건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그를 죽였다는 오명은 나에게 전혀 반갑지 않다.

 
모셀레스의 이 말을 들은 베토벤은 자신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두 사람에게서 모두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 없지만 살리에리의 말은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게다가 살리에리가 정말로 모차르트를 죽일 정도로 싫어했다면 모차르트의 아들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에게 흔쾌히 음악을 가르쳤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모차르트의 시신을 살펴본 의사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소식에 도리어 불쾌해하며 "아니 그럼 내가 틀렸단 말야? 모차르트는 틀림없는 자연사다. 그의 시체에 독살의 흔적은 없었다고!"라고 반문했다고(...). 모차르트의 시신의 행방을 모르기 때문에 진실을 밝혀낼 수는 없지만, 살리에리 외에도 누명을 쓰고 있는 사람은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나 주치의사 등이 있다.

그리고 2015년 11월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공동으로 작곡한 곡의 악보가 프라하에서 발견되어 2016년 2월 연주회를 가졌다. [5]

3 창작물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살리에리가 검은 망토의 남자로 분장하여 모차르트를 찾아가 계속 레퀴엠 작곡을 재촉하는 바람에 모차르트가 죽었다고, 자신이 모차르트[6]를 죽게 만들었다고 고백하는데, 모차르트 입장에서는 틀리지 않은 묘사다. 다만 진실은 검은 망토의 남자가 살리에리가 아니라 곡을 비밀리에 의뢰한 발제크 백작의 하인이었다는 것이 좀 다를 뿐이다.[7]참조로 더빙판 성우는 양지운(MBC)/이완호(KBS).[8]

이를 한 2차 창작물로는 알렉산드르 푸시킨(1830년) 및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1898년)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피터 셰퍼의 희곡이 원작인 아마데우스, 뮤지컬 모차르트 오페라 락 등이 있다. 여기에서 살리에리의 포지션은 당연히 모차르트에게 열폭하는 비운의 2인자 역할. 지못미. 하지만 모차르트가 신에게 재능을 부여받은 것으로 보일 만큼 엄청난 재능을 가진 자로 묘사되기에 인간의 그릇으로 그것을 뛰어넘으려고 노력하다 벽에 부딪히는 모습에 동정표를 얻기도 한다. 근데 정작 살리에리 본인은 자기가 천재적인 귀명창인건 깨닫지 못한다.

위 창작물들 때문에 많은 대중들에게는 살리에리가 영원한 2인자, 콩라인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있기도 하다.

2014년과 2016년에는 아예 그를 타이틀 롤로 내세운 한국 창작 뮤지컬 살리에르(뮤지컬)가 공연. 그런데 초연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바로 옆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그것도 거의 같은 기간모차르트!가 공연했다?! [9]
  1. 정확히 말하자면 살리에리 본인에게는 유산이 상속되지 않았던 듯 싶다. 형들이 그를 돌봐주거나 아니면 아버지의 친구의 집에서 지냈다고 한다.
  2. 모차르트는 세계 최초의 프리랜서 음악가라고도 한다. 그래서 베토벤이 무리 없이 뒤이어 프리랜서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차르트가 박차고 나온 게 잘한 것도 아닌 것이, 그는 궁정에서 허구헌날 불만을 토하여 궁내상서를 분노하게 했기에 안 나오려고 해도 잘릴 가능성도 컸다. 유명한 사례로 이전 궁정음악가가 연봉을 2000굴덴 이상을 받는데 난 800굴덴밖에 못 받나...투덜거리던 일이 있었는데, 전임 음악가가 30년 가까이를 궁정음악가로 묵묵하게 일하면서 올려받은 액수를 한번에 달라고 하니... 더불어 800굴덴은 당시 오스트리아 공무원 상위급 연봉이었으니 이 돈이 적은 게 아니다.
  3. 여러번 거절당해서 많은 설득 끝에 살리에리의 딸과 담당의사를 통하여 흥분시키지 않도록 주의하며 이야기할 것을 허락받았다.
  4. 모차르트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오스트리아 황궁 궁내상서(궁궐 담당 장관)가 "자네 성격 좀 고치게. 자넬 죽일 정도로 미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걸세" 라고 말하자 모차르트는 30살 이상 나이차도 있는 상서직의 고위 대신 앞에서 코웃음치며 "고칠 게 뭐 있습니까?!" 라는 말만 남기고 나가 버렸다. 궁내상서가 그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5. [2]
  6. 더빙판 성우는 배한성. 최고의 명연기를 보여주었다.
  7. 영화의 원작인 희곡 초판에서는 발제크 백작의 의뢰로 처음엔 하인에게 검은 망토를 입혀 레퀴엠 의뢰를 보냈다가 양심상 도저히 못 하겠다는 하인 때문에 스스로 가면을 쓰고 모차르트에게 찾아가 곡을 독촉한다. 많이 개정된 현재의 판에서는 모차르트가 당시 그가 유일하게 신용하고 의지하던 살리에리에게 '자꾸 검은 망토의 사내가 자신에게 레퀴엠을 재촉한다'고 말하자, 내심 '이게 뭔 개소리야?' 하면서도 모차르트에게 최후의 일격 삼아 즉흥적으로 '사실 그거 나야'라고 답한다. 나중에서야 검은 망토의 사나이가 실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8.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살리에리 본인이 '평범한 사람들의 대변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위에서 본 것처럼 살리에리를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당대 최고의 인기작곡가 중 하나이면서 궁정악장이기도 했고 그에게서 배운 수많은 제자 작곡가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음악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2인자의 비애를 느꼈을 수는 있겠지만 당대에 인기도 없었고 후대에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정말 평범했던 수많은 무명 작곡가들에 비교하면 살리에리는 이미 엄청난 커리어를 가진 대작곡가라 할 것이다.
  9. 폐막은 모차르트가 더 일찍 했다. 실제 인물들이랑 데자뷰 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