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자토펙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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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도에 찍은 사진

Emil Zátopek(1922년 9월 19일 ~ 2000년 11월 22일)

체코슬로바키아육상 영웅. 별명은 인간 기관차 혹은 체코 기관차.[1] 1948년 런던 올림픽과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와 은메달한개를 딴 괴인이다. 20세기 최고의 육상선수 중 한 명. 2012년 11월 국제육상연맹 명예의 전당에 최초의 12인으로 헌액됐고, 2013년 2월 'Runner's World Magazine'라는 잡지의 편집부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육상선수'로 꼽혔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922년 모라비아주의 코프리브니체에서 목수의 여섯 째 아들로 태어난 에밀은 16살이 되던해 신발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애초에 육상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삶을 살던 어느 날 공장의 운동코치가 자토펙을 포함한 4명의 소년을 지목해 육상경주를 시켰고, 자토펙은 이 때 자기는 체력도 약하고 육상에 적합한 체격이 아니라면서 거절했다. 하지만 코치는 그를 의사에게 데려가 체력진단을 받게했고 의사는 육상에 최적인 신체조건이란 진단을 내린다. 우여곡절 끝에 경기를 시작한 에밀은 강한 승부욕을 느꼈고 첫 경기(?)에서 자토펙은 아쉽게도 2등을 한다. 하지만 자토펙은 후에 이때 2등을 하는 덕에 육상에 흥미를 가졌다고 회고했다. 이때부터 육상의 길에 접어든 자토펙은 4년동안 2,000m, 3,000m, 5,000m 경주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기록을 하나하나 깨나갔다.

이때 조국의 운명은 풍전등화로 나치독일수테텐 지방의 병합에 그치지 않고 체코슬로바키아전체를 집어삼켰고 자토펙은 그 분노를 달리면서 삭였다고 한다.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가 해방되자 그는 해방조국의 군대에 자원해서 국방의 의무를 한다. 군 복무 중에도 완전군장을 하고 밤에는 플래쉬를 들고 달리는 연습을 했다. 응? 심지어는 방독면을 쓰고 다리에 무거운 추를 달고 달리기 연습을 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아내를 업고 달리기도 했다고(...)

2.2 올림픽의 영웅

1948년 처음으로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자토펙은 10,000m에서 금메달을 5,000m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다음 올림픽인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5,000m, 10,0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한 번도 뛰어본적이 없는 마라톤에도 출전해 금메달을 딴다(...)[2] 경기 도중에도 다른 선수가 자신을 앞지르면 한동안 힘이 빠진 것처럼 거리를 유지하다가 "그것 밖에 안 돼? 난 힘이 더 남아있다고."하며 여유롭게 추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마라톤 금메달 보유자가 다른 종목에서 금메달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현재까지 에밀 자토펙이 유일하다.

또한 보통의 장거리 육상선수의 경우는 달리면서 상체와 머리를 꼿꼿이 세우는 반면에 에밀 자토펙은 상체와 머리를 옆으로 불안하게 움직임에도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런 모습으로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식식대며 달리는 그에게는 인간기관차(The Locomotive)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에게 누군가가 왜그렇게 웃기게(...) 뛰냐고 물어보자 "이 종목은 체조도 아니고, 피겨 스케이팅도 아니잖아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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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솔로 염장지르는 사진 그러니까 위키니트들은 위키를 멀리하고 육상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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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에밀은 다나 자톱코바(결혼 전 성은 잉그로바)와 결혼하는데, 그녀는 헬싱키 올림픽에서 투창던지기로 금메달을 딴 선수였다. 두 사람은 재밌게도 생일이 같았다. 또한 이 둘은 역사상 최초로 같은 날에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운동선수 부부다. 그것도 단 몇 분 차이로. 오오오.

신기록도 마구마구 경신했겠다[3], 금메달도 4개나 땄겠다, 뭐하나 부러울 것 없이 살 수 있었지만.

2.3 자유의 투사

에밀은 프라하의 봄때 자유진영을 지지하는 행동을 하고 '2천어 선언'에 참가하면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육군 대령이었던 그는 각종 지위를 박탈당하여 청소부로 전락했다. 또한 숙청 대상이 되어 우라늄 광산에서 강제 노동형까지 선고받았는데 이때 깊은 탄광에서 작업모 하나 달랑 쓰고 우라늄을 캐는 노역에 시달리는 등 20년이 넘도록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

2.4 영웅의 죽음

그는 1989년 벨벳 혁명이후 다시 복권되지만 병으로 시름시름하다가 결국 2000년에 사망한다. 에밀은 선수 은퇴 후 말년을 호의호식하며 살 수도 있었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큰 일에 주저하지 않고 뛰어들었기 때문에 그가 진정한 국민영웅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2000년 12월 6일 체코 프라하에서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엔 체코 국가와 자토펙의 고향 민요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수천 명의 추모인들이 모여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라미네 디아크 국제육상연맹(IAAF)회장은 "우리가 그의 죽음에 슬퍼하는 이유는 그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4개나 따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평범한 한 인간이었으며,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온 몸을 던진 투사였기 때문이었다."고 애도했다. 이날 장례식엔 훗날 체코 대통령이 되는 밀로시 제만 수상 등 주요 요인들은 물론 후안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등 각계 인사가 대거 참여해 슬픔을 함께 했다. 사후 IOC는 그에게 피에르 드 쿠베르탱 메달[4]을 수여했다.

3 기타

  • 지구 반대편 일본에서 그의 이름을 별명으로 사용한 야구 선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신 타이거즈의 전설이자 자토펙 투수로 유명한 무라야마 미노루다. 무라야마 미노루의 다이나믹로동한 투구폼이 자토펙의 별명인 '인간기관차'를 연상시켜서 붙였다고 한다.
  • 당시에는 없었던 과학적인 육상 트레이닝법을 고안해낸 선수로도 유명하다. 연습을 할 때 구간을 규칙적으로 나눠서 일정하게 쉬는 것이 아니라 몸의 피로가 회복되기 전에 다시 달리면서 몸의 지구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인데 이것이 바로 인터벌 트레이닝의 시초다.


  • 1995년 아디다스에서 에밀 자토펙에게 헌정하는 러닝화 광고를 만들었다. 영상 막바지에 노년의 에밀 자토펙이 나와서 "My name is Emil Zatopek."하고 말하는 모습이 애잔하다.

  • 2013년 6월에 체코 프라하 중앙역에서 그의 이름을 딴 자토펙 기관차(Zatopek Locomotive)[5]가 처녀 주행을 했다. 리본 커팅은 그의 미망인인 다나 자톱코바가 했다.
  1.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괴로운 표정을 하며 입 밖으로 호흡을 식식거리면서 했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2. 아무리 장거리 경주에 익숙한 선수라도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마라톤 자체가 매우 힘든 레이스이기 때문에 다른 육상 경기보다 컨트롤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3. 20개에 달하는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그 중 1951년 20,000m 1시간의 벽과 1954년 10,000m 29분의 벽을 깬 기록이 가장 유명하다.
  4. 스포츠정신을 고양시킨 인물에게 수여되는 상으로, 어떻게 보면 올림픽 금메달보다 훨씬 희소가치가 있고 더 큰 영예다.
  5. 체코철도국 소속, 스코다 제작. 최고속도 200km/h.