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배구/전현직 배구인
이름 | 어창선(魚昌善) |
생년월일 | 1968년 8월 1일 |
출신학교 | 충남상고[1] - 서울시립대 |
포지션 | 레프트 |
신체사이즈 | 신장 185cm |
소속팀 | 서울시청[2] (1987~1991) 고려증권 (1991~1998) |
지도자 | 대전중앙고등학교 감독 (1998) 서울중앙여자고등학교 감독 (1999) 대한민국 청소년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 코치 (2001) 대한민국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 코치 (2002) 천안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코치 (2004~2006) 천안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수석코치 (2006~2009)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감독[3] (2009~2010) 성남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제니스 감독 (2010~2013) 구미 LIG손해보험 그레이터스 수석코치 (2013~2014) 대한민국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2014~2015) |
2008-2009 KOVO V-리그 여자부 감독상 | |||||
이희완 (인천 GS칼텍스 배구단) | → | 어창선 (천안 흥국생명) | → | 박삼용 (대전 KT&G 아리엘즈) |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배구 선수 및 감독. 現 KOVO 경기감독관.
2 선수 시절
충남상고와 서울시립대를 거쳤다. 서울시립대 졸업 후에는 고려증권에 입단하여 레프트로 활약하였으며 팀의 동기였던 박삼용과 고려증권의 한 해 선배인 이성희, 충남상고 시절부터 한 해 선배였던 서남원과 함께 고려증권의 슈퍼리그 두 차례 우승(1993년, 1996년)을 이끌었으며 기본기도 상당히 좋았던 선수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 사태로 이듬해 소속 팀인 고려증권이 해체되자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3 지도자로서의 행보
3.1 흥국생명 시절
고려증권 해체 후 은퇴를 선언한 그는 모교인 대전중앙고[4]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서울중앙여고 감독,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 코치 등을 거쳐 흥국생명 코치로 부임하였다. 2006년에는 수석코치로 승격되었고 2008-09 시즌 후반 사임한 이승현 감독을 대신[5]하여 감독 대행직을 맡아 플레이오프와 챔피언결정전에서 KT&G와 GS칼텍스를 각각 따돌리고 팀의 세 번째 통합 우승으로 이끌었다.
챔피언결정전 통합우승으로 이끈 지도력을 인정받아 시즌 종료 후 곧바로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으나 2009-10 시즌 전 딴 선수도 아니고 김연경이 일본리그로 가서 6승 8패라는 부진한 성적의 책임을 지고 자진 사임하였고 후임으로는 당시 일본인 코치였던 반다이라 마모루(番平 守)가 감독 대행을 맡았는데 어창선 감독 사임 후 흥국생명은 한 때 14연패까지 당하는 등 최악의 부진을 겪는 시즌을 보냈다. 아니 6승 8패가 부진? 망국 요것들 배가 불렀네
3.2 한국도로공사 시절
중흥을 이끌었지만 영광을 이루지 못한 감독
2010년 1월 흥국생명 감독 사임 후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다 같은 해 4월 한국도로공사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한국도로공사는 2005-06시즌 챔피언전 준우승, 2006-07시즌 리그 2위 이후 4위-5위-5위의 부진한 성적[6]에 한송이 FA 당시의 뻘짓[7][8]으로 이미지만 망가지고 팀이 아작난 데다가 이미 09-10시즌 전 다루기 쉽다는 이유로 신만근을 선임했지만 제대로 박살이 나고 본인의 상관이자 도공 프런트가 신만근을 지목하면서 이전 날 챔결서의 만행으로 껄끄럽긴 했어도 현대건설이 선임한 황현주 감독이 단숨에 현건을 리그 1위로 올려버린 상황에서 도공측이 연고를 구미시서 당시 본사가 있던 성남시로 옮기면서 변화를 요구[9]하며 그를 선임하게 된 것. 그리고 탈망효과는 탈쥐효과와 달리 코칭스태프도 터지니까
그는 선수단에 내재되어 있던 패배의식을 떨쳐내는 데에 많은 노력을 했고 무엇보다 선수단 체질 개선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도로공사 감독을 맡은 지 3개월 만에 선수단 대부분이 체중 감량(일명 하이패스 다이어트)을 했고 선수들 식단에도 직접 손을 대어 단백질 섭취를 줄이게 하고 채식 위주로 먹게 하였다. 이는 그가 원했던 조직적이며 빠른 배구를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패배의식을 버리면 우승도 가능하다 생각했고 선수단에게 몸과 정신을 개조하였으며 5개 구단 중 가장 많은 훈련량으로 선수들을 몰아치며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러한 효과가 통했는지 그가 도로공사 감독으로 부임한 첫 시즌부터 지난 두 시즌 연속으로 꼴지를 했던 팀이 맞나 싶을 정도로 팀이 확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전 시즌과 비교해서 달라진 것은 용병(밀라->쎄라 파반)과 하준임의 센터전환 뿐이었지만 조직력이 탄탄해지고 선수들의 체중이 감량되자 펄펄 날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 서브득점[10]에서 상당히 많은 점수를 뽑아냈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여자부 5개 팀 중 2위를 차지하였으나 플레이오프에서 3위였던 흥국생명에 2승 3패로 아쉽게 패퇴하고 만다.
이후 2011-12 시즌에서는 피네도가 살짝 맛이 갔지만 중도 합류한 이바나를 앞세워 정규리그 2위로 이끌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등 잘 나갔으나 리그 끝까지 지옥을 겪고 올라온 현대건설에게 2패를 당하며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실패하였고 계약 마지막 해인 2012-13 시즌에는 니콜 포셋을 뽑고 하준임의 사례를 토대로 표승주까지 센터 스위칭을 시키며 분전했지만 또 현대에 밀리며 6개 팀 중 4위에 그쳐 플레이오프에 진출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 시즌을 끝으로 계약이 만료되어 후임으로 서남원 감독이 선임되었다.
부임 이후 뽑은 선수 중 특히 11-12시즌 전 2라운더, 3라운더가 유독 대박을 치며 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결론은 챔결만 못 갔다 뿐이지 대 기은전 사기모드와 14-15시즌의 도공을 만든 건 8할이 어창선의 몫이라는 것.
3.3 이후
도공 감독 사임 후 구미 LIG손해보험 그레이터스의 수석코치를 맡았지만 시즌 성적 폭망으로 사임했다. 그리고 잠시 야인으로 있다가 2014년 대한민국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의 수석코치로 선임[11]되었고 현재는 KOVO의 경기감독관으로 재직 중에 있다.- ↑ 현재의 대전중앙고등학교.
- ↑ 서울시립대학교 학생으로 구성된, 겉과 달리 실질은 대학 팀이었다.
- ↑ 감독 대행 시절 포함.
- ↑ 고교 시절 당시에는 교명이 충남상고였으나 그가 졸업 후 현재의 교명으로 바뀌었다.
- ↑ 당시 흥국생명은 프런트가 워낙 개판이었는데 2008-09 시즌 초반까지만 해도 황현주 감독이 이끌었으나 되도 않는 이유(수술 요청에 대해 백정 누명을 씌웠다)로 경질당하고 당시 세화여고 체육교사로 있던 이승현을 감독으로 모셔왔는데 성적 부진과 선수단 장악 실패로 사임하자 어창선이 대행을 맡게 되었던 것. 더구나 황현주 전 감독은 흥국생명에서만 두 번이나 팽을 당했는데 흥국생명 프런트 측에서는 2005-06 시즌이 한창 진행중일 때도 통합우승을 해야된다는 이유로 감독으로 있던 그를 수석코치로 강등시키고 김철용 감독을 모셔오는 만행을 저지른 적이 있다. 물론 그 다음 시즌부터는 황현주가 다시 감독을 맡게 되었다.
- ↑ 2011년 IBK기업은행이 창단되기 전까지 여자부는 5개 구단 체제였으므로 당시 최하위만 두 차례나 한 셈이다.
- ↑ 흥국으로 보내면서 당시 정대영, 이숙자의 FA 이적으로 답이 없던 현건을 깔고 가려고 했으며, 그 목적을 위한 방법은 놀랍게도 고속도로 건설 사업권 협박이었다. GS와 인삼 역시나 사업권을 통해 협박한 건 매한가지였고, 결국 관련이 적고 알짜가 많은 흥국으로 보내는데 성공했지만, 그로 인해 빡치신 언니 한유미는 이게 FA냐며 격분해 인터뷰도 했고, 아버지는 KOVO 게시판에 직접 글을 올렸을 정도.
- ↑ 그리고 덕분에 현건은 대안으로 인삼서 박경낭
이라 쓰고 금지어를 영입하며 백목화를 내주면서 이후 제대로 윙라인이 고질적인 문제가 되었으며 도공은 보상픽인 이보라가 유리몸이 되면서 폭망. 그걸로 끝나도 문제인데 09-10시즌 전 그 이보라를 황현주의 요청으로 부실한 세터 보강 목적으로 박진왕과 바꿨는데 박진왕은 그 시즌 후 방출되고 이보라는 12-13시즌까지 뛰었다. 즉, 도공은 프랜차이즈 윙인 한송이로 받아온 게 박진왕이라는 1년 한도 세터라는 엄청난 연금술을 보인 격이다.장사의 ㅈ자도 모르는 애들도 이렇겐 안 하겠다 - ↑ 그 증거가 바로 당시 최고 FA인 황연주의 영입에 끼어들었다는 것이다.
- ↑ 이 시즌 전 공인구가 현재 쓰이는 그랜드 챔피언으로 바뀐것도 영향이 있었다
- ↑ 원래 차해원 전 흥국 감독이었지만 당시 국대 감독인 이선구 감독의 요청으로 GS 수석코치로 가면서 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