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옐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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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러시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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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1·2대3[1]·4대
미하일 고르바초프보리스 옐친블라디미르 푸틴
역대 러시아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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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2대
보리스 옐친예고르 가이다르
성명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옐친)
생몰년1931년 2월 1일 ~ 2007년 4월 23일
출생지소련 러시아 공화국 우랄 주 부트카
국적소련 -> 러시아
정당소련 공산당 -> 무소속
직위제 1대 러시아 연방 대통령
러시아 연방 제1대 총리
배우자나이나 옐치나
종교러시아 정교회
임기1991년 6월 12일 ~ 1991년 12월 26일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1991년 12월 26일 ~ 1999년 12월 31일 (러시아 연방 대통령)

1 개요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2]

보리스 옐친은 소련, 러시아의 정치인이다. 1987년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선출된 이후 개혁파 정치인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1990년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당선 이후 1991년 8월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저지하면서 러시아 공화국의 실권자로 떠올라 그 해 말 소련을 해체시키고 초대 러시아 연방 대통령으로써 1990년부터 1999년까지 역임했다.

옐친은 1985년 개혁파 정치인으로 처음 등장해 급진적인 개혁을 이끌 때까지는 인기있었으나, 1991년 독립 이후 경제 개혁 실패, 최고회의 해산 등 무능한 모습을 보이며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특히 충격요법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을 추진해 러시아 경제를 양극화시켰고, 소련 시절 쌓은 경제기반을 전부 무너뜨리면서 러시아는 1990년대를 통틀어 기나긴 불황을 겪어야 했다. 이후 1996년 체첸전 패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움 위기 및 탄핵 시도로 정치적 입지가 땅에 떨어졌다. 이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하면서 1999년 12월 31일 당시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정권을 넘기고 은퇴, 2007년 별세했다.

러시아 역사에서 옐친의 시절은 1917년 2월 혁명 이후 제정이 무너진 러시아와 여러 면에서 많이 비견될 만한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권위적인 정부가 무너진 틈을 타 극좌파부터 극우파까지 권력을 잡기 위해 투쟁했다. 경제적으로는 올리가르히레드 마피아로 대표되는 신흥 세력은 정계와 결탁해 부와 권력을 축적했다. 군부는 체제 변환 과정에서 기존의 병력조차 유지하기도 버거워 사기를 잃어버리고 체첸전에서 굴복하며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 민심은 피폐해진 경제에 지쳐 이를 해결할 새로운 지도자, 혹은 지도자 그 이상을 원했다. 이런 1990년대 러시아의 모습은 1918년 1차대전 패배 이후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민족주의 세력이 득세한 독일과도 너무나 비슷했다.

2 생애

2.1 초기

옐친은 1931년 2월 1일 러시아 공화국 우랄 주에 위치한 부트카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시절에 건축 기사로 지내다가 1961년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뛰어난 흡인력과 업무능력으로 빠르게 승진하여 1976년에 스베르들로프스크 주 제1서기가 되었고, 1981년에 공산당 중앙 의원이 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훗날 그와 원수 지게 되는 고르바초프가 지도자가 되면서 고르바초프는 옐친을 등용하여 모스크바 제1서기 (한국으로 치면 모스크바 시장 정도)가 되었다. 엘친은 모스크바 지구당 제1서기 시절 정치 개혁을 주장하다가 보수파들의 반발에 1987년에 해임되었지만 옐친은 이에 굴하지 않고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아 올려갔고,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그 결과, 1989년 소련 첫 자유 총선거때 모스크바 선거구에 출마, 89%의 득표를 얻어 초압승을 거두었고, 그의 동료들도 대거 의원직에 당선되는데 성공하면서 보수파의 세를 누르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 때부터 급진적인 노선을 본격적으로 주장하여, 절충적인 개혁을 주장하던 고르바초프와 점차 갈등을 빚기 시작하여 1990년에 공산당을 전격 탈당하였다. 원래는 고르비가 급진개혁을 추진했지만 개혁정책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개혁파 내부에서도 이견이 나왔고, 그 과정에서 고르비가 절충개혁을 주장하게 되고 이에 대항해 옐친이 고르비를 몰아붙이면서 급진개혁을 주장하면서 공산당을 탈당하게 된 것. 이 과정에서 그의 주벽에 대한 얘기가 보수파 사이에서 나왔지만 옐친의 인기는 더더욱 높아졌다. 1990년 5월에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소련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소련 공산당 위주의 중앙집권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공화국 정부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공산당 보수파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조지아 공산당 제1서기였던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같은 공화국 정부 출신 인사들을 대거 포섭했고, 옐친은 그 혜택을 받은 인물 중 하나였다. 러시아 공화국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써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옐친은 1991년 6월 12일에 57%의 득표로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2 대통령

1991년 8월 보수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옐친은 보수파들의 저지와 러시아 시민들에게 실력행사를 호소, 보수파의 쿠데타를 막아내면서 쿠데타 이후 소련을 장악할 수 있었다. 당시 소련 정부는 개혁파였던 고르바초프와 보수파였던 야나예프, 크류츠코프 등 둘 다 쿠데타로 인해 완전히 몰락한 상황이었고, 옐친은 이 공백을 이용해 고르바초프와 보수파의 지지 기반이었던 소련 공산당을 압박하면서 정국을 원하는 대로 주도해갈 수 있었다.

그 해 12월 21일 옐친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의 지도자와 벨라루스에 있는 벨로베자 숲에서 만나 함께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하고 독립국가연합의 결성을 선언했다. 이 조약으로 소련은 사실상 해체되었고 '신연방조약'의 체결을 준비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사임하게 되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러시아인들은 그가 어떤 정책을 펼칠 지 아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 옐친은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그나마 간신히 지탱되던 경제를 빈사상태로 몰아넣었다. 원래 러시아 경제는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추진한 경제 자유화의 후유증을 떠앉으면서 거의 파산에 가까운 수준이었지만,[3] 그의 재무장관이었던 예고르 가이다르가 추진한 경제개혁 정책으로 가격 자유화를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실패해버렸다.

사실 고르바초프 시절 추진한 가격 자율지정화[4]로 인해 이미 후유증이 컸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가이다르의 개혁은 너무 조급하고 낙관적이었다. 당장 통일 후 동독의 사례를 참고하더라도, 공산주의권에서는 나름 준수한 경제라는 서독의 생각과는 달리 자본주의 국가들과 경쟁하기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많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독일 경제에 큰 부담을 안겼다.

가이다르의 경제 개혁 실패로 러시아의 GDP는 추락했고, 소련 시절 국가의 지원으로 유지되던 수많은 국영기업, 공장, 콜호즈들과 연구소들은 자본주의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파산해버렸다.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경제 주체들이 사라지면서 수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실업과 빈곤 속에 빠져들었고, 오직 소수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만이 모든 부를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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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93년엔 이런 적도 있다. 옐친은 재신임에 성공한 직후 대통령에게 의회해산권을 부여하고, 기존 소련체제의 잔재였던 인민대표회의와 최고회의를 폐지하고 상하원을 신설하는 개헌을 시도했다. 이에 다수당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 등이 러시아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옐친을 탄핵하자, 타만스카야 기갑사단의 T-80들을 데려다 국회의사당을 포격해버렸다.사건의 내막18분 30초부터 나온다. 러시아에서는 대통령이 국회의사당을 포격합니다

2년 만에 탱크 앞에서 맞서던 입장에서 탱크를 끌고 가서 포격하는 입장이 된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지만, 이 때 군부가 옐친을 지지하면서 옐친은 빠르게 상황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적잖은 사상자가 나면서 러시아 국민들은 옐친에 크게 실망했다.[5] 결국 그 해 1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옐친파 장당은 고작 15.5%의 득표를 올리며 패배했으며, 극우정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이 23%로 제1당이 되었다. 공산당-농민당 연합도 22%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정파는 대다수가 사민주의 정파였다.

1995년 12월 의회(두마)에서는 공산당이 22%를 득표하며 1당이 되었다. 11%로 자민당이 2당을 차지했으며 10%의 여당 '러시아 - 우리집'은 3당에 그쳤다. 하지만 정당명부제의 특성상 어느 한쪽도 과반을 유지할 순 없었고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 이런 기조는 1999년 총선까지도 이어지만 1999년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이 선전하고 2000년 푸틴이 들어서면서 정치는 안정된다. 거꾸로 말하면 이전까지 러시아는 혼란이 심각했단 이야기다.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은 심장마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이미지 플레이로 초반 지지율 6%에서 결선투표 진출은 물론 공산당의 주가노프를 54%대 41%로 14% 가량 압서며 승리했다.[6]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옐친은 "배당을 위한 융자"라는 악명높은 합의를 통해 자신에게 선거자금을 대주는 대가로 올리가르히들에게 러시아의 중요한 경제적 자산 통제권을 나눠주겠다는 범죄적 약속을 받아냈다. 그 같은 조치는 러시아 내에서 올리가르히의 부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마디로 말해 소련시절 국가 재산이나 국영기업체들, 그러니까 인민의 소유물을 전부 소수의 사람들에게 팔아넘긴 셈이다. 특히 가즈프롬이나 루살 등 에너지나 광물 관련 회사들 등 나름 흑자를 벌어들이는 사업들이 많았는데,[7] 이런 사업체들이 모두 소련 내 제정 관료나 시장원리에 밝았던 전직 공산관료들이나 권력 핵심부에 있던 정부관리에 넘어감으로써 벼락부자들이 대거 탄생했다. 이들 중 몇몇은 옐친집권 몇년만에 세계적인 부호가 될 수 있을만큼 큰 재산을 모았다. 이런 벼락부자들의 대표적인 예로는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로만 아브라모비치 등이 있다. 소련시절에는 부동산 및 생산수단이 국유화되었기 때문에 모을 수 있는 재산은 예금이 전부였고,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이 서방기준으로 수천 달러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옐친 집권 하에서 자본주의에 빠르게 적응한 이들은 2, 3년 만에 수조에서 수십조원의 자산가가 된다.

게다가 분리독립을 선포하려던 체첸 공화국을 무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당시 체첸 지도자였던 조하르 두다예프와 협상을 거부하고 무리하게 군을 투입했다. 하지만 체첸군은 아슬란 마스하도프같은 전직 소련군 출신 인사들에 의해 훈련이 되어있는 상태였고,[8]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그로즈니 시로 진입했다가 체첸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1996년 샤밀 바사예프가 주도한 부됴놉스크 병원 인질극과 체첸 반군의 그로즈니 재탈환으로 체첸군에게 패배하면서 결국 1996년 하사브유르트 협정을 맺고 굴욕적으로 패배를 시인하면서 물러났다. 사실 러시아군으로써는 붕괴 이후 군조직이 약화되고 군사적으로 된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체첸에 투입되어 큰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개 지방이었던 체첸에 패배한 사실은 러시아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1998년 러시아 정부는 재정 부족으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기까지 이르렀다. 이미 옐친의 권위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탄핵직전에 까지몰렸다가 겨우 회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1999년 8월 KGB 출신인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지명하였다. 더 이상 평판이 나빠질 일도 없었던 옐친이 마지막으로 내던진 승부수였는데, 이후 건강 이상으로 물러난 옐친을 대신해 대통령에 오른 푸틴이 치밀한 계획과 사후 처리 대책까지 세워 체첸을 공격, 5천 명 이상을 죽게 만들고도 해결하지 못한 전쟁을 겨우 2,500여 명의 전사자만으로 체첸을 멸망시키는 형태로 해결하여 깜짝스타로 등극하자 자연히 여당의 지지율도 다시 오랐으며 그 해 12월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들이 선전하였고, 총선에서 선전한 대가로 옐친은 푸틴을 차기 대권주자로 내정하였다. 마지막 승부수는 성공을 거두었던 셈. 그해 말인 12월 31일 옐친은 건강문제로 자신의 실정에 대해 사과하면서 사임했고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었다.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옐친은 푸틴에게 사임 후에도 자신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푸틴은 옐친에게 면책특권을 보장함으로써 이에 보답하였다. 그리고 푸틴이 승승장구하면서 옐친은 푸틴으로부터 비토당하는 일없이 잘 지내며 한가롭게 야인으로 지내다가 2007년에 사망했다. 향년 76세. 그놈의 때문에 건강이 나빠서 죽었다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옐친은 살아생전 지독한 주당이었다.

그동안의 소련 지도자들은 대부분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지만 옐친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말 그대로 국가 지도자나 영웅들이 묻히는 크렘린에 비하면 격이 살짝 낮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노보데비치 수도원도 러시아의 위인들이 많이 묻힌 곳으로 유명하다.

3 개인사

옐친은 러시아 정치인들 중에서도 주변 인사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제일 먼저 보드카오이[9]를 찾았다고 증언할 만큼 술을 무척 좋아했다.

1994년에는 아일랜드 총리와 회담할 예정으로 공항에 도착하고도 만취한 탓에 비행기에서 내리지 못해 회담이 연기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덕에 (옐친의) 국제적 이미지는 대폭 추락했다.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 못지 않은 지독한 애주가농담 삼아 보리 옐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얼마나 술을 먹었는지 공식 석상에서도 취해 있어서 추태를 부리는 등 러시아라는 나라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데 일조했을 정도. 심슨 시즌 8의 10화에서도 음주 단속기의 최종단계로 이 사람 수준이라고 나온다. 말년에는 하도 병을 많이 달고 다녀서 걸어다니는 종합병동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집권 초기에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하는가 하면, 관련 기사. 음주운전을 한 적도 있다. 기사.

클린턴 대통령 시절 미국을 방문해서 백악관에서 잠을 자다가 술을 진탕 마시고 맨발잠옷 차림으로 백악관 문 앞까지 나간 적도 있었다. 이 사건은 국가 기밀로 취급되어(…) 언론에는 비공개 처리되었다가 나중에 기밀 해제가 되면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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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클린턴 대통령 시절 미국을 방문한 때인 것 같은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클린턴 대통령에게 뻐큐를 시전한 적이 있다(...). 아마 어린 시절 손가락을 잃은 탓에 그런 손동작으로 찍힌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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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당시 공식 기자회견에서조차 술취해 실언을 내뱉자, 클린턴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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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9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로스토프를 방문해 선거 유세로써 춤을 춘 사진. 당시 옐친이 선거에서 시도한 이미지 메이킹의 일환이었다. 이 사진은 1996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영상 자료로도 매우 확실하게 남아 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옐친은 떡대가 상당했으며 키 187cm의 장신거구였다.

4 평가

4.1 러시아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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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미지를 적절히 말해주는 만평. '옐친 병원'

자신의 나라를 스스로 해체해 버리고 말아먹기까지 한 천하의 매국노. 고르바초프를 밀어낸 뒤 자신이 소련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데도 권력을 더 확고하게 잡겠다며 소련을 해체해 버렸다. 비록 15개 구성국 중에 발트 3국이 부당한 병합으로 분류되어 무효가 됐다지만 나머지 12개국은 소련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고, 조지아를 제외하면 연방 유지에 동의했는데도 해체하자고 밀어붙인 게 바로 옐친이다. 이걸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어떤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어 정권을 잡은 후에, 자신에 반대되는 지역에서 선거하기가 부담스럽다고 그 지역을 다른 나라로 독립시켜 버린 거랑 비슷하다.

양반은 새로 만든 자기 나라 러시아도 바닥으로 말아 쳐먹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나라를 망칠 수 있을까?' 싶을 정도. 그 이전이나 이후나 옐친과 비교할 만한 수준의 막장 정치인은 러시아에 단 한 명도 없다. 하다못해 미하일 고르바초프조차도 옐친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고르바초프는 미움을 많이 받지만 상처를 당한 후 조금이나마 러시아인들로부터 동정표를 받긴 한다. 게다가 블라디미르 푸틴우크라이나 개입의 경우 다른 나라에서는 비판을 받지만 러시아에서는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크림 반도를 병합함으로써 지지율이 80%를 넘겼다. 그런데 옐친은 대외적인 평가는 물론 대내적인 평가까지 극악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꺾고 초대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친서민적인 이미지로 인기가 많았으나 당선 후에 다른 후보의 가족들과 측근들의 부정부패, 그리고 소련의 해체 역시 실질적으로는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잃은 틈을 타 옐친이 주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러시아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정치인이다. 거기에다가 1994년 발발한 체첸 사태 당시 체첸에 많은 돈을 투자하지만 쑥대밭만 만들어 욕 먹었다. 더군다나 그러면서도 쳐발리기만 하는데다가 1996년 8월에는 굴욕적인 평화 협상을 맺는 바람에 더더욱 인기가 떨어졌다.

거기에 집권 초에 시행한 충격요법의 일환으로 시행한 가격 자유화와 소련 붕괴에 따른 산업 붕괴로 초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예금이 모조리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는 옐친이 경제를 개혁하겠다고 워싱턴 컨센서스에 충실한 학자들이나 기관들(예를 들면 세계은행, 미국 재무부, IMF)에게 조언을 구했었는데, 옐친은 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충격요법을 시행했다. 문제는 이들 학자들이나 기관들은 이러한 충격요법을 시행하면 일어날 파장을 예측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걸 단순히 불가피한 일 혹은 단기적인 일로 여겼으며, 장기적으로 보면 시장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지나치게 낙관했다는 거다. 물론 이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그리고 옐친은 이들이 제시한 방안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충격요법에 따라 가격 자유화가 즉각적으로 시행되자, 물가 폭등으로 예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면서 구매력이 급속히 떨어졌고(소련 시절에는 그래도 싸게 공급되는 물건은 부족했어도, 풍족하게 물건이 공급되지만 가격이 비싼 암시장에서 물건 살 때 웃 돈이라도 줄 수 있었지만 예금이 휴지조각 되어버리고, 봉급도 사실상 몇 토막 나버리는 바람에 돈이 없어 물건을 제대로 사지 못했다.), 범죄율도 대폭 상승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 국민의 90%가 절대 빈곤선 이하로 전락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도 1990년 당시 9300달러였던 1인당 GDP가 1992년에는 600~700달러까지 떨어졌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과장이 아니라 실업자만 무려 2000만 명에 이르렀다. 이 정도가 어느 정도냐면 독소전쟁 당시 소련의 전사자가 약 2000만 명이라는 걸 생각하면 전쟁 희생자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는 얘기다. 1990년대 중후반 들어서는 러시아의 총 GDP가 한국보다도 못할 지경이 되었고 지금도 조금 못 미치는 수준에 불과하다.[11] 러시아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미국과 대결하던 초강대국에서 국토도 과거보다 작고 인구도 미국의 60%밖에 안 되는[12] 국가로 전락한 셈이니 그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히 상상조차 안될 정도였다.

거기에다가 무분별하게 민영화를 하다 보니 대량의 국부가 유출되었고 빈부 격차도 극심해졌으며 올리가르히(과두재벌)들이 정치계와 언론계를 장악하는 바람에 부정부패도 소련시대보다 심해진데다가 쓸수있는 예산이 줄어서 각종 복지정책 등 사회안전망까지 붕괴되었다. 재빠르게 부를 독점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들의 삶은 막장화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대기근이 와서 적어도 수백만 명은 굶어 죽을 상황이었지만 소련 당시의 아파트나 별장(텃밭 포함) 정책 공산당의 마지막 선물 덕분에 거기까지는 안 갔다. 90년대 중반에 일시적으로 상황이 호전되는 듯 했지만, 그래봐야 사회적인 지표가 개판에 가까웠고, 금융 범죄도 대거 일어날 정도로 그 내실은 결코 탄탄히 않았다. 그나마도 외환 위기가 일어나는 바람에 다시 한번 쑥대밭이 되어 급기야 모라토리엄까지 선언했을 지경이고 여기에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말 그대로 진짜 벼랑 끝에 내몰리는 바람에 발생한 출산율의 급감과 사망률의 급증으로 매년 인구가 70만에서 90만명선까지 줄어드는 수준이 되어서 한 동안 2050년이 되면 러시아 인구가 1억명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올 수준이었다.

이 시기의 상황이 얼마나 시궁창이었냐 하면 연방 해체(소련이 아니라 소련에서 분리된 러시아 연방)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90년대 러시아 여대생들의 최고 아르바이트가 바로 외국 관광객 상대 성매매(인터걸)였다는 웃지못할 사실이 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는 "러시아 여자"란 단어가 성매매여성을 지칭하는 단어가 될 정도였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동남아 여성 매매혼이 유럽-미국 국가에서는 러시아 여성 매매혼으로 벌어졌다. 니콜 키드만이 주연한 영화 버스데이걸(Birthday Girl)이 바로 그 러시아 여성 매매혼을 주제로 한 영화다. 한 마디로 말해 옐친 집권 시기의 러시아는 러시아판 고난의 행군을 겪은 셈.

게다가 1990년대 동안 러시아는 오랜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국외에 군사력을 전개시킬 수 없을 정도로 경제가 악화되었는데, 이는 역으로 중앙유럽 국가들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영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특히 이 시기 반소 감정이 심했던 중앙유럽 국가들은 재빨리 서구권에 편입되기 위해 서구권으로 경제 개혁을 진행하면서 냉전 시절의 유산을 청산했고, 그 결과 2016년 현재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 옛 소련권 국가들과 내전을 겪은 옛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현재 NATO유럽연합 회원국으로 가입해 있다. 이마저도 현재 우크라이나에 무리한 개입으로 인해 소련 시절과 비슷한 서구권의 제제가 부활했다. 이는 소련 시절의 군사력으로 서유럽을 위협하던 냉전 시기와 비교하면 최소한 적백내전 이후인 1922년과 비슷한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거기다가 독트린 94를 내세워 핵무기와 기술연구에만 투자해서 러시아군은 한없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물론 이는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대규모 정규군을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양적 감축을 통해 유지비를 최소화하되, 최소한의 국제적 영향력 유지를 위한 핵전력/이후 군 조직의 재건을 위해 필수적인 기술적 우위만은 놓치지 않겠다는 마인드에서 세워진 게 당시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군의 중추가 되는 장교/부사관들을 제대로 유지한다는 마인드가 없었던 게 큰 문제였고, 결국 러시아는 중간간부진이 무너진 군을 재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어쨌든 러시아는 옐친 덕에 제도적으로는 서방식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 점은 순수히 옐친의 업적(?)이라도 봐도 된다. 러시아는 제도만 봐서는 서방 국가와 비슷한 꼴이다. 하지만 제도 면으로만 그렇고, 실제로 러시아는 옐친 시절이나 현재 푸틴 시절이나 일인독재국가다. 오히려 책임 정치나 세대 교체 면에서 보면 임기제가 확립되어 있는 중국보다도 훨씬 뒤떨어지고, 부패도 훨씬 심하다(부패지수 중국 3.6, 러시아 2.7). 러시아는 제도만 민주화되었을 뿐, 실제로 민주주의는 매우 취약하며, 경제는 중동국가와 비슷한 막장 국가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옐친이 민주제도를 정착시켰다고 해도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 가령 러시아 헌법에서 언론의 자유는 보장되고 있지만, 실제로 반정부적인 언론은 엄청난 탄압을 받고 있으며, 언론 자유는 148위(2014)로 세계 최하위권.[13] 기자들은 중국이나 소련 시절처럼 코렁탕을 먹는 건 아니지만 유무형의 협박을 받거나 심지어는 암살된다고 한다. 또한 예전에는 반정부인사들이나 정적들을 굴라그로 보냈지만, 지금은 방사능 홍차, 정적의 사생활을 찍어 폭로해 매장시키는 몰래카메라[14]를 비롯한 여러 수단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있으며, 서방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암살 의혹 사건은 옐친-푸틴 시절부터 러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푸틴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졌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영웅 알렉산드르 레베트는 2002년 의문의 헬기사고로 사망했다. 푸틴 치하에서 투표율이 140% 되는 건 . 이런 나라가 아무리 민주제도를 갖췄다고 해도 제대로 된 민주국가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사실상 소련 중반 이후에는 공산당 내에서는 사실상 민주적으로 투표를 진행했었고 말기에는 노동자가 직접 공장장을 뽑는 제도도 시행했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 역사상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때는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진행할 때였다. 오히려 옐친은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진압을 명목으로 학살을 저지른 독재자라고 봐야 맞다.

옐친의 소련 해체는 악성 채무를 털어내고 권력을 확고하게 잡으려고 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즉 소련을 러시아로 축소시키고 알맹이만 챙겨먹어 이후 통치 및 재건을 용이하게 한다는 건데 그걸 추가로 말아먹었으니 옐친의 능력이 얼마나 답이 없었는가를 말해주는 부분.

생전의 실정 때문에 대다수의 러시아 국민들에게 나라를 말아먹은 놈, 심하면 개혁을 한답시고 개인 소유 재산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놓고선 자기와 친인척, 재벌들의 배만 불린 천하의 개쌍놈 정도의 취급을 받지만 그와 별개로 푸틴에게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올려준 아버지같은 인물이다보니 옐친이 퇴임한 후에도 현안이 있을 때마다 옐친과 얘기를 나누면서 조언을 구할정도로 대접을 융숭하게 해주었으며 장례식도 꽤 성대하게 치러졌다. 물론 옐친 본인은 민주주의의 근간 자체는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애시당초 이를 뒷받침하는 기본적인 사회정의조차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유지될 리가 없다.

많은 러시아인들이 옐친과 더불어 고르바초프를 비난하지만, 적어도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구하기 위해 여러 모로 노력했다. 고르바초프는 집권 말기 여러 수모를 겪으면서도 소련 경제를 살려보겠다고 서방 국가를 돌아다니며 차관을 빌렸다. 한국이 소련과 비교적 쉽게 수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도, 급전이 필요한 고르바초프가 요구한 30억불 차관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IMF나 미국은 소련에 차관 제공을 거절했기 때문에, 고르바초프는 수모를 겪으며 한국에까지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당시 정상 수교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전도 모두 생략하고 미국의 한 호텔에서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만나기까지 했다). 당시 한국보다 소련은 1인당 국민 소득이 2배였는데도 그랬다. 하지만,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보여준 열정이나 애국심이 전혀 없었다. 정권을 잡고 나서는 알콜 중독에 빠져 내정 뿐만 아니라 정상외교까지도 망치기 일쑤였다.

결국 옐친의 통치 하에서 러시아는 기초과학도 무너졌고 복지도 파괴되었고 환경오염도 심해졌으며 국가 경쟁력과 각종 경제 및 사회 지표 역시 폭락했다. 결정적으로 민주주의 자체도 사실상 사망한 상황이다. 남은 것이 없다. 레알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또한 러시아는 옐친 시절 소련 해체와 기본 경제 붕괴로 인해 향후 수십 년간은, 아니 어쩌면 영원히 과거만큼의 위상을 찾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특히 러시아가 전통적으로 꿈꿔왔던 기반인 동유럽에서 과거의 '식민지'들이 서구권에 편입되면서, 러시아는 옛날의 제정 러시아 때나 소련처럼 서방과 정면으로 대립각을 새울 영토적 기반을 거의 상실해버렸다.

이를 인지한 러시아에서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서구권에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서구권과 나름대로 협력을 추진하면서 대립을 피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조지아 등이 서구권 편입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러시아는 옛 영향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패권적으로 나서기 시작했고, 이는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2014년 크림 위기, 돈바스 전쟁을 겪으면서 보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는 나라 특성상 블랙 유머가 많이 통하는데, 옐친도 예외는 아니어서 꽤나 자주 입담에 올랐다. 다음은 공산주의 유머에도 나와있는 예시다.

A: 소련이 70년 동안 그토록 강조했지만 국민들을 설득시킬 수 없었던 과업을, 옐친은 단지 자신의 재임시절 몇 년 만에 다 이루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B: 국민들에게 공산주의가 좋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지.

...그만큼 소련 시절이 천국으로 보일만큼 옐친은 러시아를 파탄내버렸다.

4.2 서방의 평가

보다 나을게 없는 차악

위에서 보다시피, 옐친이 막장스러운 권위주의적 통치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서방언론에서 그에 대해 침묵한 것은 그가 잘해서라기보다는 당시 옐친보다도 더 막장인 정치인이 너무 많아서였다. 당시 옐친의 정치적 경쟁자였던, 소련 부활을 부르짖은 공산당 당수였던 겐나디 쥬가노프러시아 제국 부활을 외친 극우 자유민주당의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는 그들이 내세우는 정치적 구호의 타당성을 따지기 이전에 실제로 집권할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인물들이었다. 이게 빈말 뿐만은 아닌게, 실제로 쥬가노프는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과 거의 근접할 정도로 지지율이 높았었고, 1999년에는 옐친 이후 공산당이 다시 집권할 것이라는 예측이 과반수였다.[15]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서방권에서는 소련 붕괴 러시아 국민들이 겪은 경제적 혼란을 만들어낸 지도자보다 애국주의를 자극해 옛 질서를 회복시키려는 과정에서 무력을 사용해 유혈사태를 일으킬 정치인을 더 위험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해도 옐친이 정치적으로 무능한 것은 사실인지라, 당시 서구권에서도 이를 숨기려 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많은 서방언론들은 옐친 집권 시기 옐친이 무리한 경제 개혁 정책으로 국민들의 불신을 얻었거나, 무리하게 체첸 침공을 기획했다가 패배한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었다.

서방 측에서는 옐친이 영 미덥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극좌세력과 극우세력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해 열심히 도운 편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9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러시아 공산당 당수인 주가노프가 옐친보다 지지율에서 앞서자, 미국 측이 선거 전문가들을 대거 파견해 옐친을 도와주었다. 기사. 하지만 당시 러시아 언론을 대부분 소유했던 올리가르히들의 전폭적인 지원 덕택에[16][17] 옐친은 간신히 성공했다. (1차투표에서 옐친:주가노프는 35%:32%, 결선투표에서 옐친은 레베트와 지리놉스키의 지지를 얻어 54:40으로 이긴다) 레베디는 그 공로로 러시아 국가안전보장회의 의장까지 오르지만, 얼마안가 옐친에 의해 토사구팽되었으며, 지리놉스키는 듣보잡화 된다.

이 시기 러시아인들은 서방이 러시아를 민주주의 질서를 채택한 대가로 지원하는 대신, 러시아의 위기를 거의 방치하고 옛소련 국가들을 적극적으로 서방권으로 끌어들이는 모습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러시아인들은 서방이 소련을 일부러 무너트렸다는 인식이 강한 편이다. 하지만 사실 서구권에서는 이미 1989년 몰타 선언 등을 통해 냉전이 마감되고 이미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가 된 마당에 굳이 소련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위협하면서까지 소련을 적극적으로 붕괴시킬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서방에서는 소련 해체가 경직된 독재체제와 공산주의의 비능률로 인해 소련 국민들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고, 이로 인한 러시아의 영향력 축소 역시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영역이었던 땅에 대한 침범보다는 러시아의 압제를 겪었던 국가들의 자발적인 가입으로써 당연하게 여겼다.

4.3 한국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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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당시)

위에서 나온 무능력하고 부패한 모습과는 별개로, 한국에는 호의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다. 러시아 = 소련 = 공산당 = 북한 편이라는 소련 시절 스테레오 타입을 가진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게 옐친은 개인적으로 북한을 굉장히 싫어했다. 스탈린김일성의 회담 내용등을 포함한 한국전쟁 관련 문서를 대거 공개해 한국전쟁의 원인이 북한의 남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못박았고 남, 북한간 전쟁시 러시아가 북한편으로 개입하는 우호조약을 폐기시켜 버린 것도 옐친. 옐친 개인의 북한을 싫어하는 감정과 더불어 한국과 교류를 늘리려던 러시아의 외교 정책, 그것을 이용한 한국 정부의 외교 전략이 적용된 결과이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공식적으로 사과하였고, 블랙박스 및 유품 등을 전달해 주었다.

다만 이렇게 서방 측과 러시아의 입장을 나란히 세우는 외교적 뻘짓 때문에 러시아가 한반도에 영향을 끼칠 지렛대는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서방과 관계가 나빠진 이후에야 어느 정도 북한과 개선되었으나, 현실적으로 러시아가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는 이제 거의 없어진건 사실.

한국에서는 향후 남북 무력 충돌시 중조우호조약을 맺은 중국군처럼 북한에 우호적인 러시아군이 북한 편을 들어 개입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옐친 시절의 이 조약 폐기로 러시아군은 참전할 명분이 없어졌다. 일단 옐친의 성향부터가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공산당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이런 면에서는 한국에 은인이기도 하다

소련이 북한에 해주던 여러 가지 지원이나 우방국 혜택 같은 것을 모두 폐지하여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걷게 되기도 했다.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 북한 주민들이 수십만 명이나 아사한 걸 감안한다면 북한 입장에서는 웬쑤. 다만 이때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막장의 극치였기 때문에 설령 옐친이 북한이 호의적이었다고 해도 저런 사태는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북한이 저렇게 핵무기 및 여러 탄도미사일 개발에도 옐친의 국가 막장화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옐친 치하에서 러시아군은 무기를 제대로 관리를 안 해서 소련 시절 개발한 여러 전략무기들이 북한의 손에 넘어갔고 전략 미사일 설계국은 돈도 제대로 못 받아 엔지니어들이 거리에 나앉게 되자 북한은 이들을 거금을 줘서 일시적으로 고용을 했다. 북한은 입수한 로켓과 공학자들을 이용 소련 로켓을 역공학으로 카피하여 2000년대 들어 여러가지 전략무기를 제조해내고 있다. 기껏해야 500~700km 단거리 탄도미사일이나 간신히 만들던 나라가 90년대 말~2000년대 초에 갑자기 로켓 개발 능력이 향상된 건 이러한 이유이다. 그러니 옐친이 한국 손을 들어서 북한을 왕따시켰다고 해서 옐친이 한국에 도움을 주었다고만은 볼 수 없는 셈. 참고로 지금도 이 러시아 연구자들은 한달에 8천달러의 봉급을 받으며 북한 고급 아파트에서 경호를 받으며 살고 있으며 푸틴이 줄기차게 이들의 소환을 요구하고 있으나 북한은 이를 거절하였다.

5 기타

  •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는 이 사람을 한때 옐트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의 이름을 영어로 Yeltsin (옐트神)으로 표기하기 때문(...) 러시아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 당시 사람들이 영문 알파벳을 보고 이상하게 받아들인것이다. 사실 이런 점은 흐루쇼프도 마찬가지다.2000년대 초반까지 흐루쇼프를 흐루시초프라고 표기한 흑역사가 있다.
  •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에서는 외계인을 무찌른 후 각국과 정상회담을 가진다.근데 이 양반은 술 퍼먹다 외계인에게 당했을 것 같은 느낌이..
  1. 2대 대통령 권한 대행 포함. 당시 총리 신분.
  2. 소련까지 포함해서 따져보면 초대 대통령은 미하일 고르바초프라고 봐야한다. 서기장이기도 했지만 말년에 소련 대통령직을 신설했기 때문. 그러나 서기장이 아닌 대통령으로서는 별로 한게 없기 때문에 실질적인 초대 대통령은 옐친이라고 할 수 있다.
  3. 1990년 소련은 이미 경제체제가 거의 마비되어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을 정도였다.
  4. 국가가 가격을 정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생산자가 가격을 정하는 것. 자본주의 국가에서라면 이미 당연한 논리겠지만,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국가에서 국영화된 생산시설(공장, 농장(콜호즈) 등)을 통해 가격을 책정, 도시 노동자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고 있었다. 이는 현실공산주의 경제의 가장 기초적인 경제원리였다.
  5. 당시 러시아 정부 공식통계 추산 사상자 187명, 최고회의 추산 약 2000명 가량으로 집계했다.
  6. 여담으로 1996년 53세의 나이로 선거에 나왔던 주가노프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와 대결함은 물론 아직도 2012년 대선에 출마하여 푸틴과 대결하는 등 정치 현역이다(...). 다만 꾸준히 10% 후반대의 애매한 득표율을 얻고 있긴 한데 2000년 이후로 푸틴과 메드베데프가 모든 선거에서 50% 이상의 득표로 이겼기 때문에 결선투표까지 가진 못하고 있다.
  7. 원래 소련은 1930년대 산업화 시절 군대를 육성하기 위해 군수산업과 관련된 중공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하지만 1950년대, 1960년대를 거치면서 점점 공업 생산력이 떨어지면서 적자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소련정부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자원채굴 사업에 많이 기댔고, 실제로도 국가예산의 상당수를 자원소득에서 얻었다. 이런 자원의존형 구조는 소련 붕괴 이후 점차 심각해져 오늘날 러시아는 국고의 52%를 자원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8. 이미 러시아는 나고르노 카라바흐같은 분쟁이나 1992년 조지아 내전 때 샤밀 바사예프같은 체첸계 군인을 보냈던 적도 있었다.
  9. 러시아에서 오이는 살로(돼지 비계)와 더불어서 보드카와 함께 가장 흔하게 먹는 안주다.
  10. 이 사진에는 나름 사연이 있는데, 옐친은 당시 클린턴에게 당신은 재앙이다.라는 말을 했던(...) 상황이었다. 물론 옐친이 이 말을 진지하게 했다면 클린턴은 조금이나마 정색했겠지만, 당시 클린턴조차 옐친이 술취해 제정신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나라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던 셈이었다. 당시 영상
  11. 사실 러시아의 경제가 푸틴 시절 고도성장을 한 후에는 다시 한국을 추월했지만, 2014년 저유가로 러시아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다시 한국보다 명목상 GDP가 작아졌다.
  12. 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의 인구는 약 1억 4,800만으로 붕괴 직전 소련의 절반이었고, 199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인구는 2억 4,900만 가량이다. 지금 미국의 인구는 3억 1,000만을 넘는데 러시아 인구는 1억 4,400만으로 줄어 차이는 훨씬 늘었다.
  13. 희대의 막장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가 다스리는 짐바브웨보다도 낮다! 이미 옐친 시기가 지난지 얼마 안된 2002년에 121위를 마크해서 종교 국가들인 이란, 사우디 등과 비슷한 순위를 보여주었다.
  14. 이런 정치공작도 옐친이 원조다. 기사.
  15. 이 시기 군 출신 알렉산드르 레베디나 보리스 넴초프, 현 야블로코 당 당수인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등 개혁파 정치인들이 각광받았던 적도 있었지만, 당시 가장 큰 정치세력이었던 공산당자유민주당을 이기기엔 너무나도 부족했다.
  16. 당시 러시아 언론은 글라스노스트 이후 서방언론과 비슷할 정도의 논지를 지녔다. 러시아 국영방송이나 NTV 등에서는 소련 시절의 부정적인 모습과 1993년 10월 사태 등을 중점적으로 보도하면서 부정적인 네거티브 이미지를 중점적으로 보도했다.
  17. 당시 쥬가노프의 선거전략은 공산당 시절과 비슷한 대중집회와 연설이 주였다. 반면 옐친은 당시 방송과 신문을 (올리가르히들을 통해) 전부 장악하고 있었고,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했다. 하지만 애초에 쥬가노프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그만큼 선전했다는 점에서 옐친이 이미 신뢰를 잃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