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우치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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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사장
3대3대4대
야마우치 세키료야마우치 히로시이와타 사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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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8일 포브스의 '일본의 부호 40명' 기사에 나온 사진.
당시 총자산 48억 달러로 모리 아키라, 손정의에 이어 3위를 차지.
2010년 5월 18일 교토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암병동 준공 기념식.
한가운데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야마우치 당시 닌텐도 상담역으로,
병동 건설을 위해 개인 재산 70억 엔을 기부했다.
내일 벌어질 일은 누구도 모른다. 내일은 소니가 패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게임 비즈니스다.

山内溥
1927년 11월 7일 ~ 2013년 9월 19일

1 개요

게임계의 야쿠자, 게임계의 대부
닌텐도 전설의 시작, 이와타 사토루 취임 전까지 닌텐도의 틀을 만든 사람.

게임회사 닌텐도의 3대 사장. 나중엔 이와타 사토루[1]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고문으로 몇 년간 있다가 완전히 회사에서 손을 뗐다.

닌텐도를 평범한 화투회사에서 게임=닌텐도로 만든 사람. 그가 50년에 걸친 세월동안 닌텐도에서 세운 업적은 굉장하며, 그가 없었다면 현재의 닌텐도와 일본 게임업계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의 닌텐도 역시 이 사람이 세운 철학을 토대로 돌아가고 있다. 대표적인걸 몇개 대면, 현재 닌텐도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다량의 현금자산을 항상 보유하고 있는것. 또 아이들이 가지고 놀기 좋게 게임기를 튼튼하고 간단하게 만드는 것. 닌텐도가 게임 관련 분야 외에는 절대로 진출하지 않는 것. 닌텐도의 게임기가 절대로 적자를 보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 등이 있다.

야마우치 히로시 본인이 직접 고용한 인물인 요코이 군페이, 미야모토 시게루와 함께 닌텐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또한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회사 같았으면 채용하기를 꺼렸을 타지리 사토시까지 과감하게 채용하여, 그가 만든 포켓몬스터로 죽어가던 게임보이를 살려내는 등 인재를 보는 안목도 매우 뛰어난 편이다. 그리고 이와타 사토루가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닌텐도라는 거대기업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야마우치가 직접 그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회사를 맡겼기 때문이다.

2 행보

일본인답지 않게 호탕하고 직선적인 성격으로 유명하며, 그 거침없는 행보와 비범한 외모 (백발 올백머리, 선글래스) 때문에 팬 사이에선 야쿠자 혹은 오야붕 등등의 별명으로 불린다. 실제로 사장이라기 보다 구미쵸(組長:두목?)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실제 야쿠자는 아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것도 굉장히 싫어한다. 인명록에서 자신과 비슷한 이름이 많다는 이유로 이름의 한자를 바꿨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또한 독단적이고 자존심 높은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성향이 그가 이끈 회사인 닌텐도에도 주입된 경향이 있다.

또 엄청난 독설로도 유명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대놓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교토 토박이답게 에둘러서 말한다. 예를 들어 플레이스테이션을 까기 위해 스퀘어를 까는 식.

그런 그가 위기감을 가지고 씹었던 것은 크게 세 가지로 플레이스테이션3DOPTA(학부형회). 특히 대기업의 시장 진출에 큰 위기감을 느꼈었던 것 같다. 결국 소니에 밀려서 많은 자리를 내준 걸 생각하면 나름 선견지명. 멀티미디어라는 단어를 수식어로 홍보를 하던 새턴과 플스의 차세대기 경쟁에 대놓고 '멀티미디어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라는 말을 했다. 사실 멀티미디어라는 단어가 등장은 했지만, 당시엔 실재하지 않았다고 봐도 틀리지 않다. 지금에야 동영상 보고 방송 보는 게 흔하지만 당시엔 기껏해야 PC로 10분짜리 동영상을 1시간에 걸쳐서 다운을 받고 재생하고 있던 시절이니...

그의 어록은 게임 개발자를 희망한다면 이래저래 새겨들을 말이 많지만, 통신기능에 대해서는 무척 부정적이었다. 실제로 닌텐도는 닌텐도 시절 모뎀과 슈퍼패미컴의 사테라뷰로 말아 먹은 전례가 있으니 부정적일 법도 하다. 그럼 포켓몬스터는 뭐지?

젊었을 때는 빈둥거리며 놀기 위해서 본가인 교토가 아닌 도쿄에 있는 와세다대학 법학부에 진학(...) 그 와중에 데릴사위로 들어온 아버지가 가출 뒤 다른 여자와 재혼하는 등 파란만장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다. 조부가 사망하던 시점에서는 아버지는 이미 사망해버리는 바람에 조부의 뒤를 이어 1949년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화투회사 닌텐도의 3대째를 이어받는다.[2] 3대째를 이어 받을 때 회사의 인척들을 몰아내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주위에 인척이 있으면 휘둘려서 제대로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3] 젊은 사장 길들이기 목적인 파업에도 강경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세계 최초의 플라스틱 카드(1953), 디즈니의 라이센스를 획득해 만든 미키 마우스 트럼프(1959)[4]등의 성공으로 닌텐도를 일본 제일의 카드회사로 만든다. '세계 제일의 카드회사'를 목표로 승승장구하다가 일본 기업인 미국 시찰로 US 플레잉 카드사에 견학을 가서 초라한 규모에 놀란 뒤에 '카드로 세계 제일이 되어 버려야 소용 없구나'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서 닌텐도의 아직도 젊은 사장은 이리저리 다른 사업에 손을 대는데, (1962년) 이때 말아먹은 사업들이 하나 같이 전설이다. 러브호텔, 택시회사, 뽀빠이 라멘, 디즈니 프리커(후리카케), 인스턴트 라이스 등등, 특히 60년대의 기술력으로 만든 인스턴트 라이스는 '잘 봐줘야 죽'정도의 완성도. 이 당시에 평생 2번 겪게 되는 첫 번째 부도위기를 겪게 된다. 두 번째 부도위기는 체감형 광선총의 성공으로 사업을 확장했다가 오일쇼크로 큰 손해를 보는 1970년대. 이 당시의 영향인지 닌텐도가 이후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한 뒤에도 절대로 게임기 이외의 사업에 사업확장을 안했으며, 자신이 사장에서 물러나면서 이와타 사토루에게도 절대로 게임기 이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어쨌든 결국 초심으로 돌아가 완구회사로 성장시키기를 결심하고 요코이 군페이가 고안한 완구들을 시작으로 완구회사로서의 역사를 시작. 게임기 개발을 시작할때 그의 철학과 생각들을 쏟아냈고, 이것은 곧 서드파티와 같은 게임계의 기본 제도와 패미컴이라는 게임기를 만들어냈으며, 공전절후의 히트를 내며 슈퍼 패미컴까지 이어지는 닌텐도의 전성기를 이끌어나갔다.

그러나 그의 독단적인 성격에서 나오는 회사 방침은 서드파티들과의 불화를 심화시켜 다수 이탈을 초래하고, 닌텐도가 가지고 있던 입장상 어쩔수 없었던 몇가지 사정이 겹쳐서 닌텐도64에서 삐걱대기 시작했으며, 게임큐브에서는 순수익이 초라한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결국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었던지 야마우치 본인이 닌텐도 산하 HAL 연구소(대표작은 별의 카비)를 부도위기에서 구해낸 신예 이와타 사토루를 후계자로 지목해 몇년간의 수업을 시킨뒤에 2003년에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한다. 후계자 이와타 사토루는 NDSWii로 닌텐도의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점에서 적절한 인선이라고 볼 수 있다.

2013년 9월 19일 폐렴으로 타계하였다.

3 기타

메이저리그 팬들에게는 시애틀 매리너스 구단주로 알려져 있다. 단 야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어서 가장 이상적인 구단주라고.(야구에 관심이 없으니까 투자는 하지만 팀 관리에 간섭은 하지 않는다.) 다만 "야구를 좋아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볼 생각도 없다"라는 대답을 해서 욕을 좀 먹기도 했었다고 한다. 1990년대 초 시애틀 매리너스에 경영위기가 닥쳤을 때, 닌텐도의 미국본사 (NOA: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에 인수를 제의했고 그가 받아들여 구단주가 되었다. NOA가 있는 시애틀에 은혜를 갚는다는 게 그 이유. 홈 구장에 그의 이름을 딴 방이 있지만 방 주인이 야구에 관심이 없어 여전히 깨끗하다고... 한때 닌텐도가 시애틀 매리너스의 구단주라는 와전된 이야기는 닌텐도의 사장으로서 그가 잘 알려져있다보니 생겨난 것. 그가 매리너스 구단주일 당시에 이미 닌텐도의 사장 자리를 이와타 사토루에게 물려주고 아예 닌텐도 관련 일들에서도 손을 뗀 뒤다. 세이프코 필드 구장에 걸린 닌텐도 홍보는 야마우치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1. 그조차도 2015년 7월 11일에 담관으로 별세했다.
  2. 재미있는 점은 조부도 데릴사위로 뒤를 이었던 사람이다.
  3. 정확히 이야기하면 조부가 죽기전에 손자를 위해서 회사의 인척들을 몰아냈다.
  4. 디즈니 트럼프로 당시 반쯤 도박 도구였던 트럼프를 '애들이 갖고 노는 게임'으로 포지셔닝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