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든의 초상화, 토마스 하디 작(1792년) |
목차
1 개요
Franz Joseph Haydn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1732년 3월 31일 ~ 1809년 5월 31일
음악계의 거장 중 한명
모차르트, 베토벤에 가린 서양 음악사 최고의 음악가 중 한 명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교향곡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인물이긴 한데, 교향곡 작곡가들은 하이든 이전에도 있었고, 교향곡의 기원이 이탈리아 오페라의 서곡이었다는 것은 웬만한 음악사 서적들에도 다 나오는 공인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게 교향곡의 기원이 아니라 방식의 정립이라면 하이든이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다.[1] 이렇게 된 것은 금난새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2 생애
현재는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의 시골 마을이자 헝가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로라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향곡의 할아버지 차바퀴 제작자였고, 어머니는 귀족 저택에서 일하던 키친메이드 출신이었다. 양친 모두 음악을 생업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경우 민속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스스로 하프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들이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한 부모는, 로라우의 북동부에 있는 하인부르크라는 소도시에서 재직하던 음악 교사에게 하이든을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불과 여섯 살 때의 일이었는데, 말이 음악 교육이었지 실제로는 교사 밑에서 빨래 등 집안 일까지 떠맡아야 하는 더부살이 신세였다. 어쨌든 그곳에서 성악과 바이올린, 하프시코드 연주법을 배웠고, 하인부르크 성당의 성가대에 보이 소프라노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때 교회 관계자가 그의 실력에 감탄해, 아버지에게 "아드님 목소리가 고우신데 카스트라토로 만드시는 게 어떨까요?" 라고 했었다. 아버지가 거절하지 않았다면 그는...
성가대에서 활동하던 중 하인부르크에 우연히 들른 게오르크 폰 로이터라는 음악가가 하이든의 재능을 알아보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빈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인 장크트 슈테판 성당의 음악 감독이었다. 로이터는 하이든에게 오디션을 볼 것을 제안했고, 여기에 합격한 뒤 1740년에 빈으로 이주했다.
하인부르크에서와 마찬가지로 빈에서도 로이터의 집에 얹혀 살면서 계속 음악을 공부했는데, 1745년에는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 [3] 도 장크트 슈테판 성당의 성가대원이 되면서 합류했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의 총애를 받아서 쇤브룬 궁전에 몇차례 초대받기도 했다. 한번은 궁전 내의 공사 중인 건물에서 위험한 장난을 치다가 테레지아에게 걸려서 벌로 매를 맞기도 했다고.
그러나 로이터도 이전의 선생처럼 하이든 형제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고, 1749년에 성장으로 인한 변성기가 찾아오면서 성가대에서 어쩔 수 없이 퇴단해야 했다. 로이터의 집에서도 나와야 했고, 한동안 기본적인 의식주도 형편없는 상태에서 악전고투해야 했다.
1752년에는 당시 꽤 유명한 이탈리아 작곡가였던 니콜라 포르포라에게 잠깐 수업을 받았는데, 이것이 하이든이 받은 첫 본격적인 작곡 수업이었다. 이미 작곡가로 입신할 뜻을 굳혔는지, 이후에도 유명한 대위법 교재인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 이라든가 초기 고전주의 작품들의 악보를 사보해 연구하는 등 이론 기반을 강화하면서 오페라 등의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재정 형편은 현시창이었고, 하이든도 동시대의 많은 음악가들처럼 귀족 집안의 전속 음악가가 되기 위해 이곳저곳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 노력은 점차 성과를 얻었고, 툰 백작부인이나 퓌른베르크 남작 집안의 비상근 작곡가 겸 음악 교사로 일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퓌른베르크 남작은 하이든을 마음에 들어했는지, 1757년에 모르친 백작 집안에 악장(카펠마이스터, Kapellmeister)으로 취직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모르친 백작 집안에서 하이든은 처음으로 안정된 전속 직책을 얻게 되었고, 이 시기에 교향곡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1760년에 들어 모르친 백작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자, 이듬해에 헝가리계 귀족 집안인 에스테르하지[4] 가문으로 옮겨 부악장 자격으로 활동했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당시 공작 작위를 보유하고 있던 유력 귀족 세력이었고, 당시 기준으로 꽤 높은 수준의 악단도 고용하고 있었다.
하이든은 이 집안에서 거의 30년 가까이 봉직했고, 열성적인 아마추어 음악인들이었던 파울 안톤과 니콜라우스 두 공작들을 위해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수백 편의 작품을 작곡했다. 사실상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묶여 있던 신세였음에도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에도 명성이 퍼지기 시작했고, 1780년대 중반 쯤에는 모차르트와도 친교를 나누며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1790년에 니콜라우스 공작이 타계하면서 고용주도 그의 아들로 바뀌었는데, 아들은 전임자들과 달리 음악에는 별 관심이 없는데다 니콜라우스 공작이 지나치게 음악에 돈을 쓴 나머지 재정에 무리가 갈 정도여서 음악에 대한 투자를 줄이기로 했다. 결국 하이든에게 상당한 액수의 퇴직금을 주고 계약을 해지했다. 프리랜서가 된 뒤에는 런던에서 활동하던 공연 기획자인 요한 페터 잘로몬의 의뢰로 영국을 두 차례 방문했고, 12곡의 '런던 교향곡집' 등을 비롯한 후기의 대표작들을 작곡했다.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을 제자로 받기도 했는데, 서로 궁합이 잘 안맞았는지 미적지근한 관계로 끝났다. 이에 대해 자세한 것은 베토벤 항목을 참조.
런던에서 큰 성공을 거둔 뒤 1795년에는 다시 빈으로 돌아왔고, 도시 근교의 굼펜도르프라는 마을에 커다란 저택을 가질 정도의 거물급 인사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로 미사곡을 비롯한 종교음악에 전념했고, 예전의 고용주였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위해서도 작품을 써주었다. 종교음악 외에는 트럼펫 협주곡과 현악 4중주를 비롯한 후반기의 걸작 기악곡들도 남겼다.
그러나 칠십 줄을 넘긴 1802년부터 건강이 영 좋지 않게 되었고, 작곡도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다. 1809년에 나폴레옹이 빈을 침공하던 때에 타계했고, 유해는 집 근처의 묘지에 매장되었다가 1820년에 이전 고용주였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아이젠슈타트 저택 근처의 베르크 교회에 이장했다.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3 사후의 시련
1809년에 하이든이 세상을 떠나자 유족들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루고 그의 유언대로 유해를 교회가 아닌 일반 묘지, 즉 가문의 묘에에 안장시킨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는데 하이든의 무덤이 파헤졌고 게다가 그의 머리가 온데간데 없어진 것이다. 이에 유족들은 오스트리아 왕국으로부터 유해의 머리를 찾아달라는 요청을 정부에 보냈고 필사적으로 찾기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의 머리를 찾는데 필요한 단서와 현장의 목격자도 한명도 없어 전혀 진전이 없었다.
나중에 왜 무덤이 파헤쳐졌는지 그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는데, 오스트리아 귀족 중 1명이 음악의 천재적 재능을 가졌던 하이든의 뇌를 조사하고 싶어 유태인인 피터와 로젠바움에게 부탁해서 파헤쳐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문제가 발생는데 피터와 로젠바움은 하이든 머리를 더욱 비싼 값에 팔기위해 다른 노인의 시체의 머리를 꺼내 귀족에게 넘겨준 것이다. 물론 피터와 로젠바움은 더 비싼 값을 받고 하이든의 머리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겨버린다. 당시의 하이든 머리의 부패상태를 생각해보면 가능한 일이었다.
나중에서야 자신이 속았다는것을 알아차린 그 귀족은 분노했으며 그들을 즉시 붙잡아 조사했으나 이미 하이든의 머리는 익명의 사람에게 팔렸고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수소문하였지만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이후 100여년이 넘도록 하이든의 머리는 유럽전역에 팔려나가는 수모를 겪는다.
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이든의 후손들은 생전에 그의 머리를 찾기위해 노력하였고 자신이 사망할 때는 후손에게 반드시 조상의 머리를 찾아야한다는 유언을 대대로 남기고 있었다.
한편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번사태에 대해서 "이 사건은 국제적 망신이며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조국의 음악가 머리가 도굴당해 온 유럽에서 장식품처럼 여기저기로 팔려나가 것은 두고볼수 없다"고 하였으나 100년이 횔씬 넘었음에도 하이든의 머리를 찾는데 필요한 단서조차 없었다. 많은 의견과 비난여론이 빗발친건 물론이다.
그러다 수소문 끝에 하이든의 머리를 찾는데는 성공하여 하이든의 후손들과 오스트리아 정부는 반환소송을 청구하였다. 하지만 그 유해의 주인은 소송반환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되찾는데 어려움을 맞았고, 설상가상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유해반환 소송은 잠정중단된다.
그러다가 1954년 6월 마침내 유해반환 소송에 승소하여 하이든의 머리는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는데 무덤에서 파해쳐져 머리가 분리된지 무려 145년만의 일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스트리아 주민 수십 만명이 나와 145년만에 조국에 돌아온 하이든의 머리를 맞이한다.
또한 오스트리아 대통령 및 정치인들이 하이든의 미사에 대거 참석해 대 음악가의 안식을 간절히 바라며 이제서야 머리를 찾은것에 대해 하이든 후손들에게 정식으로 사죄했다.
4 주요 작품들
4.1 교향곡
총 106곡. 82~87번 여섯 곡은 '파리 교향곡집', 93~104번 열두 곡은 '런던 교향곡집'으로 칭하기도 한다.
- 교향곡 1번 D장조 (1759)
- 교향곡 2번 C장조 (1757~61 사이로 추정)
- 교향곡 3번 G장조 (1760~62 사이로 추정)
- 교향곡 4번 D장조 (1757~61 사이로 추정)
- 교향곡 5번 A장조 (1760~62 사이로 추정)
- 교향곡 6번 D장조 '아침(Le matin)' (1761)
- 교향곡 7번 C장조 '낮(Le midi)' (1761)
- 교향곡 8번 G장조 '밤(Le soir)' (1761)
- 교향곡 9번 C장조 (1762)
- 교향곡 10번 D장조 (1757~61 사이로 추정)
- 교향곡 11번 E플랫장조 (1760~62 사이로 추정)
- 교향곡 12번 E장조 (1763)
- 교향곡 13번 D장조 (1763)
- 교향곡 14번 A장조 (1761~63 사이로 추정)
- 교향곡 15번 D장조 (1760~63 사이로 추정)
- 교향곡 16번 B플랫장조 (1757~61 사이로 추정)
- 교향곡 17번 F장조 (1757~63 사이로 추정)
- 교향곡 18번 G장조 (1757~64 사이로 추정)
- 교향곡 19번 D장조 (1757~61 사이로 추정)
- 교향곡 20번 C장조 (1762경)
- 교향곡 21번 A장조 (1764)
- 교향곡 22번 E플랫장조 '철학자(Der Philosoph)' (1764) - 두 종류의 판본이 존재하며, 제2판은 제1판과 달리 3악장제를 택하고 있다. 또한 오보에 대신 잉글리시 호른 두 대가 편성되었다.
- 교향곡 23번 G장조 (1764)
- 교향곡 24번 D장조 (1764)
- 교향곡 25번 C장조 (1761~63 사이로 추정)
- 교향곡 26번 D단조 '탄식(Lamentatione)' (1768 또는 1769)
- 교향곡 27번 G장조 (1760 이전으로 추정)
- 교향곡 28번 A장조 (1765)
- 교향곡 29번 E장조 (1765)
- 교향곡 30번 C장조 '할렐루야(Alleluia)' (1765)
- 교향곡 31번 D장조 '호른 신호(Mit dem Hornsignal)' (1765)
- 교향곡 32번 C장조 (1757~63 사이로 추정)
- 교향곡 33번 C장조 (1760~61 또는 1763~65)
- 교향곡 34번 D단조 (1765)
- 교향곡 35번 B플랫장조 (1767)
- 교향곡 36번 E플랫장조 (1760년대 상반기)
- 교향곡 37번 C장조 (1758경)
- 교향곡 38번 C장조 '메아리(Echo)' (1765~69 사이로 추정)
- 교향곡 39번 G단조 (1767~68)
- 교향곡 40번 F장조 (1763경)
- 교향곡 41번 C장조 (1769경)
- 교향곡 42번 D장조 (1771경)
- 교향곡 43번 E플랫장조 '메르쿠리우스(Merkur)' (1771경)
- 교향곡 44번 E단조 '슬픔(Trauer)' (1772)
- 교향곡 45번 F샤프단조[5] '고별(Abschied)' (1772)
- 교향곡 46번 B장조 (1772)
- 교향곡 47번 G장조 (1772)
- 교향곡 48번 C장조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68~69) - 이 곡은 에스테르하지 궁을 방문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헌정한 곡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고 이런 별명이 붙었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작곡 시기나 그 구성으로 봤을 때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실제로 헌정된 곡은 교향곡 제50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하이든의 합스부르크 헌정곡 No.1 - 교향곡 49번 F단조 '수난(La passione)' (1768)
- 교향곡 50번 C장조 (1773~74)
- 교향곡 51번 B플랫장조 (1773~74)
- 교향곡 52번 C단조 (1771~72)
- 교향곡 53번 D장조 '제국(L'Impériale)' (1778~79) - 적어도 세 종류의 4악장 대체본이 존재하고 있다.
- 교향곡 54번 G장조 (1774)
- 교향곡 55번 E플랫장조 '교장(Der Schulmeister)' (1774경)
- 교향곡 56번 C장조 (1774경)
- 교향곡 57번 D장조 (1774)
- 교향곡 58번 F장조 (1774)
- 교향곡 59번 A장조 '불(Feuer)' (1769경)
- 교향곡 60번 C장조 '정신나간 사람(Il distratto)' (1774 또는 1775)
- 교향곡 61번 D장조 (1776)
- 교향곡 62번 D장조 (1780~81)
- 교향곡 63번 C장조 '록슬란(La Roxelane)' (1779~81 사이로 추정) - 두 종류의 판본이 존재하고 있다.
- 교향곡 64번 A장조 '시간의 변화(Tempora mutantur)' (1773~75 사이로 추정)
- 교향곡 65번 A장조 (1778경)
- 교향곡 66번 B플랫장조 (1775~76?)
- 교향곡 67번 F장조 (1779경)
- 교향곡 68번 B플랫장조 (1779경)
- 교향곡 69번 C장조 '라우돈(Laudon)' (1779경)
- 교향곡 70번 D장조 (1779경)
- 교향곡 71번 B플랫장조 (1780경)
- 교향곡 72번 D장조 (1763~65 사이로 추정)
- 교향곡 73번 D장조 '사냥(La chasse)' (1782)
- 교향곡 74번 E플랫장조 (1780~81)
- 교향곡 75번 D장조 (1779~81 사이로 추정)
- 교향곡 76번 E플랫장조 (1782)
- 교향곡 77번 B플랫장조 (1782)
- 교향곡 78번 C단조 (1782)
- 교향곡 79번 F장조 (1784)
- 교향곡 80번 D단조 (1784)
- 교향곡 81번 G장조 (1784)
- 교향곡 82번 C장조 '곰(L'Ours)' (1786)
- 교향곡 83번 G단조 '암탉(La Poule)' (1785)
- 교향곡 84번 E플랫장조 (1786)
- 교향곡 85번 B플랫장조 '왕비(La Reine)' (1785~86) - 하이든의 파리 체류 기간 중 작곡된 파리 교향곡집 중 하나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음악을 특히 좋아하여 이런 부제가 붙었다고 전해진다.
하이든의 합스부르크 헌정곡 No.2 - 교향곡 86번 D장조 (1786)
- 교향곡 87번 A장조 (1786)
- 교향곡 88번 G장조 (1787)
- 교향곡 89번 F장조 (1787)
- 교향곡 90번 C장조 (1788)
- 교향곡 91번 E플랫장조 (1788)
- 교향곡 92번 G장조 '옥스포드(Oxford)' (1789)
- 교향곡 93번 D장조 (1791)
- 교향곡 제94번 G장조 '놀람(Surprise)' (1791) - 독일어권에서는 '팀파니 치기(Mit dem Paukenschlag)'라고도 불린다.
- 교향곡 95번 C단조 (1791)
- 교향곡 96번 D장조 (1791)
- 교향곡 97번 C장조 (1792)
- 교향곡 98번 B플랫장조 [6] (1792)
- 교향곡 99번 E플랫장조 [7] (1793)
- 교향곡 100번 G장조 '군대(Militär)' (1793~94)
- 교향곡 101번 D장조 '시계(Die Uhr)' (1793~94)
- 교향곡 102번 B플랫장조 (1794)
- 교향곡 103번 E플랫장조 '팀파니 연타(Mit dem Paukenwirbel)' [8] (1795) - 4악장을 약간 늘린 대체본이 존재한다.
- 교향곡 104번 D장조 '런던(London)' (1795)
- 오보에, 바순,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협주 교향곡(신포니아 콘체르탄테) B플랫장조 (1792) - 엄밀히 따지면 교향곡은 아니지만, 종종 105번이라는 번호를 부여받고 교향곡 목록에 편입되기도 한다.
- 교향곡 'A' B플랫장조 (1757~60 사이로 추정) - 104곡의 교향곡 목록이 나온 뒤에 발견된 곡. 호보켄 번호로는 107번이다.
- 교향곡 'B' B플랫장조 (1757~60 사이로 추정) - 역시 교향곡 목록이 나온 뒤에 발견된 곡. 호보켄 번호로는 108번이다.
이외에 호보켄 번호 106번을 부여받은 곡이 하나 더 있지만, 악보가 파트보 하나만 존재해서 연주 불가능한 상태다.
4.2 관현악곡
- 가상칠언(Die sieben letzten Worte unseres Erlösers am Kreuze)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책형을 당하며 남겼다는 일곱가지의 유언을 주제로 한 작품. 유언의 앞과 뒤에 서곡과 지진 묘사 음악이 붙어있기 때문에 실제 곡 수는 아홉 곡이다. 이후 오라토리오와 현악 4중주용으로도 편곡되었고, 오라토리오판의 경우 네번째 유언과 다섯번째 유언 사이에 추가로 관현악 간주곡이 들어가 열 곡이 되었다.
4.3 협주곡
- 피아노 협주곡
- 1번 C장조 (1756)
- 2번 D장조 (1767)
- 3번 F장조 (1771)
- 4번 G장조 (1770)
- 5번 C장조 (1763)
- 6번 F장조 (1766) - 바이올린이 독주부에 더해진 2중 협주곡
- 7번 F장조 (1766)
- 8번 G장조 (1766)
- 9번 G장조 (1767)
- 10번 C장조 (1771)
- 11번 D장조 (1779~80)
- 바이올린 협주곡
- 1번 C장조 (1765경)
- 3번 A장조 (1770경)
- 4번 G장조 (1769)
- 첼로 협주곡
- 1번 C장조 (1761~65 사이로 추정)
- 2번 D장조 (1783)
- 호른 협주곡 1번 D장조 (1762)
- 트럼펫 협주곡 E플랫장조 (1796) - 한국에서는 3악장 초반부가 장학퀴즈 시작 음악으로, 2011년 이전 서울도시철도공사 종착역 알림음으로 쓰여서 유명하다.
- 두 대의 리라 오르가니차타를 위한 협주곡 (1786) - 악기가 사실상 사멸한 현대에는 플루트와 오보에 혹은 플루트 두 대가 독주 악기로 대체되고 있다.
- 1번 C장조
- 2번 G장조
- 3번 G장조
- 4번 F장조
- 5번 F장조
4.4 현악 4중주
총 68곡. 구식 집계로는 83곡이지만, 위작으로 판명되거나 의심되는 작품들을 제외하고 새로 추린 숫자다.
- 현악 4중주 Op.1 (1762~64)
- 1번 B플랫장조
- 2번 E플랫장조
- 3번 D장조
- 4번 G장조
- 5번 E플랫장조
- 6번 C장조
- 현악 4중주 Op.2 (1763~65)
- 7번 A장조
- 8번 E장조
- 9번 F장조
- 10번 B플랫장조
- 현악 4중주 Op.9 (1769)
- 11번 D단조
- 12번 C장조
- 13번 G장조
- 14번 E플랫장조
- 15번 B플랫장조
- 16번 A장조
- 현악 4중주 Op.17 (1771)
- 17번 F장조
- 18번 E장조
- 19번 C단조
- 20번 D장조
- 21번 E플랫장조
- 22번 G장조
- 현악 4중주 Op.20 (1772) - 통칭 '태양 4중주곡집'
- 23번 F단조
- 24번 A장조
- 25번 C장조
- 26번 G단조
- 27번 D장조
- 28번 E플랫장조
- 현악 4중주 Op.33 (1781) - 통칭 '러시아 4중주곡집'
- 29번 G장조
- 30번 '농담(Der Scherz)'
- 31번 B단조
- 32번 C장조 '새(Vogel)'
- 33번 D장조
- 34번 B플랫장조
- 현악 4중주 35번 D단조 Op.42 (1784)
- 현악 4중주 Op.50 (1787) - 통칭 '프로이센 4중주곡집'
- 36번 B플랫장조
- 37번 C장조
- 38번 E플랫장조
- 39번 F샤프단조
- 40번 F장조
- 41번 D장조 '개구리(Frosch)'
- 현악 4중주 Op.54 (1788) - 통칭 '토스트 4중주곡 제1집'. 에스테르하지 대공의 전속 관현악단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한 토스트(Johann Tost)에게 헌정되어 붙은 이름이다.
- 42번 C장조
- 43번 G장조
- 44번 E장조
- 현악 4중주 Op.55 (1788) - 통칭 '토스트 4중주곡 제2집'
- 45번 A장조
- 46번 F단조 '면도칼(Rasiermesser)'
- 47번 B플랫장조
- 현악 4중주 Op.64 (1790) - 통칭 '토스트 4중주곡 제3집'
- 48번 C장조
- 49번 B단조
- 50번 B플랫장조
- 51번 G장조
- 52번 E플랫장조
- 53번 D장조 '종달새(Lerche)'
- 현악 4중주 Op.71 (1793) - 통칭 '아포니 4중주곡 제1집'. 하이든의 후원자였던 안톤 게오르크 아포니 백작에게 헌정되어 붙은 이름이다.
- 54번 B플랫장조
- 55번 D장조
- 56번 E플랫장조
- 현악 4중주 Op.74 (1793) - 통칭 '아포니 4중주곡 제2집'
- 57번 C장조
- 58번 F장조
- 59번 G단조 '기수(Reiter)'
- 현악 4중주 Op.76 (1796~97) - 통칭 '에르되디 4중주곡집'. 헝가리 백작이었던 요제프 에르되디에게 헌정되어 붙은 이름이다.
- 60번 G장조
- 61번 D단조 '5도(Quinte)'
- 62번 C장조 '황제(Kaiser)' - 유럽 유랑을 끝내고 비엔나로 돌아온 하이든이 신성로마황제 프란츠 2세에게 헌정한 곡이다. 프란츠 2세는 음악군주로 불릴만큼 음악에 관심이 많았으며,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소개된 것처럼 모차르트 최대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2악장에서 훗날 독일 국가인 독일인의 노래가 되는 황제 찬가의 선율이 나온다. 이 선율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가로 쓰이다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에서도 국가로 지정되었다. 자세한 설명은 항목 참조.
하이든의 합스부르크 헌정곡 No.3 - 63번 B플랫장조 '일출(Sonnenaufgang)'
- 64번 D장조
- 65번 E플랫장조
- 현악 4중주 Op.77 (1799) - 통칭 '로브코비츠 4중주곡집' 보헤미아 출신 공작이었던 요제프 프란츠 막시밀리안 로브코비츠에게 헌정되어 붙은 이름이다.
- 66번 G장조
- 67번 F장조
- 현악 4중주 68번 D단조 Op.103 (1803) -2악장과 3악장만 완성된 미완성 작품이다.
4.5 피아노 3중주
현존작 기준 총 43곡. 호보켄의 초기 조사에서는 47곡이었지만, 그 중 두 곡이 이그나츠 플레옐의 작품으로 밝혀져 제외되었다. 아래의 곡 번호는 이후 H.C. 로빈스 랜던이 새로 정리한 것이다.
- 피아노 3중주 제1번 F장조 (1760~66 사이로 추정)
- 피아노 3중주 제2번 C장조 (1760~66 사이로 추정)
- 피아노 3중주 제3번 G장조 (1767)
- 피아노 3중주 제4번 F장조 (1767)
- 피아노 3중주 제5번 G단조 (1760~66 사이로 추정)
- 피아노 3중주 제6번 F장조 (1760~66 사이로 추정) - 2악장의 대체본이 존재한다.
- 피아노 3중주 제7번 G장조 (1760~67 사이로 추정)
- 피아노 3중주 제8번 D장조 (1760~71 사이로 추정. 악보 소실 혹은 행방불명)
- 피아노 3중주 제9번 D장조 (1771. 악보 소실 혹은 행방불명)
- 피아노 3중주 제10번 A장조 (1764~71 사이로 추정)
- 피아노 3중주 제11번 E장조 (1760~71 사이로 추정)
- 피아노 3중주 제12번 E플랫장조 (1760~74 사이로 추정)
- 피아노 3중주 제13번 B플랫장조 (1760~69 사이로 추정)
- 피아노 3중주 제14번 F단조 (1760)
- 피아노 3중주 제15번 D장조 (1755~60 사이로 추정)
- 피아노 3중주 제16번 C장조 (1760~66 사이로 추정)
- 피아노 3중주 제17번 F장조 (1767~71 사이로 추정)
- 피아노 3중주 제18번 G장조 (1784)
- 피아노 3중주 제19번 F장조 (1784)
- 피아노 3중주 제20번 D장조 (1784)
- 피아노 3중주 제21번 B플랫장조 (1784)
- 피아노 3중주 제22번 A장조 (1785)
- 피아노 3중주 제23번 E플랫장조 (1785)
- 피아노 3중주 제24번 E플랫장조 (1788)
- 피아노 3중주 제25번 E단조 (1788)
- 피아노 3중주 제26번 C단조 (1789)
- 피아노 3중주 제27번 A플랫장조 (1790)
- 피아노 3중주 제28번 D장조 (1790)
- 피아노 3중주 제29번 G장조 (1790)
- 피아노 3중주 제30번 F장조 (1790)
- 피아노 3중주 제31번 G장조 (1792)
- 피아노 3중주 제32번 A장조 (1793)
- 피아노 3중주 제33번 G단조 (1793)
- 피아노 3중주 제34번 B플랫장조 (1794)
- 피아노 3중주 제35번 C장조 (1794)
- 피아노 3중주 제36번 E플랫장조 (1794)
- 피아노 3중주 제37번 D단조 (1794)
- 피아노 3중주 제38번 D장조 (1795)
- 피아노 3중주 제39번 G장조 '집시' (1795)
- 피아노 3중주 제40번 F샤프단조 (1795)
- 피아노 3중주 제41번 E플랫단조 (1797)
- 피아노 3중주 제42번 E플랫장조 (1797)
- 피아노 3중주 제43번 C장조 (1797)
- 피아노 3중주 제44번 E장조 (1797)
- 피아노 3중주 제45번 E플랫장조 (1797)
4.6 피아노 소나타
현존작 기준 총 55곡. 다만 이 중에도 몇 곡은 위작 의혹이 있다. 아래의 곡 번호는 피아노 3중주와 마찬가지로 H.C. 로빈스 랜던이 새로 정리한 것이다.
- 피아노 소나타 제1번 G장조 (1766)
- 피아노 소나타 제2번 C장조 (1766)
- 피아노 소나타 제3번 F장조 (1766)
- 피아노 소나타 제4번 G장조 (연도 불명)
- 피아노 소나타 제5번 G장조 (1767)
- 피아노 소나타 제6번 C장조 (1767)
- 피아노 소나타 제7번 D장조 (연도 불명)
- 피아노 소나타 제8번 A장조 (1763)
- 피아노 소나타 제9번 D장조 (1760)
- 피아노 소나타 제10번 C장조 (1760)
- 피아노 소나타 제11번 B플랫장조 (1760)
- 피아노 소나타 제12번 A장조 (1767)
- 피아노 소나타 제13번 G장조 (1766)
-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C장조 (1760)
- 피아노 소나타 제15번 E장조 (1767)
- 피아노 소나타 제16번 D장조 (1767)
- 피아노 소나타 제17번 E플랫장조 (연도 불명)
- 피아노 소나타 제18번 E플랫장조 (연도 불명)
- 피아노 소나타 제19번 E단조 (1765~67)
- 피아노 소나타 제20번 B플랫장조 (1767)
- 피아노 소나타 제21번 D단조 (연도 불명. 악보 소실 혹은 행방불명)
- 피아노 소나타 제22번 A장조 (연도 불명. 악보 소실 혹은 행방불명)
- 피아노 소나타 제23번 B장조 (연도 불명. 악보 소실 혹은 행방불명)
- 피아노 소나타 제24번 B플랫장조 (연도 불명. 악보 소실 혹은 행방불명)
- 피아노 소나타 제25번 E단조 (연도 불명. 악보 소실 혹은 행방불명)
- 피아노 소나타 제26번 C장조 (연도 불명. 악보 소실 혹은 행방불명)
- 피아노 소나타 제27번 A장조 (연도 불명. 악보 소실 혹은 행방불명)
- 피아노 소나타 제28번 D장조 (연도 불명. 미완성)
- 피아노 소나타 제29번 E플랫장조 (1765~67)
- 피아노 소나타 제30번 D장조 (1767)
- 피아노 소나타 제31번 A플랫장조 (1765~67)
- 피아노 소나타 제32번 G단조 (1765~67)
- 피아노 소나타 제33번 C단조 (1777)
- 피아노 소나타 제34번 D장조 (1784)
- 피아노 소나타 제35번 A플랫장조 (1783)
- 피아노 소나타 제36번 C장조 (1773)
- 피아노 소나타 제37번 E장조 (1773)
- 피아노 소나타 제38번 F장조 (1773)
- 피아노 소나타 제39번 D장조 (1773)
- 피아노 소나타 제40번 E플랫장조 (1773)
- 피아노 소나타 제41번 A장조 (1773)
- 피아노 소나타 제42번 G장조 (1774~76)
- 피아노 소나타 제43번 E플랫장조 (1774~76)
- 피아노 소나타 제44번 F장조 (1774~76)
- 피아노 소나타 제45번 A장조 (1774~76)
- 피아노 소나타 제46번 E장조 (1774~76)
- 피아노 소나타 제47번 B단조 (1774~76)
- 피아노 소나타 제48번 C장조 (1780)
- 피아노 소나타 제49번 C샤프단조 (1780)
- 피아노 소나타 제50번 D장조 (1780)
- 피아노 소나타 제51번 E플랫장조 (1780)
- 피아노 소나타 제52번 G장조 (1780)
- 피아노 소나타 제53번 E단조 (1774~76)
- 피아노 소나타 제54번 G장조 (1784)
- 피아노 소나타 제55번 B플랫장조 (1784)
- 피아노 소나타 제56번 D장조 (1784)
- 피아노 소나타 제57번 F장조 (1784)
- 피아노 소나타 제58번 C장조 (1789)
- 피아노 소나타 제59번 E플랫장조 (1789)
- 피아노 소나타 제60번 C장조 (1794)
- 피아노 소나타 제61번 D장조 (1794)
- 피아노 소나타 제62번 E플랫장조 (1794)
4.7 미사곡
총 14곡. 9~14번 여섯 곡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위해 쓴 탓에 '에스테르하지 미사곡집' 이라고도 부른다.
- 미사 제2번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is)' (1750)
- 미사 제3번 '성 체칠리아 미사(Missa Cellensis in honorem Beatissimae Virginis Mariae')' (1766~73)
- 미사 제9번 '오피다의 성 베르나르도 미사(Missa sancti Bernardi von Offida)' (1796) - 빈민 구호에 힘써 사후 101년 뒤인 1795년에 성인으로 시성된 수도사인 오피다의 성 베르나르도를 기념한 미사곡. 독일어권 국가에서는 '거룩한 미사(Heiligmesse)' 라고도 부른다.
- 미사 제10번 '전시(戰時) 미사(Missa in tempore belli)' (1796) - 독일어권 국가에서는 '팀파니 미사(Paukenmesse)' 라고도 부른다.
- 미사 제11번 '위기의 시대 미사(Missa in Angustiis)' (1798) - 영어권 국가에서는 '넬슨 미사(Nelson Mass)' 라고도 부른다.
- 미사 제12번 '테레지아 미사(Theresienmesse)' (1799) - 제목의 테레지아는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von Neapel-Sizilien)를 뜻함.
- 미사 제13번 '천지창조 미사(Schöpfungsmesse)' (1801)
- 미사 제14번 '하르모니 미사(Harmoniemesse)' (1802) - 관악기의 취급이 당대에 유행한 하르모니무지크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었다.
4.8 오라토리오
- 천지창조
- 사계
그 외 현악 3중주, 피아노 독주곡, 서곡, 가곡, 칸타타, 오페라, 극음악 등 다수. 총계 약 750곡. 몰라 뭐야 이거 무서워.
5 창작 성향
오랫동안 귀족 집안의 전속 작곡가로 일한 탓에 작품에 큰 기복은 없고, 꾸준한 자기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초기에는 바로크 음악의 강한 영향을 받았고, 바흐나 헨델 등의 독일계 본좌 대선배들 뿐 아니라 코렐리나 비발디 등 이탈리아 선배들의 영향도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교향곡 제6~8번 연작의 경우,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 양식을 적극 도입해 여러 악기들이 솔로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하지만 1760년대 후반부터 1770년대 초반까지는 판할이나 디터스도르프 같은 동시대 작곡가들이 크게 유행시킨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양식에 영향을 받았고, 이 시기에 단조로 된 교향곡이나 현악 4중주가 꽤 많이 나왔다. 질풍노도 시기를 지난 뒤에는 고용주였던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주문으로 많은 오페라와 극음악을 썼는데, 다른 장르의 작품들에도 이러한 주문 폭주가 반영되어 다소 가볍고 해학적인 곡들이 많이 나왔다. 그 절정에 있는 작품이 교향곡 제60번으로, 모차르트의 디베르티멘토 F장조 '음악의 농담(Ein Musikalischer Spaß, KV 522)'에 필적하는 그 시대 초절개그인데 마지막 악장인 6악장에서 현악기의 조율을 다시 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있다.
1770년대 후반에는 고용주의 허락 없이 자작곡을 출판할 수 있게 되었고, 직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외부 출장도 가능해졌다. 이때를 전후해 하이든의 수많은 악보들이 여러 음악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묶여 있던 명성을 유럽 각지에 퍼뜨리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저작권 개념은 지금과 달리 상당히 애매했고, 몇몇 악보들은 작곡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첨삭 혹은 편곡되거나 하이든의 이름을 사칭한 짝퉁까지 나돌기도 했다.
후기에 속하는 1790년대에는 런던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명성과 작풍을 완전히 확고하게 굳히는 시기였는데, 특히 자신의 임지였던 아이젠슈타트 근처에서 쉽게 접할 수 있던 헝가리나 크로아티아, 체코 등 동유럽계 민속 음악이나 집시 음악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작품의 구조와 규모도 더 방대해졌고, 말년의 두 걸작 오라토리오인 '천지창조'와 '사계'에서 정점에 달했다.
6 사생활
커다란 트러블이나 일화 같은 것은 없고, 오랫동안 피고용인 생활을 한 만큼 다소 설렁설렁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교향곡 제45번 '고별'의 에피소드에서 보듯 고용주가 꼬장피운다 싶으면 음악으로 보복하는(!?) 용자 기질도 있었고, 의외로 대단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하이든 사망 200주년이 된 2009년에 다니엘 바렌보임의 지휘로 개최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에서 고별 교향곡의 4악장이 공식 프로그램의 마지막 곡으로 연주되었는데, 지휘자를 쌩까고 계속 하나둘 빠져나가는 악단원들의 모습 자체가 개그. 이건 하이든 자신이 진짜로 초연 때 단원들에게 지시한 퍼포먼스다.[9]
당시 고용주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도통 휴가를 주지 않아서 단원들의 마음을 헤아린 하이든이 이렇게 지시했고, 그 결과 휴가를 따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휴가를 따내기 위해 이런 걸 지시한 하이든이나 그걸 보고 휴가를 내준 후작이나 보통 인물은 아니었던 듯. 요즘 같았으면? 하이든, 너 해고!
▲ 백문이 불여일견. 차례차례 빠져나가는데 여기서는 4분 18초부터 보면 된다. 당황스러워하는 척하며 가지 말라고 손짓하는 지휘자와 무시하고 나가는 단원이 유머. 5분쯤부터는 청중들도 웃는다. 개그의 절정은 곡이 끝나는 7분 이후.
하지만 결혼 생활은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르친 백작 집안에서 일할 때 마리아 안나 알로이지아 아폴로니아 켈러라는 3년 연상의 여성과 결혼했는데, 불행히도 아내가 남편의 음악 활동을 듣보잡 취급한 데다가[10] 결정적으로 불임이라 서로 애정이 급속히 짜게 식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 로마 가톨릭의 교회법에서는 이혼이 금지되어 있었고, 결국 부부 관계는 하이든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그 지긋지긋한 생활에 서로 질렸는지, 아예 각자 애인을 두고 살기까지 했다. 흠좀무. 만년에 미사곡 창작에 몰두한 예를 봐도 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것 같은데, 아마 그 때문에 종교를 버려가면서까지 이혼을 하는 모험을 하지 않았을지도.
초상화를 보면 그럭저럭 준수한 외모처럼 보이지만, 당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키도 작고 어렸을 때 앓은 두창 때문에 얼굴에 얽은 자국이 계속 남아 있었다고 한다. 체격이 왜소해진 것은 어릴 적부터 도제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느라 그랬던 것 같은데, 한창 자라나야 할 청소년 시기에 배불리 먹기는 커녕 스승들의 온갖 잡일에 시달려야 했다고 하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청장년 시기에는 일종의 인후 질환인 비용종과 그로 인한 편두통에 시달리기도 했고, 종종 작곡 활동에 방해를 주기까지 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7 평가
일단 후세의 일반적인 평가는 '고전 시대의 대표적 작곡가'. 더불어 교향곡과 현악 4중주의 ㅎㄷㄷ한 숫자로 봤을 때 엄청난 양산형 작곡가로서도 명성(혹은 악명)이 높다.[11] 너무 곡들이 많다 보니 제목이 없는 곡들은 상대적으로 듣보잡화되는 안습 상황까지 겪을 정도. 클래식의 김성모
하지만 그렇다고 하이든을 탓하기가 뭣한 것이, 당시 작곡가라는 직업은 귀족 혹은 고위 성직자들에게 예속되어야 먹고 살 수 있는 위치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룰을 스스로 거스르고 프리랜서를 자처했던 모차르트의 만년 생활은...OTL[12]. 이들은 안정된 주거 환경과 보수를 제공받는 대신, 고용주가 쓰라는 대로 곡을 계속 써야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때문에 작품에 오랜 시간과 공을 들이는 스타일의 창작가는 살아남기 힘들었고, 때로는 자신의 의지에 반해 별로 애착이 안가는 장르나 편성의 곡을 억지로 써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숫자의 곡들을 근성으로 차근차근 들어보면 나름대로 발전 양상을 추적할 수 있고, 특히 말기에 가면 베토벤 등의 작풍을 예견할 만큼 원숙하고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로 작곡가 당대의 악기와 연주법을 고증해 재현하는 '시대연주'가 득세하면서 묻혀있던 많은 작품들이 리바이벌되고 있고, 재평가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하이든의 손으로 쓰여진 모든 장르에서 고전 형식의 발전과 완성 양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천재성이나 베토벤의 혁신 기질 등 후배들의 후광에 눌린다고 해도 여전히 중요성을 잃지 않을 작곡가이기도 하다.
듣는 사람에게도 근성이 요구되지만, 전곡을 연주한다는 연주자들에게는 근성 이상의 대인배+용자 기질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끈기있는 이들에게 종종 떡밥이 되곤 한다. 특히 100곡을 넘는 교향곡의 경우 많은 이들이 전곡 녹음에 도전했는데, 현재 딱 네 명의 지휘자와 관현악단 만이 이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차례대로 오스트리아 지휘자인 에른스트 메르첸도르퍼와 빈 실내 관현악단, 헝가리 출신의 미국 지휘자인 언털 도라티와 필하르모니아 훙가리카, 역시 헝가리 지휘자인 피셔 아담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하이든 관현악단, 미국 지휘자인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와 슈투트가르트 실내 관현악단. 하지만 메르첸도르퍼의 경우 음반이 너무 극소량+제한적으로 풀려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도라티가 최초인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청취자와 연주자 모두에게 근성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역시나 김성모. 근성이다?
2014부터 이탈리아 출신의 시대악기 지휘자인 지오반니 안토니니에 의해 하이든 탄생 300주년인 2032년(!) 완성을 목표로 한 교향곡 전곡 녹음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무사히 완주하기를..[13]
물론 트리오나 현악 4중주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전곡을 녹음한 케이스는 많지 않다. CD 9장 분량으로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의 피아노 트리오도 보자르 트리오와 반 스베덴 트리오, 아이젠슈타트 하이든 트리오, 트리오 1790의 녹음 정도 밖에 없는 실정이고, 아얘 장르 자체가 생소한 CD21장 분량의 바리톤 트리오는 앙상블 에스테르하지의 녹음 외에 전곡 녹음은 시도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 친숙한 장르인 현악 사중주도 CD23장에 이르는 방대한 양으로 인하여, 타트라이, 에올리안, 코다이, 앙헬레스, 부크베르거 4중주단 정도가 전곡 녹음의 위업을 달성하였고, 시대악기에서는 초기 곡을 제외하고 녹음한 페스타티치 4중주단이 전곡녹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상기의 위업 중에 도라티, 피셔의 교향곡전집, 유일한 바리톤 트리오 전집을 남긴 앙상블 에스테르하지, 현악 사중주 전집을 남긴 타트라이, 코다이, 페스타티치는 모두 헝가리 단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아무래도 헝가리 귀족인 에스테르하지가의 음악가였던 만큼 생각 외로 헝가리에서 녹음에 근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8 작품 연구
하이든 뿐 아니라 바로크와 고전 시대의 '양산형' 작곡가들 대부분에 해당되는 문제지만, 워낙 출판된 작품보다 그렇지 않은 곡들이 많고 악보의 소재도 명확하지 않아서 음악학자들의 애를 먹이는 경우가 다반사다. 교향곡의 경우 오이제비우스 만디체프스키가 104곡으로 처음 정리했는데, 교향곡 목록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것도 작곡 연대 추정에 관한 수많은 오류가 있는 조사였다.
1957년에는 네덜란드 음악학자인 안토니 판 호보켄이 자신의 성을 딴 '호보켄 작품번호(Hoboken-Verzeichnis. 약칭 Hob.)'로 장르별 작품들을 분류한 목록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현재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 번호 분류도 후배 음악학자들인 로빈스 랜던이나 옌스 페터 라르센, 솜파이 라즐로 등이 새롭게 발굴한 자료들을 통해 계속 오류를 지적했기 때문에 완벽한 목록으로 보기는 힘들다.
'창작 성향' 항목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하이든의 명성에 편승해 무단 편집된 악보나 위작이 나도는 등 부작용도 많아 연구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개중에는 하이든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던 곡들까지 위작으로 판명되고 있는데, 2악장이 유명한 현악 4중주 '세레나데'는 로만 호프슈테터라는 작곡가의 작품으로 사실상 확정된 상태다. 장난감 교향곡도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여흥 음악인 카사치오네에서 하이든의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이 3개 악장을 골라 편곡한 것으로 밝혀…진 줄 알았는데, 이게 끝이 아니다. 자세한 사항은 레오폴트 모차르트 항목 참고.
반대로 타인의 작품으로 오랫동안 의심받아오던 것이 유력한 자필보나 필사보의 발견으로 하이든 작품임이 확실해진 경우도 있다. 첼로 협주곡 제2번의 경우 에스테르하지 악단의 첼리스트로 봉직했던 안토닌 크라프트의 작품으로 오랫동안 의심받아 왔지만, 1951년에 하이든의 서명이 첨부된 자필 악보가 발견되어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외에도 당시에 반짝하고 사라진 악기들을 위해 쓴 곡들도 있는데, 이들 작품도 하이든의 고용주나 작품을 의뢰한 사람들의 취향과 당대 유행을 추측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에스테르하지 공작이 즐겨 연주한 바리톤(baryton)[14]이 포함되는 현악 3중주나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의 왕 페르디난도 1세의 주문으로 작곡한 리라 오르가니차타(Lira organizzata)[15] 협주곡이 대표적인 예.
9 트리비아
9.1 대중문화에서의 이용
원체 유명한 인물인 만큼 음악이 방송이나 영화, 광고의 BGM으로 쓰이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트럼펫 협주곡의 경우 위에 쓴 대로 장학퀴즈의 시작 음악으로 오랫동안 쓰였고, 제목이 붙어 있는 후기 교향곡이나 현악 4중주의 경우에도 이런저런 분야에서 사용된 바 있다.
9.2 하이든 머리 도난 사건
음악 외적인 에피소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머리 도난사건'인데, 1820년에 굼펜도르프에서 아이젠슈타트로 이장하기 위해 유해를 발굴했을 때 두개골이 소실된 채로 나와 충공깽을 선사했다. 이것은 굼펜도르프에 유해를 묻을 때 매장에 관여한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비서인 칼 로젠바움과 니더외스터라이히 주립 교도소장 요한 네포무크 페테르가 '연구 목적'으로 몰래 빼돌린 탓이었는데, 해부학으로는 하이든의 뇌에서 '음악적 천재성'을 입증하기 불가능했기 때문에 삽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하이든이 사망할 당시의 유럽에서는 골상학[16]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으며, 로젠바움과 페테르가 하이든의 진짜 두개골을 골상학적으로 분석하였더니 측두엽과 전두엽이 일반인들보다 튀어나와 있었고 이러한 특징은 바흐나 베토벤같은 다른 작곡가들의 두개골에서도 나타나 있었다.
연구가 끝난 뒤 두개골만 남은 하이든의 머리는 나무 상자에 봉인되어 모처에 감춰졌고, 이장할 때 두개골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꼭지가 돈 에스테르하지 공작이 로젠바움과 페테르의 소행임을 알아냈다. 공작이 두 사람을 찾아내 갈구자 두개골이 반환되었는데, 문제는 이 두개골이 다른 인물의 것이었다는 점이었다. 하이든의 진짜 두개골은 로젠바움이 죽자 페테르에게, 페테르가 죽자 빈 음악가협회에 넘어갔다.
빈 음악가협회에서는 1954년에야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하이든의 진짜 두개골을 넘겨주었는데, 그 해 6월 5일 하이든의 고향인 로라우에서 로라우 교구 사제장과 오스트리아 대통령 및 추기경이 참여한 미사가 열렸고 거리에서 수만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중하게 모셔져 다시 묻혀졌다. 이 때는 가짜 두개골도 처치곤란했는지 두 가지를 모두 입관시켰다. 그래서 지금도 아이젠슈타트의 하이든 묘지에는 몸통 하나에 두개골 두 개라는 아햏햏한 상태로 유해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10 독일 국가 에피소드
현재 독일 국가로 쓰이고 있는 독일인의 노래(Das Lied der Deutschen. 또는 독일의 노래 Deutschlandlied)도 하이든 작품인데, 원래 1797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프란츠 2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영국의 국가를 좀 베껴서 지은 축가였다. 원제는 '신이여 프란츠 황제를 보호하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 나폴레옹이 유럽을 개발살내기 시작하던 시기였던 만큼 그에 대항하는 애국주의 경향이 물씬 풍기는 가사 때문에 자주 애창되었다고 하고, 하이든도 말년에 건강 악화로 고통받으면서 자기 위안으로 이 멜로디를 자주 연주했다고 한다.
이 멜로디에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이 1841년에 독일 민족주의 성향의 3절로 된 새로운 가사를 붙였고,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 운동과 함께 일종의 애국가로 널리 보급되었다. 세기가 바뀌고 공화국이 수립된 뒤에도 이 곡은 독일을 상징하는 국가[17]로 계속 쓰였는데, 나치의 경우 '독일, 모든 것 위의 독일(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이라는 자뻑성 내용으로 시작되는 1절만 채택해 나치 당가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와 함께 국가로 지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난 뒤, 동독과 서독은 서로 다른 국가를 채택해야 했다. 동독의 경우 요하네스 베허 작사/한스 아이슬러 작곡의 '폐허로부터 부활하여(Auferstanden aus Ruinen)'라는 노래를 새로 채택했지만, 서독에서는 호프만의 가사 중 '통일과 권리와 자유(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라는 가장 민족주의와 관련된 위험성이 적은 3절만 공식 채택해 국가로 부활시켰다.
1990년에 통일이 되면서 새로운 국가 제정에 대한 떡밥이 던져졌는데, 서독 측은 일단 동독 국가를 쓸 것을 원칙적으로 거부했다. 그래서 다른 노래나 동서독 국가의 짬뽕 연주 등 온갖 대안이 이곳저곳에서 제시되었는데, 결국 흡수 통일한 서독 정부가 '그냥 우리꺼 쓰기로 하겠음 깝ㄴㄴ' 하면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네오 나치를 비롯한 극우 꼴통들은 여전히 서독/독일 정부의 결정을 쌩까고 1절만 정치 집회에서 목청껏 부르고 있다. 하이든은 이걸 보고 뭐라고 생각하려나.[18]- ↑ 100곡을 넘어가는 많은 양을 작곡했으므로 아버지 대접 받아도 뭐 문제될 것은 없다. 참고로 모차르트는 41곡, 베토벤은 아홉 곡.
- ↑ 이 곡은 장학퀴즈의 메인 시그널 음악으로도 유명하며 서울도시철도공사가 종착역 알림음을 국악으로 바꾸기 전에 종착역 알림음으로 사용되었다.
- ↑ 동생도 형만큼 많은 수의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교회음악을 많이 작곡하였으므로 교회음악의 아버지라 불린다. 작품 수는 소실된 것을 제외하면 총 838개의 작품을 남겼다.
- ↑ 참고로 이 가문 집사의 아들이 바로 프란츠 리스트다. 아쉽게도 하이든이 사망한지 2년 후에 리스트가 태어나서 두 거장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 ↑ 교향곡 중에 이 조성으로 된 작품이 드물다.
- ↑ 4악장에 쳄발로 독주가 들어있다.
- ↑ 클라리넷 2대가 처음으로 편성되었다.
- ↑ 첫 악장이 팀파니 독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 ↑ 출판 악보에는 단순히 연주가 끝나는 파트 악보에 마침표만 되어 있고, 하이든 자신은 거기에 독일어로 nichts mehr(더 이상 없음)라고만 적었다. 하지만 현대에 연주할 때도 음반 제작용 스튜디오 녹음이 아닌 한 초연 때처럼 진짜 단원들이 나가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 ↑ 하이든의 친필 악보를 냄비받침 취급하여 손상시키거나, 심지어는 벽난로에 땔감으로 쓴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 때문에 후대의 후대까지 욕을 거하게 먹고 있다.
- ↑ 하지만 이는 비단 하이든 뿐 아니라, 당대의 많은 작곡가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총 집계 수만 1000곡이 넘는 바흐나, 그 이상으로 많다는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 등을 살펴봐도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니고.
- ↑ 사실 모차르트는 본인이 재산관리를 잘 못했던 부분도 무시할순 없다.
- ↑ 90년대에 영국 출신의 호그우드가 진행하던 교향곡 전곡 계획은 잘 진행되다가 파리 교향곡, 런던 교향곡 등의 주요 교향곡들의 녹음을 남겨두고 무산된 적이 있다.
- ↑ 첼로 크기의 7현악기. 하지만 7현은 활로 긋는 현의 숫자고, 그 뒤에 긋는 현과 같이 울리는 공명현(resonance strings)이 12개 가량 더 달려 있다.
- ↑ 현악기지만, 활로 긋거나 손가락으로 퉁기지 않고 악기의 핸들을 돌려 소리를 내는 드렐라이어 계통의 악기였다.
- ↑ 骨相學, phrenology. 두개골을 해부해서 뇌의 어느 부분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알아보는 학문.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가로도 쓰였다.
- ↑ 통일 당시에는 1절부터 3절까지 전곡을 부르는 퍼포먼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